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투기장
* * *
[이 쥐새끼들이.]
잘도 숨어있었다.
그들은 다키아를 포획하는 데 성공했는지 쇠사슬로 묶은 후 디안의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바비룬이 폭풍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더라면 디안은 어물쩍거리다가 붙잡혔겠지.
하여간 유리멘탈, 곱씹으며 그들에게로 하강했다.
쿠웅!
땅에 머리가 닿기 직전, 인간으로 형태를 변환했다.
파라소스의 글락과 비슷한 다이빙. 대지는 쿵 하고 뒤엎어졌고 디안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가면 너머라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여기에요!”
“나도 눈 있어. 다키아. 너는 왜 잡혔냐?”
다키아가 꾸물거린다.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던 입마개를 제거했다.
“코, 콜록... 수호대장님...”
“이젠 대놓고 부르네.”
“어, 어차피... 알고 있더군요... 콜록!”
“알고 있었다고?”
“그래, 바비룬 필라이트.”
퀸의 건틀렛이 아지랑이를 피워낸다.
그녀의 주위 공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바비룬도 그에 맞춰 입김을 내뿜었다.
쉬이이이 몸이 우득우득 거리며 형태를 변환한다. 그는 이죽거리듯 말했다.
“내가 유명하긴 하지. 근데 꼴들이 왜 그러냐?”
팀명 용사의 눈에는 모두 고글이 씌워져 있었다.
디안이 바비룬의 옆으로 붙으며 말했다.
“마도구에요. 연기 속에서 합류한 것도 저 물건 덕분일 거예요.”
“병신들, 많이도 준비했네.”
하늘에 휘몰아치는 검은 폭풍.
새로 뿜어지던 연기도 폭풍에 휘말리며 사라질 뿐이다.
의미가 없어졌다. 장은 혀를 차며 마법진을 해제했다.
바비룬은 그를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잔재주지. 안 그래 마법 용사야?]
형변 호(虎). 모델 샤벨타이거.
하지만 예전의 모습과는 박력이 달랐다. 바비룬의 송곳니에 무언가가 번쩍이며 아지랑이를 피워낸다.
고온에 그을려진 강철처럼 바비룬의 송곳니는 붉게 물들었다. 어금니에 끼워진 링에서 열이 분출되는 것이다.
이 또한 마도구다. 부아르가 다섯 번째 붉은 팔찌를 참고하여 만들어낸 바비룬만의 팔찌.
이 도구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 이후부터, 바비룬은 폭염의 드루이드라고 불린다.
정작 본인은 그 이명이 오그라든다며 싫어한다지만.
[흔적도 안 남기고 씹어먹어줄게. 씹새들아.]
“역시 천박하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퀸은 자세를 잡으며 조금씩 다가왔다.
그녀 나름의 도발이었지만, 바비룬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멋대로 떠들어라. 야 디안, 다키아. 다 물러나.]
“저 묶여있는데요?”
[개소리하지 말고.]
“너무하셔라...”
케일의 검이 목에 겨눠졌던 다키아, 그녀의 온몸은 분명하게 쇠사슬로 강하게 묶여있었다.
잠시 바비룬에게 한눈을 판 사이, 다키아는 시야에서 벗어났다.
쇠사슬이 철그럭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고, 다키아는 저 멀리에서 어깨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아... 대장님은 어떻게 이런 기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거람...”
“마왕군에서는 연체동물도 기르오?”
듄이 당혹스런 눈길을 거두지 못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고글을 벗었다가 쓰며 제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뿌득 뿌득
관절을 분리하고, 쇠사슬에서 빠져나간 뒤 다시 맞추는 것이다.
다키아의 표정이 저 고통을 설명한다. 이래서야 검은 안개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건 아니에요 듄 씨.”
장의 손이 작은 마법진을 통과한다.
그리고선 주먹을 꽉 쥐어 절도 있는 동작으로 당겼다.
그그그그
안개 속에서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와 함께 나타난다.
장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용 가면, 이 녀석이라도 포획에 성공했으니까요.”
[아오, 저 새끼.]
본인의 부관이 순순히 잡혀갔다는 것에 앞발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퍼석 앞발톱에 긁혀 머리 위에 덩그러니 매달려있던 가면이 깨졌다.
