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격투 용사 퀸
* * *
거짓말이었다.
김희수의 과거에 대해 말할 여유가 일행에게 있을지도 모르겠고, 있더라도 굳이 내뱉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녀를 괴롭힐 생각으로 이 말을 내뱉은 게 아니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어쨌거나,
지금 그녀는 여러 방면으로 넘칠 것 같은 물컵처럼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이다.
이 상태의 김희수라면 제압하는 건 어렵지도 않을 터.
뭐, 조금만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굳이 지금이 아니더라도 죽일 기회는 많았다.
내가 그녀를 가지고 논다는 명목하에 봐주고 있다는 걸 그녀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하는 바램인데.
“버려질 거야... 버려질 거야......”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궁지에 몰렸을 때, 사람은 일차원적인 생각에 가까워진다.
그 이상의 인과관계라거나 내 의중을 파악한다던지의 사고에는 미치기 어렵다는 거다.
또한 다크 오러의 영향도 한몫했다.
그 어두운 기운은 그녀의 내면을 뒤흔들기에 충분했고, 나로서는 이게 그녀를 향한 마지막 적대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를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닐 지도 모르겠다.
이 전투가 막을 내렸을 때,
그녀가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지 생각하면.
무덤덤하리라는 건 거짓말이다.
배알이 뒤틀린다. 솔직히 윤상이의 뜻에 응하기 싫다는 마음도 있었다.
죽 쒀서 개 주는 꼴이나 다름없으니까.
“일어나라 퀸.”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정신을 못 차리네.”
“꺄악!”
생각지도 못한 비명이 들렸다. 이런 비명을 지를 줄도 아는 여자였던가?
격투 용사, 마나와 오러를 동시에 다루는 강인한 전사.
그 이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
‘음.’
어쩌면 평소 굳건하고 우직했던 모습은 포장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강한 빛에는 진한 그림자가 따르듯 강한 척했을 뿐이었지, 내면은 누구보다 혼돈스러웠다는 걸 방금의 연약한 목소리가 증명한다.
하긴, 그럴법도.
ONE(?)에서의 살생과 우리의 모성이었던 지구에서의 살생은 무게감이 다르긴 하다.
이런 생각조차 내가 죽여왔던 수많은 몬스터들이나 인간들에게 실례겠지만, 내가 그렇게 느끼는데 어쩌겠어. 이것만큼은 세뇌의 영향이 없는 순전한 내 생각이었다.
“너 그러다 죽어.”
그건 그거고.
지금 퀸이 보이는 모습은 무척이나 한심하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세계를 등지고 싸우는 용사다.
고작 자기 과거 까발려지는 게 두려워서 사천왕을 앞에 두고 패닉 상태에 빠진다니.
다크 오러는 어디까지나 불온한 감정을 살짝 건드리는 수준일 뿐이지, 정신 계열 마법 같은 것도 아니다.
저런 썩어빠진 정신머리로 용사를 자청하고 있었다니.
전 세대 용사로서 화가 치밀어오른다...
......아니야.
내 분노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토텔리 프리온.
내게 죽는 것으로 삶을 마감해야했던 그 비운의 운명을 지녔던 사내.
그에게 얼굴을 들 수 있게, 이 사천왕으로서의 삶을 어떻게 마감하느냐.
그것이 내겐 무거운 숙제였는데 첫장부터 이모양 이꼴이다.
협조해달란 말이다.
이 연극을 아름답게 장식할 수 있게 정신을 차리란 말이다.
속으로 간절하게 말했지만 그녀에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
그냥 죽일까?
먹보가 내게 말했다.
‘죽여!’
그러곤 싶지.
하지만 너도 알잖아.
그럴 수 없다는 거.
그래도 변화는 필요했다. 앞발로 그녀의 복부를 걷어찼다.
“일어나.”
꿈틀거리기만 할 뿐, 일어서진 않는다.
다시 발에 힘을 모았다.
“일어나.”
벽에 처박혔지만 신체 강화를 둘렀으니 치명타는 아니다.
정신적인 고통만 바로잡아주면 그녀는 주먹을 쥘 것이다.
“일어나라고.”
“일어나.”
“안 들려?”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일어나!!”
인내심의 한계에 치닫는다.
나머지 한쪽 팔도 잃어야 정신차리려나보지?
검에 오러가 스며든다. 목표는 그녀의 왼팔.
대검을 천천히 들었다. 검이 지나가는 방향에 따라 오러가 선을 그리며 따라붙는다.
“한심하다.”
후웅
내려쳤다.
