〈 152화 〉 반란
* * *
되짚어보면 흑역사나 다름없는 얘기지만, 솔직히 말해 스승까지도 넘볼 실력이 있었다 자신했다.
그러니 흑막이 누구일지라도 때려 부수면 되겠다, 대충 이런 생각이었다.
결과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지. 된통 깨졌다. 심장에 언약까지 걸어버렸는데 말해 뭐할까.
그러니 반감이 생겼다.
처음에는 솔직히 굴욕감이 컸고, 이걸 설욕해야겠다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분노는 점차 잠잠해졌다.
사실 그렇게 불타오르는 성격도 아닌지라 잠잠해질 것도 없이 애초에 얌전하긴 했다.
그래서 에이브(AVY)에 대한 것이 금방 식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메이블의 두 번째 일지가 떠오른다.
그곳에는 별로 도움 되는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일기였다. 단탈리온은 오늘 무엇을 했고, 현 용사들은 무엇을 했고, 오늘은 기분이 어떻고 저쩐다. 이따위 일기.
하지만,
그 일지의 마지막 장 가죽으로 된 곳에 불길에 그을려 적혀있던 것.
일지가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새겨놓았던, 그곳에 적힌 문자를 보면 애초에 일지는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결정되어 있었다는 걸 알수 있었다.
첫줄은 이렇다.
‘DEAR. 썩을 폭파범.’
두 번째 줄은.
‘스스로를 부르길 어딘가의 대마법사? 건방진 놈. 너는 쥐새끼가 어울린다. 아무렴 어떠련만.’
세 번째 줄.
‘네놈이 이걸 보게 된다면 내가 있는 세계는 실패했다는 거겠지.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힌트 정도는 주마.’
네 번째 줄.
여기서부터 열이 좀 받았지.
‘그래도 얌전히는 못 넘기지. 너 때문에 무너진 마왕성을 생각하면...’
다섯 번째 줄.
‘고생 좀 해야돼. 어디 잘 해석해봐라. 할 수 있다면.’
메이블 개새끼.
‘HINT! 뜨거운 것이 고개를 숙였을 때 무엇을 다짐했는지, 저 멀리에서 빙긋 웃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삼켰던 붉은 것, 낡은 뱀의 가죽을 찢으며 얻어냈던 게 무엇인지.’
이 암호 같은 걸 딱 마주했을 때 무슨 생각이 들었냐고?
개소리인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메이블은 알듯말듯한 것만 던져줬을 뿐이었다. 이 얼마나 불친절한 선임인지.
그렇다고 시간을 역행하여 물어보는 건 내 자존심에도 금이 가는 일인지라 이곳에 숨은 뜻을 파헤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물론 잿빛 램프 속이었으니 현실 시간은 얼마 흐르지 않았겠지. 하여튼간.
뜨거운 게 모습을 감췄을 때.
뜨거운 것 화염, 그게 모습을 감췄다?
화염 마법인지, 혹은 난로에 물을 부으면 알 수 있는 것인지 다 모르겠었다.
‘태양 아닐까요?’
디안이 힌트를 준 덕에 알아차렸지.
뜨거운 것이 모습을 숙였을 때 무엇을 다짐했는지.
즉 황혼이 다가올 때 무엇을 다짐했냐는 것.
용사 시절을 되짚어봤다. 그러니 내가 일행에게 다짐하듯 말했던 그것이 떠올랐다.
‘마왕군을 다 깨부수고 무사히 지구로 돌아가자.’
...다시 생각해보니 좀 부끄럽지만.
아무튼 지구로 돌아가자는 그것이 첫 문장.
저 멀리에서 빙긋 웃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삼켰던 붉은 것.
저 멀리라면 신을 얘기하는 건지, 아니면 높은 건물을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머리를 붙들었다.
붉은 것? 피? 아니면 비유적인 걸까. 가령 희생이라던가, 내가 죽여왔던 이들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수록 정답에서 멀어져가고 있었는데, 이건 어이없게 풀렸다.
침실에 향초 하나 키고 머리 싸매던 차 입이 심심했던 암두시아스가 다가와 내 찻장을 열고 멋대로 과자를 가져갔었던 때였다.
짜증나던 차라 과자를 탈취해가던 암두시아스를 마나 조작으로 붙들었고, 그대로 내 앞으로 데려와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하지 말라고!”
“그러니까 과자를 왜 가져가 바보야. 주방으로 가면 되잖아.”
“거긴 늑대 놈들이 고기 뜯어먹느라 비린내 난단 말이야!”
“늑대 놈들? 웨어울프라고 제대로 안 부르면 난리 날 테니까 언행을 조심하라고 내가 몇 번이나”
“늑대가 늑대지!”
화아악
마기를 방출하고 도망쳤다.
쫓아갈까 하다가 좋아하지도 않는 과자인지라 놔뒀다.
‘...웨어울프라 부르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가만보자 웨어울프?’
놈들의 수장이 얘기했던 것.
