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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33화 (133/152)

〈 133화 〉 준비

* * *

스프라임을 살려내려면 카티골을 찾아 나서야 했다.

때마침 워 울프가 찾아왔다.

마치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최적의 타이밍에 등장했고, 자신의 가치를 카티골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말과 함께 입증했다.

그는 폴암에 있는 치료독으로 바비룬을 치유했다.

그 간단한 치유만으로 카티골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근거에 힘이 더해졌다.

“그 자식이 주든?”

치료독, 용사 시절 많이도 이용해온 그 특유의 끈적한 녹빛 액체.

진 키아라의 작품이다. 그것이 워 울프의 폴암에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장에는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워 울프와 같이하는 것이지?

그 의문을 재기하기도 전, 워 울프는 입을 열었다.

“사실 바비룬, 그대를 설득하러 비이린에 찾아온 것은 아니다. 이곳에 있는 이그니스와 요정, 그리고 우드 엘프들의 도움을 얻고자 온 것이지.”

“나는 얻어걸렸다는 거야?”

“아니, 당신이 여기 있을 것 같기는 했다. 감각으로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라 너무 캐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해.”

그는 고개를 돌렸다.

이그니스에게로, 그리고 벙찐 넬피에게로.

“스프라임을 살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어.”

[알고 있네. 신 포식자라 할지라도 능력의 한계는 있겠지.]

“그래도 데려가겠다. 혹시나 모를 일이니.”

“어째서 당신이 우리를 돕는 거죠? 이 또한 그분의 뜻인가요?”

“뜻은 무슨, 오히려 죽이길 권장하는 쪽이겠지. 스프라임의 죽음은 바비룬 당신이 퀸의 팔을 멋대로 잘라낸 것에 대한 벌이었다.”

“...”

“너무 풀 죽지 말게.”

“풀 죽은 게 아니라, 기분 더러운 거야.”

말은 그리 했지만 죄책감이 몸을 휘감는다.

이대로 스프라임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배가 되겠지.

바비룬은 풀 죽은 상태가 맞았다.

그래도 실낱 같은 희망을 찾았으니, 그것에 기대지 않을 수 없었다.

몸은 치유독 덕에 조금은 편해졌다. 완전해졌다기엔 무리가 있었지만, 움직일 수는 있었다.

바비룬은 몸을 일으켰다. 넬피가 말리려 해봤지만, 그의 결의 굳은 눈빛을 보자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바비룬이 말했다.

“어디에 있어. 빨리 움직이자.”

“좋아, 하지만 그 전에,”

뜸을 들이자 바비룬이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미 환복을 마쳤고, 머리칼을 비롯해 피부마저도 주술로 씻어낸 후이다.

“빨리 말해.”

“당신이 아니라, 두 종족의 대표들에게 말이다.”

예상했던 것일까, 이그니스는 침묵을 지켰다.

“우리를 도와줘. 이 지겨운 놀이를 이만 끝낼까 해. 그러러면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해.”

[......생각할 시간을 주겠나.]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지.”

워 울프는 바비룬을 부축하고자 다가섰지만, 그 손길을 뿌리쳤다.

형변도 없이 스프라임의 관을 손쉽게 들었다.

그리곤 걸었다. 카티골이 있을 곳을 안내하라는 서두와 함께.

한 10분 정도 걸었을까,

비이린의 경계에서 벗어나 동대륙의 이프카리스토로 가까워지고 있었을 때, 바비룬이 아는 길이 있다며 성큼성큼 발걸음의 속도를 올렸지만, 워 울프는 그의 어깨에 올려진 관을 붙들었다.

“더 움직일 필요는 없어.”

워 울프가 관을 다시 바닥에 두었다.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이어진 정적, 누군가가 나타났지만서도 쉽사리 입이 떼지지 않을 것이다.

“......”

“......”

카티골. 아니, 진 키아라.

그녀가 수풀을 해치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바비룬과의 시선이 교차되었지만, 어째서인지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스프라임.”

진 키아라는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섰다.

관 뚜껑을 살짝 밀자, 바닥에 쿵 하고 떨어졌고, 창백한 안색의 스프라임이 있었다.

그의 온몸은 나무 덩굴에 휘감기고 있었다.

막 이그니스가 치유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굉장히 작았던 그 덩굴이, 스프라임을 자연으로 데려가고자 스스로 성장하여 몸집을 부풀리는 것이다.

등가교환은 필요하다. 단지 주술이 신비하다는 이유만으로 덩굴의 성장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덩굴은 스프라임의 몸에 남아있는 생명력을 야금야금 먹고 있는 것이다.

바비룬은 표정이 굳곤 덩굴을 찢어발기려 했지만, 워 울프가 가만히 지켜보라며 그를 말렸다.

