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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19화 (119/152)

〈 119화 〉 투기장

* * *

“그래서... 내 상대는 가냘픈 여성인 거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드리아스를 구석으로 던져버리고 듄은 몸을 풀었다.

그의 근육이 꿈틀거린다. 드리아스는 신기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징그러워라.”

어차피 정체가 들킨 것, 가면은 의미가 없었다.

다키아는 가면 윗부분 결합부를 얌전하게 쪼개곤 듄을 눈으로 담았다.

경멸이라는 감정이 서린 눈빛이었다. 근육남은 취향이 아닌지라.

“좀 봐주실래요? 아직도 당신한테 얻어맞은 등이 아파요.”

“허어­ 큰일날 소리 하시네. 나 돈 받은 용병이요. 일 대충 했다가 한 푼도 못 건지면 책임질 거요?”

“결승까지 왔으면 할만큼 한 거 아닌가요? 그냥 둘이서 시간만 떼워도 되는데.”

“내가 날로 먹는 걸 좋아한다는 정보를 캐낸 것이오? 참으로 매력적인 제안이구만.”

‘착각도 유분수. 너 같은 잡병까지 조사할만큼 우리가 한가하진 않은데...’

무심코 독설을 내뱉을 뻔했지만, 시선을 돌리자 삼킬 수 있었다.

대신 찌푸린 눈가는 어쩔 수 없었다.

‘드리아스는 구출해야 돼. 그는 유능하니까.’

녹록치는 않을 것이다.

2차 경기 때 함정을 맞아도 상처 하나 없었던 듄.

그 장면이 다키아의 뇌리에 되새겨졌다.

그때 바비룬이 내린 평가는 ‘위협적인 놈은 아니야. 가고일처럼 더럽게 튼튼하겠지만.’ 이었다. 다키아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오러와 마법을 다룰 줄 모르기에 저 금강불괴 같은 피부를 뚫어낼 수 없다.

독과 암기는 마왕군에서 진 키아라 다음으로 능숙하게 다루지만, 그것도 피부에 날이 박혀야 의미 있는 얘기다.

암살자는 전사가 아니다. 서로를 인지한 상태에서의 전투에선 한없이 무력해진다.

진 키아라라면 다르겠지만, 다키아의 경우에는 듄의 입에 직접 독이나 폭약을 넣는 게 아니고서야 그를 쓰러트릴 수단이 없었다.

그렇다고 두려운 건 아니다. 둔해 보이는 놈이다. 붙잡힐리는 없다.

서로가 상성이다. 피하는 게 상책이다.

...사실 한 거지 방법이 더 있지만.

“나도 마음 같아서는 의미 없는 전투는 피하고 싶은데...”

듄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상당히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다키아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걸쳐서 쓴 가면을 바닥에 던지고 머리칼을 뒤로 묶었다.

“뜻이 통했네요. 그냥 적당히 시간만 보낼까요? 저도 귀찮은 건 질색이라.”

“하지만 당신은 이 우드 엘프를 구해야지 않소?”

“음... 상관 없어요. 죽이지만 않으신다면.”

“...흠.”

“호쾌해 보이시더군요. 인질을 괴롭힐 성격은 아니지 않아요?”

“그것도 조사했나?! 세상에, 마왕군의 정보력은 참 무섭구만!”

고글 때문에 잘 보이진 않았지만 순간 눈이 커졌었다.

그는 고글을 목에 걸고선 껄껄 웃었다.

“그래! 숨겨 뭐하리! 맞소! 내 입으로 부끄럽지만 나는 상당한 호걸이오! 하하하!!”

“그래 보여요.”

다키아는 빙긋 웃었다. 바비룬 앞에서 보이는 비릿한 웃음과 성질이 같았다.

“저도 제 입으로 말하긴 부끄럽지만, 저는 꽤 날렵하답니다? 당신 동료를 아주 귀찮게 할 수 있어요.”

“알고 있지.”

“당신도 아주 강인해 보이더군요. 수호대장님도 까다롭게 여기셨어요.”

“천하의 사천왕이 나를 칭찬해? 허허, 오래 살고 볼 일이구만.”

“어머, 웃는 게 은근히 귀여우시네?”

다키아는 듄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뒷짐 진 손에서는 연분홍색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허­ 더, 더는 다가오지 마시오.”

“제 대장님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 있거든요.”

걸음은 빠르지 않았지만, 거리는 가까워진다.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별 모양 눈물점이 부각된다.

“...어떤 말을 하던가?”

“전장에서의 그 벅차오름과 사랑의 감정은 사실 같지 않을까?”

“글쎄, 공감을 못 하겠군...”

뒷걸음치며 드리아스의 포박줄을 잡았다.

그 모습을 보며 다키아는 머리칼을 넘겼다.

“어, 어떤 점에서 말인가?”

꿀꺽, 듄은 침을 삼키며 뒷걸음질이 느려진다.