‘우리는 보름달이 우리를 지켜볼 때 가장 강해집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초승달이 우리를 비출 때는 그닥 힘도 없는지라 마치 비웃는 것 같다고 느껴지더군요.’
저 멀리에서 빙긋 웃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삼켰던 붉은 것.
저 멀리에서 빙긋 웃는 것? 초승달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그럼 그때 삼켰던 붉은 것은... 와인.
첫 회식. 맥주와 다른 주류도 넘쳐났지만, 그것들은 싸구려였고 비싼 와인은 딱 1병만 샀었다.
‘그 와인의 이름은’
Πρασμα(통로).
통로였다. 통로, 통로?
첫 번째 힌트와 연결하면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그 좌표를 알아냈다는 말인가? 어떻게, 어디에서?
낡은 뱀의 가죽을 찢으며 얻어냈던 게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했다.
낡은 뱀.
이건 고민하지도 않았다.
실렉티스, 아들러 프리브룩스를 얘기하는 것이겠지.
그의 가죽을 찢으며?
그가 통치하는 곳 필라기리아, 그곳의 외벽을 부숴먹으며 벗어났었을 때를 말하겠지.
그때 뭘 얻었을까?
말해 뭐해. 자유를 얻었겠지.
뭐 하나 챙겨갔던 것 하나도 없으니까. 끽해야 돈?
어쨌든 자유가 가장 컸다. 그러니 자유라는 키워드가 중요해졌다.
곧장 떠오르는 건 하나였다. 넘겨짚는 식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찾았다.”
자유, 자유의 마탑.
괴짜들이 즐비하다고 소문난 몰락한 마탑.
그들이 연구했던 것은 저 멀리의 차원이었고, 그 연구는 완성되지 못했다.
왜냐면 사짜 취급을 받았거든.
한국으로 치면 사이비 종교? 하여간 환대받지 못하는 마탑이었다.
‘여기에 좌표가.’
있었다.
지구의 좌표를 연구했던 흔적이.
정확히 지구를 노린 것은 아니었겠지. 따지자면 우연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완성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이 마탑의 마법사들이 멍청해서라기보다는...
‘처참해.’
몰락한 마탑, 사람의 손길이 닿지도 않는 곳에 있어서 더욱 처량해 보였다.
하지만 분명한 단서였다. 시간의 파편을 통해 잿더미가 되었던 그들의 연구 일지를 되돌려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한 발짝만 더 뻗었더라면 완성됐을 연구. 그것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막아섰다.
‘에이브(AYV)겠지. 용사들이 이것을 알면 안 되니까.’
그러나 알아내고 말았다.
나는 메이블의 덕에 알아냈던 거지만.
첫 번째 단서, 지구로 돌아가자,
두 번째 단서, 통로,
세 번째 단서, 그리고 자유의 마탑에 있는 좌표.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의 좌표.
완성됐다. 그렇지만 웃음이 지어지지 않았다.
쏴아아아
그날은 비가 내렸다.
머리칼이 뭉텅이진다. 얼굴을 타고 빗물이 주르륵 흐른다.
찝찝했다. 도대체 메이블 그 자식은.
‘이걸 알았으면서도 왜...’
ONE(?)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법사란 놈들은 끊임없이 탐구하는 족속들이다.
나는 마법사였다.
놈이 어째서 그랬는지 나는 알아야만 했다.
“지구로 갈 수 있는 좌표를 알아냈어.”
철수 형이 포크를 떨어트렸다.
이재홍이 사레가 들렸는지 자꾸만 콜록거렸다.
예상했던 반응보다는 심심했지만, 내가 할 말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어. 그래서 형이랑 재홍이한테 묻고 싶어.”
사실 나도 악취미인게, 애초에 돌려보낼 생각이었음 이렇게 물어보는 것부터가 잘못됐다.
“돌아갈래?”
“...저 새끼는 어쩌고.”
이재홍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철수 형도 입을 달싹였다가 푸욱 고개를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잡을 거야.”
“나랑 철수 형 돌아가면 너 혼자?”
“어.”
“이 씨발 놈을 그냥, 이 새끼 일부러 이렇게 말했네.”
“나만 느낀 거 아니지?”
“어, 저 악질 새끼 죽여버리든가, 아오 씨발.”
쾅!
재홍이 화를 못 이겨내고 접시를 던졌고, 그것은 내 얼굴을 스쳐가며 깨졌다.
“제발 수호대장님! 식사 중에 이게 무슨 망나니 짓입니까!”
부주방장 파리오가 얼굴을 찌푸리며 노발대발 화냈지만 재홍의 태도는 여전했다.
“다시 사오면 되잖아! 지금 저 새끼가 나 열받게 했다고.”
“음식이 무슨 죄가 있다고 던지냐고요.”
“다 먹고 던진 거니까 입 좀 닥쳐.”
“아, 그래요? 그럼 됐고요.”
파리오는 납득했는지 다시 식당을 나갔다.
이재홍의 열 내는 것은 지속됐다.
“너 버리고 우리만 지구로 가라고?”
“그러고 싶다면.”
