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궁술 용사 빈
* * *
케다시.
한때는 브룩이라는 이름.
지독한 악연. 이곳에서 끝내야 한다.
나는 폴암을 꽉 쥐었다.
헤인켈.
인간에게 환대받지 못하던 괴짜 용인 마법사.
슈가리아.
가는 임무마다 혼자서 살아왔다고 재수 없는 년이라 불리던 여자.
벡터.
마력, 오러도 다룰 줄 모르는 떨거지라며 무시받던 군인.
나.
저주 받은 무기, 전갈을 수호해오던 일족이라 손가락질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불량품들이었다.
하루 내 몫을 해치우며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벅찼으니 결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엇나가기 시작했다.
마탑을 불태웠으며, 길드에서 뛰쳐나왔으며, 무기를 빼돌렸으며, 마을에서 탈출했다.
그러곤 쫓기는 신세가 되었었지.
그게 다 옛일이다. 그런 우리를 보듬어준 존재가 있었으니.
베이플.
블루 드래곤 로드이자.
우리 일행의 리더.
그는 괴짜인 우리들을 불러모았고,
이왕 망가진 삶, 대의를 위해 일해보자고 말했다.
뭐, 설득될 일은 없었다.
그야 우리는 불량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힘만은 넘쳤다. 그러니 베이플에게 덤벼드는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를 펼쳤지.
네 명이 전부 말이다.
결과는 처참했다.
베이플은 강했고, 우리는 상대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겐 상처가 하나도 없었다.
멀쩡했다. 물을 많이 먹어서 코와 귀가 괴롭기는 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그는 상냥하게 우리를 쓰러트렸다. 말 자체가 역접적일지는 모르겠지만.
‘이왕 힘자랑 할거면, 용사가 되자는 말이야.’
그가 제시한 것은 황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갈곳 없는 우리여서 그랬을까.
그리고 평생 손가락질받고 얕보이던 삶을 살아서일까.
다른 방안도 없었고, 그냥 그의 말에 따랐다.
그 기묘한 동행이 시작된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잠이 안 와?”
인간 모습의 베이플.
드래곤은 잠을 안 자도 된다기에 매일 불침번을 자처했었다.
“뭐, 그냥... 당신이랑 얘기나 할까 하고.”
“어이구, 그런데 술이 없네.”
“내일 일찍 일어날 거잖아. 음주할 생각은 없어.”
털썩
그의 옆에 앉았다.
흙먼지가 살짝 일어났지만 베이플은 전혀 불편하단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되려 그는 빙긋 웃으며 나뭇가지에 꽂힌 생선구이를 척 내놓았다. 모닥불에 구워서 맛있다나.
“어디서 났어?”
“내가 바다의 주인인데, 생선 하나 따위 구하기 어려울까.”
“정작 문어는 무서워하는 주제에.”
“문어가 아니라 크라켄이야! 그리고 무서운 게 아니라 징그러워서 싫어하는 거고.”
“어이구, 그러셨어?”
“이 미천한 인간 놈이 감히, 로드 드래곤을 모욕하는구나.]
“네, 네. 죄송하게 됐습니다.”
대충 대답하곤 나는 그의 옆에 앉으며 생선구이를 받아들었다.
“잠은 왜 안 오디.”
생선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나도 머리부터 한 입 베어물곤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냥, 우리가 잘하고 있나 의심이 들어가지고.”
우리는 어엿한 용사가 되었다.
단탈리온, 그리고 메이블을 비롯한 사천왕.
이들을 모두 깨부수고 세계의 평화를 향해 차차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질 받는 일도 많았다.
오히려 환대했던 적이 손에 꼽던가.
당신들이 더 열심히 움직였더라면 내 남편이 살았을 거예요...!
어, 어머니가 몬스터한테 죽었어요. 도대체 언제쯤 마왕군을 물리칠 수 있나요...?
내 아들이 굶어서 죽었어! 마왕군 개자식들 때문에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었다고! 책임져, 책임져어어!!
근 한달 내에 들었던 대사들이다.
한때는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이며, 우리야말로 이 혼세를 고쳐나갈 힘이 있다고 굳게 믿었지만, 이 모든 게 허사였다.
정의감보다 지쳐가는 감정이 더욱 크다.
용사가 될 테니 지원해달라 전대륙을 쏘다니며 요청해보아도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손가락질만 받는 신세이니 원.
“왜, 그만두고 싶어졌어?”
“그건 아니야. 당신이 이끄는 길로 가다 보면 정답이 있겠지.”
“그렇게 과대평가하면 곤란한데. 나라고 뾰족한 수는 없어. 사실 마왕군에 원한도 없으니 너희보다 내가 의욕이 더 떨어질 수도 있지.”
“그럼 왜 우리를 용사로 만들었어?”
