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마법 용사 장
* * *
마지막 태엽 고장난 시계.
악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며 마지막에 더 끼워넣었던 주문식.
이 마법을 행하기 위해선 결계가 필요하다.
과거로 돌아간 내 몸은 취약해지는 것도 이유 중 하나고, 마찬가지로 상대가 내 마법에 응해주어야 이 마법이 발동되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결계 속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주어야 한다. 또한 상대가 우위에 있다고 느끼게끔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마법에 응할리 없을 테니까.
[......네놈 미친 거냐?]
내가 행하는 마법은 한 대상과 나의 육체 시간대를 일시적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일이기에 고장났다고 표현했다.
[그게 네놈 시그니처의 마지막인가.”
악쿤의 비늘과 뿔, 꼬리 등이 떨어져나간다.
그가 내 마법을 받아들인 것이다.
“네 번째, 다섯 번째 태엽까지 있는데 모두 보여주자니 내 마나가 부족해서 말이지.”
째깍 째깍 째깍
악쿤의 모습이 어려진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스무 살 초반의 나이. 그리고 그가 입은 복장은 펑퍼짐한 자켓에 맨투맨, 목에는 십자 모양 목걸이까지 있었다.
대학생? 뭐든 상관 없다.
저게 내 눈에 익숙한 복장이라는 게 중요하다.
“역시, 네놈도 전송자였어.”
타나토스가 헛소리를 한 게 아니었다.
현 사천왕은 과거의 용사였다는 이야기.
그들의 목표는 말할 수 없지만, 나와 동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무엇보다 동료들 중 한 명은 용사가 아니라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흑막이나 다름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헛소리.
“그럼 마왕군이라는 건가?”
“아까부터 잘못 짚고 있는데 너 상대는 마왕군이 아니야.”
그 위의 존재지.
라고 말하는 듯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기만 했다.
타나토스는 입을 열었을 때부터 심장에 언약을 걸었다.
그러니 그의 말은 일절 거짓이 없다.
모든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속을 게워냈다.
마왕군이 전 용사라는 얘기?
놀라지 않았다. 모종의 이유는 몰라도 그들의 행보를 쫓다보니 나 역시도 마왕군과 용사는 깊은 관련이 있다고 추측해왔으니까.
그들이 용사는 안중에도 없다는 얘기?
이 또한 마찬가지다. 죽일 기회가 많았음에도 살려두는 것은 현재 용사가 성에 안 찬다는 얘기겠지. 가지고 놀고 있을 때 퀸의 말처럼 악착같이 성장하여 그들을 쫓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게끔.
그러나 이건 전제가 잘못됐다.
성에 안 차서가 아닌, 우리가 목표가 아니라는 거다.
마지막 타나토스의 손가락질. 그것은...
‘신을 의미하는 거겠지.’
그 초월적인 존재를 대입하자 머리가 씻은듯 맑아졌다.
놈이 이 모든 일을 꾸미고 있구나.
마왕군은 꼭두각시에 불과했구나.
그런 결론에는 도달했다.
용사 역시 꼭두각시라는 결론도 나왔고.
‘일단은 그 뜻에 맞춰 움직여주마.’
용사로서 가질 마음가짐이 아니지만, 악쿤에게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다.
‘내가 진의를 알아냈을 때, 그때 하늘에서 끌어내려주마.’
기대해. 누군진 몰라도 ONE(?)의 신님.
“마력이... 거의 바닥이네. 그리운 감각이야.”
그전에 우선 이 녀석을 박살내야 한다.
악쿤, 그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마나를 끌어모았다 흩날렸다를 반복한다.
“1서클, 룬어까지 일일이 읊으면 2서클의 마법은 사용할 수 있을 거야.”
“적인 나한테 말해줘도 되는 건가?”
“어차피 알게 될 텐데 굳이 숨겨봤자...”
말을 흘리곤 발치에 마나를 끌어모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오른 주먹에 마나를 휘감고 악쿤에게 뻗으며 주문을 읊었다.