“좆까, 저 새끼 엿 먹이기 전까진 안 돌아가.”
“나도 그래. 근데.”
화아악
재홍의 모습이 변한다.
스릉
검집에서 먹보가 자태를 드러낸다.
“우릴 시험한 죄는 치뤄야겠어 윤상아.”
[웬일로 뜻이 맞네?]
“......”
...괜히 떠봤다가 며칠간은 회복에만 전념하게 됐었지.
하여튼간 다사다난했다.
지구 좌표만 알아내면 끝일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린 떠날 수 있어도 떠날 수 없는 몸이었다.
이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 그건 핑계고.
나는 메이블에 대한 것 때문에.
철수 형도 마찬가지로 토텔리에 관한 것 때문에.
재홍이는... 병신 새끼. 그냥 나랑 철수 형 따라서였다.
하여튼간.
같이 있으니 든든하긴 하더라.
언제나 등을 맡겨왔던 동료다. 시간이 지나면 허물어질줄 알았는데 더욱 견고해졌다.
우리는 강해졌다. 단지 서클이 올랐다거나 오러가 올랐다는 그런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에이브(AYV)에게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정신을 얻었다.
그리고 돌아갈 수 있음에도 다음 대가 고통받지 않길 위해, 메이블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모한 짓에 정면으로 뛰어들 관록이 생겼다.
남은 건 그를 얼마나 몰아세울 수 있냐는 거였다.
그를 위한 시간이었다. 장과 그의 동료들이 마왕군을 깨부수기 위해 시간을 쏟아냈듯, 나와 동료들은 에이브(AYV)를 끌어내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퍼부었다.
그 결실을 맺을 때였다.
하늘이 열린다. 아니, 쪼개진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까.
[...악쿤 토든.]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듣기에는 잔잔하다. 하지만 그 뒤에 몰아치고 있는 거대한 파도를 이제는 분간할 수 있었다.
그는 분노했다.
감히, 자신이 원해오던 용사와 악역 놀이를 내 멋대로 끝마친 것이다.
감히 인간 따위가. 자신이 길러오던 장기말 따위가 말이다.
에이브(AYV)는 공간을 지배하는 신이다.
그는 날 벌주고자 친히 하늘을 쪼개여 자신의 군단을 하나둘 보내기 시작했다.
‘와오.’
그 연출만큼은 신군이라고 불리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쪼개진 하늘은 나도 모르게 넋 놓고 쳐다보게 될 정도였으니까. 저 속의 공간이 궁금해진 것은 내가 마법사라는 족속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은 나 스스로의 호기심일까?
하지만 신군의 외형을 보자 그 생각은 쏙 모습을 감췄다.
참으로 징그러운 외형들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역겹다 표현해도 된다.
내가 무언가를 형태로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차피 저것들은 모조리 내가 처죽일 것들이니 멋대로 욕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하. 세상이 무너지려나.”
하지만 포스는 엄청나다.
징그러운 놈들이 꾸득꾸득 공간을 찢고 나와서 그런지 신군의 등장은 세계 종말이라는 말과 참으로 어울렸다.
놈들은 크기를 제외하곤 모습이 똑같았다.
눈이 거미처럼 8개였으며, 그것들을 뒤덮고 있는 외피는 진득해보인다.
이빨은 흉측했다. 목덜미와 다리는 굵었다. 뿔은 날카로웠으며 비늘은 유연했다.
[어쩔 거야?]
암두시아스가 태연하게 물었다.
나도 그녀의 뿔을 쓰다듬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뭘 어째.”
내 가슴팍으로 손을 뻗었다.
그곳에는 자이키릭의 것이 내 본래의 심장을 대신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푸우욱
그 심장에 기다란 무언가를 쑤셔박았다.
주사기였다. 그곳에 있는, 파란색 물감을 들이부은듯한 액체가 강한 빛을 발하며 자이키릭의 것에 스며들어간다.
이것은 내 마나였다.
따로 보관해뒀던 내 마나.
급격히 차오른다. 꽉 차오르는 느낌이다. 자칫 넘칠 것도 같지만, 그 전에 발산하면 그만이다.
잿빛 램프 속에 있었을 때의 감각.
그것이 되돌아온다.
장과 같이 했던 놀이는 끝났다.
이제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형!”
시그니처도 사용하지 않은 채 외쳤다.
철수 형은 고개를 끄덕이곤 오러의 크기를 넓힌다. 그도 램프 속에 있었을 때의 감각을 되살리는 것이다.
“■■■■■■■!!”
“■■■■■■■!!!”
신군 놈들이 내게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귀를 파는 시늉을 하곤 그들에게 손을 뻗었다.
마법진이 완성된다.
작은 마법진. 내 손바닥 만한 그것이.
눈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네는 안 봐줘도 되겠지?”
저들이 내 말을 이해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상관 없다.
“{ 얼어라. }”
...휘이이.
조용한 눈보라가 그들을 더듬었고.
까드드득
하늘을 쪼개며 나타난 수많은 신군은 한순간에 모두 얼음에 갇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