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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32화 (132/152)

〈 132화 〉 준비

* * *

“총독! 이제 들어가도 되나요옹~?”

하이톤의 목소리, 장난기 넘치는 말투.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이링커를 데려왔군.”

북대륙의 괴학자.

그 미치광이도 대동하였다.

총독이 내게 눈짓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능력 있는 사내이다.

그리고 연구실장인 부아르가 골머리를 썩고 있어서,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계산이 섰다.

머잖아 스터프의 안내를 받고 내 집무실에 찾아온 하이링커.

여전히 엉망진창인 머리칼이다. 폭탄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에, 이마에는 물안경 같은 고글을 쓰고 있다.

겉에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시커먼 먼지인지 섬유가 무엇에 그을린 것인지, 얼룩져서 얼룩말 무늬같이 느껴졌다.

하여튼간, 전체적인 인상은 지저분하다는 것이었다.

“오랜만이네요, 하이링커.”

옛적, 용사 시절 아티팩트 능력 향상을 위해 찾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차림과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지간히 독특한 사람이라 잊을 수가 없었다.

“허어? 저를 아시나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이상했다.

마치 초면이라는 듯, 조금은 경계심 짙은 말투.

“총독! 이 사람이 의뢰주입니까?”

“맞다.”

“근데 여긴 어디입니까? 또 저 악마는 누구입니까?”

...?

나와 김철수의 눈이 마주했다.

어째 대화의 핀트가 어긋난 듯한 느낌은 나만 받는 게 아닌 듯했다.

하이링커는 암두시아스를 가리키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고, 반면 나와 김철수는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벡터?”

그를 바라봤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이 전해졌는지, 벡터는 아차하는 표정을 짓곤 하이링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내 곁으로 다가왔다.

“하이링커, 잠시만 대기해봐. 나 저 의뢰주랑 할 말이 있어서.”

“악마랑 단둘이 두지 마십시오! 리아! 당신이라도 제 옆에 있어줘요!”

“더러운 손으로 옷 붙잡지 마세요.”

“그러지 말고오­!!”

꽁트라도 하는 듯한 동작과 귀를 거슬리게 만드는 목소리.

그 둘이 합쳐졌다. 불쾌감은 배가 된다. 나는 문밖으로 벡터를 끌고나오다시피 질질 끌며 나섰다.

“저거 상태 왜 저래? 여기가 어디냐고 묻는 건 북대륙 농담이냐?”

“뭐... 농담은 아니지.”

그럼 정말로 모른다는 건데, 이게 말이나 되는지 싶다.

몬스터가 드글드글했다. 안전지대 경계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외진 곳에 있다.

마왕성이라는 건 세 살 배기 어린아이가 보아도 알 수 있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이링커는 의뭉을 떠는 것인지,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그래, 그렇다고 쳐.”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고.

의문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왜 기억을 못 하는데? 하이링커랑 나랑 구면이라고. 설마 용사를 잊을만큼 건망증이 심한가?”

“아니, 그의 기억력은 굉장히 좋아.”

“그럼 날 왜 기억 못 하는 거냐고. 비단, 나뿐만이 아니야. 다르칸까지 모른다는 눈치잖아.”

“그건 진짜 모르니까 모른다는 거지.”

벡터를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봤다.

그는 본인이 말하려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인지하고 있는 듯, 난감하다는 얼굴로 겨우 운을 뗐다.

“당신이 마기를 방출하며 기억을 지웠잖나.”

“그랬지.”

“그래서 기억이 지워졌다.”

“...믿으라는 거야?”

“나도 황당해. 하지만 진실인 걸 어쩌겠나.”

하아.

하이링커가 종잡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 경계를 한참이나 벗어난 성질의 것이다.

전대륙에 마기를 방출하며 동시에 기억을 지웠다. 그건 분명하다.

그러나 사천왕이 전 세대 용사라는 걸 기억하는 자들은 분명히 있었다.

이건 마기와 내 마법에 대항했다는 증거였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내 기준 일정 수준의 이름을 날릴 능력자라면 우리를 기억할 수 있을 터였다.

하이링커도 그에 포함되어 있었다. 내 생각에는 분명히 그러했다.

하지만 그 마기조차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범인(凡人)이었다는 말인데,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일어난 일인걸. 나도 당황했었지.”

“무슨 수작질을 한 게 아니고?”

