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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36화 (136/152)

〈 136화 〉 검술 용사 ­ 케일

* * *

망설였다.

“대답해줘요.”

그녀가 인간이었든 무엇이었든 무자비한 살인귀라는 사실은 변함 없는데, 나는 멋대로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내 검은 그녀를 찌르지 못했다.

바닥에 그녀의 머리칼을 자르며 처박힌 채, 부르르 진동하고 있다.

구겨지는 진의 얼굴이 보인다.

아까보다 더욱 알아차리기 쉬운 심경 변화였다.

“어째서... 어째서 마왕군이 됐나요.”

아는 사람이었어서?

그것도 불확실하다.

나는 무얼 기대하는 걸까.

“만약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더라면... 알려줘요.”

이질감은 분명히 내 가슴 속 존재하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아마, 마왕군의 여럿 침공 때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어째서 우리는 마왕군을 상대해야 했고,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부터 시작된 거다.

그들이 악이기에, 세상이 그들을 악으로 부르는 것이 아닌,

악이라고 지정해놓은 세상의 잣대 때문에. 그들이 그에 맞춰 움직여 악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걸 본격적으로 가슴에 품게 된 때는 기장 오빠가 막 5서클에 돌입했을 때부터였다.

메일리에서, 그때 마주했던 악쿤.

그에게서 느껴지던 무척이나 싱그러운 냄새. 나를 감싸주는 듯한 푸근하고도 따스한 그 꽃내음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향수로 샤워를 한 것처럼. 그보다는 혼란스러워서가 더 크겠지.

내가 진을 죽이길 망설이는 것은.

과거와는 달라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냄새 때문이다.

악쿤만이 아닌 다르칸에게서도, 바비룬에게서도 느꼈던 그 냄새.

그것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과거 터널에서 봤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닐까 무심코 생각했을 정도로.

그 냄새의 결은 같았지만, 도저히 맡아줄 수 없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코를 처박고 맡아보고 싶을 정도로 물씬 풍긴다.

달콤한 것, 그러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이건 이제 악취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래, 이건 향기였다.

오히려 악취가 나는 쪽은 항상...

“진짜 많이 컸어, 이제는 귀엽지가 않아.”

내 볼을 쓰다듬는다. 그녀의 놀랍도록 차가운 손길에 현실감이 되돌아왔다.

그녀는 베시시 웃었다. 내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

그리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진 키아라는 끄응, 소리와 함께 검에 짓눌린 머리를 얌전히 빼냈고, 내 그늘에서 벗어나 천천히 일어났다.

“내가 어째서 마왕군이 됐냐고?”

내 머리칼을 쓰다듬는다.

마치 부모의 그 손길처럼.

잠시 어색했지만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있었다.

묘하게 나는 그 향기와 함께...?

스릉­

지독한 악취로 변했다.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꽈악­!

머리칼을 잡아당겨 내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단검을 꽉 붙든다. 그것은 내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꽈아악­ 그 검을 붙잡았다. 힘싸움의 구도. 진은 내게 밀리지 않았다.

“나는 네 숙적이야.”

내 손과 진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줄다리기하듯 팽팽한 그 힘싸움에서 나는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단검의 날카롭고 흉측한 그 끝이 내 목에 닿았다.

소름 돋도록 서늘한 그 날이 피부를 통해 느껴지자 내가 미친 짓을 했다는 걸 자각했다.

그녀에게서는 진하고도 비릿한 냄새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이건 순수한 살의다.

“감히 이해하려고 하지 마. 감히 동정하지 마. 내가 선택한 운명이야. 네까짓 게 멋대로 떠들어도 좋을 게 아니야.”

꾸우욱­

목에서 한 줄기 피가 흐른다.

죽는다. 이대로는 죽는다.

그걸 받아들이자 놀랍게도 정신이 말끔해졌다.

잡념은 물로 씻어낸 듯 사라졌다. 오른손을 옆으로 젖혔다.

