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 검술 용사 케일
* * *
모빌을 타고 흩날리는 머리칼을 붙들었다.
갑옷은 어제 막 기름칠을 한 터라 완벽하다.
손에 쥐어진 클리브 솔리스도 부르르 진동하며 준비가 되었음을 알렸다.
뒤를 돌아봤다.
수많은 인파가 시야를 가득 메운다.
끝도 알 수 없는 북대륙, 동대륙, 서대륙의 군인과 기사단.
그들에게 남대륙의 마법사들이 인챈트를 걸었다.
그들은 각기 대륙과 나라를 대표하는 깃발을 꼽고, 스노우 모빌과 설산용 마차, 열기구와 조련된 곰과 호랑이를 타고 있었다.
어마무시한 인파다. 이들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쏟아졌던가, 되짚어보니 괜한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숙이고, 간절히 빌고,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며 감정에 호소했다.
이제야 결실을 맺을 때다.
저 멀리에 점처럼 작은 마왕성이 보인다.
스노우 모빌의 속도가 올라감에 따라, 군단의 함성이 커짐에 따라.
마왕성은 가까워져갔고, 그 안에 우글거리는 몬스터들의 기가 느껴졌다.
전투는 곧 시작된다.
그 신호탄을 지금 막,
“{ μετωρο 운석 火 (ε,υ,τ) }”
장이 알렸다.
하늘에서 쩌어억 괴수가 아가리를 벌리듯 커다란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안에서 스멀스멀 시커먼 화염구가 기어나온다.
“돌격하라!”
양이 검을 치켜들고 외쳤다.
백금, 황금 기사단장인 칼리오, 브로슨이 검을 ‘X’자로 교차하며 외쳤다.
북대륙의 총독 벡터가 깃발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워 울프가 폴암의 끝을 마왕성을 향하곤 외쳤다.
우와아아아아아!!!
이어져 나온 것은 천둥이 치듯, 호쾌하게 울부짖는 군단의 병사들의 포효였다.
케일은 장에게 눈짓했다. 그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노우 모빌을 운전하는 주피아의 화이트, 그의 어깨를 툭툭 쳤고, 그는 속력을 올렸다.
수많은 인파 가운데, 사람 인(人)자로 눈길 한 줄기가 매섭게 달려나갔다.
그 안에는 케일이 있었다.
“건투를 빕니다!”
화이트가 외치자, 케일은 클리브 솔리스를 꽉 붙들었다.
눈앞에는 베어울프와 웨어울프, 오우거와 트롤들이 득실거렸다.
케일은 결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모빌을 발로 차며 도약했다.
그때 땅의 흔들림은 더욱 커졌다.
뒤의 군단의 행진 때문이 아니었다.
[그어어어어!]
땅에서 그로테스크한 이빨만이 얼굴의 전부인 스노우 웜이 모습을 드러냈다.
총 세 마리, 놈들은 몸으로 소용돌이를 그리며 케일을 먹어치우고자 달려들었고, 허공으로 도약한 케일에게 피해낼 수 있는 공간이란 없었다.
[커헙]
웜은 입을 다물었다.
케일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뒤를 따르던 병사들의 함성이 일순 멎었다.
하지만 양은 피식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장난이 늘었네.”
그가 말했다.
동시에 스노우 웜의 뱃속에서 황금색 빛이 스멀스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 태극 류 발도술 제1식 출근길 ]
촤자자작!
웜이 허공에서 분쇄기에 종이를 구겨넣듯 산산조각났고, 그 중심에서 웜의 진액을 가득 뒤집어 쓴 케일이 있었다.
그녀는 눈더미에 고양이처럼 가볍게 착지했다.
잠시 몸을 부르르 털곤, 주먹의 등으로 눈매를 닦아냈다.
와아아아아!!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병사들의 사기가 샘솟는다.
케일은 클리브 솔리스의 검끝을 마왕성을 향하며 크게 외쳤다.
“내가 연합군의 선봉장 케일이다!!”
황금색 찬란한 오러가 그녀를 중심으로 터져나간다.