“{ Ελευθρωση 방출! }”
*
콰앙!
장의 주먹이 얼굴을 스쳐지나간다.
피슉 볼에 붉은 선이 그려진다. 깊지는 않았다.
‘같은 마력으로 승부하자, 이런 생각이겠지.’
양으로는 몰라도 질적으로는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발동할 수 있는 마법.
그조차도 오만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싶어, 나도 본격적으로 임했다.
우우웅
나도 장처럼 적은 마나로 신체 강화를 마쳤다. 전체적인 신체 스펙이 일반인보다 조금은 상승한 수준.
프로 격투기 선수쯤으로 보면 된다. 그만치나 근력이나 반사신경이며 상승했으니 제법 치열한 전투가 펼쳐진다.
두 팔에 마나를 끌어모으고 지팡이에 마나를 휘감으며 휘둘렀다.
장은 허공에 발판을 깔았고 그걸 밀어내며 피해냈다. 그러자 그의 몇 발치 뒤 땅바닥에 심어두었던 마법진에서 얼음 구체 덩어리가 장에게로 뻗는다.
이번에도 고개를 뒤로 빼며 능숙하게 피해낸다.
하지만 급격히 거리를 좁혀 뻗어나가는 내 발차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쩌억
“크윽.”
장의 복부에 꽂혔다.
그의 몸이 활처럼 휘며 뒤로 날아간다.
하지만 발차기는 과정일 뿐이었다.
발바닥을 통해 장의 복부에 마법진을 그려놨고, 그 마법진이 푸른 빛을 내뿜으며 빛나다가 천천히 회전을 멈춘다.
“{ Ελευθρωση 방출 }”
콰앙!
장의 몸이 폭발하며 허공에 붕 떴다. 하지만 그 폭발에 나도 지팡이를 놓치고 말았다.
덜그럭
저 멀리로 날아갔다. 회수하고자 뒤돌았지만 무언가가 날 붙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딜 가?”
투, 투둑.
근력에 떨어져나가고 있긴 하지만 제법 탄탄하다.
날 붙잡고 있는 건 촛농이었다. 그 촛농은 바닥에서부터 내 양팔과 두 다리를 휘감고 있었고, 나는 마나를 방출하여 그것을 뜯어냈다.
‘...저런 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구나.’
검은 촛불,
메이블의 아티팩트였던 것.
하지만 그는 시그니처 사용에만 집중했고, 검은 촛불은 일반적인 화염 마나보다 더 뜨겁고 강력한 흑염을 토해내는 데에만 사용했다. 그 이상의 용도를 보여주지 않았다.
왜냐면 트럼프 시그니처 자체가 사기였으니까.
촛불의 사용법을 연구하기보단 시그니처를 더 깊고 파고드는 쪽을 택했겠지.
하지만 장은 다르다.
그의 마법, 마지막 태엽은 사용자와 상대방을 출발점으로 끌고 간다.
그 순간부터는 마력이나 오러, 이런 경지에 구애받지 않고 순전히 전투 센스와 테크닉으로만 판가름난다.
즉 깊이로만 승부 보겠다는 얘기였고, 이걸 직설적으로 말하면 잡기술이 많을수록 사용할 수 있는 수가 늘어난다는 얘기.
이것저것 가릴 틈이 없었다는 거다.
하나라도 더 머리를 짜내어 수를 준비해야 한다.
검은 촛불의 촛농을 사용하는 것도 그가 준비한 것들 중 하나라는 것.
장이라고 마냥 가만히 있던 게 아니었다.
‘...지팡이 쪽에도 촛농이 잔뜩 깔려있다.’
저기로 다가가면 설치해둔 마법진이 발동하여 내 몸을 묶겠지.
장은 이미 몸을 일으켰다. 얼굴을 찌푸리는 것을 보아 데미지는 상당한 것 같지만 전투 불능은 아니었다. 촛농에 몸이 더 묶이면 이제는 내가 위험해진다.
