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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30화 (130/152)

〈 130화 〉 준비

* * *

8일주일이나 씻지도 못했으니 외견은 엉망인 채였다.

머리칼은 푸석푸석하고, 피부에는 잔기름이 가득하다.

온몸에는 상흔이 가득했고, 의복 또한 핏빛으로 물들어 굉장히 너저분했다.

방치된 시체가 일어난다면 이런 몰골일까.

“어떻게 됐어? 괜찮아? 괜찮대?”

이 모든 게 방금 눈을 뜬 바비룬의 상태였다.

그는 주술로 자신을 치유하기도 어려울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때문에 세계수의 정기를 공급받고 있었는데, 그런 주제에 남의 목숨을 걱정하고 있었다.

스프라임의 것을 말이다.

바비룬의 벗이자, 그의 부관이었던 우드 엘프.

“...바비룬 님.”

[그... 아무래도 어렵더군.]

“아~ 생명력이 부족하구나? 아니면 주술이 필요해? 걱정 마, 내가 도울게! 나 이제 괜찮아!”

“야, 재홍. 너 지금 엉망진창이잖아. 괜찮기는 무슨. 너도 안 죽은게 기적이야.”

“정윤상 저거 또 헛소리하네. 내가 용사들 따위한테 죽을 리가 없잖아? 나 진짜 괜찮다니까? 봐봐!”

팔로 원을 그리며 세차게 휘두른다.

하지만 그의 어깨에 묶인 붕대에서 피가 여럿 줄기 솟구쳤다.

또한 뿌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가 다시 났고, 바비룬도 그대로 엎어졌기에 괜찮다고 속아주기도 난감했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일 없다는 듯 일어나 비틀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서는 이재홍의 모습은 너무나 처량했다.

가슴이 욱신거린다. 그도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애써 밝은 척하는 것이다.

하지만 강한 빛일수록 그림자는 짙은 법이다.

이재홍의 속내를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솔직하지 못한 성격을 알기 때문에.

“하, 하하? 이게 왜 이러지? 아무튼 스프라임 녀석 아직 포기 안 해도 되는 거지? 내가 도우면 되는 거잖아. 맞지?”

“얌전히 있어. 너도 부상자라고.”

“에이. 윤상아, 좀 비켜봐. 너 무시하는 게 아니라 너는 주술 잘 모르잖아. 이짝들이 전문가들이라고, 나도 그렇고. 그치 이그니스? 당신은 내 심정 알잖아. 넬피, 너도 알잖아. 스프라임 녀석이랑 나랑 같이 지낸 세월이 얼만데, 내가 쟤를 모르고 쟤가 나를 모르겠어? 에이, 자꾸 농담하지 마. 저 녀석은 절대 안 죽어. 허리가 잘려도 재생하던 괴물 같은 놈인데 이렇게 죽는다고? 이렇게 쉽게?”

“...재홍아.”

[바비룬. 피한다고 해결할­]

의도적으로 말을 끊는다.

이그니스도 평소처럼 호통치지 않고 조용히 입술을 달싹였다.

“에이~ 분위기 잡지 마. 왜들 그러냐.”

그 침묵이 견디기 어려웠는지 녀석은 말이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호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써 거짓말한다고 숨길 수 있는 일도 아니거니와, 빠르게 현실을 알려주는 것이 녀석을 위한 배려이니까. 모두가 말의 서두를 어떻게 해야 할까만을 고민하고 있었다.

“바비룬 님... 스프라임 님은.”

“야! 장난 좀 그만 치라니까? 이러다 속겠어 진짜~ 아. 웃겨가지고. 그래서. 의식은 언제 찾을 것 같아?”

그럴 때마다 말을 또 끊겠지만.

아무래도 강경하게 말해야 들을 생각인 것 같아,

목소리에 힘을 싣었다.

“재홍아.”

“야! 너 아무것도 모르잖ㅇ­”

“이재홍. 들어.”

“...뭔데그래.”

“부상이 너무 심했대. 더군다나 오러에 베인 거라 재생도 안 돼.”

“......힘들까?”

“이미 떠났어.”

“.........”

사실 이재홍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상당했다지만, 생명력을 느낄 수 없지는 않을 것이다.

스프라임의 가느다랬던 생명줄이 끊긴 그 순간부터 알고 있지만 외면하고 있던 것이다. 내가 직면시켜줬다. 그래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케다시도 사라졌으니까 치료 끝나면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마왕성으로 복귀해. 차원문 마도구 가방 속에 넣어뒀다.”

그래서 몰아세웠다.

여유를 줄 틈도 없었다. 이제 슬슬 시작되려 했으니까.

“...윤상아.”

“갈게.”

“윤상아.”

“몸조리 잘해. 조만간 보자.”

“정윤상.”

“가보겠습니다. 이그니스.”

“야, 정윤상!!”

“바비룬 엇나가지 않게 잘 돌봐줘 넬피.”

“앗, 알겠어요!”