그녀의 양옆으로 계곡에서 커다란 바위에 물살이 갈리듯, 병사들이 쏟아지며 돌격했다.
전투는 시작되었다.
*
전장에 중심에 서서 베고 베고 또 베어냈다.
진득한 피로 샤워를 한 듯, 온몸은 끈적거렸다.
과거 슬라임에게 된통 당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강해졌으니 웨어울프마저도 손쉽게 벨 수 있는 거겠지.
그래서 더욱 피에 굶주린 아귀처럼, 몬스터를 찢어발겼다.
도신을 타고 피가 주르륵 흐른다. 어느덧 내 주변의 눈더미는 피로 가득차 있었다.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서는 성빈 오빠와 바비룬 필라이트가 격돌하고 있었고, 기장 오빠와 악쿤 토든은 서로 마법진을 만들고, 역산하여 부수고를 반복하며 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저들 중 누구도 전투가 버겁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1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리고 나도 사천왕 중 한 명을 묶어내고, 심지어 죽일 자신이 차고 넘쳤다.
‘이런 잡졸들 말고, 제대로 된 애는 없어?’
클리브 솔리스도 나와 뜻이 같았다.
우리는 그녀를 찾아서 죽일 것이다.
한때 나를 공포에 찌들게 했었던,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악취에 시달려 정신을 쏙 빼놓았던.
진 키아라.
그녀와 끝맺음을 지어야 한다.
검술 교본을 미친듯이 파헤치고, 오러를 밤낮없이 갈고닦은 것은 순전히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석연찮은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들었던 찝찝함.
그것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그녀를 만나 대화할 필요가 있었다.
“나와!!”
그래서 그녀의 부하들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이래도 안 나올 거냐는, 도발과도 같았다.
“진 키아라!!”
바로 옆에 있어도 인기척을 조그만치도 흘리지 않는 그림자와 같은 그녀.
일행들은 그녀를 눈치챌 새도 없이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내게는 코가 있다.
뛰어난 후각, ONE(?)에 도착한 후부터 별다른 노력도 없이 얻어낸 능력.
그것으로 진 키아라를 판별할 수 있다.
비록 피비린내에 쩔어있어도 그녀의 지독한 악취만큼은 구분할 수 있다.
나는 태생부터 그녀의 천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전장을 가득 채운 피비린내 속, 나는 냄새를 맡았다.
저 멀리, 12시 방향,
아니,
조금은 가까이, 내게서 3시 방향.
아니,
더욱 가까이, 내게서 6시 방향.
아니,
코앞,
바로 내 뒤.
카가가각!
검을 쥔 팔을 뒤로 뻗자 단검에 클리브 솔리스가 맞닿았다.
이를 꽉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선 증오스러운 그녀가 있었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니?”
진 키아라.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다.
“보고 싶었어요, 언니.”
오러를 거뒀다. 내 몸을 감싸던 찬란한 빛은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클리브 솔리스를 놓았다. 바닥으로 손잡이가 아래를 향한 채 수직으로 떨어진다.
진은 주춤하는 눈치였다.
검사가 검을 치우고 오러를 거둔다는 것은 전투할 의사가 없다는 뜻이니까, 항복 선언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 잘못 짚었다.
“죽어.”
콱!
클리브 솔리스를 발등으로 차올렸다.
그러자 재빠르게 진의 턱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여유롭게 피해낸다.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검의 끝을 끝까지 지켜보는 그 노련함에 기가 찼지만, 내 검을 지나치게 의식했던 덕인지, 내 손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미처 쳐다보지 못했다.
나는 주먹에 오러를 실었다.
송곳처럼 주먹 마디마디가 튀어나온 건틀렛, 그 부분에 오러가 스며들며 찬란한 빛을 뿜는다.
나는 그녀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것만은 예상치 못했는지 반응이 한 박자 더뎠다.
콰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눈앞에는 배를 부여잡고 주춤 뒤로 물러나는 진 키아라가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숨을 쉬기 어렵다는 듯 가파르게 입김을 내뱉으며 고통에 찬 듯 몸을 부들부들 떤다.