“내가 그럴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

그야 그렇다.

...그냥 더 생각하지 않는 게 이로우려나.

“그래서, 내가 사천왕인지도 모르고, 여기가 마왕성인지도 모르는 저 눈치 밥말아먹은 매드사이언티스트는 우리를 돕고 싶다는 거지?”

“그렇지.”

“무슨 일에 가담하는지도 모르고, 그 방향성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모르는데 돕겠다는 거지?”

“그렇지.”

“그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야?”

“나는 하이링커에게 이렇게 말했었지.”

아직 개발이 끝나지 않은 마도구가 있다.

아마 하이링커의 도움이 없더라면 끝내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그 뿐만 아니라, 대의를 위해 만들어줘야 할 무기 등등이 많다고.

“그걸 대뜸 수락했다는 말인가?”

“그래.”

“그 무기가 전쟁을 불러올 수도 있는 건데, 그렇게 대충 넘어갔다는 거지?”

“괴학자잖나.”

“...참 개연성 풍부한 이명이야.”

“동감하네.”

묻고 따질 이유도 없었다.

괴학자라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는 것이, 내게도 벡터에게도 다행이라는 사실만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

“이, 이쪽도 악마!”

“같은 개발자로서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괴학자 하이링커.”

부아르가 격식 있게 하이링커를 반겼다.

그는 내 뒤에 숨어 로브 끄트머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

부들부들 손과 온몸을 떨기를 1분 남짓, 부아르가 그를 재촉하지 않고 꾸준히 온화한 미소를 짓자, 수줍음을 조금 덜어낸 아이처럼 쭈뼛쭈뼛 그에게로 다가섰다.

참나,

내가 마왕군 참모장이라는 걸 알고서도 이럴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는 악마에 대한 면역이 조금씩 생겨나는 중이었다. 1차적으로는 암두시아스를 통해서, 2차적으로는 부아르를 통해서.

“초, 총독. 리아를 붙여주시면 안 되겠나요?”

“마음대로 하게.”

“그... 아무래도 불안하시면, 다른 곳에서 각기 개발하는 것도......”

“아, 아니에요~ 그, 영혼이 먹힌다거나, 산채로 뜯겨 죽는다거나 하는 불경한 생각은 일절 하지 않았답니다! 정말로요! 정말! 하하하, 하! 하하하!!”

이대로 놔둬도 될지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머잖아 리아의 존재가 그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다행일거라는 판단이 섰다.

물론 보석 마법사의 마법 전개 방식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다짐하곤 벡터를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하이링커를 연구실에 박아둔 후, 벡터에게 온갖 마법을 시전했다.

내가 공식화한 마법, 진위여부와 도청을 방지하기 위한 촘촘하면서도 단단한 마나 장벽, 그의 감정을 읽어내기 위해 암두시아스까지 곁에 끼고, 위험 같은 것을 감으로 감지하기 위해 김철수의 먹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은 상당히 직설적인 내용이었다.

에이브(AYV)를 어떻게 토벌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계획, 그리고 벡터의 군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계획하는 것. 그것을 조율하여 어떤 좋은 결과를 나눌 수 있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했다.

신군에 대적하려는 것 자체가 버거운 일인지라, 북대륙에서 얼마나 협력을 얻어낼 수 있을지 그를 떠보았는데, 큰 기대를 바랄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들은 인간인 동시에 ONE(?)의 주민이며, 일가족이 있을 터이니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런 성질의 얘기로 넘어가면, 마왕군도 별반 다를 바는 없었다.

우리 사천왕과 용사들, 그리고 에이브(AYV)에게 엮인 이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비단, 계획하는 마지막 전쟁에서만 통용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용사에게 경험치가 되어주고자 떠나는 그 여정에서도, 몬스터를 마구잡이로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명령을 내린 적도 없었다.

그들이 자원해서 떠난 것이었다. 대의를 위해, 에이브(AYV)가 환멸을 느끼고 이 세계를 갈아엎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래서 그들은 희생해왔다. 그 사실을 모르고, 저들의 힘으로 성장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을 용사들을 생각하면 구역감이 차올랐지만, 그래도 인내해야 했다.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위하게 되겠지만.

그래, 이건 복수인 것이다.

우리가 죽여왔던, 그전에 죽어왔던 몬스터들과 이 세계를 유지하고자 죽어났던 사천왕들.