순간적으로 단검이 내 목을 비껴가며 옆으로 치워진다. 그것은 목을 죽 그으며 뒤로 스쳐지나갔다. 나는 왼손을 주먹 쥐었다. 휘둘렀다. 묵직한 감각이 왼팔을 타고 내게로 닿았다. 둔탁한 소리도 느껴진다.

콰당탕탕­! 이어진 것은 요란한 소음이었다. 책상과 의자가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숨을 헐떡이며 검을 쥐었다.

클리브 솔리스는 나를 혼내고 있었다. 귀에 안 들어온다.

진을 마주했다.

그녀의 오른쪽 볼이 시퍼렇게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녀는 바늘을 쥐었다. 반대 손에는 사슬을 쥐었다. 파츳, 파츠츳. 형광등이 스파크를 내뿜으며 깜빡인다.

그녀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진다. 느껴졌다. 분노였다. 악취는 타는 듯한 냄새로 바뀌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교실의 칠판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도 그에 맞춰 교실 뒤편으로 빙글빙글 돌았다. 거리를 유지했다. 진은 내 행동을 기다리는 듯했다. 먼저 움직여야 할까? 그것도 함정일지 모른다. 아니야, 타격은 들어갔다. 단지 체력을 회복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떻게 할까. 째깍, 째깍. 지독한 침묵 속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내 심장 박동 소리도 북을 치듯 요란하게 귀를 때리고 있다. 시곗바늘 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의 박자가 맞춰진다.

발을 의자에 걸쳤다. 위로 올려찼다.

의자가 붕 뜬다. 진에게로 대포처럼 날아간다. 그때 잠시, 의자와 진의 모습이 겹쳤다.

아주 잠시였다. 의자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었다.

쩌어억­ 칠판에 명중했다. 칠판이 움푹 파였다. 진은 그 찰나의 순간 내 시야에서 벗어난 것이다.

삐이익­ 이어지는 것은 날카로운 무언가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 오러를 둘렀다. 내 오른편에서 바늘이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오러에 막혀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왼편에서 의자와 책상이 어지러히 날아왔다. 그것들의 다리 끝에는 검은 사슬이 칭칭 감겨 있었다.

검을 휘둘러 그것을 모두 잘라냈다. 치이이익. 그때 눈치챘다. 잘라낸 책상 사물함 밑에서 무언가가 타들어가는 냄새가 났다. 화약이었다. 내 오러의 열기에 불이 붙었다. 몸을 웅크렸지만 조금 늦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유리창과 형광등이 모두 깨지며 교실은 난장판이 되었다.

몸이 폭발에 밀렸다. 뒷문과 함께 복도로 나가떨어졌다.

한 바퀴 빙글 돌며 겨우 착지했다. 얼얼한 피부에 고통스러워 할 새는 없었다.

진의 냄새를 쫓았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덜그럭­ 무언가가 발에 걸렸다.

어둡다. 조명을 켰다. 탁, 타탁. 순차적으로 복도가 밝아진다.

내 뒤에서부터 앞으로. 괴담에서나 나올 법한 음험한 그 연출에 살짝 몸이 떨렸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뒤에서부터 앞으로. 그러자 하나의 인영이 보였다. 진이었다. 하지만 그녀보다 눈에 띄는 게 있었다. 조명을 받아 내 눈을 찌르는 수많은 암기들이었다.

사슬낫, 수리검, 단검, 비수, 바늘, 차크람, 그리고 진득한 독을 품은 유리병들.

그것들의 끝에서부터 무언가가 하나의 선을 그리며 반짝반짝 빛난다. 와이어였다. 그것은 거미줄처럼 이곳저곳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정갈하지 않았다. 굉장히 어지럽다.

모두 베어내면 된다. 불리할 건 없다.

