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 투기장(2부 完)
* * *
큰 파도가 일었다.
“거기 누가 물 좀 빼! 대지 속성 마법사 없어?!”
아, 비유적인 얘기였는데 진짜 파도도 일었었다.
투기장은 물바다가 되었다.
일단 여차저차 복구에 들어가긴 했는데, 언제 시설이 정리될지는 모르겠다.
다행인 것은 그 파도로 인한 사상자는 없었다.
또한 마왕군이 대동했을 때의 사상자도 아예 없었다.
그놈에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우거는 죄다 녀석이 만들어낸 얼음 속성 클론이었고, 용병과 군인들에게 상처는 입힐지언정 죽이지는 않았다.
어디까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다.
혹시 알까? 조금만 심기가 뒤틀렸다면 나 또한 목숨이 끊겼을지.
그것 하나만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아직 사명을 다하지 못했으니까.
투기장에서 죽은 자는 단순히 경기에서 죽었던 자들이 전부다.
패이, 헤인켈, 음.
그들의 장례식은 따로 진행되었다.
지혜와 퀸은 음의 장례식에.
나는 헤인켈의 장례식에 얼굴을 비추고 패이의 장례식장에 있었다.
그때 성빈이 형은 어리둥절한 채였었지.
형은 자신이 없어진 후 투기장에서 있던 일을 건네듣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퀸에게 미안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미안하다. 나만 있었어도...”
“나는 괜찮다.”
“그래도...”
“괜찮다니까.”
“...알았어.”
괜찮다는 말의 뜻이 여러 의미가 있을 줄이야.
퀸은 다가오지 말라는 듯한 아우라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녀의 팔은 복구되지 않았다.
바비룬의 발톱에 찢겨나갔을 때 진한 독액이 그녀의 팔을 잠식했다.
이제 다시는 제기능을 할 수 없다더라. 그녀의 오른팔을 대체할만한 마도구나 의수 같은 걸 찾아봤지만 그녀는 한사코 거절했다.
대신 나한테만 귀뜸 준 말이 있었다.
팔을 잃으면서 뭔가 깨달은 게 있다고 했었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아티팩트는 모두 모았다.
이제 레벨을 올리고 서클과 오러를 올린다면 마왕군과 전쟁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 길이 맞아?”
“맞아야지. 안 그러면 검둥이가 죽을 테니까.”
우리는 파라소스로 향하고 있었다.
숲은 미로처럼 지독했다.
마나 감지를 펼쳐보자 숲 전체에 혼란 룬어를 섞은 대형 마법진이 있었다.
어떤 미친 자가 이걸 설치했을까.
누구겠어, 용둥지의 2인자 산미기엘이지.
“끼에, 끼에에...”
우리가 이곳으로 온 목적은 다타리오의 치료였다.
사실 치료라기보단... 그를 파라소스에 데려다놓는 것까지가 누군가가 원하는 시나리오겠지.
슈가리아는 마왕군과 내통하고 있었다.
여기까지야 내 동료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는 얘기하진 않았다.
바비룬이 슈가리아에게 무언가를 건넸던 것을 말이다.
건넨 것은 다타리오의 먹이였다.
최악의 드래곤 타나토스의 마나를 빚어 만들어낸 것이라는데.
지금 다타리오는 그걸 먹은 상태였다.
왠지 결승전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니, 앓아 누웠던 것이다.
그냥 기운이 없다고 여기기엔 장례식이 끝나도 여전했기에 그제야 슈가리아가 다타리오에게 독을 줬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은 이마가 숯덩이같다.
원래도 불을 뿜었기에 체온 자체가 높았지만, 지금은 뭔가 달랐다.
그냥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다타리오는 춥다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래서 일행에게 말했다.
파라소스로 가야 한다고. 블랙 드래곤인 다타리오를 치유할 곳은 그곳 뿐이라고.
‘마왕군이 독살을 꿈꿨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되짚어볼수록 그건 아니었다.
설령 다타리오가 눈엣가시였다면 직접 죽이는 방법도 있었고, 무엇보다 그들은 세계를 혼돈에 빠트릴 것이라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사실 특정 누군가가 속한 곳에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 속한 곳은 총 다섯 개.
빛의 정령왕과 요정족의 여왕이 살고 있다는 비이린,
암두시아스를 방출해낸 마계,
초월자 중 한 명인 줄이 살고 있는 서대륙의 거대 용암 지대,
초월자 중 한 명인 홀라가 잠시 거주했다던 동대륙의 피릭치라는 작은 마을,
마지막으로 파라소스이다.
마계야 마왕의 고향일 터이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다른 곳은 다르다.