“야! 멈춰보라고!!”

그의 말을 무시하며 비이린에서 나섰다.

입맛이 더럽다. 나도 애석한데 저 녀석은 얼마나 괴로울까.

“야! 제발 멈춰봐. 제발, 제발...”

욕도 한 마디 내뱉지 않는 걸 보면...

가늠가지 않았다.

이재홍은 감정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짙어지면 욕을 안 하는 녀석이니까.

나는 마왕성으로 돌아갔다.

장례식이 준비되고 있었다.

디안은 투기장에서 데려온 블루 드래곤, 아쿠아와 함께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아니야, 안 돼. 안 된다고... 스프라임. 스프라임이 왜 죽어야 되는 건데... 왜, 왜!”

[포기하게 바비룬. 그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어떻게 좋은 곳으로 가겠어!!]

푸스스­

이재홍의 포효에 놀란 새들이 나무에서 일어나 도망쳤고, 방 전체가 뒤흔들렸다.

접시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바비룬의 내면과도 같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다독이려고 했지만, 바비룬은 너무나 거대해진 범이 되어 울부짖고 있었다.

[온몸이 만신창이였어. 그뿐일까? 그토록 사랑하던 인간에게 모욕당하며 죽었다고!!]

[진정하게.]

[그 녀석을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어. 모든 게 내 탓이야. 어떻게든 말렸어야 해. 스프라임을 죽인 건 나야. 나라고... 왜 그랬지? 왜 그렇게밖에 못 했던...]

[바비룬! 그게 그가 바라는 바임을 모르겠는가? 자네가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슬퍼하며 절망하는 것 말일세!]

[이그니스...]

[정신 차리게! 자네는 용사였어! 지금은 마왕군일지언정 언제나 선의에 의해 움직였다는 말일세! 스프라임을 불쌍히 여기지 말게. 동정하지 말란 말이네. 그는 자네와 뜻을 함께하며 죽었어. 마지막까지 자네 편이었다는 말일세. 그거면 되지 않는가? 마음 맞는 벗이 떠나가서 슬프단 건 알겠지만, 생기사귀(??死?)라고 했네. 현세에 머무는 것은 잠시일 뿐이고, 결국은 뿌리로 가야 하는 법일세. 스프라임은 세계수의 곁으로 돌아간 것일 뿐이니 슬퍼할 것이 못 돼.]

이그니스의 말을 곱씹었다.

세계수의 곁으로...

삶의 순환. 이 규칙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스프라임을 살릴 수도 있을 텐데...

아.

형변을 풀었다.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방법이 생각났어.”

“바비룬 님? 지금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죠?”

[바비룬! 그것만은 안 되네!!]

“뭐라는 거야. 이상한 생각 안 했어.”

[아, 아... 음.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 무슨 방법을 찾았다는 거지?]

“스프라임을 살려낼 수 있는 녀석이 하나 있어.”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우선 몸을 치유하는 게 우선이다.

그 녀석을 만나러 갔을 때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으니 전투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요정은 죽은 사람은 못 살려요. 저희가 치유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저주에 관련한 것뿐이에요.”

카넬루아는 더군다나 실렉티스이니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을 터.

[다른 빛의 정령도 마찬가지일세. 우리는 축복을 내릴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은 힘들어. 사자(死者)를 살려낼 수는 없다는 걸세.]

빛의 정령왕이 못 살려낸 자를 다른 정령이 살려낼 수 있다곤 생각조차 않았다.

“아니라니까.”

[그럼 도대체 누구를...]

“신.”

정확히는 신을 먹은 존재.

케다시가 죽은 마왕군을 살려내던 그 모습은 뇌리에 깊게 박힌 채였다.

“카티골을 찾아가겠어. 어디 있는지 알아?”

[아... 카티골?]

“역시나 여기 있었군.”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태양처럼 붉은 머리칼, 굵직한 팔에는 묵직한 폴암이 있었다.

“네가 여기 왜 있어.”

바비룬이 눈을 가늘게 뜨며 사내를 경계했다.

이그니스와 넬피도 마찬가지였다. 빛을 내뿜으며, 바비룬의 머리 위에 붙으며 그를 바라본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자다.

개인의 욕심을 위해 살육해온 자는 비이린에서 반기지 않는다.

바비룬처럼 용사라는 대의가 없었기에 그는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포위망을 싸는 정령들과 우드 엘프들.

사내, 워 울프는 환대할 수 없는 손님이었다.

그들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조금은 난감하단 표정을 지으며 폴암을 바닥에 내려놓고 쌍수를 들었다.

“싸울 생각은 없소. 너무 경계해도 곤란하오.”

“그래서 다키아랑 스프라임을 죽였어?”

시기가 안 좋다. 스프라임에 대한 것만으로 감정이 요동치던 때였는데, 그 스프라임의 죽음과 관련있는 자가 제발로 찾아왔다.