어느샌가 다키아의 페이스에 빠져들고 있었다.

“두근거린다는 점이요. 왜, 그런 소설들 있잖아요. 적군이랑 사랑에 빠진다던가... 몰래 도망쳐 서로에게 설탕보다 달콤한 말을 속삭이는.”

“더, 더는 다가오지 말라고 말했소!”

“어째서 사랑스러울까...”

“허, 허튼 수작 마시오.”

코 앞까지 다가왔다.

다키아는 듄의 볼로 손을 뻗었다.

움찔하며 뒤로 고개를 뺐지만, 그 동작은 둔했다.

결국 다키아의 가냘픈 손이 듄의 살결에 맞닿았다.

“누구보다 강인한 전사가... 저 하나한테 안절부절못하시네요...”

“이, 이러면 아니 되오...”

“우리 이러면 어떨까요? 잠시 눈을 감는 거예요.”

“...그 다음엔?”

“글쎄요. 어떡할까요...”

“...너무 가깝소.”

“더 가까워져도 상관 없어요. 안개 속 우리를 볼 사람은 없어요.”

말대로 스멀스멀 시커먼 연기가 아직 주위를 덮고 있다.

그녀는 손가락을 하나씩 까딱거리며 듄의 살결을 톡톡 두드렸다.

듄의 표정이 무거워진다. 다키아는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재밌지 않나요.”

“......”

“눈을 감아요. 여기엔 당신과 저 밖에 없어요. 용 가면 씨를 놓아주고 어서.”

두 팔로 듄의 목을 감았다. 살짝 당긴다.

두꺼운 목이 얇고 새하얀 팔에 이끌려 당겨진다.

숨소리가 들린다. 입김이 느껴진다.

향기가 났다.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달콤한 향기가.

“저한테 집중해요. 어서.”

듄의 동공이 풀리기 시작한다. 다키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베시시 웃고는 눈을 감으라 다시 속삭였다. 듄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검은 안개 속이라는 게 그에게 도망칠 구실이 되었다.

‘역시 시시한 놈이었어. 최음 향수 따위에 당하다니.’

다키아는 서서히 눈을 떴다.

얼굴 앞에는 험상궂은 얼굴이 있었다.

질색하며 향수를 손에서 놓았다. 그리곤 다른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다.

꺼낸 것은 진득한 녹색 액체였다.

진 키아라가 손수 빚은 맹독. 그것을 주물거리곤 듄의 입가로 가져갔다.

“...피,”

드리아스가 중얼거린 건 그때였다.

“응?”

“피해......!”

잠시 시선이 팔렸을 때, 몸이 휘청한다.

시야가 바닥에 가까워진다. 코가 아프다. 눈이 아프다. 피부가 쓸린다.

그치지 않았다. 얼굴에 무언가에 갈리고 있는 듯 격한 통증이 지속됐다.

콰가가가각­! 귀에 무언가가 튀긴다. 뇌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오. 나는 맨살 드러낸 여자 안 믿거든.”

카가가각­

다키아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자세를 잡았다.

겨우 축을 잡고 발을 튀기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곤 단도를 손에 쥐었다.

콱! 콱! 콱! 젓가락으로 바위를 찌르는 것처럼 의미 없는 짓.

단검은 활처럼 휘었다. 듄은 다키아의 뒤통수를 꽈악 쥐곤 놓아주지 않았다.

“끄으으­!”

“사실! 온몸을 다 덮고 있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소!!”

연극에서나 들을 법한 톤.

전장에서 듣기에는 상당히 어색했다.

“이, 이익­!!”

단검을 버리고 듄의 팔을 다리로 휘감고 손목을 붙들어 안간힘을 다해 꺾었다.

하지만 미동도 없었다. 더럽게 튼튼한 몸뚱이처럼 근력이 말도 안 됐다.

다르칸이나 바비룬과 대련할 때에 느꼈던 무력감과 비슷했다.

“허, 허억... 허억...”

그래도 머리는 빼냈다. 다키아는 허공으로 날렵하게 떠올랐다.

얼굴은 피투성이었다. 그녀는 왼팔로 눈가의 피를 닦으며 시야를 확보했다.

듄의 두툼하고 큼지막한 손이 다가온다.

아마 붙잡힐 것이다. 그녀에겐 비행 기술이 없으니까.

그래서 바닥에 낚싯대를 던졌다. 콱­! 재빠르게 박힌 낚싯대를 요령 있게 당겼다.

그러자 다키아의 몸이 끌려온다. 큼지막한 손은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거리가 점차 벌어진다. 그전에 일격을 먹일 생각이었다.

‘급소를 치자.’

다키아는 왼눈을 감으며 오른손에 너클을 끼고 왼손을 L자로 폈다.

조준경을 보듯이 왼손 검지와 엄지 사이를 바라봤다. 그 가운데엔 듄의 머리통이 있었다.

정확히는 관자놀이.