호랑이의 얼굴이 보인다. 그의 얼굴 무늬가 일그러지는 것이 기분을 대변했다.
가득 짜증이 난 상태였다. 넌더리가 난다는 말투로 말했다.
[너까지 왜 그러냐.]
“방심... 용사... 강함...”
[전송자가 씨팔 강하지 그럼 약하겠냐?]
“예상 외...”
[말 시킨 내가 병신이지. 알았으니까 닥쳐.]
다키아에게 앞발을 겨누며 말했다.
[네가 저 새끼 구해.]
“부상자 열외는 없나요?”
[.......]
“...농담입니다.”
디안에게로 앞발을 옮겼다.
[너는 뭐 해야 하는지 알지?]
“네.”
[오케이. 오래 기다렸지 버러지들아? 이제 진짜로 놀아줄게.]
퀸과 케일이 자세를 잡았다.
듄은 드리아스를 묶은 포박을 더 강하게 당겼고, 장은 마법진을 겨눴다.
“...어라.”
바비룬이 아닌 디안을 향하고 있었다.
‘제길.’
분명히 최고의 시나리오는 검은 안개가 펼쳐졌을 때 제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녀는 안개를 확인한 즉시 바로 근처의 마법진을 역산하고 거리를 벌리며 방어 마법을 둘렀던 것이다.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깔끔한 대처.
때문에 계획이 조금 꼬였지만, 일행과 검은 안개로 디안을 포획하지 못했을 때 그녀를 누가 맡을 것인가도 염두에 두었다.
그 역할을 맡은 건 장이었다. 마법사는 같은 마법사가 잘 잡는다.
그들 간의 서클 차이는 오러를 다루는 자들간의 격의 차이와도 같기에.
뒤엎을래야 뒤엎을 수가 없는 공식이나 다름 없다.
장의 서클은 7이다. 디안의 서클은 6이다.
장이 패배할리 없다. 바비룬을 상대로 시간을 벌다가, 디안의 제압을 마쳤을 때 3명의 용사가 동시에 그를 쓰러트리면 된다.
“저와 정정당당히 승부라도 할 생각인가요?”
디안이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선 장은 대답을 남기지 않았다.
무시는 아니었다. 무언가 상념에 잠긴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턱을 짚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고민에 빠지더니 “아!”라는 소리와 함께 손바닥에 주먹의 밑을 경쾌하게 쳤다.
“긴가민가했는데 직접 목소리 들으니까 누군지 알겠어.”
“저를 아시나요?”
“우리 구면이잖아. 메일리에서 말이야.”
그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스승의 죽음, 그때 악쿤의 옆에 있었던 여자라는 걸 확인하자 분노가 몸을 휘감는다.
그는 마나를 끌어올리다가 쿵! 하는 거대한 소음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곤란하단 얼굴을 하고선 디안에게 말했다. 풀풀 피어오르는 원한과는 달리 꽤나 상냥한 말투였다.
“장소를 옮길까?”
디안도 흘깃 옆을 보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날파리 같은 새끼들이!]
“언니! 땅에서 악취! 뛰어올라요!”
“주술이라는 것도 범용성이 넓군. 기회가 된다면 배우고 싶은데.”
“그런 소리할 때가 아니잖아요!!”
바비룬이 쿵쿵거리며 퀸과 케일에게 앞발을 휘두르자 대지가 뒤흔들린다.
그들의 오러와 바비룬의 송곳니가 부딪치자 충격파가 일었다.
균형도 잡기 힘든 필드. 멀어지는 것이 상책이다. 장은 손짓했다.
“저쪽으로.”
“네.”
둘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나를 몸에 둘렀다.
머잖아 마법진이 그들을 휘감았다.
단거리 순간이동 마법 블링크. 둘의 몸을 환한 빛이 감싸더니, 그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에는 이미 둘 다 필드에서 사라진 후였다.
*
블링크를 마쳤을 때 둘의 거리는 제법 있었다.
장은 고글을 머리에 걸쳤다. 싸늘한 눈매로 그녀를 담으며 말했다.
“너한텐 할 얘기가 많지. 악쿤의 부관인 인간 마법사 디안.”
“저는 대외적으로 활동한 적이 없는데, 저를 어떻게 아시는 거죠? 정보망이 따로 있나요.”
“그렇다고 봐야지.”