현 용사에게 죽어나는, 사지로 내몰린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무덤덤히 떠나는 그들과 그 중심에서 눈물 흘려오던 마왕들을 기리기 위해, 이 전철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지긋지긋하고 재미도 없는 선역, 악역 놀이를 끝마치기 위해.

그 끝은 에이브(AYV)를 죽여내는 것이다.

벡터는 호감가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조금은 마음이 풀어졌다. 가슴 속 응어리진 시커멓고 고약한 냄새의 무언가가 씻겨나가는 기분이었다.

우리와 뜻을 함께할 수 있는 자가 있다니, 잔뜩 꼬인 실이 풀려나간다. 안심되었다.

“뭐... 이쯤 뜻이 통했으면 됐겠지. 너무 붙어있어도 에이브(AYV)의 의심을 피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만 돌아가도록 하겠어.”

벡터가 겉옷을 챙기고, 눌린 머리를 다시 군모 위에 밀어넣는다.

잠시 그를 붙잡았다. 무슨 할 말이 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리아라는 보석 마법사랑은 좀 얘기를 해보고 싶은데.”

“마음대로 해. 그녀도 당신에게는 궁금한 점이 많은 것 같더군.”

“좋아, 근데 하이링커는 언제까지 놔둘 생각이지?”

“글쎄, 그가 얼마나 열의를 띄우느냐에 달렸겠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벡터도 날 보며 입가를 살짝 올렸다가 침묵했다.

“가보겠다.”

“멀리 안 나가.”

“바라지도 않았어.”

*

“...세상에, 마법을 쓰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흑마법까지 정통할 줄은 몰랐군요.”

“엥, 당연한 거 아닌가? 그쪽은 악마잖아요. 이것도 못 해요?”

히죽히죽 웃는다.

하이링커 특유의 짓궂은 농담이다. 하지만 부아르에게는 닿지 못했다. 그의 말이 들릴 겨를도 없는 것이다.

차원포, 그것을 개량하여 만들어낸 차원총.

이것은 하이링커의 작품을 부아르가 손본 것이었다.

개발은 순조롭지 못했다.

차원을 잇는 그 방식 자체는 카피에 성공했고, 축소하여 총에 담아낼 수 있었지만, 발사가 불가능했다.

이론상으로는 문제될 게 없었는데, 항상 불발나는 차원총을 보며 답답함에 가슴팍을 치기 일수였다. 그것을 하이링커가 단박에 해결했다.

연구실에는 새하얀 마법진이 수십 개 허공에 비상하고 있었다.

또한 시커먼 마법진도 동시에, 자주빛 마법진마저도 떠다니고 있었고, 자주빛 마법진은 대거 정신 계열 마법에 관련한 것이었다.

그걸 차원총 안팍에 있는 흑수정에 적용하고 있었다.

“이 마석이라는 게 참 재밌거든요. 최면을 걸면 그에 맞춰 움직여요.”

설명을 이어가며 다른 차원총에는 흑마법을 적용했다.

“이렇게 시커먼 마나를 적용시키면, 원래 성질의 반대로 움직이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데, 참 귀엽지 않나요?”

흑마법의 새로운 기능... 아니, 마법을 통틀어도 새로운 방식이었다.

마법진이 적용될 때마다 차원총 안의 마석이 반응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더 뛰어난 성능을 뽐내며.

해결을 넘어서 개선되었다.

아직 불안정한 감이 있지만 조율하면 되는 일이다.

반짝이는 듯한 열의 넘치는 눈으로 하이링커를 바라보다가 그가 마법진을 모두 껐을 때,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뭐가 대단한지 모르던 리아마저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같이 박수를 치자 멋쩍은 얼굴로 하하 웃는 하이링커가 있었다.

하이링커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아내곤 숨을 돌렸다.

물을 벌컥 들이킨 후 차원총을 바라보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부아르에게 물었다.

“근데 이건 어디에 쓰시게요옹?”

“아 이거는......”

뭐, 간략하게는 말해줘도 상관 없겠지? 마왕군은 걸 알면서도 온 것일 테니.

부아르는 뭉뚱그려 설명했다. 너무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면서, 이 물건이 완성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이다.

“뭐... 그게 가능한...? 아니, 세상에. 진짜로요?”

생각보다 많이 놀란 눈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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