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127화 (127/152)

〈 127화 〉 진 키아라

* * *

일행이 흩어진 후 당분간 할 일이 없었다.

가장 흥미로운 다르칸에게는 카넬루아를 붙여두어 몬스터 혐오 사상을 더욱 깊게 심어두었고, 다른 이들은 알아서 강해져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흐르길 기다려야 했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다.

‘심심한데.’

일행과 같이 있을 때는 시끌벅적해서 재밌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할 것이 없었다.

책이나 볼까.

지구에서의 만화책. 이제는 완전히 카티골의 취미로 자리잡은 것.

그 책을 펼쳤다. 최근에 읽었던 것은 다 본지라 새로운 것을 꺼내 들었다.

등장인물들이 매력적이라는 호평이 자자한 것.

그 책을 읽어내렸다. 확실히 등장인물들은 각기 매력이 있었다.

아주 재밌게 보고 있었다. 몇날 며칠이고 한 자세로 고정하여 그 책을 다 읽어내렸다.

하지만 다 읽었을 때 의문점이 들었다.

책을 보고 있을 때만큼은 꽤나 재미있었는데, 막상 등장인물들이 그리 입체적이라고 느끼진 않았다.

‘너무 틀에 맞춰서 움직이는데?’

물론 책 속 인물들도 성장하고, 변화하고, 반성하고, 극복하고들 한다.

하지만 모두 예상이 가는 범위였다.

이만큼 성장하고 변화하겠지.

이만큼 반성하고 극복하여 앞으로는 이렇게 행동하겠지.

카티골의 예상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왜일까, 책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내리며 분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했다.

‘얘네는 감정이란 게 없나?’

아니, 있는 것 같다.

표정이 분노하고, 말풍선 속 느낌표가 많아지거나, 침묵하며 기쁘거나 분노하거나 슬프거나 등의 연출을 내비추긴 하니까.

그러나,

모르겠다.

호평이 자자하다던 책이라 봤는데 여운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책을 들었다.

예전에 읽어내렸던 책이었다.

그때는 재밌게 봤었던 만화.

순정 만화도 있고, 스포츠 만화도 있고.

옛날에 느꼈던 감정을 되새기며 그것들을 읽어내렸는데...

‘뭐야, 여기서 왜 이렇게 행동하지?’

솔직히 잘 만든 만화들은 아니었다.

조잡한 감이 넘쳤다. 등장인물들의 에고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적절하다.

의외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캐릭터성을 무시하는 행동, 독백, 대사 등.

작가가 놓친 것이 있는 건가? 아니, 놓친 것이 너무 많으니 잡은 것은 있는 건가?

전의 작품과는 아예 상극이었다.

그것은 견고하게 짜여진 조형물이라면, 이것은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었다.

‘...내가 이걸 재밌게 봤었던가.’

의문이다. 다시 보니 재밌을 요소가 하나도 없다.

캐릭터들이 밍밍했다. 무엇보다 그들이 그려나가는 얘기가 재미가 지독하게 없었다.

덮었다.

양손을 포개어 기지개를 켰다.

“...나갈까.”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북대륙을 마구 쏘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니 마주하기 싫어도 어떤 사건을 마주하고야 말았다.

이곳은 마왕성 근처. 아, 몬스터 침공인가?

“악마다! 죽여! 죽여라!!”

아니였다.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똑같지만, 피비린내는 지극히 적다.

멍하니 서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았다.

“저기로 갔어!”

“포위망을 좁혀! 반드시 죽여야 한다!”

북대륙의 인간들이 일사불란하게 무언가를 쫓고 있었다.

그들과 눈이 마주했다.

순간 귀찮은 일에 엮였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암기 용사님 아니십니까?!”

“...무슨 일이죠?”

어쩔 수 없었다. 진 키아라의 말투로 물었다.

이들에겐 용사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줘야 했다.

“악마가 마을에 왔습니다. 그, 이렇게 생긴 악마인데 도망쳐서 추격 중이었습니다.”

고개를 갸웃했다.

악마? 악마라면 마왕군에서 관리하거나 마경에 있을 텐데, 인간 마을에 왔다고?

‘마왕성에서 탈출한 건가?’

흥미가 솟았다.

그 엄중한 경계를 뚫고 도망친 악마라...

짚이는 바는 있었다. 그곳에선 악마를 상대로 인체실험을 진행한다.

이유는 다음 마왕 후보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게 괴로워서 도망쳤을까? 이유로는 충분했지만, 옳은 행동이라 보긴 어렵다.

끝이 좋지 않을 텐데. 그걸 모를 리는 없잖아.

‘자기 일족이 몰살당해도 상관없다는 건가.’

마왕성에서 도망친 것은 에이브(AYV)를 거스르는 것이다.

에이브(AYV)를 모를 가능성은 없다. 마왕군의 잡졸들을 제외하면 그의 존재를 모르는 자는 없다.

