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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20화 (120/152)

〈 120화 〉 투기장

* * *

크허어어­!!

포효하며 앞발을 휘둘렀다. 퀸은 허공에 떠 있었기에 피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바비룬의 노련한 전투 경험에서 나오는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하지만 퀸은 빙긋 웃고 있었다.

“단순한 놈.”

철컥­

건틀렛을 던지더니 허공에서 몸을 돌려 발을 하늘로 향했다.

건틀렛이 발에 닿았다. 동시에 퀸의 오러가 스며들어간다.

콰앙­!

궤도가 바뀌었다. 땅에 곤두박질치듯 떨어졌고, 순간 땅이 흔들렸다.

“......”

퀸은 땅에 박힌 머리를 빼냈다.

꽤나 멋쩍은 표정이었다.

“언니! 괜찮아요?!”

퀸이 벌어준 시간.

케일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비룬에게 검을 휘둘러 상처를 남겼다.

“감히 언니를 땅에 처박아?!”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각이었기에 케일의 시야에선 퀸이 바비룬에게 얻어맞은 것처럼 보인 것이다.

퀸은 어째서인지 그녀의 분노한 눈을 똑바로 마주하기 힘들었다.

“어... 케일. 나는 괜찮다. 아프지도 않더군.”

[아프면 한심한 거지. 너 자폭한 거잖아 병신아.]

“...윽.”

“헛소리 마라 바비룬!”

[너나 헛소리 마 검 쓰는 년아. 저 새끼 스스로 땅에 처박힌 거야.]

“다, 닥쳐라...”

[아직도 아티팩트 제대로 못 다뤄? 네가 2번째로 얻었잖아.]

“......”

[한심한 년. 자기 무기도 못 다루면서 나를 죽인다니 어쩐다니.]

앞발톱 하나를 드세우며 퀸에게 삿대질하다가 바비룬의 시선이 돌아갔다.

[너도 똑같이 한심해. 오러 등급은 좀 높아졌지만, 결국 나한테 상처 하나 못 남기잖아.]

케일의 얘기였다.

방금 그녀가 베어낸 옆구리의 상처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가 사라지니 상처는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바비룬은 시시하다는 듯 몸을 바닥에 털썩 뉘었다. 머리를 앞으로 내밀며 두 용사에게 말했다.

[고맙다. 둘 다 꾸준히 한심해줘서. 이참에 하나만 더 부탁하자. 앞으로도 계속 한심해줘.]

진심이었지만, 그녀들에겐 도발로 느껴졌을 것이다.

의도와 다르게 들려도 상관 없었다. 바비룬은 용사가 싫었으니까.

“언니.”

“고맙다.”

케일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퀸에게 건틀렛 한쪽을 던졌다.

그것은 빨려가듯 퀸의 손에 닿았고, 능숙하게 장착했다.

그새 케일은 옆으로 다가왔다. 바비룬에겐 들리지 않게 조용히 말했다.

“언니, 저 두꺼운 가죽 말인데요. 마법으로 어떻게 못 해요?”

“힘들다. 항마력이 상당해서 이기장이 오지 않는 이상 털도 태우기 어려워. ”

“파열권은요?”

“몇 번 시도해봤지만 덩치에 비해 너무 빨라. 네가 빈틈을 만들어줬을 때 다가가는 게 유일한 방법인데, 지금껏 봤잖아.”

케일이 시선을 끌려고 여러 시도를 해봤지만, 바비룬은 퀸만을 노렸다.

설령 그녀에게 베이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파열권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럼... 한 가지 방법밖에 없겠네요.”

검을 꽈악 잡았다.

오러를 불어넣는다.

자기가 확실하게 베겠다는 것이다.

행동을 억제하는 위협에서 그치지 않고, 죽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달려들겠다는 것.

퀸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너무 쳐다봤다 싶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나보다 수준히 현저히 높아졌다.’

한때 같은 오러 등급에 머물렀던 적도 있었다.

더군다나 그때는 퀸의 오러가 더 묵직하고 강인했다.

지금도 오러 등급은 같다. 퀸은 근래에 소드 익스퍼트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제는 격의 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같은 등급이지만 박력이 달랐다.

