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투기장
* * *
“장, 이게 이 경기장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악쿤의 마법진이 모든 준비를 마쳤다. 장은 애타게 소리치며 마나를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조족지혈이나 다름 없었다.
“{ Ματαωση 캔슬!! } { Ματαωση 캔슬!!! }”
“참으로 재밌을 거야. 대부분이 죽어나겠지?”
“...미친 새끼가.”
마법진 파훼가 어렵다는 걸 깨닫곤 목표를 바꿨다.
빈의 안전을 위해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 했건만 결국 손을 대게끔 악쿤이 만들었다.
“{ δρυ φλγα 화염의 창...! }”
흑빛 화염으로 이글거리는 창, 구현은 완벽했다.
형태마저도 날카롭고 굳센 그 창은 장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마나까지 모두 잡아먹어 무척이나 뜨거웠다. 아지랑이가 피어난다. 그 끝은 바비룬에게 향한 채였다.
“그것 가지고 바비룬을 죽일 수 있을까.”
한껏 얕잡아보는 말투.
온전한 상태였더라면 모를까, 지금의 장은 악쿤에게 전혀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케일도 마찬가지. 그녀 또한 다르칸에게 위협이 될 리가 없다.
정작 눈엣가시는 워 울프와 음이었다.
빌어처먹을,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그들을 저주하듯 눈에 담았다.
‘마음 같아선 다 죽이고 싶다. 특히나 워 울프랑 음.’
바비룬과 세 부관이 용사를 손쉽게 제압하곤 검은 촛불을 회수해와야 했지만 제대로 틀어졌다.
워 울프와 음, 늑대와 동대륙의 군대가 합류하여 바비룬을 비롯해 부관들을 제압하고 죽여낸 것이다.
이에 혼란이 일어 케다시에게 닥치는대로 따졌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했다.
“아버님이 그리 하라고 하시던걸? 나한테 말해봤자 소용없어.”
빌어처먹을 에이브(AYV).
때문에 다키아가 죽었다.
그리고 디안은 아마 왼편에 있는 건물에 있을 것이다.
마나가 느껴지는 걸로 보아 무사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위험해. 진정해야 돼.’
스스로에게 하는 말.
악쿤은 장보다도 여유가 없었다.
홧김에 이곳에서 모두 죽여버린다면, 그때야말로 에이브(AYV)의 노여움을 산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더 기다려야 한다.
그렇기에 겨우 인내하고 있었다. 입에 침이 바싹바싹 마른다.
“이것 가지고 바비룬이 죽겠냐고?”
장이 그걸 알 리는 없었다.
“마음대로 생각해. 난 내 전력으로 쏘아낼 뿐이니까. 네가 마법진 가동하는 순간 동시에 쏘아낼 거야.”
“기껏 머리 굴려 나온 답이 그건가? 바비룬을 인질로 한 협박?”
“바비룬만이 인질일까? 아까부터 너 부관은 어디 갔을까.”
디안의 얘기였다.
아껴두고 싶었지만 상황이 아니었다.
용병들과 군인들이 실시간으로 죽어나가고 있다.
여기에 악쿤의 마법이 떨어지면 그야말로 모두 죽을 것이다.
허세를 부려야 한다.
이곳에서 모두 죽으면 그야말로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간다.
그 허세는 제법 먹혀들었다.
악쿤의 심장이 무척이나 빨리 뛰고 있었고, 그의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이 그의 내면을 대변한다.
‘우리 애들이 무조건 먼저야. 거래에 응해주는 게 최선이겠지.’
바비룬도 저 화염 창에 맞으면 위험하다.
그는 기절한 상태. 정신이라도 있더라면 괜찮겠지만 지금은 형변도 저절로 풀리는 것으로 보아 인간과 다름없는 몸으로 돌아가고 있다.
디안도 문제였다. 용병인지 군인인지 모를 저들이 신변을 해치는 건 무척이나 쉽다.
디안의 마나는 바닥을 치고 있었기에. 또한 마나를 억누르는 마도구를 끼워둔 것인지 회복조차도 어려웠다. 그녀도 일반인이나 다름 없다는 얘기였다.
‘스프라임도 아직은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아직 숨이 붙어있다.
비록 다 죽어가지만 아직은 살아있다.
‘세 명 다 데려가야 해. 근데 어떻게?’
케다시와 세 간부를 교환하자는 제안이 먹힐지 모르겠다.
검은 촛불만 탈취했더라면 이토록 일이 꼬이지는 않았는데 어째서인지 장의 손에 쥐어져있다.
‘누가 수작질을 부린 거지. 아니, 지금 생각할 여유는 없어.’
이곳에서 디안과 바비룬을 무탈하게 데려가려면 장에게 케다시를 던져주고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용사가 모두 모이게 되고 아티팩트도 모두 모인 꼴이 된다. 이제 겨우 1년이었다. 이들이 ONE(?)에 온지.
그 중심에는 장이 있었다.
느긋하게 성장하길 바랬지만, 장은 게걸스럽게 악쿤의 뒷꽁무니를 쫓아오고 있었다.
