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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35화 (135/152)

〈 135화 〉 검술 용사 ­ 케일

* * *

“악쿤 토든은 내가 죽인다.”

장이 말했다.

반론은 없었다. 그야 모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바비룬 필라이트는 누가 맡지?”

“내가 맡을게. 그 괴물 같은 놈 상대로 상성이 제일 괜찮잖아.”

같은 주술을 사용한다는 점이 아닌,

바비룬에게서 장을 제외하곤 유일하게 원거리 공격이 주 수단이라는 점에서 빈이 손을 들었다.

“그럼 진 키아라... 그 녀석은 아무래도.”

“응. 읽어내기 굉장히 어렵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어. 전면전이 아닌, 군단의 후방에서 파괴 공작을 벌일지도 모를 일이지.”

“전쟁이 시작되면 무조건 그녀를 찾아내야 해. 가장 까다로운 존재임에는 분명해.”

거대한 몸집의 바비룬 필라이트, 검은 오러를 풀풀 풍기는 다르칸, 마나가 드래곤처럼 방대한 악쿤 토든.

이들과는 달리 진 키아라는 아무런 현상을 내비치지 않는다.

또한 그녀는 그림자처럼 음침하고도 조용해서 기척을 느끼기 힘들다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누구처럼 뛰어난 후각 같은 것이 있지 않다면 말이다.

“흠...”

하지만 아무도 케일에게 그녀의 상대를 하라고 선뜻 말하지 않았다.

케일에게 있어서 그녀는 트라우마였으니까. 그를 모르는 일행은 없다.

눈앞에서 인부들이 무더기로 죽었을 때의 기억에 가장 시달렸던 것은 정 많고 울음 많던 케일이다.

그를 모두가 알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하나 머리를 싸매는 것이다.

“전 괜찮아요.”

그 곤란함을 읽어냈는지, 케일이 말했다.

사자 같이 용맹한 결의를 얼굴에 머금고선 말이다.

“괜찮겠어? 시련 때도 진 키아라가 나타났다면서. 이제 이겨낸 거야?”

“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리고 예전 터널에서 그녀를 인지했던 건 제가 유일했어요. 저만 상대할 수 있어요.”

“지혜,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저도 언니, 오빠들처럼 용사라고요.”

“에이~ 무리하는 거 맞는데? 너 표정만 봐도 알아. 괜히 객기부리지 말고, 양이나 그 서대륙 기사단장들도 있으니까­”

“......아까부터 자꾸.”

화아악­!

오러를 터트렸다.

방이 진동한다. 예삿, 투기장에서 퀸과 장이 다퉜을 때의 그때처럼.

그때보다 박력이 차원이 달랐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의 오러는 더욱 상승했다.

이제는 소드 마스터 급의 오러.

귀여운 울보였던, 지켜줘야했던 케일은 이곳에 없었다.

“그 여자 상대는 내가 해요.”

일행은 순간 그녀에게 압도되었음을 느꼈다.

그 이후, 진 키아라의 까다로움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휘리릭­!

사슬 낫이 내 몸을 휘감고자 꺾이며 다가온다.

콰착­!

검으로 쳐냈다. 사슬이 오러에 깨지며 바닥에 파편을 흘렸다.

사슬 낫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으로 비상하고 있었고, 나는 진 키아라와의 거리를 재빠르게 좁혔다.

철컥.

그때 어떤 장치가 작동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내렸다. 곰 덫 같은 것의 날카로운 이빨이 내 장화를 좀먹고자 끙끙거리고 있었고, 발을 휘두르자 눈에서 하나의 선이 죽 그어지며 위로 치솟았다.

덫과 이어진 와이어. 그 중간에는 다이너마이트가 여럿 있었다.

진 키아라가 속삭이듯 말했다.

“폭(?).”

콰아아앙­!

쾅­ 콰앙! 콰과앙!

수많은 폭발이 터지며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고, 내 발을 붙든 그 덫은 여전히 날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검에 오러를 불어넣으며 장화 바로 옆을 쑤셨다.

콰작­!

덫을 부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가느다라면서도 탄탄한 와이어는 여전히 내 발에 칭칭 감겨 있는 채다.

이곳에 시간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진 키아라가 허공으로 뛰어오르곤 허공에 둥실둥실 뜬 얼음 발판을 밟으며 다가온다.

하늘에서는 냉기 마법을 무자비하게 폭격하는 악쿤 토든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명백한 위기였다.

1년 전이었다면 그랬겠지.