[ 태극류 발도술 제 3식 마늘 빻기 ]
번쩍
붉은 빛이 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하나의 인영이 내 대검을 빗겨 막으며 옆으로 치웠다.
“...하.”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자 예전과는 달리 사뭇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김희수에게 말했다.
“다르칸 말이 맞아요.”
붉은 오러가 눈앞에 넘실거린다.
그것은 포근한 햇살처럼 무척이나 따스했다.
“적을 앞에 두고 한심하게 뭐하는 겁니까?”
그는 내 대검을 겨우 밀어내곤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적어도 후회 없게는 싸워야죠. 저 사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모습 보이는 거, 솔직히 못 봐주겠습니다.”
그리곤 바닥에 널브러진 건틀렛을 건넸다.
그냥 묵묵히 지켜봐줬다.
나도 전의를 상실한 그녀와 싸우는 건 내키지 않는다.
그건 전투가 아니라 폭력이니까.
물론 그 상태로 만든 것도 나다만,
이건 내 탓이 아닌 저 여자의 정신력을 탓해야지 않을까.
뭐, 나도 별반 다를 바는 없으려나. 윤상이를 두 번이나 죽일 뻔했으니까.
어쨌거나 지난 일이다.
“그리고 퀸, 당신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몰라도 용사님들이 그것만으로 뒤돌아설 사람들입니까?”
눈앞의 사내는 질문을 던졌다.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그는 푹 고개를 숙이며 짙은 한숨을 뱉었다.
“잘 보고 있어요.”
검을 세우며 내게 대적한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고, 또 김희수를 바라볼 때에는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강직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에게 이런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니.
내게도 그런 얼굴 좀 보여주지 그랬어.
양.
그에게 말했다.
“제자를 많이 아끼는 스승님이네.”
비꼬듯이.
아니, ‘듯’이라는 말도 모순이다. 대놓고 비꼬았다.
“스승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닙니다. 오러를 다루는 법을 알려줬을 뿐이죠.”
뻔뻔하게도 대답한다. 나는 혀로 이를 훑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 오러 다루는 법은 어디서 터득한 거더라.
더군다나 네가 방금 사용했던 검술도 누가 정리해둔 교본을 토대로 익힌 거더라.
이제와서 도둑놈이다 뭐다 할 생각은 없다.
검술 교본을 만들었으니 그것을 토대로 배우는 것은 당연하다.
하필이면 대량 살육에 쓰였으니 그게 문제였던 것이지.
또한.
“모조품.”
그 검술로 내게 대적하는 것이 터무니없어서 그렇지.
“과연 그 검이 내게 닿을까?”
방금도 그랬다.
김희수를 지켜내고자 내 검에 대적했을 때,
그의 정체가 양이라는 걸 알아냈기에 손에 힘을 뺐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검째로 양을 두동강 냈을 것이다.
그를 알고서 달려든 거라면 담력 하나는 인정해줘야겠지만, 진심으로 내게 대적하고자 달려들었던 거라면.
무모하다.
가망 없는 짓이다.
“그렇겠죠. 태극류 자체가 당신에게서 배운 거니까요.”
“멋대로 말하지 마. 나는 가르친 적 없어.”
“맞습니다. 저랑 음이 멋대로 훔쳐 배운 것이죠.”
슬쩍 김희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우리의 대화를 따라갈 수가 없다는 듯 넋을 놓고 있었다.
어차피 상관 없지. 이어서 입을 놀렸다.
”정작 음은 죽었지.”
“녀석은 만족하면서 죽었습니다.”
“하!”
이마를 덮으며 웃었다.
“만족스러운 죽음이라, 너희가 그런 감정을 느낄 줄도 알았던가? 살육 병기일 뿐이잖아.”
“맞습니다. 그것만이 저희 존재의 이유였죠.”
“그런 주제에 이제 와서 인간다운 척 하지마. 내겐 너희 존재 자체가 굴욕이니까 지금 살의를 억누르는 것도 벅차거든.”
“이해합니다. 당신에겐 못할 짓을 했어요.”
“양, 마지막 경고야. 멋대로 더 떠들다간 너 진짜 죽어.”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태극류 검술을 배운 순간부터 당신 손에 죽고 싶다고 바랬거든요.”
“그게 소원이라면 기꺼이 이뤄줘야지.”
철컹
대검의 묵직한 금속음이 복도에 울리자 양의 목젖이 꿀렁거린다.
“살아남으려면 증명해야 할 거야.”
“기꺼이.”
한발짝씩 서로에게 다가선다.
내 두 손이 대검의 손잡이를 감싼다. 양도 그에 맞춰 검을 붙든다.