하지만 진은 틈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어깨 뒤로 당겼다. 촤악­! 내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들며 내 등을 베었다. 수리검이었다. 그녀는 곡예하듯 와이어 사이사이를 통과하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그 손에는 단검이 있었다. 검을 세웠다. 카가각­ 막아냈다. 그녀가 다리로 반월을 그리며 바닥을 쓸었다. 순간 휘청했다. 뒤로 넘어가려는 찰나. 오른손에 꽉 쥐어진 단검이 가슴팍을 노리며 휘둘린다. 검으로 쳐냈다. 그녀는 왼손을 당겼다.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진다. 독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오러를 터트렸다. 독액은 내 피부에 스며들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지글지글, 나무 바닥이 녹는다.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을 휘둘렀다. 진이 주춤 물러선다. 투두두둑­ 무언가가 잘라졌다. 와이어였다. 하늘에서 수많은 무기가 떨어진다. 뒤로 물러났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것들은 바닥에 널브러졌다. 진은 축구하듯 발을 휘둘렀다. 단검이 내 눈으로 다가선다. 고개를 옆으로 치워 피했다. 그리곤 돌격했다.

검을 휘둘렀다. 진은 뒤로 물러나기만을 반복하며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와이어를 모두 베어내며 최선의 경로로 공격하고 있었다. 그때 진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핑­ 내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신발장에서 타는 냄새가 난다. 또 폭탄이었다. 검을 내려놓았다. 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리곤 당겼다.

“나만 당할 수 없잖아요.”

나도 빙긋 웃어줬다. 진의 표정이 변하기도 전, 폭탄이 터졌다. 조명이 깨졌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복도는 불길에 휩싸였다. 어둡지는 않았다.

열기에 와이어가 조금씩 느슨해진다. 발을 구르자 클리브 솔리스가 내 가슴팍으로 올라왔다. 착! 다시 착검하며 자세를 잡았다. 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 나올 때까지 베어내면 된다.

이쯤이 좋겠다. 중얼거리곤 검을 양 손으로 콱 부여잡곤 그곳에 검을 쑤셔 박았다. 오러 덕에 두부를 자르듯 검은 부드럽게 벽을 파고들었다.

[ 케일식 검술 2번 ­ 일몰. ]

그대로 검을 머리 위로 초승달을 그리듯 휘둘렀다.

석­ 학교 전체에 검은 선이 그어졌다. 내 검이 지나간 경로다.

쿠구구구­ 그것은 두 토막으로 잘려나갔다. 학교가 뒤흔들린다. 복도는 세로로 잘렸다.

불길 속 매캐한 연기가 바깥 공기를 통해 빠져나간다.

어디 있지? 킁킁, 눈을 감고 코를 씰룩였다. 거기구나. 검을 휘둘렀다. 창가로 휘둘렀다.

서억­ 숨어있던 진이 보인다. 그녀는 폭약에 휩싸여 옷이 엉망인 채였다.

나는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벽을 차내며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운동장. 축구 골대만이 있는 휑한 그곳. 최적의 필드다. 저런 탁 트인 곳이라면 잡술수는 부릴 수 없다. 진도 그걸 알았는지 줄행랑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강당으로 유도했다.

넘어가줄 생각은 없었다. 재빨리 그녀를 추격하며 강당 쪽 문을 향해 거대한 검기를 내뿜었다. 콰가가가­! 강당으로 가려던 그녀는 거대한 공격에 주춤하더니 방향을 바꿨다.

식당이었다. 문을 발로 차며 그곳으로 진입했고, 진은 조리실 안편으로 들어갔다.

재빨리 쫓았다. 배식대를 뛰어넘으며 안으로 진입하자 거대한 냄비가 내게로 날아왔다.

발로 찼다. 콰앙­! 찌그러진 냄비가 처량하게 바닥에 엎어졌다.

이어서 날아온 것은 식칼이었다. 그를 비롯한 여러 조리기구였다.

