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126화 (126/152)

〈 126화 〉 진 키아라

* * *

“이 녀석들이 다음 세대 용사란다.”

브룩의 모습으로 케다시가 카티골의 눈앞에 어떤 화면을 띄웠다.

그 화면에 보던 책이 가려지자 살짝의 짜증을 내며 책을 내렸다.

“이 수컷은 배경이 뭔데.”

거대한 화면을 수십 명의 학생들이 바라보고 있다.

그곳에는 복잡한 글자가 좌르륵 쓰여 있었는데, 아무리 한글을 공부했어도 알아볼 수 없는 글자였다.

“컴퓨터라나? 우리 세계에는 없는 기계인데, 아무튼 그걸 공부하는 녀석이래. 이름은 정윤상. 나이는 22살.”

특이할 건 없는 사람이었다.

수업 도중 하품을 몰래 하는 것도 평범했다.

친구들과의 관계는 그럭저럭. 인기가 많은 편도 아니지만 외톨이는 아니었다.

카티골이 보던 소설 속에서는 조연에 가까운 인물이려나.

“이 수컷은?”

“회사 다녔던 사람. 너 회사가 뭔지는 알지?”

“알지. 이 만화 13권에 주인공이 들어가거든. 따분한 서류 정리하는 곳 아니야?”

“뭐 대충은 맞아. 아무튼 회사에서 일하다가 최근에 해고당한 사람. 나이는 29살. 이름은 김철수.”

그는 편의점에 앉아 소주를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자기 주제도 모르는지 과음한 것은 좋게 보이지 않았다.

흐느적거리며 혀도 꼬인다. 이 사람은 앞의 정윤상과는 다르게 외톨이인 것 같았다.

“얘는 그냥 아르바이트 하는 애. 그... 아르바이트가 무슨 뜻이냐면 직장이랑은 조금 다른데...”

“나도 알아.”

“그러냐? 이름은 이재홍. 얘는 좀 재밌어 보이더라.”

말마따나 제일 특색 짙은 사람이었다.

친구들과 담배를 연거푸 태우며 술을 마시기 바쁘지만 과음은 하지 않는다.

바로 출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편의점 알바생인데 술냄새를 대충 지우고 들어가서 뻔뻔하게 일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카티골이 봤던 만화 중 이런 캐릭터는 몇 개 있었다.

주연급, 혹은 주인공인 경우도 있었고.

“다 수컷들이네. 나도 수컷 캐릭터로 움직이면 되는 거야?”

“아니, 너는 홍일점이 돼야 한대.”

“왜? 너네 용사들은 모두 수컷이잖아.”

“그러니까 서로 말도 잘 안 했잖아. 대화가 좀 활발히 이뤄졌으면 하시더라고.”

“음... 그래, 나도 따지면 암컷이니까 암컷 역할이 더 편하겠지.”

“혹여나 말하는데 너 얘네 용사 오면 암컷, 수컷 거리지 마라. 남자, 여자라고 해.”

카티골은 비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 내가 너보다 용사들 세상 더 잘 알아.”

“그래? 그럼 길 가다가 시비가 붙었어. 너보고 돈을 내놓으래. 어떻게 할 거야?”

“단숨에 죽이고 시체를 유기하겠어.”

“미친년. 너 보는 만화 캐릭터들도 그러디?”

“답답하게 안 그러더라고. 그냥 죽이면 되는데 왜 그럴까?”

“너 전 세대 용사 어떻게 했었냐?”

“주인공처럼 행동했지.”

“이번에도 그렇게 해.”

“힘들 것 같아. 속 터져 죽는 줄 알았거든.”

화면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이재홍이 보였다.

“마일드 에잇 하나.”

“곽으로?”

“응.”

편의점에 들어온 취객이 카드를 던졌다.

“야, 계산됐다.”

그에 맞춰 이재홍도 취객에게 담배를 던졌다.

그리고선 서로 싸우기 시작한다. 목소리의 높낮이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카티골은 쿡쿡 웃었다.

“마음에 들어?”

“응, 얘랑은 잘 맞을 것 같아.”

“다른 애들은?”

“글쎄, 첫인상은 시시한걸.”

하기야, 인간이 다 그렇지.

시원시원한 맛이 없는 게 그들의 단점이었다.

결단을 내리길 두려워하는 주제에 때로는 무모한 짓도 벌인다.

고작 몬스터 하나를 죽이길 겁내고, 무척이나 약해빠져서 병에 걸리고 쉽게 죽는다.

그런 것들이 뭐가 재밌단 말인가,

에이브(AYV)의 사상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미천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용사 놀이.

뜻을 같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에이브(AYV)니까 참는 것이지.