‘이제는 기대기만 하던 이지혜는 없어졌구나.’

맨날 울면서 징징거리던 여고생은 듬직한 용사가 되었다.

퀸은 흘리듯 말했다. 목소리에 신뢰가 담겨 있었다.

“간다.”

고개를 끄덕이곤 앞장섰다.

이번에도 케일이 미끼를 자처하는 것처럼 꾸며내곤, 사실 퀸을 미끼로 던지자는 것이다.

바비룬이 빈틈을 내준다면 그때야말로 케일의 검이 번쩍일 때이다.

퀸은 격려하듯 말했다.

“이기장 오기 전에 끝내보자고.”

“좋아요. 오빠도 깜짝 놀라겠죠?”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바비룬도 몸을 일으켰다.

‘너무 단순해.’

두 용사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온다.

여지껏 압도적인 힘 차이를 보여줬음에도 투지가 꺾이지 않았다.

‘전략을 바꿨네?’

케일과 퀸의 가시덤불 색깔이 바뀌었다.

노란색과 붉은색.

이제는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예상컨대 퀸이 보조를 맡겠다는 거다.

그녀의 자랑인 파열권을 봉인하고 바비룬의 시선을 끌겠다는 것이다.

그때 케일의 검이 오의를 내뿜겠지.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검술 용사야. 너 쓰는 검술 이름이 뭐였지?]

케일이 멈칫했다.

그녀는 작은 입술을 꾸물거리더니 말을 뱉었다. 경계심이 거리가 제법 됨에도 느껴졌다.

“태극류. 어차피 알고 있으면서 왜 모르는 척이야?”

여지껏 퀸을 경계할 때는 케일의 검을 무식하게 그대로 맞았었지만, 굳이 맞아주는 것도 아니다.

당연 여유가 있을 때는 능숙하게 피해냈다.

그는 거대한 몸을 날렵하게 비틀며 한끗 차이로 피했다.

정말 한끗 차이로.

그게 케일에게 약간의 좌절감을 주었다.

타인의 시선에선 아슬아슬했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케일과 클리브 솔리스는 바비룬이 태극류를 꿰뚫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비단,

아슬아슬하게, 마치 놀리듯 공격을 피했다는 것만이 근거가 아니다.

공격이 닿았을 때에도 이질감을 느꼈다.

가죽이 두껍기도 두껍지만, 못 베어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상처는 언제나 얕았다.

교묘하게 흘려내는 것이다. 이게 순발력으로 가능한 건가?

생각을 정리하다 ‘마치 태극류를 알고 있다는 듯이.’라는 생각에 도달했을 때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태극류를 꿰뚫고 있다면 그의 덩치에 걸맞지 않은 기묘하면서도 섬세한 움직임이 설명된다.

물론 지극히 감각에 의존한 말이었지만,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에 케일은 그것을 굳게 믿었다.

바비룬에게 백날 태극류를 구사해도,

그는 또다시 아슬아슬하게 피하거나 흘려낼 것이다.

라고.

‘태극류로는 바비룬을 베어낼 수 없는 걸까?’

기분이 착잡해졌다.

그 심리를 읽은 바비룬은 깔보듯 케일을 내려다봤다.

‘아무렴, 지독하게 봐왔는데 통하겠냐.’

태극류, 양과 음이 전쟁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었다는 ONE(?) 최강의 검술.

은 헛소리다. 암두시아스가 마기를 터트렸을 때 극소수를 제외한 인간은 전 세대 용사를 잊었다.

다르칸의 존재가 그들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때문에 그의 검술은 양과 음이 만들어낸 검술로 기억이 대체되었다.

‘동작은 김철수랑 완전히 똑같아. 하긴, 양이랑 음 두 애새끼들도 나이에 비해 노련했으니까 스승으로서 부족함은 없었겠지.’

한때 보았던 그들의 검술은 꽤나 그럴듯했다.

저 멀리서 본다면 다르칸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케일은 다르칸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 했다. 그녀가 음과 양보다 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 문제점으로 파괴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다르칸과 케일은 레벨도 확연히 다르고, 오러의 등급만 보아도 2단계나 차이 난다.