진 키아라는 느릿느릿한 손길로 스프라임의 몸을 훑고 있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건 꽤나 피말리는 일이었다. 진단 결과를 기다리는 보호자의 심경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괜히 조급해졌지만, 독촉하지는 않았다.

“......지독하게도...”

그녀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다키아가 죽었다는 것은 알고 있을까, 그것을 알려줘야 할까.

지금 스프라임을 보면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마왕성을 떠났을 때의 그날처럼, 하등 종족을 비하하며 스프라임을 비웃고 있을까.

그날의 빳빳한 모가지는 여전할까.

만신창이로 나타난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여전히 에이브(AYV)에게 무한한 충성을 바치고 있을까.

대화를 섞지 않았으니 어느 무엇도 알아낼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어째서.”

카티골이 아니라 진 키아라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의 감정.

오랜 세월 보아와서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것은 슬픔이다.

그것이 가식일지 아닐지는 모르겠다. 일행을 몇 년이나 속여왔던 그녀이다.

어쩌면 눈앞의 존재가 카티골이 아닐 수도 있다.

전능한 신 포식자일지니, 분신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믿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스프라임을 애석한 눈길로 어루만지며 눈두덩이가 저 하늘의 석양처럼 황금빛으로 밝게 물드는 그녀의 상냥함이 진실된 것이리라 믿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곧 찾아올 것은 어스름한 것을 가져올 황혼이다.

그것처럼 이 숲이 더 어둑해지기 전에, 그녀의 갈빛 도는 눈동자가 흑빛으로 바뀌어 더는 감정을 엿볼 수 없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그녀의 속내를 읽어내고 싶었다.

그를 눈치챈 것은 아닐 것이다. 조금 뚫어지게 쳐다보긴 했지만, 이건 용사 시절 때에나, 같이 마왕성에서 생활할 때에도 보였던 버릇이었으니 유별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카티골이 스프라임의 진단을 마친 것은, 진실된 것이었다.

“......온전히 살려낼 순 없을 것 같아.”

그녀는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씨발!”

나무를 걷어차자 나뭇잎과 솔방울이 우수수 떨어지고, 새들이 놀라 하늘로 비상한다.

카티골은 살짝 놀란 눈치였지만, 애써 평온을 찾으며 바비룬을 바라봤다.

아니, 평온을 찾은 게 아니었다. 슬프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혼이 다가온다. 그림자의 각도가 바뀌어, 나무를 기울인 모양의 어둠 속에서의 카티골의 얼굴은 확실히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는지 그녀는 한 마디를 덧붙였고, 바비룬은 그녀에게 달려들어 뽀얗고 가녀린 손을 양손으로 붙들었다.

그에 살짝 놀라 뒤로 주춤했지만, 시선을 다시 돌려 바비룬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돋아 있었다. 조금 엉망인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밝은 얼굴임은 분명했다.

해가 졌다. 숲은 어두워졌다.

워 울프가 폴암의 불꽃을 피워내며 길을 밝혔고, 이들은 어딘가로 떠났다.

마왕성은 아니었다.

*

‘왜 나한테만 이런 얘기를 하는 거야.’

타나토스와의 만남은 장에게 독이 되었다.

‘마왕군만으로도 벅차, 신경 쓸 게 너무 많다고. 근데...’

이제와서 짐을 하나 더 어깨에 올리는 건 너무나 잔혹한 일이었다.

털어놓을 사람도 없었다. 타나토스에게 들었던 것은 동료마저도 의심해야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마왕군을 뒤에서 조종하는 자가 있다고 얘기했다.

암두시아스의 얘기겠거니, 멋대로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 위의 존재. 신이 마왕군과 그들에게 대적할 용사를 위한 무대를 설계하고 있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여기까진 놀랍지는 않았다. 막상 들으니 주춤하긴 했지만, 예상 못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신... 그래, 그 신이 얼마나 악취미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마왕군과 용사의 대립을 원하기에 이 지경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그럼 스승의 죽음도 신이 계획한 것이냐는 물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타나토스는 그건 악쿤의 개별적인 판단이라고 대답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협하고 죽이고 습격하는 것마저도 악쿤의 판단하에 이루어졌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그 말을 듣자 오히려 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악쿤을 여전히 증오해도 되겠구나.

내게 있어 그는 순수하게 살의를 품어도 될 대상임에는, 용사 얘기의 종지부를 찍게 될 때쯤 최후의 벽임에는 달라지는 게 없겠구나.

그래서 무덤덤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들려온 얘기가 너무나도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용사를 의심하라. 그들에게 속내를 내비추지마라.]

“또 그 패턴이야? 질리지도 않아? 좋아, 말해봐. 어째서 그들을 의심해야 되는지.”