더군다나 악마라면, 마왕 후보라면 지독하게도 에이브(AYV)의 전능함을 세뇌시키듯 알려주었을 터.

물론 반발심이 일어날 수는 있다. 마왕군에 맞서고, 에이브(AYV)에 맞설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일족의 대표로서 온 것이다.

인체실험을 진행하기에 앞서 일족의 번영을 협박이나 구실 삼아 마왕성에 데려왔을 것이라는 거다.

근데 그걸 알고서도 도망쳤다고.

가족이 모두 죽어도 상관없다는 걸로 밖에 안 보였다.

악마(??)니까. 이름부터가 악으로 똘똘 뭉친 존재들이니까.

가족이 무슨 대수랴, 자신만 위한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그건 확실한 오답이다.

에이브(AYV)가 형제를 죽이고자 군단을 모았을 때, 신을 포식하기 전 카티골과 케다시는 악마와 같이 지내왔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패턴을 알고 있었다.

고로 혼란이 이는 것이다.

그들은 ‘사악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는 주제에 자기 일족은 지독하게 챙긴다.

인간처럼. 어쩌면 인간보다도 더욱이.

그러니 도망친 악마는 무슨 끔찍한 변종인가.

그는 사고라는 게 없는 것인가.

궁금해졌다.

단순히 실험이 괴로워서 도망쳤더라면 무척이나 실망스럽겠지만, 다른 이유가 있더라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호기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나오길 잘했어.’

그 악마를 찾아 나서야겠다.

호기롭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협조할게요.”

“감사합니다!!”

그 악마의 이름은 몰랐다.

케다시에게 물어볼까, 단체로 도망치진 않았겠지.

‘...아니, 내가 직접 찾아보자.’

생각을 바꿨다.

그 악마를 만나서 얘기를 나눠봐야겠다. 케다시는 방해일 뿐이었다.

그래서 인적 없는 곳으로 가 어깨춤에서 노골적인 뼈와 가죽으로 이루어진 흉측한 날개를 꺼냈다.

허공으로 비상했다. 인기척은 진 키아라처럼 숨긴 채.

‘눈이 많이 오네. 발자국을 추격하는 건 힘들겠어.’

그래서 떠오른 것인데. 비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독하게 내리는 눈송이가 시야를 가렸고, 바닥은 새하얗게 물들었다.

와중 서늘한 남색 밤하늘은 외로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인간들의 소음은 칼바람에 묻혔다.

‘어떤 기분일까?’

이런 지독한 날씨 속에서 규율을 어기고 쓸쓸히 도망치는 것은.

일탈이었다. 분명한 일탈이었다.

정녕 인간 마을에 가서 살아갈 생각이었던가?

그 얼마나 한심한 생각인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생각이 그토록 없을 수가.

기름과 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존재.

악마와 인간이다. 그야 현 마왕만 봐도 알 수 있다.

‘단탈리온.’

악마. 그리고 불쌍한 아이.

그녀는 마왕이 되길 원치 않았다. 그러나 에이브(AYV)가 그녀를 선택했다.

그래서 불쌍했다.

그녀는 악마와 마왕이라는 이름에 역접되게도 정이 많고 평화를 원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겨움도 있었다.

이곳저곳 어딜 가나 평화, 평화.

지겨운 울림. 이 세상 속 어디에 평화가 있단 말인가?

그 울창하고 싱그러운 숲 비이린도 관련 없다.

그곳의 요정족 여왕은 실렉티스다. 빛의 정령왕은 눈 가리고 귀를 막은 위선자이다.

숲을 사랑하는 우드 엘프도 마찬가지.

그들 중 마기와 탁기, 혼돈과 쾌락을 사랑하여 피부를 검게 물들였던 자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ONE(?)의 역사를 함께해왔던 카티골은 그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보았었다.

그것은 현재진행형이다.

비단, 가장 평화를 운운하는 인간이라고 다를까?

아니, 현 용사들을 위하는 척 울타리 안에 숨어 마왕군을 부숴주기만을 기도하는 인간들이야말로 굉장히 눈에 거슬렸다.

용사라는 거죽을 뒤집어쓰지만 않았어도 수틀릴 때 죽여버리고 싶은 벌레들.

움직이지도 않는 주제에 타인에게 의지할 줄만 아는 게으르고 악취나는 쓰레기들.

‘너는 다를까?’

새하얀 눈더미 속 이질적인 검은 무언가를 발견했다.

천천히 하강하며 녀석의 뒤를 밟았다. 지쳤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짧은 다리는 멈출 줄 모른다. 조랑말? 아니, 이마에 뿔이 있는...

“...유니콘?”

무슨 소리를, 그건 만화책에서나 나오던 환상의 동물 아니던가.

다른 존재일 것이다. 마기가 피부를 통해 전해져오고 있으니까.