[ 케일류 검술 3번 ­ 용솟음! ]

땅으로 검을 향하고, 눈을 끌어올리듯이 위로 쳐들었다.

올라온 것은 눈뿐만이 아니었다. 폭포가 역류하듯 내 앞에는 커다란 오러가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고, 그것은 내 방어막이 되어주었다.

사르르르...

머잖아 폭발은 오러에 잡아먹혀 잠잠해졌다.

하지만 두 가지가 문제였다.

“으아아악­!”

하나는 폭발의 여파에 의해 눈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눈더미에 병사들이 휩쓸려,

콰직끈­!

난폭한 소리와 함께 떠내려가기 시작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촤르르르륵­

꽈아악­

발판을 밟고 어느새 내 뒤로 건너온 진 키아라의 공격에 무방비해졌다는 것.

그녀의 사슬이 내 몸을 휘감았고, 나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이익­!”

태극 류 방어술 1번, 갑옷을 사용했다.

견고한 오러를 터트리며 이 사슬에 대항했지만, 한 겹이 아닌지라 모두 부서트리지 못했다.

진은 손틈마다 하나씩, 총 4개의 바늘을 쥐곤 내 곁에 서 있었다.

그 바늘을 허벅지의 어떤 유리병에 푹 찍었다. 바늘에서는 진득한 독액이 묻어 바닥을 녹여내고 있었다.

마치 용암처럼.

그리고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열기?

독일 뿐인데 열기가 느껴진다고?

뒤에서 느껴졌다.

진 키아라도 잠시 행동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악쿤­!!”

기장 오빠가 소리치며 메테오를 떨구고 있었다.

그것이 바닥에 닿자, 눈이 녹아내리는 것을 넘어서 바닥이 들끓기 시작했다.

필드가 바뀐다.

하늘은 뽀얀 눈처럼 새하얗지 않고 짙붉게 물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묶여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진은 시선을 다시 내게로 향하고 바늘을 손에 꼭 쥐곤 달려들었다.

정확히 내 정면으로.

다가오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지만, 발끝에 신경을 집중하자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발끝. 내 클리브 솔리스가 맞닿아있는 그곳.

발을 굴렀다.

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녹아내린 물줄기가 떠올랐고, 동시에 검도 내 눈높이까지 올라왔다.

‘그거 할 거야?’

클리브 솔리스가 물었다.

‘응.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진 키아라가 내 눈앞까지 바늘을 가져왔다.

그 찰나의 순간, 세상이 어두워진다.

하늘부터 땅까지.

모든 오감이 정지된 듯, 요란했던 함성과 비명. 폭발물 터지는 소리와 눈사태의 은은하고도 거대한 그 소음마저도 동영상의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일순 정지했다.

시야도 또다시 뒤바뀌기 시작했다.

내 몸을 칭칭 휘감았던 검은색 사슬은 풀어졌고, 내 코앞까지 다가왔던 진은 저 멀리에로 강제 전송됐다.

“이게 무슨...?”

천하의 사천왕이 당황했다. 묘한 뿌듯함을 느꼈다.

이것은 영역 전개라고 할 수 있었다.

음이 투기장에서 내게 보여줬었던 클리브 솔리스의 기술.

그것을 사용했다. 이제 이곳에는 나와 진, 단 둘이다. 방해는 없다.

고요하다. 비록 밖은 어두웠지만, 아까만큼은 아니다.

“그리운 곳일 거예요, 언니.”

내 상상력에 맞춰 세상이 변화된다.

네모낳고 각진 것으로, 창문이 생기고, 그 네모난 공간 곳곳에는 또 여럿 물건들이 순차적으로 생겨난다.

책상, 그리고 의자.

내 뒤에는 칠판. 그 밑에는 분필들, 그리고 교탁까지.

이곳은 교실이었다.

내가 다녔던 서원 여고.

3학년 1반. 내 반이었고, 한때는 멋져보였던 그 언니의 반.

“최세린.”

그 언니의 이름을 부르자 진은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의 이름이잖아요.”

허리를 숙여 검을 집었다.

탁, 타닥.

스위치 켜지는 소리와 함께 순차적으로 교실이 밝아진다.

정다운 곳.

내 옷은 갑옷이 아닌 교복이 되어 있었고, 눈앞의 여성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최세린]

3학년을 나타내는 푸른색 명찰과 함께.

그리고 전교회장임을 알리는 완장과 함께.

“이제야 알 것 같아요.”

검으로 땅을 슥, 스슥 그었다.

그 행동을 몇 번 반복하다가.