‘......언약. 언약만 아니어도......’
심호흡, 분노를 삭히며 장의 눈을 봤다.
그는 벌벌 떨고 있었다.
혹여나 저 마법진이 가동될까봐. 자신의 아티팩트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희생할까봐.
‘...그래, 우리 애들 먼저 챙겨야 해.’
하늘로 뻗은 손을 거뒀다.
동시에 입으로 룬어를 뱉었다.
동시 구현, 이번에는 구현이라기보단 취소겠지만.
악쿤은 두 마법진을 동시에 취소했다.
그러자 용병과 군인을 뒤덮고 있던 몬스터들은 얼음이 되어 바닥에 녹아내렸고, 하늘의 마법진은 사라졌다.
와이번은 그대로였지만, 애초에 이들은 위협만 가할 뿐 누군가를 죽이지 않았다. 죽지도 않았고.
사상자는 없었다.
모두가 고장난 기계처럼 행동을 멈췄다.
그 중심에서 악쿤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모두의 귀에 울렸다.
“너 말대로 빈을 넘겨주겠다.”
장이 일순 안심한 표정을 지은 것이 실수였다.
그게 그의 밑천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니.
그 순간의 표정 때문에 악쿤은 더욱 많은 걸 요구할 수 있었다.
“나는 바비룬과 부관들을 데려가겠다.”
악쿤의 손끝에는 다키아와 스프라임이 있었다.
“...저들은 이미 죽었어.”
혹여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악쿤의 심기를 건드릴까 염려스러웠지만 악쿤은 꽤나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면은 결코 아니었지만.
“저들을 기리기 위함이다. 내 동료가 인간에게 모욕당하는 걸 더는 보기 싫거든.”
“...먼저 빈을 돌려줘.”
“다르칸.”
“알겠다.”
멈춰버린 워 울프와 음을 밀치곤 차원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자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다르칸의 부관인 데스나이트 스터프었다.
“똑바로 걸어.”
그가 누군가를 발로 찼다. 그러자 익살맞은 비명이 들려온다.
“끄악!”
그 목소리에 케일과 장의 얼굴이 밝아진다.
옷은 너저분해졌지만 다친 곳은 없어보이는 빈, 그가 차원문을 통해 포박된 채 걸어나오고 있었다.
“형!!”
“뭐, 뭐야. 기장이냐?”
“오빠!! 오빠!!!”
“지혜야! 지혜 맞지?!”
케다시의 뻔뻔한 연기에 기가 찼지만 표정은 고수했다.
악쿤은 용병과 군인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바비룬에게로 다가섰다.
다르칸도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그는 스프라임과 다키아의 시신을 챙겼다.
그때 일순 정적이 흘렀다.
용사의 재회. 케다시는 스터프에게 묶인 채이다.
아직은 거래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이 극도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일어나 폭염.”
바비룬에게 말했다.
그는 여전히 기절한 채였다.
이 거구를 직접 움직일 수는 없으니 마나 조작을 통해 차원문으로 밀어넣었다.
그러자 와이번들도 스프라임과 다키아의 시신을 챙기곤 차원문을 향해 들어갔다.
그러나 아직 이 자리를 뜰 수는 없었다.
아직 한 사람을 데려가지 못한 것이다.
자신의 부관 디안이다.
“내 부관을 데려와라.”
장을 향한 말이었다.
“좋아, 그녀를 넘길 테니 빈의 포박을 풀어줘.”
“그건 부관의 안전을 확인한 후다.”
“네가 무슨 술수를 부릴줄 알고 덜컥 내놓겠어.”
“...뭔가 착각하는데.”
휘이이이이!!
폭풍이 몰아친다.
악쿤이 마나를 흘린 것만으로도 하늘이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건 권유가 아니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아직도 확인하지 못했는가?”
당장 이 자리에서 케다시를 제외한 모두를 도륙낼 자신이 차고 넘쳤다.
언약이 장의 목숨을 몇 번이나 살렸는지 그는 절대로 깨닫지 못할 것이다.
“사지 멀쩡하게 보내는 것조차도 불쾌하다. 마음이 변하기 전에 내 부관을 보여라.”
“...퀸은 팔이 잘렸어.”
“우리는 부관을 둘 잃었다.”
서로 잃은 것이 많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하나라도 더 얻어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생각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둘의 시선이 맞물린다.
우위는 악쿤에게 있지만, 그것은 형태만이다.
악쿤조차도 언약에 벗어나지 않고자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악쿤의 표정이 일순 찡그려졌다.
‘마나 반응이 끊겼다.’
디안의 마나가 감지되지 않았다.
“...약속을 파기했군. 디안이 사라졌다.”
쩌적 쩌저적
악쿤의 온몸에 냉기가 드사린다.
다르칸은 스토프에게 신호했다. 그는 포박을 더욱 꽉 조였고, 순간 욕설이 나올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자 장의 일행은 모두 갑작스러운 악쿤의 변화에 마나와 오러를 터트렸다.
“약속을 파기해? 그게 무슨 소리야!”