“아무튼, 너는 대충 이런 캐릭터를 연기해야 돼.”

화면이 전환된다.

그곳에는 똑같은 옷을 입은 10대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나 이거 뭔지 알아. 학생이지?”

“맞아, 고등학교의 고등학생이라는데 특이하게 여자만 모아놓은 곳이래.”

“왜 여자만 모아놔?”

“그야 인간이 아니라서 모르겠는데.”

흐음, 턱을 짚으며 그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가장 활발해 보이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검은 단발, 슬림한 몸.

얼굴도 제법 예쁘다. 피부도 뽀얗고 인간 기준에선 미인이 틀림 없었다.

“얘가 마음에 드네. 얘로 움직여야겠어.”

그 이후론 그 여자아이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이름은 최세린이었다.

*

‘답답해.’

배움의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이재홍은 역시 호쾌한 맛은 있었지만, 주술과는 어울리지 않는 성미였다.

이 아이가 차라리 검술 용사였더라면 상황이 보다 나았을 텐데, 옆에서 지켜보기 답답할 정도로 주술과 생명력이 지닌 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변신했을 때의 호전적인 성향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심지어 케다시가 연기하는 브룩보다도 호쾌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온화한 다이어 울프와 성질머리 더러운 잡견.

이것이 브룩과 이재홍의 차이였다.

뿐만일까, 바비룬에게는 여러모로 실망이 컸다.

그는 아까도 말했듯 그냥 광견이었다. 아군이며 적군이며 구분 없이 다 물어뜯는 놈.

사리분별도 못 한다는 것이다. 욱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더라면 무심코 죽였을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는 카티골에게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었으니까.

‘정윤상, 악쿤 토든 얘가 차라리 나아.’

마법, 룬어, 마나를 이해하는 방식이 나름 신선했다. 게으르지도 않았다.

브룩 세대 메이블보다야 뒤떨어지지만, 이 정도라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점을 줄 수는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형제였던 창판과 비교가 되는 것이다.

그는 그야말로 마법의 정수였다.

저 멍청한 인간과는 비교조차 안 된다.

그래도 하나 쳐줄 수 있는 것은.

‘전투에서 판단은 좋아. 중요한 사항을 결정해야 할 때에도 일행을 잘 이끌고 있어.’

예상과는 달랐다.

이재홍, 그러니까 바비룬 필라이트가 일행의 리더가 될 줄 알았지만, 동갑내기 정윤상이 그보다 더욱 리더쉽이 있었다. 그러나 리더의 자질이 넘쳐난다는 말은 또 아니다.

‘우유부단해. 의견이 갈리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을 때가 많아.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 부류.’

옆에서 이끌어줘야 하는 이들이 분명 필요했다.

저 혼자서 놔두면 자멸하고 말 타입. 그 역할은 보통 자신 아니면 김철수가 하고 있었다.

‘김철수, 다르칸.’

제일 의외였던 사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일까? 그의 성장도를 보면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검에 대한 재능이 출중하다. 오러를 다루는 기도 타고났다.

현 사천왕인 토텔리 프리온, 그도 제법 쓸만하다고 느꼈는데 다르칸은 수준이 달랐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토텔리를 단숨에 죽여낼 것이다. 그만치나 다르칸의 재능은 특별했다.

‘전송자의 해택을 누리지 못했더라도 이름을 날렸을 거야.’

정말 타고났다는 말밖에 못 하겠다.

성품도 게으르지 않고 착실한지라 노력을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서대륙 황금, 백금 기사단장들도 혀를 내두른다.

괴물을 만들고 있는 것 같다며.

이 정도라면 초월자 홀라와 비슷한 재능일지도 모르겠다.

감히 아버지에게 도전했던 그 암컷... 아니, 여자.

천벌은 제대로 받았지만, 아무튼간에 그녀의 강인함은 부정할 수 없었다. 인간 중 그녀보다 검과 한몸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자는 단언코 없을 터였는데.

그 자리를 다르칸이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같이 지낸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냥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평생을 전투와 함께했던 카티골인지라 더욱 그렇다.

‘성격은 마음에 안 들어. 혼자서 아무것도 못 정하고, 화낼 줄도 모르는 멍청이. 악쿤보다 더 지독하게 우유부단하다는 점이 살의를 들끓게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가장 쓸만해.’

일행도 그를 가장 의지하고 있었다.

특히나 바비룬과 악쿤이 싸울 때 중재하는 역할은 다르칸이 항상 도맡고 있었다.

‘...역시 이 녀석을.’

실렉티스로 키우면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다르칸이 잘 때마다 그의 머리맡으로 가 조금씩, 조금씩 주술을 걸었다.