화륵
마법진을 그녀에게 겨눴다. 한 개.
그에 맞춰 디안도 마법진을 만들었다. 그녀는 두 개.
장도 갯수를 늘린다.
디안도 갯수를 늘린다.
서로 마법진의 갯수를 하나둘 늘리다보니 어느새 열 개가 넘어섰다. 그렇지만 둘의 마나는 마를 줄 몰랐다.
“인간이 어째서 마왕군에 있는가, 그게 의문이야.”
“사연이 있죠. 그쪽이 알 일은 평생 없겠지만.”
“악쿤의 지인이었나?”
“글쎄요.”
“나도 멍청이가 아니야. 너네 참모장이 한때 인간이었다는 걸 알고 있어.”
“아니요.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악쿤도 어지간히 저질이야. 이 위험한 일에 자기 지인을 끌어들이다니.”
“잡담은 그만하는 게 좋겠어요.”
“악쿤이 멀쩡한 놈이었더라면 너 기억을 지우면서라도 끌어들이지 않았겠지.”
“......”
“안 그래? 일반인이나 끌어들이는 그런 쓰레기가 뭐가 좋다고 충성을 바치는 거야? 세뇌라도 당했나?”
디안은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숨을 골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발끈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게 장의 유도심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런 정보를 넘겨서는 안 된다. 이 결승에서 디안의 역할은 장의 발목을 묶는 것.
그게 전부다.
마법사를 가장 잘 잡는 건 마법사다.
하지만 장의 서클은 7, 디안의 서클은 6이다.
경지가 더 높은 마법사를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악쿤이 뼈저리게 겪어온 사실이다.
그런데 어째서 디안에게 장을 상대하게 지시했을까?
그녀는 단순한 6서클이 아니기 때문이다.
“{ πρωττυπη μαγεα(시그니처 매직) }”
그녀가 허공에 띄운 마법진에 다른 마법진을 더 두르자 장의 표정은 역변했다.
여유 넘치던 모습은 사라졌다. 그는 다시 고글을 끼고선 반격을 준비했다.
디안은 눈을 감고 마나를 선명히 느꼈다.
자신의 몸을 타고 흐르는 것, 장에게서 느껴지는 강렬한 것.
저 멀리에서 포탄처럼 터지는 난폭한 퀸의 것.
그리고 대기에 은은하게 떠 있는 마나까지 모두 다.
집중할수록 그녀는 내면으로 깊게 빠져들었다.
물방울이 디안의 몸을 감쌌다. 그녀의 마나 농도가 진해진다.
어느새 디안의 모습은 감춰졌다. 시퍼런 물이 경기장에 깔리며 요동친다.
그녀는 악쿤의 얼굴을 떠올렸다.
디안은 경기가 시작하기 직전, 악쿤에게 말했다.
“제가 이길 수 있을까요?”
돌아오는 대답은 황당하다는 것이었다.
“디안, 내가 널 너무 과잉보호한다고 재홍이한테 혼난 거 알아?”
“아... 음... 몰랐어요.”
“이번에 8강 전투 보니까 더 확신하더라고. 내가 지나치게 널 보호한다면서.”
“그야... 스프라임은 제 동생이었으니까요.”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하지.”
멋쩍은 웃음이 오갔다.
악쿤은 조금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널 과잉보호했지만... 너도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마지막 말을 남기며 통화를 종료했다.
“시그니처를 완성한 마법사는 ONE(?)에서 4명밖에 없어. 네가 같은 마법사한테 어떻게 져.”
작은 점이 꾸물꾸물 움직이며 하나의 선을 긋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 선들은 마법진 위에서 자유롭게 움직였고, 머잖아 그 선들은 모두 이어졌다.
‘마나를 살아있는 생명체라 생각하며 보듬어주듯이.’
그러자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청색의 마법진의 가운데에 원소를 나타내는 룬 문자가 떠오른다. 디안의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 λωποδτη 소매치기 }”
“...? 저게 무슨 마법이야.”
처음 보는 룬어로 구성된 마법진.
설마...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을 때, 장의 사방에 청색 마법진이 동시에 생겨났다.
그것들은 천천히 회전을 멈췄다. 디안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나지막히 외쳤다.
마치 기도하듯이.
“{ χορ πεταλοδων 나비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