비이린을 건드리면 이그니스의 노여움을 살 것이며,
줄의 영역을 감히 침범하면 그의 마법이 마왕성에 떨어질 것이며,
홀라가 사랑하는 이들을 건드리면 마왕성에는 칼부림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마왕군을 상대로 단신으로 이겨낼 것 같지는 않다.
사천왕을 모두 겪어봤기에 대답할 수 있었다.
초월자가 아무리 대단할지라도 사천왕이 힘을 뭉친다면 질 것 같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하지만 마왕군이 파라소스를 건드린다면 얘기가 다르다.
분명 마왕성은 궤멸할 것이다.
그곳에는 많은 용이 있다.
행동대장 글락, 최강의 핏줄 카이루스, 관능적인 산미기엘, 등등등...
그들을 날개로 감싼 것이 타나토스다 과거 피아라는 이름의 초월자.
그들을 상대로 마왕군이 검끝을 들이민다는 건,
스스로 궤멸을 뜻하는 것과 다름없다.
용사와 파라소스의 다크 드래곤들이 연합하는 순간 모두가 죽을 테니까.
그러니 바비룬이 슈가리아에게 독을 건넨 것은 다타리오를 암살하기 위해 보낸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지혜가 염려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괜찮을까요. 타나토스는 인간을 싫어하잖아요.”
“싫어하면 제물을 왜 바치라고 하겠어.”
“잡아먹으려고겠죠.”
“아 그런가?”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다보니 처음 출발했던 곳에 다시 도착한 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타리오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다. 요즘 묵직해진지라 슬슬 팔이 아프다.
“제길, 한시가 급한데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기장아, 무슨 방법 없어?”
“안 그래도 결계 다 때려부수자고 방금 마음 먹었어.”
“산미기엘이 분노하지 않을까?”
“그것까지 고려하기엔 검둥이가 많이 아프니까.”
이제는 더 시간을 끌 수가 없다.
다타리오의 온몸이 자줏빛 독액에 물들고 있다.
타나토스의 독일 것이다. 바비룬은 그렇게 말했었으니.
‘타나토스가 마왕군과 내통하지 않기만을 바래야지.’
그를 만나 바비룬이 어떻게 마나로 만든 독을 입수했는지를 물어볼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생각해뒀다. 설령 파라소스의 드래곤들과 마왕군이 내통할지라도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당연히 성공률 100퍼센트는 아니다.
그나마 가능성이 제일 높은 방법일 뿐이다.
일이 틀어지면 당분간 일행들이 합류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런데 굳이 왜 위험을 감수하냐고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답은 간단했다. 다타리오가 죽는 것만은 원하지 않으니까.
녀석 덕분에 아티팩트를 모았었으니. 또한 일행의 사기 또한 언제나 상승했었으니,
그에 대한 은혜갚기라고 해야 할까.
다타리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단기간 내에 이만치나 성장할 수 없었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그래, 다 물러서봐.”
결심이 굳었다. 다타리오를 지혜에게 넘기고 결계 속 나무 한 그루에 손을 얹었다.
눈을 감고 마력을 끌어올려 결계를 느꼈다.
아주 복잡하게 구성된 술식. 하지만 역산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1시간, 아니. 빠르게 하면 40분이면 된다.
‘여기에 반전 문자를 섞어? 진짜 소문대로 개 변태...’
한참 역산에 몰두하고 있을 때쯤,
“너무 실례되는 생각 아닌가요?”
한 줄기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자 다타리오가 더 성장하면 딱 저런 모습이겠다 싶은 검은 용이 있었고, 그 옆에는 붉은색과 하얀색으로 반씩 나뉜 날개를 펄럭이는 여성이 있었다.
산미기엘이다.
“헐. 엄청 예쁘네. 할머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머, 궁술 용사님도 생각보다 미남이신걸요?”
그녀는 날개로 입가를 가리며 웃더니 지상에 발을 디뎠고, 그녀는 지혜의 품 안에 있는 드래곤에게로 고개를 뻗어 상태를 살폈다.
“그이가 또 자기 마나를... 에휴. 그놈의 시련이라는 것이 그리도 중요한 건지.”
깊게 탄식하자 흑룡이 천천히 바닥에 가라앉아 산미기엘의 곁에 착 붙었다.
[어머님, 그 덕에 저는 강인한 전사로 거듭났습니다.]
“농이 늘었구나. 내 품에 안겨 재롱피우던 게 생생한데 강인한 전사?”
[...너무 옛날 일이잖습니까.]
“내겐 엊그제 같다.”
거대한 용이 쩔쩔매는 것을 보자 신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방금 어머님이라 한 것 보면 저 녀석이 카이루스인가. 최강의 핏줄이라던.