인간우월주의. 그의 기준에서 인간이 아니며 동시에 악이라 생각되는 것들은 무참히 짓밟을 성품까지 심어주었다.

그리고 사건은 터졌다.

본인과 다르칸이 항복한 몬스터를 무참하게 살해한 것이다.

“그렇게 잔인하게 죽일 필요는 없었어. 포로로 만들어서 마왕군에게 인질 교환을 요청했어도 됐을 일이야. 이번에 철수 형은 이성적이지 않았어.”

그 책임은 다르칸에게 돌아갔다. 카티골은 조용히 그 대화를 담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 새끼 말에 동감해. 투항한 놈들을 상대로 괜히 힘 뺄 이유는 없지. 무력을 과시하고 싶은 거라면 납득하겠지만.”

바비룬과 악쿤의 뜻이 통한 적은 오랜만이다.

그것도 저녁밥 메뉴 결정 같은 것 말고, 진지한 주제로 말이다.

“몬스터를 살려둬서 무슨 득이 있을까. 죽일 수 있을 때 죽여두는 게 더 득 되는 행동 아니야? 언젠가는 우리 발목을 잡을 거라고.”

“이미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잖아. 그리고 그동안 죽여온 몬스터를 봐서 알아. 살려둬서 발목을 잡는다라... 그러진 않을걸. 이미 눈빛부터 전의를 상실했던데. 애초에 덤벼들지도 않았고.”

“마왕군은 악이고, 인간은 그들에게 유린당했어. 더 설명이 필요해?”

“마왕군이 악이지, 몬스터가 악은 아니야. 착한 몬스터도 분명히 존재해. 그리고 넓은 카테고리로 보면 용족이나 요정족, 엘프 녀석들이나 정령도 몬스터의 일종 아니야? 그들은 고등한 종족이니 예외다 뭐다 떠들지만 실상 인간과 다른 존재는 모두 몬스터로 취급하잖아. 지성이 없는 몬스터만 있는 것도 아니고.”

“마왕군에 전담했던 몬스터들 중에서도 선이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병사는 의지가 없어. 방금 투항했던 놈들을 포함해 여럿 몬스터들이 강제로 마왕군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을지 어떻게 알아? 단탈리온과 사천왕의 악명은 자자하잖아. 그들이 전력 보강을 위해 몬스터를 협박하지 않았으리란 생각은 너무 무른 거 아니야?”

본래의 다르칸이었더라면 이리 말하지도 않았을 터.

과정이 결론을 내놓을 것이 아닌, 결론을 미리 얻고 과정을 채워넣는지라 그의 몬스터 혐오의 이유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그는 세뇌되고 있었다.

가장 강한 용사이니까. 세뇌하는 데 시간은 꽤나 걸렸지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인간 우월주의? 상관 없어. 나도 지금은 드루이드라지만 분명한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상을 남에게 강요해선 안 되지.”

바비룬의 언성이 높아진다.

그에 다르칸의 표정도 점점 굳어진다.

“내가 강요한 적이 있던가.”

“자기 좆대로 안 되면 썩창 얼굴 짓는데, 그럼 우리가 눈치를 안 볼까? 형은 언제나 몬스터를 잔혹하리만큼 죽였어. 인간한테는 시발 존나게 관대하고. 그리곤 그게 당연하다는 마냥 행동했어. 마왕군 소속이 아닌 몬스터를 죽인 건 뭐 때문인데?”

“그들이 몬스터기 때문이라니까, 말이 어려워?”

“또 좆 같이 말하네.”

“너 성격대로 덤벼보던가. 이번에는 유야무야 안 넘어가고 피떡을 만들어 줄게. 너 다혈질은 언제 봐도 지겹다.”

“...그래? ˚ 형변(??) ­ 랑!(?) 모델 회색 늑대 ˚”

쾅­!!

급기야 둘은 엉키기 시작했다.

바비룬도 꾸준히 강해지긴 했다. 주술에 대한 이해도가 어느 정도 생기자, 그도 자신의 힘을 어떻게 다뤄야하는지 깨달은 것이다.

‘죽을 것 같으면 그때 말려야겠다.’

카티골의 태도는 여전했다.

그때 싸움은 끝났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시시하긴.

“형, 어디가는 거야.”

“서로 이해관계가 성립되지 않으면 동행은 서로에게 독일 뿐이야. 당분간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겠다. 나나 재홍이나.”

[병신 같이 회피를 하네.]

“괜히 대답 안 하련다. 언젠간 다시 만나겠지. 그때 다시 얘기해보자고.”

그렇게 일행은 갈라졌다.

이때 다르칸을 완전한 실렉티스로 만들어야겠다 다짐하곤 카넬루아에게 연락을 넣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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