바비룬이 침대에서 일어나 그의 몸을 휘감았던 덩굴을 하나 둘 끊어낸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그니스는 이 눈빛을 알고 있었다.

죽이려는 것이다. 살의 가득한 맹수 같은 눈.

먹이에 굶주린 그것이 아니다.

분노를 어떻게든 털어내고자 움직이는 눈이었다.

“내가 죽이지 않았소.”

[무릇, 통솔자라면 부하들의 책임도 질 줄 알아야지. 자네가 풀어놓은 이리들일세. 그들이 스프라임과 다키아를 해친 것은 사실이잖나.]

“뵙게 돼서 영광이오, 이그니스.”

[입발린 소리 말게. 나를 원망하고 있지 않나?]

“부정하지 않겠소. 그쪽은 요정족 공주 넬피인가?”

“치근거리지 마시고 이곳에서 나가요. 당신을 반길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적나라한 적개심이지만,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반응은 예상했지만, 그래도 물러날 순 없소.”

“...어딜 뻔뻔하게 내 앞에 나타나?”

바비룬이 이를 빠드득 갈며 으르렁거린다.

하지만 성격대로 덤벼들지는 않았다.

“진정하시오 바비룬. 내 뜻이 아니라는 걸 당신도 알잖은가.”

그 때문이다.

단지 역할일 뿐이었다는 것을 무척이나 잘 안다.

그래서 원망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엮이고 싶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 감정을 설명하자면 반감에 가깝다. 목소리만 들어도 주먹이 부들거린다. 그러나 워 울프는 입을 닫지 않았다.

“우리 둘 다 피해자일 뿐이외다. 나도 동료를 둘이나 잃었소. 심지어 한 명은 내 손으로... 직접...... 하아. 본론을 얘기하고 싶은데, 저들 좀 물리면 안 되겠소?”

창밖의 나무를 가리켰다.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시각적인 것이다.

우드 엘프가 자연에 동화되어 워 울프를 노리고 있다.

“너 동료가 죽었든 윤간당했든 돼지우리에 사료로 갈려 들어갔든 나는 알 바 없어. 꺼지라고 말했어.”

“동료를 잃은 슬픔은 그대가 지금 느끼고 있지 않소. 어째 그리 입이 사납소?”

“그러다 치겠다?”

“제발 이빨 좀 거두시오. 난 당신을 도우러 온 거라니까.”

“네놈 도움 따위 필요 없어. 동료 더 모욕당하기 싫으면 꺼져. 더 심한 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카티골의 위치를 궁금해했잖은가.”

“...이 새끼가 어디까지 들었어.”

“대충 중간부터. 스프라임을 살리고 싶으니 카티골의 위치가 궁금하다고?”

“......너 뭐냐?”

“끝까지 들어라 바비룬. 도움을 주겠다고 했잖나.”

“앞잡이 새끼. 이 자리에서 죽여야­”

“...전갈.”

끼기기긱­

폴암의 형태가 변한다.

아티팩트 ­ 전갈. 그것의 모습이 변하여 앞에는 전갈의 집게가. 그 끝에는 꼬리가 있었다.

그것이 바비룬의 어깨를 푹 찔렀다.

피가 바비룬의 피가 굳은 옷을 다시 적신다.

워 울프는 강하다.

형변도 하지 않은 채 만신창이인 바비룬의 상태로는 이길 수 없다.

이그니스가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가 상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워 울프의 눈을 보자 그만두었다.

“들으라고. 짜증나게 하지 말고.”

전갈의 꼬리에서는 독이 나온다. 모든 걸 녹여내는 뜨거운 붉은 독이.

워 울프는 그것을 내뿜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을 바비룬의 몸에 넣고 있었다.

그는 대화하러 왔다. 바비룬과 이그니스. 넬피와 대화하러 온 것이다.

하지만 야생마처럼 날뛰는 바비룬은 방해였다. 그를 잠시 짓누르기 위해 강경책을 쓴 것이다.

“이 새끼가... 끄악­!”

“더 날뛰면 평생 어깨를 못 쓰게 만들어주지.”

“이그니스 님! 빨리 도와주세요!!”

[음... 괜찮을 걸세.]

“네, 빨리 저 사람을... 뭐라고요?”

그가 너무나 뜻밖의 말을 뱉자, 넬피의 반응은 한 박자 느렸다.

“저러다 죽어요!”

[그러지는 않을 걸세. 바비룬 너도 이 자의 말을 듣게. 확실히 도움을 주려 온 것 같으니.]

말대로였다.

바비룬의 표정도 바뀐다. 그는 어깨와 워 울프의 창을 번갈아보며 입을 열었다가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 창 뭐냐?”

“내 무기인 전갈. 지금은 치유독을 넣는 중이니 가만히 있어라.”

“...목적이 뭐야.”

“하아... 아까부터 말했잖나.”

푸슉­

전갈을 뽑으며 이그니스와 넬피를 뒤돌아보았다.

“대화 좀 하자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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