[그들 중 하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을 포식한 자 케다시. 그가 섞인 채 너를 비롯한 용사들을 감시하고 있다. 그러니 숨어라. 입 밖으로 내뱉기 전 백 번도 넘게 생각해라.]

“거짓말.”

피식 웃고는 타나토스는 손을 들어 심장을 어루만졌다.

화륵­ 불 속성 마나가 그의 심장에 선명한 고리를 만들며 휘감겼고, 그는 일체의 거짓도 없다며 선언했다.

언약이었다.

그의 몸은 불타지 않았다.

[더 증명이 필요한가?]

“...그럼, 여지껏 함께해온 시간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거야?”

[그거야 모르지.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케다시는 인간의 감정에는 절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거다.]

“동료라고 속이면서 우리 곁에 머물고 있었다고? 지금도?”

[그렇게 되겠지.]

...구역감이 올라왔다.

웩­ 웨엑­! 웩­ 웩!

벽을 붙들고 속을 게워냈다.

지혜, 퀸, 성빈이 형.

이들 중 한 명이 신이라는 놈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고, 지금껏 함께해온 모든 시간이 거짓이었다고.

같이 잠을 자고, 밥을 먹고, 농담을 하고, 던전에서 사선을 넘고, 전리품을 나누고, 때로는 얼굴 붉히며 싸우고, 갈라섰다가 화해하고, 이 모든 과정 자체가 거짓이었다는 것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지만, 언약을 맺은 순간부터 타나토스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장은 타나토스의 방에서 나섰다.

성의 1층으로 가, 카이루스와 옥신각신 싸우는 일행이 보인다.

그들은 장을 마주하곤 저마다의 대사를 던졌다.

“오빠! 들어봐요, 이 허세용이 아까부터 자꾸­”

[목덜미가 뜯기고 싶지 않거든 말을 가려서 하길 권하지 인간 계집!]

“지겹지도 않아. 네가 올라간 순간부터 한시도 입을 쉬지 않고 열을 내고 있는데, 이 또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기장?”

“야, 기장아! 빨리 와서 이거 먹어봐. 파라소스에서만 재배되는 산딸기로 만든 쿠키라는데, 맛이 기가 막히다. 마음 같아서는 한 트럭 싸가고 싶네.”

그들은 모두 반겼지만, 장의 표정은 우중충했다.

이들 중 한 명이 신의 감시역이다.

사실 달라지는 건 없다. 끝내 모른척하며 마왕군까지 토벌할 것이다.

하지만 가슴을 인두로 지지는 듯 무척이나 뜨겁고 괴로운 것이었다.

*

1년이 지났다.

“곧 시작할 거야.”

장이 일행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무표정이었다.

“곧 시작될 거야.”

악쿤이 일행에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어쩐지 슬퍼보였다.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부디... 모두 살아 돌아올 수 있기를.”

“괜히 긴장되네... 하, 참.”

장의 근처에는 오른팔을 로브로 가린 퀸이, 클리브 솔리스의 검집에 이마를 맞대고 기도하듯 눈을 감은 케일이, 스톰브링거를 괜히 어루만지는 빈이 있었다.

“일 끝나면 맥주 파티라도 하자.”

“맥주가 뭐냐? 더 비싼 술 퍼마셔야지.”

“그것도 좋지. 재홍이 네가 사는 거야?”

“그래, 아주 배 터지도록 먹여줄게.”

악쿤의 근처에는 멋쩍게 웃으며 몸통만한 대검에 몸을 기대고 있는 다르칸이, 괜히 열을 내며 링을 매만지고 있는 바비룬이 있었다.

쿠구구구­

땅이 진동한다.

경사진 눈더미를 파헤치고 다가오는 존재들이 느껴졌다.

거대한 스노우모빌을 타고 파도가 밀려오듯 다가오는 인파.

생각보다 수가 적어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마왕성의 사각에서 다가오는 모빌이 더욱 많았다. 그들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다가서고 있었고, 고개를 처들자 하늘에서도 비행정을 통해 다가오는 이들이 느껴졌다.

“메이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너와 같은 전철을 밟을지, 아니면 극복해낼 수 있을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준비는 철저했다. 그래도 불안감은 숨길 수 없었다.

무척이나 가소로웠던 용사들은 너무나도 잘 성장하여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하늘에 그려지는 흑, 홍색 마법진의 크기와 그 압력이 그들의 전력을 대변한다.

악쿤은 건물의 옥상으로 천천히 올랐다.

다르칸은 대검을 들고 스터프에게 소리치며 건물의 1층으로 나섰다.

바비룬은 날개를 펄럭이며 비행정을 향해 다가섰다.

“살아서 보자.”

악쿤이 말했다. 흑, 홍색 마법진에 청색 마법진이 맞선다.

­!!

거대한 소음이 인다.

최종결전이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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