‘장에게 집중한다.’
어차피 심장의 마나를 감당할 수 없는 지금 자이키릭의 심장은 내게 큰 의미가 없었고, 장의 시그니처가 발동한 순간부터 마법을 던지고 받아치는 전투 구도는 끝났다.
이제부터는 단순 육탄전이 더 비중을 차지하게 될 테지.
그러니 지팡이는 몽둥이 그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꼭 지팡이일 필요는 없지.’
시선을 내렸다.
빛을 받아 찰랑이는 십자 목걸이가 눈에 들어온다.
투드득
힘으로 뜯어냈다.
진자 운동을 하듯 좌우로 흔들리는 그것의 끝을 붙잡아 멈췄다.
머잖아 일자로 정렬된다.
목걸이의 뒷부분을 꽉 말아쥐었고, 그 상태로 내 손에서부터 목걸이에 마법진을 적용했다.
“{ Ταχεα ψξη 급속 냉각 }”
싸아아아...
그대로 얼어붙는다.
형태까지 신경쓸까 싶었는데 그런 곳에 마나를 투자하자니 아쉬워 단순 몽둥이 같은 형태가 되었다.
철수 형을 떠올리며 검을 쥐듯 얼음 막대기를 잡았다.
녀석도 촛농을 녹여 일자로 세우곤 검과 같이 움켜쥐었다.
거리가 가까워진다. 천천히 다가서던 나와 장의 걸음의 속도가 빨라지고 둘이 아래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마치 다르칸이 검을 휘두르듯, 케일이 검을 휘두르듯 팔을 휘둘러
쿠우웅!
그의 마나와 내 마나가 격돌했다.
살짝 충격이 일었다. 1서클로 등급이 내려간 나는 항마력도 덩달아 줄어들어 충격이 크지 않았음에도 피부가 터져나갈듯 저려왔다.
“끄아아아!”
장도 마찬가지로 그 충격에 버티고자 안간힘을 쓰며 팔에 힘을 꽉 주었다.
부들부들 떨린다. 그의 발과 내 발. 그의 두 손에 드리운 힘줄과 내 목에 올라온 핏대가 서로의 한계임을 증명한다.
그 모습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가 우습지?!”
“비웃은 거 아니야. 단지 옛 생각이 나서.”
순간 장과 예전의 용사 시절 때 동료들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때는 나도 눈앞의 녀석처럼 강해지는 것만 생각했더라면 지금은......
‘그래도 져줄 생각은 없지만.’
그의 촛농의 화염은 내 얼음을 녹이지 못하고, 내 목걸이의 냉기는 화염을 꺼트리지 못한다.
서로 마력의 총량이 비슷하니 내가 마력을 더 투자해도 소용 없다. 그만큼 장도 마나를 더 끌어쓰면 그만이다.
서로 지치기만 할뿐, 이 구도가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변화를 줘야 할 때였다.
빠직
목걸이를 타고 푸른색의 무언가가 번쩍인다.
빠직 빠지직
그 스파크는 점점 심해진다.
“...전격?”
“마법의 정석 2권 2단원 기억나?”
“...복합 속성!”
장이 물러서며 촛농으로 방어막을 세운다.
하지만 번개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 Ελευθρωση 방출 }”
빠지직!
푸른 전격이 장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간다.
그의 온몸에 스파크가 넘실거린다.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참모장이 된 이후로 빙결 속성 빼고는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장이 준비해둔 비장의 수라고 해봐야 1년 안에 급조한 것들.
반면 나는 10년에 버금가는 세월을 쌓고 또 쌓아왔다.
내게 마력이 밀린다 생각해서 마지막 태엽을 준비한 것은 좋았지만, 깊이가 다르다.
메이블과 나처럼. 그때 그가 자신에게 수많은 제약을 걸었던 것처럼.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싸움. 그런 싸움에서 져야 했던 그를 생각하니 입맛이 씁쓸해졌다.
나는 그보다 모든 면에서 열등했다.