더는 내 모조품 따위를 상대하기 지친다.
슬슬 이 놀이도 끝낼 때가 온다.
김희수의 상태로 보아 더 질질 끌어봤자 괴롭히는 기분만 들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도 카피했던가?”
아래에서 올려치는 자세.
“뭐, 알아서 막아. 이번엔 안 봐주니까.”
내 오의 중 하나.
단순한 동작이지만 효과는 발군이다.
맞받아치는 건 불가능, 피하는 것도 내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오의다. 알아도 막을 수가 없으니까.
한때 정신이 붕괴되었을 때, 카이루스에게 먹였던 ‘날개 찢기’.
이 공격으로 일도양단(一???)낸다.
‘너랑 지겨운 인연도 여기서 끝이구나.’
나는 팔을 휘둘렀다.
쿠구구구!
아래에서 끌어올리는 오러에 마왕성의 바닥이 과자처럼 무너지기 시작했고, 내 검이 지나가는 방향에 강대한 풍압이 인다.
저런 기술을 맞받아칠 기술은 태극류, 그러니까 다르칸류에 없다.
내가 창시자니까.
그러니 양은 죽는다.
“흐읍!”
마지막 발버둥일까.
양은 대검의 방향에 맞춰 몸을 틀었다.
그래봤자 늦었다. 검이 다가오기 전 충분히 거리를 벌리지 않은 순간부터... 어라.
카가각
대검이 벽에 끼었다.
순간이었다. 그래도 문제는 없었다.
먹보는 그대로 벽을 부숴내며 양에게로 돌진한다.
조금은 검격이 느려졌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때였다. 양은 허공에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내게로 팔을 뻗었다.
‘...이건.’
여지껏 본 적 없던 동작이었다.
[ 양(?)류 첫 번째 춤사위 과교선(???) ]
콰가가가가!
내 검이 마왕성을 두동강냈다. 잘려나가곤 파편이 기울었다. 하늘이 보인다. 나는 멍하니 멈춰섰다.
“...허억, 허억, 허억......”
양은 내 뒤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석
피슈우욱!
내 어깨에서 피가 솟구친다.
“제길, 얕았어.”
양이 중얼거렸다.
오러때문인지 치명상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분명히 상처입었다. 내 어깨춤을 매만지니 선명한 피가 묻어나온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 하하. 웃음이 나온다.
태극류가 아니구나.
“본 적 없는 검술이네.”
철컹
철컹
뒤돌았다. 내 발걸음 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양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제법 불량한 자세였다.
왼손으로 검을 잡고, 다른 한손으론 무너진 벽을 딛으며 서 있는 그 모습.
마찬가지였다. 태극류에는 저런 자세가 없다.
방어에는 비중을 두지 않는다는 자세.
알 것 같기는 했다. 내 육중한 대검을 상대로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근데.’
이 통로는 무척이나 좁았다.
대검을 휘두르기에 제약이 많은 장소다. 모조리 베어버리지 않는 이상 말이다.
“머리 좀 썼네. 확실히 이런 장소에서 대검은 부적합한 무기지.”
김희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아닌 양에게로 시선을 흘기고 있었다.
불쾌하네, 순간 다 잘라낼까 고민했지만 그건 고민에서 그쳤다.
이곳을 괜히 무너트리고 싶진 않았다. 이미 커다랗게 베어냈지만 이 이상은 싫다는 말이다.
다시 밖으로 이들을 끄집어내고 싶지만, 그럼 인간 병사들이나 내 부하들이 휘말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할까...
금방 답은 나왔다.
‘...그걸 해볼까.’
순간 재홍이의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녀석이 했던 말이 귓가에 재생되는 것처럼 선명히 들린다.
“먹보가 너무 커졌다고?”
“어쩌라고.”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좀 마.”
“그래, 방법은 있지. 모습이 변하면 되는 거잖아. 나 형변하듯 먹보였나 이 녀석도 형변할 수 있게 해주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가능하냐고? 당연히 되지. 생명체라면 다 할 수 있어. 에고 소드니까 얘도 해당되는 거고.”
“아~ 그게 아니라 나한테 그런 능력이 있냐고? 그럼 꺼져 씨발.”
툴툴댔지만 끝내 해줬었지.
나는 먹보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리곤 상상했다. 내가 원하는 형태로.
그러자 먹보가 종이 구겨지듯 줄어든다.
‘뭐야!’
당황한듯하지만, 내가 빙긋 웃자 이내 안심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내 입김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머잖아 내 허리춤에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 형변(??) 한손검. 모델 환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