“재밌어요?”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검을 치켜세우고, 위로 들며 그녀를 향했다.
그리곤 휘둘렀다.
그리고 베어냈다.
짙붉은 피가 허공으로 피슉 솟는다. 바닥에 철썩 소리와 함께 그것은 어지러히 떨어졌고, 나는 검에 잘려나간 형체를 보았다.
‘......’
섬뜩한 무언가가 몸을 쭉 훑는다.
닭살이 돋아남과 동시에 뒤돌았다.
콰직!
단검이 내 목덜미를 노렸지만, 그것은 검집에 박혔다.
아까 베어낸 진 키아라의 시신은 바닥에 검은 물을 토해내더니, 머잖아 반토막나고, 복부 부분이 박살난 마네킹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기습은 이제 안 통해요.”
눈으로 쫓을 수 있게 된 순간부터 그녀의 속공은 내게 닿지 않는다.
“오러도 다루지 못하는 당신에게 육탄전으로 밀릴 일도 없어요.”
검집에 오러를 불어넣자 단검이 녹아내리며 쇳물을 뚝뚝 흘린다.
아까 다채롭던 표정은 잘못 본 것이었다는 듯, 지금은 무표정한 진 키아라가 있었다.
그녀의 눈가가 씰룩인다.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다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많이 컸네. 겁에 질려 몸을 웅크리던 그때와는 달리, 이제는 위협적인 전사가 되었어.”
“다 당신 덕이죠. 내게 너무 많은 모욕감을 줬잖아요.”
“검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네. 예전에는 묶여 있었다면 이제는 자유로워. 마치 홀라처럼. 그리고 우리 군단장처럼.”
“칭찬 고맙네요. 그래서, 언제까지 입 털 생각이에요 언니?”
“입도 험해졌고...”
진은 검집에 잡아먹혀 녹아내린 단검을 놓았다.
팍, 팍팍.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마치 투명인간이 지나가는 것처럼 눈과 피로 뒤덮인 바닥에 순차적으로 발자국이 새겨진다.
“대충 놀아주려고만 했는데, 이젠 그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겠어.”
촤르르륵
그녀의 허벅지에서 시커먼 쇠사슬이 흘러내린다.
그 사슬에서는 음험한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악취도 극심했다. 예삿 물건이 아니라는 것만은 잘 알 수 있었다.
“열 번째 사슬.”
“어머, 알고 있었네?”
그 양쪽 끝에는 낫이 달려 있었다.
그 손잡이가 아닌, 사슬의 중간을 잡으며 빙글빙글 휘두른다. 그 기세에 맞춰 눈이 닿기도 전에 허공으로 도망쳤다.
“무서워?”
“기다리던 순간인데 그럴리가요.”
“센척도 늘었어. 우리 강아지.”
그녀는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었다. 아니, 웃는 척을 했다.
표정은 미묘하게 바뀌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마네킹보다도 더 생동감 없다.
애니메이션이 움직이는 느낌이다. 저것이 사람이라고 느끼기엔 생리적인 거부감이 앞선다.
표정에서 어떠한 감정도 읽어낼 수 없다.
방금 웃는 것조차도 착각으로 느껴질만큼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읽어내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이게 널 덮칠 거야.”
사슬 낫을 가리키며 하는 말.
“온몸을 칭칭 감고, 이 날카로운 날이 너의 목덜미를 꿰뚫고, 그 뽀얀 피부를 뽑아낸 나무의 뿌리처럼 너덜너덜하고 너저분하게 만들 거야.”
사슬 낫을 교차되게 빙글빙글 휘두르며 다가선다.
“그리곤 그 상처에 진득한 독액을 발라줄게. 특히나 그 귀여운 얼굴에 말이야. 다시는 재생할 수 없게,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세계를 구해낸 용사인들, 모두가 바라보는 것조차도 겁에 질리게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줄게.”
거리가 가까워진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독희(??).’
그녀의 이명.
그걸 증명하듯, 그녀의 서슬벼린 사슬 낫 끝에는 진득한 독이 묻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