장도 마찬가지. 그도 나보다 모든 면에서 열등하다.
애초에 보내온 시간이 다르니 당연하다. 장도 그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전송자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용사였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목숨이 걸린, 세상의 안위가 걸린 일에서 당연하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 팔이 잘리면 이빨을 들이밀며 발목이라도 물어야 한다. 이가 떨어지면 잇몸이라도 써서 부둥켜야 한다. 턱이 잘리면 박치기라도 할 기세로 덤벼야 한다. 예전의 내가 그랬으니까.
“......”
하지만 이미 전투는 끝난듯하다.
그는 부상이 깊다.
이젠 일어날 여력도 없겠지.
총구를 겨눴다.
“...지혜?”
그때 장의 분위기가 순간 변했다.
“......퀸?”
나도 그를 따라 마나 감지 영역을 펼쳤다.
아, 슬슬 정리되고 있구나.
“...성빈이 형?”
철수 형을 제외하곤 느껴지지 않는다.
재홍이는 심연으로 갔을 것이고, 최세린은... 일을 마쳤으니 이곳에서 벗어났겠지.
그러니 우리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
“슬슬 정리한 모양이야.”
거짓말은 아니지. 용사들을 지구로 돌려보내는 게 우리에겐 정리였으니까.
“너도 그렇게 만들어줄게.”
변한 분위기에 멈칫했지만 해야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총구를 겨눴고 방아쇠를 당겼다.
티잉!
‘...미치겠다.’
총알이 그를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더 당황한 건 저녀석이겠지만.
“......죽였어?”
“글쎄. 상상하기 나름이지.”
“.........”
침묵이 이어진다.
그의 주위에 머물던 마나가 금방이라도 폭발할듯 일렁인다. 그것들은 장의 심장으로 모인다.
나는 저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
8번이나 겪어봤으니 모를 수가 없다.
‘나보다 모든 면에서 저열하다 느꼈는데.’
한 가지는 빼야겠다.
그가 나보다 하나 앞선 게 있었다. 그건...
“이 공간에서 그 짧은 순간만에 성장했구나.”
성장력.
시그니처의 영향이 아니다.
단순히, 분노가 그의 과거로 돌아갔던 서클을 성장시켰다.
“...이젠 힘들겠어.”
3서클의 마법 화염 방패가 그의 주위를 공전한다.
그는 룬어를 읊으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콰앙!
화염의 칼, 얼음 벽을 세우며 막았다. 하지만 닿는 즉시 금방 녹아내린다.
이젠 힘싸움으로 안 된다. 나도 이 공간에서 서클을 상승시키지 않는 이상 거스를 수 없다.
입장이 역전됐다.
마력의 우위가 저쪽에 있었다.
이를 생각하고 시그니처를 개발한 거라면, 이 공간에서 장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다.
서클이란 마법사에겐 탑이나 같다.
빨리 쌓겠다고 서두르면 금방 무너지기 일수지만, 이 공간은 얘기가 달랐다.
애초에 고등 서클을 지닌 자가 다시 1서클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빨라봤자 의미가 없다. 장과 내 경우에는 9서클까지 성장한다고 한들 탑이 쉽사리 무너질리가 없다.
그러니 저 괴물 같은 성장력을 지닌 장을 위한 최적의 공간이다. 징글징글한 놈.
‘대충 했다간 나도 죽는다.’
바닥을 얼리며 뒤로 도망쳤다.
장이 재빠르게 쫓아오지만 얼음 송곳을 세워 그의 앞길을 방해했다.
치이익...
얼음을 깔아둔 덕인지 바닥의 촛농이 한 박자 느리게 작동한다.
덕분에 마나가 동날 것 같지만 다시 이것이 내 손으로 들어왔으니 상관 없다.
두근
자이키릭의 지팡이를 회수했다.
그것의 윗부분을 꽉 잡았다. 손이 시려온다. 냉기의 항마력이 있음에도 놀랍도록 차가운 심장. 드라이 아이스를 움켜쥐고 있는 것만 같다. 시려운 걸 넘어서 살이 데이기 시작했으니.