진 키아라... 아니, 최세린을 똑바로 마주했다.

“마왕군에도 전송자가 있을 수 있다는 걸.”

검을 두 손으로 붙들고, 그 끝을 진에게 향했다.

찌르기의 자세. 오러가 휘감긴다. 조명보다도 더욱 빛나는 그것이 도신에 머물러 있었다.

내 기세에 교복 치마와 자켓이 흔들린다.

창문마저도 요란하게 떨리고 있었고, 조명은 금방이라도 깨지거나 떨어질 듯, 굉장히 위태로웠다.

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무표정으로 날 마주하고 있었다.

그래, 무표정으로. 여지껏 전투에서 보였던 그 차갑고도 감정이라곤 없는 그 표정...

......아니.

무표정이 아니었다.

조금은 망설이고 있었다.

무얼 망설이는 걸까?

내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채서?

아니면 내가 자신의 후배였다는 것에 당혹감이 들어 죽이기가 겁나서?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한때 존경했던 그 언니이든, 설령 그 존재가 아니든.

죽일 대상임에는 변함 없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생명을 가지고 장난쳤다.

나는 다짐을 마쳤다.

검을 쥔 손과 몸에 긴장을 풀었다.

또각, 또각.

몇 발짝 다가섰다.

또각, 또각, 또각­ 탁, 탁­!

다시 몇 발짝, 걸음에 속도를 높이며.

탁, 탁, 탁, 탁, 탁! 탁! 탁! 탁!

이제는 달려나가며.

직사각형의 교실을 가로질렀다.

책상과 책상을 밟으며 그녀에게로 달려든다.

몸을 던졌다. 찬란한 오러가 내 몸을 감싸고 있다.

일격에 죽이자.

이 일격에.

[ 케일류 검술 5번 ­ 송곳...! ]

콰자자자작­!

공기를 찢으며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

“이때쯤 올 줄 알았어.”

악쿤이 말했다. 회의장에는 그를 비롯하여 다르칸, 암두시아스와 디안, 그리고 바비룬의 손에 작은 화분이 된 채 들린 스프라임이 있었다.

“세린... 아니, 카티골이라 불러야 할까?”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쩐지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악쿤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었다.

“편한대로 불러.”

덤덤한 척 말했다.

그는 작게 고개를 몇 번 주억이고는 ‘그치, 그래.’라는 별 뜻도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내게로 다가왔다.

“에이브(AYV)가 원하는대로 용사와 사천왕은 맞붙을 거야.”

거리가 가까워진다.

악쿤은 내 손에 착 들어오는 작은 무언가를 쥐어주곤 말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 전투의 마지막에는 이걸 써줘. 꼭. 그게 너에게 하는 마지막 부탁이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곤 용사가 찾아올 때, 그때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

시간은 흘러,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아버님과의 약속대로 진 키아라라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연기하며 연합군을 깨부수며 그녀를 찾고 있었다.

내 상대로 점지된 자.

무척이나 약하고 가냘퍼서 툭 건드리면 무너져내릴 것 같던, 하찮기 그지없던 그녀가.

“나와­!! 진 키아라­!!”

울부짖으며 날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습을 드러냈다.

“센척도 늘었어, 우리 강아지.”

적당히 하다가 때가 되면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용사에게 패배한 사천왕을 연기하며 쓰러져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 이상으로 케일의 질척거림은 심했다.

전투로 안 밀린다는 그런 것이 아닌,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연기하는 고등학생 최세린.

그녀의 이름은 언급하며, 교복이라는 실용성 없는 옷을 내게 강제로 입히며.

내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굉장히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최세린에게 서운한 것이라도 있는 건가?

아니면 전송자에 대한 것에 의문이 남아 있는 건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나는 그녀에게 있어 죽은 존재다.

그거면 된 거다.

케일은 다음 사천왕이 될 것이고, 나는 다음 용사가 될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알려주세요.”

근데 왜 너는 나를 내려다보며 그런 표정을 짓는 걸까.

클리브 솔리스는 내 귀를 스치고선 바닥에 박혔다.

염색약이 다 빠져 흑색으로 변해버린 기다란 머리칼이 내 몸과 얼굴에 촤르륵 쏟아진다.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평범한 인간이었던 당신들이...... 마왕군이 됐나요.”

무표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속에서는 무언가가 끊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인내심이라는 이름의 끈.

어줍잖게 아는 주제에, 동정하듯 날 바라보는 그 시선이 너무나도 같잖아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이 아이는 아무래도.

“알 필요 없어.”

제대로 짓밟아줘야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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