“마법 용사님처럼 치켜세워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 아이가 목이 빳빳한 거예요.”
“......”
내가 잘못 생각한 게 아니었다. 역시나 생각이 읽히고 있었다.
이 공간 자체가 산미기엘의 고유 공간이라서 그러한 것일까, 그녀 고유의 능력인 것일까.
어느 쪽이든 내 속내가 보인다는 것은 꽤나 불쾌한 일이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생각을 꺼트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물론 방법은 있지만... 어떻게 할까.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제 그만 엿볼 테니까요.”
“부디 그래주시죠.”
“재미없어라.”
그녀는 나를 가늘게 눈을 뜨고 보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조용히 카이루스에게 무언가 말했고, 그는 질색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지막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 등에 타라. 인간 놈들.]
*
파라소스에 도착했다.
신전 같은 외형, 밑에는 기다라면서도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저걸 하나하나 올랐더라면 다리가 온전할 수 없겠지.
드래곤들이기에 가능한 건축물이었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저런 계단이 있어서는 안 됐다.
역시 제물로 팔려온 인간은 먹이로 죽는 건가.
“결례되는 생각이에요.”
“그만 읽는다지 않았습니까?”
산미기엘이 또 생각을 읽었다.
이 여자가 진짜...
“그보다 언제 도착하는 겁니까. 이 녀석이 많이 아프다고요. 조금 속도를 올려주세요. 한시가 급하단 말입니다.”
[호들갑 떨지 마라 인간. 내 핏줄인데 그리 쉽게 죽을리가 없지.]
“당신이 누군데 바둑이 아빠라는 거예요?”
[...무지가 곧 용기를 주는 건가. 멍청한 계집.]
지혜가 얼굴을 붉혔으나 카이루스의 태도는 일관되었다.
[이 아이는 내 아들 다타리오다. 네놈들이 검둥이라느니 바둑이라느니 그리 저급하게 불러도 될 존재가 아니다.]
“다, 당신이야말로 부모라면 아이부터 챙겨야 하는 것 아닌가요?”
[사자는 새끼를 절벽에서 민다지? 하물며 최강의 종족이라면 더한 것도 해야지. 그래서 용사 곁에 보냈다. 마왕군과 부딪히며 성장하라고. 인간 따위가 이해할 리 만무한 얘기겠지.]
“...당신이 누군데요.”
[최강의 드래곤 카이루스다. 무식한 네년일지라도 내 이름은 들어본 적 있을 테지?]
나야 눈치채고 있었다. 퀸도 반응을 보아하니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 같다.
반면 지혜와 성빈이 형의 눈이 두 곱절 커진다. 둘은 상상치도 못했던 것 같다.
“쿡쿡...”
그들보다도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옆에서 날고 있는 산미기엘이었다.
그녀의 반응은 상당히 독특했다. 마치 웃음을 참는 듯 입가를 가리고 있다.
“언제부터 네가 최강의 드래곤이었느냐? 아비는 고사하고 행동대장부터 이겨야 하는 것 아니겠니?”
[크, 크윽... 어머니 제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잖습니까.]
카이루스가 치욕스럽다는 듯 몸을 떤다.
“아... 예비 최강의 드래곤 카이루스. 기억해둘게요.”
[닥쳐라 인간 계집!!]
“바둑... 아니, 다타리오와의 첫인상은 상처투성이였다. 이것도 당신이 못살게 군 것 때문인가? 타나토스와 글락에게 패배한 치욕감을 해소하려고?”
[조용하던 네년마저도 날 모욕하는가?! 이것들이 주제를 모르고!!]
“카이루스. 손님이시잖니.”
[주, 주제를... 하아아......]
이로써 카이루스의 첫인상이 결정났다.
사춘기 소년 같은 성격.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꿈쩍도 못 하는 녀석.
들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위엄 넘치고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공포의 드래곤은 무슨.
귀여운 면도 있었다.
“음~ 아무튼 다타리오를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요. 슬슬 더 위험해지기 전에 저희 둥지 안에 품어야 했거든요. 그래서 그이가 시련을 줬는지도 몰라요. 드래곤을 치유할 수 있는 건 드래곤의 둥지 뿐이니까요.”
산미기엘은 주절주절 말하더니, 다 왔다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확실히 지독한 계단이 끝나고 무언가가 보였다.
석제 책상, 그것을 마구 휘감은 영험한 나무 덩굴.
그 뒤에는 꼭대기가 보이지도 않는 거대한 성이 있었다.
설화 속에나 등장하는 용의 성.
소문으로는 마왕성 못지않게 웅장하다던데, 말인즉, 마왕성도 이만치나 거대하다는 거다.
