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 궁술 용사 빈
* * *
‘저와 벡터를 도와주시오.’
[그대는 대체 무얼 꾸미는 건가.]
‘에이브(AYV), 그리고 케다시를 죽일 것이니 이 문신을 잠시 잠재워주시오. 이런 일에는 그대들이 전문가지 않소?’
[허, 허어.]
‘그것만이 원하는 전부요. 비이린에는 절대로 피해가지 않도록 노력할 테니 부디.’
[......]
이그니스와 넬피에게는 신세를 졌다.
덕에 나와 벡터의 공격은 케다시에게 닿을 수 있었다.
*
“......후우.”
한참이나 노도 같은 공격이 쏟아지고 난 후, 더는 폴암을 휘두를 기력이 없었고, 벡터도 가져온 마석을 모두 사용했는지 혀를 찼다.
케다시는 죽은 듯했다.
온몸은 기존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만큼 갈기갈기 찢겼고, 그의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일단락 된 건가.
베이플의 복수를 마친 건가.
“아.”
휘청거렸다.
눈앞에 나무 줄기가 솟구친다.
그것이 내 몸을 휘감았고, 저 멀리에서 바비룬이 말했다.
[고생했다.]
“괜한 소리를. 네녀석보다 고생했을까.”
[그건 맞아.]
농담처럼 말했지만, 이번 전투에서 바비룬이 내려놓은 것은 꽤 크다.
그의 아티팩트인 세계수의 수액, 그것을 모두 사용했다.
이제는 그것이 바비룬에게 어떤 의미일까. 검사가 검을 포기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까.
[야, 뭔 생각하는지 보여. 괜히 동정표 날리지 마. 짜증나니까.]
“실례했군.”
바비룬은 저 형변이 풀리면 이제 드루이드로서의 기능을 거의 잃는다.
간단한 형변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사천왕의 위엄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용사보다도 약해질 것이고, 당장 사천왕의 부관과 비교해봐도 다름 없을 것이다.
[...좀 쉰다.]
그는 지쳐보였다.
몸부림치던 케다시를 완전히 제압한 것이 10분이 넘었다.
로드 드래곤을 비롯하여 우리 일행을 손쉽게 쓸어버렸던 케다시이다.
모든 생명력을 다 사용하지 않고서야 쉽지만은 않은 일이겠지.
“이제 남은 건 에이브(AYV)인가.”
벡터가 마도구를 하나씩 탈착하며 바비룬에게로 다가섰다.
그의 목소리가 심연에 울리자 바비룬은 잠시 사색에 잠겼고, 허공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대답했다.
[기도나 해야지. 우린 할 일을 다 했으니까.]
“하기야. 그나저나 이 심연에선 어떻게 탈출하지?”
[좀 기다려야 돼. 차원포 재가동 시간까지 조금 남았거든. 대충 10분?]
“밖의 전황을 보고 싶다.”
[나도 궁금해 미치겠다. 용사들은 다 돌려보냈는지.]
연락이 닿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우리의 계획은 차원총을 이용해 용사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강제 전송시키는 것.
그와 동시에 케다시를 죽이면, 곧장 신살 계획으로 이어진다.
케다시를 심연에서 죽이면 에이브(AYV)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때 에이브(AYV)를 기습한다.
그러니 케다시를 죽이는 것이 곧 신살 계획이 성공하느냐 마느냐의 첫 계단이라고 볼 수 있었다.
‘우선 케다시는 죽였다.’
이것만으로도 안심된다.
신군에서 가장 까다롭던 자였으니, 또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한도에서 가장 강한 적이었으니.
나는 할 일을 마쳤다는 것이 된다.
왠지 너무 순조로웠던 것 같지만... 이건 바비룬의 덕택이겠지.
[왜 자꾸 꼬라봐.]
“...아니오.”
하여간 귀염성 없는 자식.
사실 피차 불편한 사이다.
나는 실렉티스였고, 마왕군을 죽였다.
스프라임과 다키아.
스프라임은 카티골의 덕에 부활하는 데 성공했으나, 기억은 모두 사라졌고, 아직 완전히 깨어난 것도 아니기에 부활이라고 표현해도 될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병 주고 약 줬다는 식이다.
바비룬도 그렇게 꽉 막힌 놈은 아닌지라 나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근데 싫어하는 것 같기는 했다.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다신 볼 일 없겠지.
“하나 궁금한 게 있다.”
그때 벡터가 말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갔다.
이것은 나와 벡터가 동시에 가진 의문점이었다.
[뭔데.]
“용사들의 고향, 그러니까 지구라는 행성의 좌표를 알아냈으니 현 용사들을 보낸 것 아닌가?”
[어, 우리 참모장 새끼가 고생 좀 했지.]
“그럼 어째서 떠나지 않았지?”