“글쎄, 변덕?”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생선을 목 너머로 꿀꺽 삼키곤 첨언했다.
“너도 내 나이 돼봐라. 변덕 죽 끓듯 한다.”
“당신이 그런 성격인 건 아니고?”
“모르겠네. 다른 드래곤이라면 이제 내 아들 녀석 밖에 몰라서.”
“‘아쿠아’라고 했던가.”
“맞아.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보고 싶지는 않아?”
“언젠가 보겠지 뭐. 인간과는 달리 드래곤은 수명이 무척 길어서 1년, 2년 정도야 눈 깜빡할 새 지나가거든. 너희랑 보낸 시간은 정말 작은 틈새에 속하지.”
“그건 좀 서운한데. 나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당신이랑 겪은 일이 가장 자극적이어서 평생 못 잊을 것 같거든.”
“그건 나도 그래. 힘들 때도 있지만 분명 즐거운 걸.”
“그러냐?”
“그래.”
“그렇구나.”
“너 할 말 없지?”
“뭐 그렇네.”
“다시 잘 거야?”
“잘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고민 해결은 커녕, 종족 차이만 깊어진 느낌이라.”
“하하하! 그럼 노래라도 불러줄까?”
“노래 참 좋아하더라.”
“들어봐, 블루 드래곤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노래인데”
그날 모닥불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울리던 그의 맑은 목소리.
한때 잠을 설친 내게 불러줬던 그 호수 속 잔잔한 물결 같던 그 목소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하나둘, 헤인켈과 벡터, 슈가리아마저도 눈을 부스스 비비며 일어났고,
새벽부터 모닥불을 바라보며 조용히 베이플의 노래를 들었다.
“킁킁 생선 냄새가 나는데? 꽁쳐둔 식량 있었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어이, 워 울프랑 베이플. 대답해봐.”
“...튀자!”
“어이 워 울프! 감히 본좌를 앞에 두고 도망치는 게냐!”
뭐, 정작 그 평화롭던 광경은 금방 깨졌지만.
어쨌거나, 우리 일행은 적당히 떠들썩했고, 적당히 다퉜고, 적당히 돈독했다.
그 중심에는 베이플이 있었다고 단언한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부랑자들이었으니, 모두 표현만 하지 않을 뿐, 그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참나, 안 그래도 내가 고른 후보들 싹 탈락해서 기분 안 좋단 말이야.]
그래서일까, 그런 베이플의 죽음이 내게 절망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무슨 이런 날파리들이...]
사천왕인 브룩.
아니, 에이브(AYV)의 아들 케다시.
그가 본모습을 드러내 우리를 모두 제압했고, 모조리 찔러 죽이고자 날카로운 날개의 끝을 향했다.
[멈춰라!]
그때 베이플이 말했다.
우리만은 살려달라고.
그에 대한 댓가로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나만 죽여라! 저들만은 살려달라 이렇게 간곡하게 바란다!]
[내가 왜 너 말을 들어야해?]
[어차피 내가 없으면 진작에 무너졌을 머저리들이다! 살려둔들 당신에게 위협이 되지 못할 거다! 그러니 나만 죽이라는 말이다. 쓸데 없는 살생은 그대도 꺼려지지 않는... 커헉]
말하다 입가에 피를 쏟아냈다.
베이플은 이미 중상이었다. 우리도 다를 바 없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모두 죽을 것이 분명하게끔 처참히 무너져버린 후였다.
“아니야! 나를 죽여라!”
그때 내가 외쳤다.
“저, 저들은 모두 쓰레기들이다. 나를 죽여라 브룩.”
벡터가 총을 지팡이삼아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아, 아니에요. 저를 죽이는 게... 크윽......”
슈가리아가 엉금엉금 기며 다가섰다.
케다시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흠... 이래서야 너희를 죽이면 내가 나쁜 놈이 되잖아.]
흠,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유일하게 말이 없던 노인을 발견했다.
헤인켈이었다. 그를 보며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치더니, 날개를 퍼덕이며 그에게로 다가서곤 말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 굉장히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이다.
[너희 말대로 한 명만 죽일게!]
헤인켈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케다시는 빙긋 웃으며 그의 수염을 잡아당겼다.
[근데, 네가 골라야 돼. 이 입만 산 노친네야.]
“아아... 아아아......”
[한 명만 죽일게. 빨리.]
“어, 어째서 내게......”
[그야 너만 입을 다물고 있었잖아.]
헤인켈은 입을 달싹이기만 할뿐,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러길 몇십 초. 슬슬 케다시는 싫증이 났는지, 헤인켈의 수염을 난폭하게 당기며 다시 말했다. 투두둑 몇 가닥이 그의 손에 이끌려 뜯어졌다.
[슬슬 한계야. 아버지가 화나셨어. 나도 너희 사정 봐주기 힘드니까, 그 잘난 우정 유지하고 싶거든 말하라고. 누굴 죽일지.]