“디안을 죽였구나.”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장은 검은 촛불을 꽉 쥐며 마나를 터트려봤지만 그의 몸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디안과의 전투, 바비룬과의 전투에서 모두 소진한 것이다.
승산 없는 싸움이었다. 최대한 자극하지 않으려 했건만 악쿤은 이상한 소리를 내뱉으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위험했다. 만발의 상태여도 모자를 판에 최악의 컨디션으로 악쿤과 맞붙게 생겼다.
워 울프와 음은 악쿤에게 있어서 상성이 안 좋다. 가까이 다가가기 전 얼어붙을 터이니 이곳에서 악쿤을 막을 자는 없었다.
평화롭게 떠나가려는 것을 그나마 위안삼을 수 있었는데, 무언가 일이 틀어졌다.
디안의 마나가 사라졌다고? 장은 마나 감지를 펼쳤다.
‘...아뿔싸, 진짜 사라졌다.’
디안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면 두 가지 경우 밖에 없다.
이곳에서 벗어났거나,
혹은 죽었거나.
죽인 건가? 디안을 데려갔던 자들이 누구였지?
플라금의 군인이었다. 음도 그들에게 성급히 연락을 넣고 있었다.
“끄아아아악!!”
하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악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용병과 군인들은 얼어붙으며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저 드래곤처럼 방대한 마나를 버텨낼 수 없는 것이다.
이때 장은 섬뜩한 기운에 발밑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신발에 서리가 드리우고 있었다.
하늘은 이미 완전히 새하얘졌다.
이렇게 끝인가?
타도할 방법은 없는 건가?
그때 케일이 악쿤에게로 달려들었다.
속공, 그녀의 손과 온몸은 냉기에 잠식되었지만 검 정도는 휘두를 수 있었다.
그녀는 검을 뽑으며 오러를 터트렸다. 기를 쥐어짜내어 터트렸다는 것이 한눈에 보아도 알아볼 수 있었다.
[ 태극류 발도술 제 1식 출근ㄱ ]
하지만 악쿤의 뒤에 시커먼 오러가 나타났다.
[ 방어술 제 1식 갑옷 ]
콰가각!
케일의 몸이 튕겨나갔다.
다르칸이었다.
그의 차가운 눈매는 케일을 담고 있었고, 그에 공포심을 느꼈다.
습관적으로 코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눈매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어째서일까, 알 것 같았다.
다르칸이 태극류를 구사한 것이다.
방어술 제 1식 갑옷. 그 기술로 케일을 밀쳐냈다.
플라금의 검술 교본을 다르칸도 입수했다는 것인가?
의혹은 깊어져가지만, 지금 신경써야 할 것은 다르칸보다는 악쿤이었다.
그의 마나만 보아도 분노했다는 것이 느껴지고 있으니까.
“대장님!!”
그때 건물에서 두 군인이 뛰쳐나왔다.
갑옷을 입은 그들은 펑 젖은 채였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온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들은 입을 열려다가 벌벌 떨리는 입 때문에 제대로 말을 마무리하지도 못했다.
무언가 전하고자 끔뻑거리고는 있다.
“푸, 푸른... 머, 머리칼... 여자가...”
한 군인이 겨우 말을 뱉었다.
그 목소리가 들리자 악쿤은 걸음을 정지했다.
“{ πγο αλυσδα 얼음 사슬 }”
촤아악!
악쿤의 손가락에서 뻗어나온 사슬이 그에게로 닿았다.
손을 확 당기자 그의 몸도 저절로 끌려왔고, 악쿤은 그의 얼음을 녹여내며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디안은 어디 있지?!”
“히, 히익!! 악쿤 토든!!”
“대답해라!!!”
잠깐 악쿤이 정신을 판 사이, 장과 워 울프는 시선을 교환했다.
이 상황을 보다 낫게 만들어줄 수 있는 인물.
빈이었다. 워 울프는 폴암을 휘두르며 스토프를 몰아내고자했고, 다르칸이 뒤돌아 가세하려 했지만, 케일이 그 앞을 막아섰다. 동시에 장의 마법도 그를 덮쳤다.
“{ φλγα αλυσδα 화염 사슬 (υ,δ) }”
대폭과 약화 룬어를 섞어서 정말 작은 마나만으로도 잠시나마 다르칸의 발목을 묶을 수 있었다.
정말 잠시나마였지만, 그는 주춤했다. 케일의 검은 휘둘렸고, 그 옆에 음이 따라붙어 다르칸에게 눈으로 쫓기도 어려운 현란한 검술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 그게... 디안 그 여자가...”
이 난장판에도 악쿤의 시선은 디안을 데려갔던 군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 이목이 집중된다.
그때 빈이 스토프에게서 벗어났고, 그가 활을 꺼내며 시위에 살을 얹었을 때.
“도망쳤어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때 건물 뒤에서 무언가가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며 몰려오고 있었다.
“...다행이다.”
악쿤이 말했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밀려오는 것은 거대한 파도였다.
그 파도 위에는 블루 드래곤과 디안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