요컨대, 불확실한 것에 목숨을 걸 바에, 그 좌표로 건너가 ONE(?)으로부터 도망쳐 살면 편하지 않았겠냐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로 가봤자 가족이고 뭐고 없어서 그닥.]
바비룬의 인간 시절을 모르는 나로서는 그들의 고향이 썩 좋지만은 않았으리라는 미약한 예상만이 가능했다.
그러나 바비룬은 불쾌하다는 식의 반응까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곳이 더 좋다는 것도 아닐 테니 지금 그를 움직이는 것은 단순한 정의감일까.
[정의감? 나 그런 거 없다는 거 좀만 봐도 알 것 같지 않냐?]
그는 곧장 부정했다.
[그냥 친구 따라 강남가는, 그런 느낌이야. 악쿤이랑 다르칸 따라서 행동하는 거지.]
“강남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그들은 어째서 신살 계획에 참여했지?”
[끝맺음. 그런 거지.]
이때 미묘하게 표정이 바뀌었다.
특정 누군가가 한심하다는 듯, 거하게 한숨을 쉬며 ‘하여간 병신이지’라 중얼거렸다.
[다르칸도 나랑 비슷해. 가족은 있는데,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다더라. 근데... 정윤, 아니지. 악쿤 토든 그 자식이 진짜 미련한 새끼지.]
착잡한 얼굴을 짓곤 아랫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누구보다 돌아가고 싶어하던 놈이... 에휴. 야, 됐다 됐어. 슬슬 차원포 가동할 테니까 이리로 모여라.]
대화는 끝났다.
바비룬이 나무 줄기로 차원포의 포환을 감싸며 그곳에 생명력을 흘려넣는다.
심장 박동 뛰듯 두근거리는 그것을 마주하며 우리는 다가섰다.
찬란한 빛이 요동친다. 이 심연에서 벗어날 차례였다.
[......재밌는 얘기를 하는구나.]
그때였다.
일순 소름이 돋았다. 폴암을 휘두르며 몸을 돌리자 빛 구체가 내 몸을 강타했고, 나는 저 멀리로 날아갔다.
“커, 커헉”
“워 울프!!”
[뭘 놀라. 너도 똑같이 만들어줄 건데.]
“크, 크으윽!”
벡터의 몸이 빛 구체에 묶여 둥실 떠오른다.
바비룬은 성급히 차원포환을 회수하려 했지만, 그것은 이미 다른 곳에 있었다.
[용사를 지구로 보냈다고? 카티골이 들으면 좋아 죽을 얘기네.]
강렬한 기가 느껴진다. 그곳에서 푸른 빛이 선명하게 심연을 밝혔다.
차원포환이 내뿜는 빛이었다.
“이, 무슨...?”
케다시의 시신이 널브러져있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여전히 케다시의 시체가 있었다.
그럼 저건 뭐지? 이 방대한 기를 이루는 육신은 누구의 것이라는
[나는 신 포식자야. 신도 먹었는데, 이까짓 것쯤 못 먹을리 없지.]
빛의 구체가 그에게로 되돌아온다.
동시에 그의 온몸을 밝힌다.
그의 팔과 다리에는 벡터가 버렸던 마도구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는 나무 줄기가 이어져 있다.
[자, 우선 ONE(?)으로 돌아가자고.]
[묶어!]
나무 줄기가 어지러히 케다시를 묶고자 달려들었지만, 빛의 구체가 수어 번 휘둘리자 그 줄기는 모조리 타들어가며 사라졌다. 케다시는 즐겁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바비룬, 내가 한 번 당하지 두 번 당하냐?]
[막아! 막아야 돼!]
바비룬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튕기며 폴암을 집었다.
케다시에게로 다가섰다. 그의 손에 들린 차원포환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위태롭게 빛난다.
케다시가 다시 되돌아간다면 신살 계획은 물거품이다.
용사를 보내고 그를 죽이는 게 이 계획의 시작이다.
첫장부터 틀어지면 에이브(AYV)를 절대로 물리칠 수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케다시를 막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 어떻게라는 것을 어떻게 이루는가.
바비룬은 지쳤고, 벡터는 모든 마석을 사용했다.
나만이 유일하게 이 상황을 파훼할 수 있었다.
폴암에 화염이 지글거린다. 뒷부분의 무게추에 오러를 흘려보내자 전갈의 꼬리처럼 변환한다.
[날파리야, 왜 자꾸 앵앵거리니.]
빛 구체 7개가 나만을 향하며 다가선다.
폴암을 휘둘렀다. 구체를 비스듬하게 쳐내자 빗껴간다.
몸을 돌렸다. 구체가 내 몸을 스쳐지나갔다.
폴암을 바닥에 처박았다. 그에 몸을 기대곤 공기를 밟듯 움직여 두 개의 구체를 피해냈다.
[어쭈, 잔재주.]
화아악!
강한 바람이 불었다.