이딴 장난 같은 짓에는 진력이 났다. 모두 베어내며 진에게로 다가섰다. 그녀는 와이어를 당겼다. 천장이 열리며 무언가가 쏟아진다. 그대로 오러를 터트리며 모두 맞았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드디어 붙잡았다. 검을 휘둘렀다. 단검이 그걸 막는다. 하지만 깨졌다.

다시 휘둘렀다. 진의 팔뚝이 베인다. 피가 솟구친다. 마네킹이 아니었다.

오른쪽에서 머리를 노리고 휘두른 횡베기, 진은 고개를 숙여 피했다. 무릎을 세웠다. 콰작­! 진의 얼굴에 꽂혔다. 그녀의 고개가 뒤로 주춤한다.

그녀는 팔을 당겼다. 와이어가 내 몸에 휘감긴다. 오러로 모두 끊어냈다.

석­ 검을 휘둘렀다. 진의 다리를 베었다.

진이 단검을 찔렀다. 내 어깨에 박혔다.

검을 휘둘렀다. 진이 좌수가 잘렸다.

진이 와이어를 당겼다. 내 몸이 앞으로 기운다. 내 몸에 오른팔을 얹고 빙글 돌아 나를 바닥에 처박았다. 덜컥­ 무언가가 빠지는 소리. 재빨리 뒤돌았다. 진의 오른발 앞쪽에 날카로운 단검이 있었다.

그것이 내 배에 박혔다. 끄으으­ 신음을 토해내며 진을 발로 찼다. 그녀는 벽에 처박혔다.

돌진했다. 진은 몸을 기울여 내 검을 피해냈다. 검이 벽에 박혔다. 빼내려는 찰나 내 등에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바늘이 여러 개 박혔다. 그곳에서 진득한 독이 내 몸에 침투한다.

행동을 멈췄다. 더 활발히 움직이면 독이 전신에 퍼진다.

그 전에 진을 죽여야 한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웃겨.”

진은 잘려나간 왼쪽 팔목에 단검을 거꾸로 박았다. 오른손에는 바늘이 쥐어져 있다.

그대로 내게 달려들었다.

칵, 카각­! 푹, 서억­ 칵! 카칵! 푹, 푸푹, 푹! 석, 서억, 서걱, 촤르르륵­ 꽈아악­! 푹! 푹! 콰앙­! 쿵, 쿠웅­! 석­ 석­!

푹! 석, 퍽, 퍼억! 퍽! 퍽! 석­ 석­

서걱­ 석­ 석­ 퉁. 푸우우욱... 꿀렁... 꿀렁... 꿀렁......

............타앙­!!

*

어지럽다. 시야가 흐릿하다.

몸이 휘청거린다. 만취한 것처럼 제대로 가눌 수 없었다.

비틀거렸다. 빡­ 벽에 머리를 박았다.

꿈이라기엔 모든 감각이 너무나 선명하다.

내 온몸에 박힌 가시와 단검, 그곳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피부를 갉아먹는 진득한 독.

후들거리는 왼팔, 그곳에 휘감긴 검은색 사슬.

나는 마지막으로 검을 한 번 휘둘렀다.

검을 타고 흐르는 진 키아라의 선혈은 바닥에 반달 모양으로 뿌려졌다.

나는 앞을 보았다. 그리곤 허망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꿈이라면 좋았을 텐데.”

앞으로 고꾸라졌다. 코가 아프다. 다른 곳은 더 아프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들어 앞을 바라봤다.

온몸이 토막난 진 키아라가 보였다.

*

화아악­!

어두컴컴멓고 진득하고 흉흉하던 급식실에 빛이 쏟아진다.

따스한 빛이었다. 전장이라고 부를 수 없는 따스함.

그때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들었다. 아주 격하게.

“...당장......! ......러다 ......을래?!”

귀가 먹먹하다.

조금씩 들리는 그 목소리에 눈꺼풀을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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