“......”
[대답.]
“그, 그......”
[안 되겠다.]
케다시의 날개 끝이 번뜩 빛난다.
그때 헤인켈이 손으로 누군가를 향했다. 눈은 가린 채, 고개는 숙인 채.
“헤인켈!”
“영감님! 미쳤어요! 차라리 나를 죽여”
[다들 쉿. 결정은 존중해줘야지.]
손가락 끝에는 베이플이 있었다.
케다시는 우아한 날갯짓으로 그에게로 다가섰다.
베이플은 빙긋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 아닌, 진정으로 다행이라는 듯 안심한 미소.
헤인켈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고, 우리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고개를 절레고 있었다.
[마지막 한 마디 남겨. 그 정도 자비는 베풀어줄게.]
인심 쓴다는 듯 케다시가 어깨를 으쓱한다.
[...배려 고맙군.]
베이플은 우리를 바라봤다.
처음 마주했던 날 하늘에 떠있는 햇살처럼 따스한 눈빛으로.
마치 자식을 달래는 듯한 푸근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다들 괜히 복수하겠다 까불지 말고 잘 살아라. 그리고... 못난 날 따라워줘서 고마웠]
[한마디라니까.]
퍼석
베이플의 온몸이 찢겨나갔고, 케다시는 몸을 떨며 웃기 시작했다.
[덩치가 커서 손맛이 있네! 어디보자, 내가 분명 드래곤은 먹은 적이 없었지?]
그리곤 날개의 크기를 키운다.
베이플의 온몸을 뒤덮을정도로 거대해진 그 날개의 그림자에 우리는 모두 덮어져 있었다.
그 모습만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게 있자, 날개의 가운데에서 톱니 같은 이빨이 생겼고, 그것은 베이플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슈가리아는 ‘말도 안 돼’라 중얼거리며 혼절했고, 벡터는 초점 풀린 눈빛으로 광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때 헤인켈은 도망쳤다.
우리는 도망칠 힘조차도 없었는데
[어으, 배불러. 바다에서 살던 놈이라 좀 비리긴 하네.]
끄윽 트림을 내뱉곤 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인자했다. 같잖게 인자했다고.
그는 내게 다가왔다.
[뭐, 공짜로 살려준다고 말하진 않았으니까.]
내 팔뚝을 잡는다. 그리곤 무언가 중얼거렸다.
치이익
인두로 살갗을 지지는 듯 강한 격통이 따른다.
넋이 나가있던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비명이 절로 새어나온다.
나처럼 벡터와 슈가리아에게도 인두로 지지듯 무언가를 새겼다.
붉게 물든 살이 조금 진정되자 그게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문신이었다.
S자 뱀 모양 문신.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에이브(AYV)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팔뚝의 문신이 화끈거린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서일까.
콰가가각
바비룬의 줄기에 케다시의 몸이 묶인다.
상상할 수도 없던 광경이었다. 한때 그토록 두려웠던 존재가 이토록 무력하게 제압당하다니.
[내가 너 애비를 못 해치는 거지, 너를 못 죽이는 건 아니거든?]
[끄아아악!!]
줄기를 꽈악 당기자 고통스럽다는 듯 몸부림친다.
빛나는 구체는 바비룬의 줄기를 퍽퍽 때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차이였다. 바비룬이 이토록 강했던가.
[야, 뭣들 하냐. 묶었으니까 좀 때려.]
그가 말했다. 나는 폴암을 꽉 쥐었다.
옆의 벡터를 바라봤다. 그도 휴대용 캐논을 꽉 쥐곤 결의를 마친 표정을 지었다.
[비겁하다!]
[그럼 사천왕이 비겁하지, 정의롭겠냐?]
케다시의 외침에 능글맞게 대답하며 더욱 줄기를 강하게 조인다.
그래, 바비룬의 말이 맞다. 이 기회에 죽여야 한다.
폴암에 오러를 흘려보냈다.
지글지글
끓는다. 끝의 독에서도 마찬가지로 맹렬한 무언가가 소용돌이친다.
발로 땅을 밀어내며 케다시에게 달려들었다.
벡터도 조준경을 장착하곤 케다시를 향한다.
일제히 공격을 퍼붓는다. 강렬한 화염과 형형색색의 빛나는 총알이 그에게로 닿는다.
!!
이어지는 폭음.
그 기세에 나도 모르게 몸이 밀렸고, 회색 연기가 심연을 모두 뒤덮었다.
[야, 더 해. 저 정도로 죽을 새끼 아닌 거 너네가 더 잘 알잖아.]
바비룬이 재촉한다.
그래, 숨 돌릴 틈은 없다.
벡터는 방아쇠를 당겼다. 나도 폴암을 휘두르며 그에게로 달려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