그러니 같은 검술을 구사하더라도 위력이 확연히 다른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시간이 흘러 레벨과 오러가 비슷해지면 다르칸과 비슷한 위력이 나올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위력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동작을 지적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뭔데?

그녀의 검에는 자연스러움이 없었다.

다르칸의 검은 물 흐르듯 매끄럽게 이어졌다면 케일의 검은 어딘가 어색했다.

하지만 바비룬으로서는 그녀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의 까닭을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검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러나 옆에서 보아온 게 있으니 하기 싫어도 자연스레 비교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짢았다. 답답했다.

‘죽이지 못한다는 건 오케이. 이미 알고 있었어. 하지만 적어도 재미있는 전투라도 되길 바랬어. 내 스트레스를 풀어주길 바랬다고.’

수준 미달이다.

놀이 상대로도 부적합하다.

현재 용사들보다 각 사천왕의 부관들이 더 강하단 평가가 내려진다.

태극류 검술이 스승의 것인 양 여기는 게 같잖았다.

퀸도 마찬가지다. 파열권이 무서워서 피할까. 정통으로 처맞아도 잠깐 아프고 그만이다.

아직 퀸은 너무 약했다. 제 딴에는 스스로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지금 마주해보니 확실해졌다.

둘 다 너무 약하다.

지금도 실컷 봐주면서 싸운다는 걸 알기나 할까.

[......]

이런 이유들이 얼기설기 섞여 도출해낸 것은 저들이 불쾌하다는 감정뿐이었다.

‘...나도 이렇게 보였을까.’

전 사천왕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그때 케일이 달려들었다.

‘어차피 미끼인 척이잖아.’

다르칸을 대입하니 너무나도 쉽게 피해낼 수 있었다.

이번 그녀의 공격에는 살기가 없었다.

‘이쪽도 마찬가지.’

퀸이 주먹에 화염 속성 마나와 찬란한 오러를 휘감으며 충격파를 장전하고 쏘아냈다.

최소한의 동작으로 피했다.

화르륵­! 지글거리는 바닥의 정도를 보아하니 맞았어도 치명상을 아니었을 터.

역시나 이번 퀸의 공격도 미끼였다.

그 바로 다음 박자에 사각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이게 진짜 공격이겠지. 나름 비장의 수단일 테지만 어차피 다르칸의 검술일 터.

또 피해내면 그때야말로 절망할까? 그 모습은 꽤나 기대됐다.

몸을 비틀며 똑바로 케일을 마주했다.

역시나 익숙한 동작이었다.

검을 허리쯤에 잡고 상반신만을 돌려 바비룬에게서 등 돌린 채이다.

다음 동작이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순식간에 몸을 비틀며 오러를 머금고 횡베기를 할 것이다.

이후 몸을 한 바퀴 더 돌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찍을 것이다.

그렇게 십자 모양으로 상대를 베어내는 것이, 마치 행성을 자르는 것 같지 않냐고 해서 붙은 이름 행성참.

그 동작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오의든 뭐든 맞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검의 길이는 정확하게 바비룬에게 닿을 거리이다.

포효로 케일 자체를 날려버리면 공격이 무산될 것이다.

동작이 끝나기 전 목에 힘을 바짝 주었다.

이를 악물며 천천히 입을 벌렸을 때­

[ 케일류 검술 3번 ­ 용솟음 ]

검은 횡베기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며 바비룬에게 다가왔다.

미처 목소리가 나오기도 전, 그녀의 검은 바비룬의 턱에서부터 입술까지 찢어발겼고, 짙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허억... 허억... 이, 이것 밖에 안 베였어?”

케일이 바닥에 착지하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얕았다. 하지만 피해는 상당했다.

철철 흐르는 피는 폭포 같았다. 바비룬은 경직된 채로 가만히 있었다.

기회였다. 퀸은 오른손에 모든 현상을 끌어모아 한 방을 준비했다.

순간 그녀의 가시덤불이 노란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워록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나와 오러의 융합, 그 기술이 직격하면 바비룬을 쓰러트리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퀸은 주먹을 휘둘렀다. 바비룬의 턱을 노리며 뛰어올랐다.

[............]

“언니­!!!!”

투둑­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퀸의 오른팔은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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