‘상관 없지.’
내 몸은 다시 9서클로 돌아갈 거니까.
이 공간에서 끝을 보려고 했지만, 굳이 불리한 싸움을 해줄만큼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장이 2서클에 도달한 순간, 이 공간을 깨부수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뿌득
심장을 지팡이에서 뽑았다.
그리곤 약간의 마나를 불어넣었다. 입구가 열린다. 그곳에 내 모든 마나를 집어넣자 탈진 현상이 올 것 같지만, 입을 한 번만 움직이면 됐었다.
룬어의 기초가 되는 것.
용언.
κρηξη
심장이 퍼렇게 물든다.
머잖아 공간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결계가 깨진다. 그것들은 소나기처럼 내려와 나와 장의 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과부하를 주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네놈이 내 동료를...... 내게서 어디까지 뺏어가야”
“미안. 이제 시간이 없어서.”
까드득
장의 온몸이 얼어붙는다.
일전에 내가 배에 새겨놨던 그 마법진에서부터.
여지껏 보지 못했던 마법 형식. 암두시아스를 위해 만들었던 그 마법. 본래는 포획용으로 만들던 그것이 빛을 발한다.
“{ ακριβ πγωμα 절대빙결. }”
장의 몸이 멈췄다. 흑염을 터트리며 녹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 전에 그에게로 다시 총구를 겨눴고, 마침내 그의 몸이 분자화되며 사라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끝이다.
“악쿤... 악쿤...! 악쿤...!!!”
장이 분한듯 몸을 부르르 떨며 내게 소리친다.
나는 애써 웃어주었다.
묘한 씁쓸함이 느껴진다. 마무리가 허무하지만, 그래도... 나름 만족했다. 몇 번이나 수세에 몰렸으니까.
“만족하고 살아.”
너까지 악역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안녕.”
“너, 너”
푸스스
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몸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휘이이이...!
내 눈보라에 맞춰 인간군 전체가 얼어붙었다.
음성 마도구를 꺼냈다.
“지금이야.”
[네.]
[알겠습니다!]
수화기 속 디안과 연구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왕군의 천장이 무너진다. 그곳에 있는 암두시아스. 일각공의 형태인 그녀가 내가 만들어둔 얼음 발판을 밟으며 우아하게, 천천히 전장의 중심으로 걸어왔다.
[이제 시작이야?]
“그래.”
암두시아스가 룬어를 외기 시작한다.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전장의 바닥에는 시커먼 마법진이 깔렸고, 그 마법진에서 새어나온 마기는 마왕군을 감싸며 보호막이 되었다. 이쪽은 준비 끝. 나는 마왕성으로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내 역작을!”
“그거 하이링커가 만든 거 아닌가요?”
“아, 아무튼! 찬물 붓지 마십시오 디안 양!”
마왕성의 천장, 그곳에 있는 대포를 가운데 두고 떠들고 있는 디안과 부아르.
그들에게 눈짓하자 고개를 끄덕이곤 대포에 불을 붙였다.
치익!
이제 지겨운 이 놀이가 끝나간다.
치이이익...
아니, 끝난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은데 시작이다.
치이이익... 투웅!
차원포가 불을 뿜었고, 거대한 포환이 전장의 중심으로 떨어진다.
철수 형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봤다. 그도 먹보를 세우곤 오러를 통해 몸을 방어하고 있다.
재홍의 흔적이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곳을 바라봤다.
공간이 일렁인다. 머지않아 탈출할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차원포가 터진다.
암두시아스는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크게 외쳤다.
“꼭 살아남자!!”
와아아아아아!!
마왕군의 우뢰 같은 함성에 포환이 터지는 소리는 묻혔지만,
차원포는 확실히 터졌고, 그에서 새어나온 찬란한 빛은 인간군을 모두 다른 곳으로 보내버렸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냉소적인 목소리로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반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