하지만 우리는 성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석제 책상, 손님을 모시기 위한 공간으로 다가섰다.
[내려라.]
그때였다.
순간 카이루스가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균형이 무너졌고 일행은 바닥에 쿠당탕 떨어지기 시작했다.
“꺄악!”
“안전운전!! 안전운전!!”
[소란부리지 마라.]
우리는 바닥에 난폭하게 착지했다.
다친 사람은 없지만 더러워진 옷이 썩 반갑지 않았다.
그래도 산미기엘이 곧장 카이루스의 뿔을 잡고 머리를 쥐어박으며 혼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글거리는 눈으로 우릴 바라보는 카이루스가 보였다.
네가 뭐 어쩔 건데.
“그 눈매, 그 눈매! 손님이라고 방금 말했잖니!!”
나는 빙긋 웃어줬다. 그에 또 도끼눈을 뜨다가 산미기엘과 시선이 마주하곤 꼬리를 내렸다.
[......죄송합니다. 어머님.]
“내게 사과할 일이니? 용사님들께 사과하렴.”
[...하아.]
“어서.”
[......미안하게 됐네.]
진짜 사춘기다. 카이루스의 나이는 수 세기를 관통할 정도라고 들었는데 거꾸로 먹은 것인가.
“죄송해요. 이 아이가 워낙 인간을 싫어하는지라.”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척 보기에도 그래보이니 굳이 해명이 필요하진 않았다.
다치지도 않았으니, 또한 다타리오가 서서히 낫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목표 달성이다.
하지만 내 개인적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
이미 산미기엘도 내 생각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일부러 반응을 보고자 생각을 멈추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않나요? 산미기엘.
방금 눈이 마주쳤다.
“마법 용사님.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요. 아, 해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 당신들 안주머니에 있는 돌멩이도 건드릴 생각 없고요.”
그녀의 관능미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산미기엘도 나와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주머니의 차원석을 꽉 쥐고 그녀를 따라 성으로 향했다.
다른 용사는 카이루스와 다타리오와 있기로 했다.
“서로 뜻이 통했다고 믿어요.”
“저는 당신의 생각을 읽지 못합니다만.”
“당신도 마나 장벽을 펼치면 제가 생각을 못 읽을 텐데, 일부러 제 반응을 보기 위해 가만히 있는 것 아닌가요?”
“제가 누굴 속이겠습니까. 마법의 주인인 드래곤 앞에서요.”
“마법에 주인이 어디 있나요. 인간들처럼 특허를 낸 것도 아닌데요.”
이곳의 수많은 드래곤들은 보통 외곽에 앉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며 돌아다니고 있었기에 성 내부는 한적하면서도 아주 거대했다.
조명도 찬란했다. 또한 대리석으로 된 고급진 회전식 계단이 있었다.
놀러온 것이라면 계단을 밟아라도 봤을 텐데 나는 산미기엘의 손을 잡고 날아올라 꼭대기로 향하고 있었다. 일일히 걸어가기엔 시간이 꽤나 지체되기 때문이다.
“여기가 제 방이에요.”
그래도 덕분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곧장 마주한 것은 거대한 철문. 가냘픈 체구의 산미기엘이 밀거나 당기기엔 이질감이 있을 것 같다.
물론 근력이 말도 안 될테니 이상하진 않겠지만, 어울리진 않는다는 얘기다.
그를 의식했는지 문 손잡이를 잡은 산미기엘이 잠시 내 눈을 보더니 손에 바람의 마나를 휘감았다.
그리곤 문에 가져갔다. 스르륵 문틈 사이사이에 숨바꼭질하는 꼬마처럼 잽싸게 들어간 그 바람은 문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열리는 그 안에서 거대한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너구나. 이번 마법 용사가.”
20대 남성, 머리칼은 녹빛과 붉은빛이 반씩 물들어 있었다.
그는 머리칼처럼 색이 다른 날개를 펄럭였다.
복장은 깔끔한 와이셔츠에 슬랙스, 꼬리와 날개는 옷을 찢어서 뺀 건지 어떤 건지 생각하기 싫었다. 아무튼간 그는 내게 자신 건너편의 자리를 권했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
“왜 모르겠습니까. 최악의 드래곤.”
“아... 이제는 그런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지. 잠시 까먹었네.”
내 반응을 살피기 위해 의뭉을 떠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의자를 끌어 엉덩이를 붙였다.
산미기엘은 눈앞의 남성, 타나토스의 옆에 착 달라붙어 앉았고,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는 형태가 되었다.
그가 입을 뗐다.
“잠시 옛날 얘기 좀 들어보겠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이 지난 후,
나는 혼란에 빠져 속을 게워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