치익­ 치이이익­

너클의 뒤에서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너클의 뒷쪽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부아르의 작품, 이름은 헤비 해머. 준비는 마쳤다. 다키아는 신호를 보냈다.

“슛!”

퍼엉­!

화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다키아의 주먹이 듄의 옆 머리통에 강렬하게 꽂혔다.

쿵­!!

거구의 듄은 요란하게 쓰러졌다. 연기가 그의 몸이 기울어지는 것에 따라 거둬진다.

휴우­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았다. 이마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다른 주머니에 손을 꽂고 흰색 가루를 손에 듬뿍 쥐었다.

그걸 이리저리 문지르곤 이마에 펴발랐다. 출혈은 멈췄다.

“...말하다가 말았군.”

멈칫했다. 쓰러트릴 생각은 아니었지만, 벌써 일어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놀란 고양이처럼 재빠르게 뒤로 물러나며 연기 속 거구의 인영을 바라봤다.

그는 팔을 붕붕 돌리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당신이 온몸을 다 덮고 있었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소!! 왠 줄 아는가?!!”

“더럽게 튼튼한 몸뚱이...”

다키아는 총을 손에 꽉 쥐었다.

투두두두두­! 연기 속 듄에게 마구잡이로 갈겼다.

하지만 그의 진격은 멈춰지지 않았다. 그가 거인처럼 느껴졌다. 그 거인은 계속 떠들었다.

“나에겐 사랑스러운 여보가 있단 말이오!! 하하하!!! 사랑해 여보­!!!”

“...안 궁금했어.”

“괜찮소. 당신한테 하는 말 아니니까.”

듄은 허공을 문득 바라보더니 대뜸 멋진 포즈를 잡았다.

다키아는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저런 한심한 놈한테 죽을 뻔했단 말이야? 자괴감이 온몸을 덮었다.

뚝, 뚜둑­

그러거나 말거나,

듄은 목을 양쪽으로 당기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으음­! 몸이 풀렸군! 이제 제대로 해볼까?! 덤비시오 다크 엘프­!!”

“......진짜 싫다.”

질색하며 손등을 휘둘렀다.

꺼지라는 제스처. 이젠 지쳤다는 것이다.

“저는 할 만큼 했어요. 이제 좀 쉴래요.”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뒤에서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생했...... 이제... 내 차례......”

포박이 풀린 드리아스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듄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고, 드리아스도 콧김이 자꾸 나오는 걸로 보아 그와의 전투를 기대하고 있었다.

“수호대장님 지시대로만 하죠.”

그에 찬물을 확 쏟았다. 멈추지 않았다.

“전투 방해하지 말라고 했었고, 마법 용사는 디안이 맡기로 했으니까요. 드리아스 님 역할 기억하죠? 저 근육덩어리든, 오러 쓰는 조그만 여자애든, 가둬만 둘 것.”

“나... 싸우고... 싶은...”

“아서요. 저희 도망칠 생각도 해야 되니까 괜히 힘 빼지 말자는 거예요.”

“......”

“드리아스 님.”

“......안... 되나...?”

몸이 앞으로 푹 숙여졌다.

그의 두 눈썹이 'ㅅ'자가 되었다.

그는 다키아를 슬픈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녀는 인상을 팍 구기고 있었다.

“드리아스 님 직속 상관 지시라니까요.”

“............알겠...”

“이제 대화 끝난 건가? 어서 덤비라고­!!”

듄이 신난 어린아이처럼 쿵쿵거리며 드리아스에게 다가왔다.

침울한 표정의 그는 손바닥을 척 하고 뻗었고, 듄은 주먹을 꽉 쥐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태양을 가린다. 듄의 그림자에 드리아스의 얼굴이 덮였다.

하지만 둘이 맞닿을 일은 없었다.

˚ ...촘촘한... 새장...... ˚

드리아스의 손가락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듄을 뒤덮는다.

촤락­ 촤라락­ 나무 줄기 같은 것들이 그를 칭칭 휘감았다.

“엥? 이게 뭐야!”

“너... 나랑... 시간... 보내야 함...”

“이딴 것 쯤 찢어버리면­”

“이거... 군단장도... 골치... 아프다고... 했음......”

반대 손도 분열하면서 듄을 휘감았다.

얼굴만 빼꼼 나온 듄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몸을 뒤흔들었으나, 나무 줄기가 찢어지면 2배로 늘어날 뿐이었다.

“수호대장이... 경기... 시작하기... 전에... 말했...... 엑스트라는... 빠져 있으라......”

“으­! 너는 말하는 게 왜 그리 답답한 건가?! 아무튼 이거 풀라고 말했소! 정정당당하게 붙자고!!”

“...그러고... 싶지만... 수호대장... 전장에... 빠지라......”

“아­! 말이라도 빠르게 하던가!!”

분통터지는 듄과는 다르게 드리아스는 여전히 풀죽은 표정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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