미약하지만, 마기가 느껴지고 있으니 저것의 정체는.

“아니, 악마구나.”

이마에 뿔이 있는 말 모양의 악마.

아마도 67위 악마 암두시아스, 하지만 저렇게 작았던 걸로 기억하진 않는데?

확인이 필요했다. 삽시간에 거리를 좁혔다.

“...!!!”

그래도 악마는 악마라는 것인지,

녀석은 다가서자 카티골의 존재감을 눈치채곤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눈더미 속이다. 깊게 파묻히는 발을 열심히 움직여봤자 인간들이나 겨우 따돌리지, 카티골에게서 도망칠 가능성은 없었다.

결국 따라잡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단숨에 그녀의 뒷목을 붙잡고 허공에 들었고, 몸상태를 살폈다. 그것은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흐음... 무척이나 작네. 전에 봤던 암두시아스는 죽은 건가.”

“{ Ε, Ελευθρωση ­ 바, 방출...! }”

녀석은 몸부림쳤다.

하지만 먹혀들 리 없었다.

꽈아악­

손아귀에 힘을 더 주었다.

“가만히 있어.”

대화가 가능한 상태인지 몸을 확인해봐야 하니까.

“제발 죽이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힘들 것 같았다.

암두시아스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흔들리는 동공에선 굵은 물방울이 선을 그으며 바닥에 떨어졌고,

추위에 얻어맞아 짙붉게 변한 다리와 얼굴, 얼음처럼 차가워진 피부가 부들부들 떨린다.

떨림의 이유는 공포심도 있겠지만, 추위가 더한 것 같았다.

아울러 온몸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으니. 체온을 유지할 체력도 없겠지.

“아니... 널 죽일 생각은 없었는데.”

우선 달랬다.

물론 대답하기에 따라서 결과가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당장에는 죽일 생각이 없었다.

‘치료부터 해줘야겠다.’

마음 같아서는 주술을 사용하여 단숨에 치유하고 싶지만,

이 아이는 진 키아라가 카티골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아직은 이 아이에게 용사로 보이고 싶어서 진 키아라의 치유법을 따랐다.

단순한 변덕이었다.

카티골은 암두시아스를 천천히 바닥에 내리곤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유리병이었다. 그 안에는 진녹색 액체가 출렁였다.

주술을 액체로 형상화한 것이다.

용사들에게는 약초를 배합하여 특수 제작한 치료제라고 속이고 있지만, 그들은 별 관심도 없으니 들킬 일도 없었다.

그러니 암두시아스가 눈치챌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움직이지 마.”

“......”

암두시아스는 눈을 감았다.

순복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몸은 떠는 주제에 순간 편안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순복한 것이 아니다.

많이 봐왔던 표정이기에 알고 있었다.

저항을 포기하고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 암두시아스의 표정은 그때의 홀가분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가여워라.’

움찔거리는 그녀를 보며 빙긋 웃었다.

아직 편하게 해주지 않을 거야.

그야 아버님이 널 마왕 후보로 선택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거든.

물론 내 기분에 따라 널 죽일지도 모르겠지만,

대답에 따라서 살려줄 거야. 부디 날 재밌게 해주길 바랄게.

곱씹으며 치유를 가속했다.

그리곤 피가 멎었다.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좋아, 끝.”

죽음을 받아들였지만, 죽지 못했어.

과연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암두시아스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머잖아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저한테 뭘 한 거예요?”

“아하하하­!!”

“왜, 왜 웃어요?”

암두시아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티골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순수하고, 한편으론 안심하는 것이 느껴져서.

그것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웃었다.

예상했던 반응은 맞지만, 순수하고 초라한 소동물 같은 눈빛이 카티골을 웃음 짓게 만든 것이다.

왜 웃긴지는 모르겠다.

그냥 웃겼다. 그래서 웃었다.

암두시아스에게 호감이 느껴졌다.

정말 조금만이라도 표정을 찡그렸더라면 대답이고 뭐고 단박에 죽였을지, 마왕성에 보내버릴지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데.

“...저기요?”

암두시아스는 게임에서 승리했다. 자신이 승리했다는 것도 모른 채.

“...아하하... 웃겨가지고 진짜.”

카티골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웃음을 억눌렀다.

시선을 마주했다. 약간 겁에 질린 것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전보단 괜찮다는 듯 카티골을 바라본다. 바다처럼 투명한 눈동자를 여유롭게 감상하며 생각했다.

너는 절대 모를 거야.

내가 다시 널 시험할 거라는 걸.

약속할게.

네가 게임에서 승리하면 무사히 풀어줄게.

다만 패배하면 넌 죽고 말 거야.

기껏 도망친 보람은 손아귀에서 부질없이 녹아내리는 작은 눈송이처럼 사라지고 말겠지.

카티골은 암두시아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앗... 음...”

미약하게 놀란 눈치지만,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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