케다시 곁에서 싱긋 웃는 나비 모양의 바람의 정령이 느껴진다.
내 몸이 뒤로 밀린다.
강렬한 기운이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자 나를 스쳐지나갔던 4개의 구체가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피하고자 몸부림쳤지만, 강렬한 바람 때문에 말을 듣지 않는다.
[솟아!]
그드드득
바비룬이 외쳤다. 내게 다가서던 4개의 구체는 나무 줄기에 막혔다.
하지만 일시적이었다. 구체는 마치 열기를 압축한 것처럼 나무 줄기를 시커멓게 태우기 시작했고, 나는 시간이 촉박함을 깨달았다.
다시 땅을 밀어내며 케다시에게로 다가섰다.
3개의 구체가 눈앞에 보인다.
캉 카앙
하나는 폴암으로 쳐냈다. 하나는 꼬리에 꽂았다.
나머지 하나는
“끄아아아악!”
피할 길이 없었다.
그냥 맞았다. 어깨가 송두리째 날아갔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강렬한 격통이 따르지만 움직임을 멈춰서는 안 됐다.
코앞이다.
폴암을 휘둘렀다.
하지만,
[애쓴다.]
“......비, 빌어먹을...”
등이 뜨겁다.
주르륵, 무언가가 내 등을 적신다.
피였다. 시선을 내리자 등에서부터 내 가슴팍까지 관통한 날카로운 케다시의 날개가 보였다.
“나, 나는... 너한테 닿을 수 없는 건가......”
[그럼. 그 파란 로드 드래곤도 내게 위협이 못 됐는데 한낱 인간이 수련 좀 했다고 신을 죽이겠다 마음먹는 것 자체가 오만한 거지.]
“......제길, 제길... 쿠, 쿨럭.”
분했다.
무척이나 분해 눈물이 시야를 가린다.
끝까지 이모양이란 말인가.
베이플이 죽은 후 저놈을 죽이기 위한 그 복수심만으로 살아왔는데,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단 말인가.
[이젠 우네. 가관이다 정말.]
“크, 크흐흑...”
[실렉티스로서 살아가면 명은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미련한 선택을 한 순간부터 너희 죽음은 예정되어 있던 거야. 용사 지망생들은 모두 죽었다고 아버지에게 전해야겠는걸.]
“케다시... 케다시......!”
[너도 참 부질없는 삶이었다.]
한껏 비웃는 어투.
분하지만, 이젠 모든 게 끝인가.
“워 울프.”
그때 들린 목소리.
가까이에서 들렸다. 케다시에게서...?
아니, 그 뒤에서.
“왜 혼자 가려고 그러냐.”
[이, 이놈이!]
“나도 목숨 내놓았는데, 너만 멋진척하면 좀 그렇잖냐.”
케다시의 손에 들렸어야 한 차원포환은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을 발로 찼다. 그러자 바비룬의 나무 줄기에 닿았고, 머잖아 그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벡터는 바비룬에게 말했다.
“당신은 빨리 건너가. 우린 틀렸다.”
[...다른 방법이]
“망설이다가 다 끝난다. 빨리 가.”
[이, 이이익! 죽어라 벡터! 죽어라! 죽어! 이 끈질긴 벌레 새끼가!]
“애쓴다 애써. 이미 다 죽어가는데 뭘.”
덤덤히 말하는 벡터의 팔은 날개에 찢겨 너덜너덜해졌고, 심장도 마찬가지로 뚫렸다.
피를 토하면서 벡터는 웃었다. 그 미소를 보자, 어째서인지 절망감 대신 다른 것이 차오른다.
“리아가 쓰지 말라고 했는데.”
[멈춰라!]
“괜히 미안하네. 근데 뭐 어쩌겠냐, 안 그래 워 울프?”
“...설마.”
“설마가 사람 잡지.”
[...벡터.]
“아직도 안 갔어? 빨리 가라고.”
그는 웃옷을 벗은 채였고, 그의 가슴팍에는 처음 보는 형식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푸른 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치지지직
마치 폭탄의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벡터는 케다시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한마디 뱉을 기회는 줄게.”
[멈춰라 벡터어!]
“한마디 다 한 거지?”
치지지지직... 탁.
타들어가는 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벡터는 나와 눈을 마주했다.
“가는 길 말동무나 하자.”
잠시 시간이 멈춘 듯 했다가,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나오려는 듯 벡터의 피부가 불그스름해진다.
그의 몸은 케다시의 구체보다도 빛나기 시작했고, 머잖아 팽창한다.
“하하.”
그를 바라보며 안심하듯 웃었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한심한 마무리가 아니라 참으로 다행이야.
고맙다, 고맙다고 벡터.
그래, 네 말대로 같이 가자. 지루할 텐데 말동무나 하자.
...
...
...
...
...
.....!!!
거대한 폭발이 심연을 뒤덮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