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 투기장
* * *
결승이 시작됐다.
준결승과 같이 4 대 4로 진행한다.
용사 팀 선발 인원에는 조금 변동이 있었다.
패이가 죽어서 그 자리를 듄이 채우게 됐다.
하지만 별 다를 바 없을 거라는 식이다.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히던 ‘위대한 마법의 주인과 아해들의 심포니’를 무너트린 시점에서 팀명 용사의 승리를 모두가 직감했다. 패이가 듄으로 바뀌어도 이들의 강함은 달라지지 않는다. 대기를 바꾸는 용사와, 양과 음을 상대로 승리를 일궈낸 용사인데 말해 뭐할까.
배팅율은 8 대 2였다.
물론 가면무도회의 임팩트도 엄청났다. 하지만 상대가 용사다.
마왕군이 나타나지 않고서야 이들을 이길 수 있는 자들은 없다.
라는 의견이 태반. 그게 현실이 될 줄은 몰랐을 터.
“...하하. 이렇게 보게 되네.”
사자 가면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조금 크게 웃었다. 아예 쭈그려앉아 호쾌하게 웃었다.
가면 사이로 눈물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치나 웃고 있었다. 실성한 사람처럼.
“뭐가 웃기지?”
“아~ 미안해, 미안. 그냥 고대하던 순간이 와서 너무 즐겁거든. 크크큭...”
웃음기를 거두지 못했다. 손끝으로 가면의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사회자는 잠시 말을 멈추고 결승 상대간의 대화를 적나라하게 송출하고 있었다.
장은 눈앞의 마왕군과 사회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같은 가면... 연관이 있지는 않겠지.
“재수 없는 놈.”
바비룬을 보고 쏘아줬다.
마음 같아서는 온갖 육두문자를 후려갈기고 싶지만,
아직은 시큰둥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슈가리아와의 계획을 형태나마 지켜야 한다.
그 계획은 사실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다.
마왕군이라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싸운다.
기회가 왔을 때 검은 촛불을 건네받고 바비룬을 필두로 그들의 일행을 모조리 붙잡는다.
이게 끝이다. 나머지는 개인의 실력에 맡기자는 형태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태도. 어차피 슈가리아는 제대로 협력할 것도 아니니 그러려니 했다.
열 내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다. 오히려 슈가리아도 토벌 대상에 포함해두었다.
과정이 어찌되었던, 그녀가 마왕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것은 진실이니까.
‘신경쓰이는 건... 백뢰랑 붙었던 저 여자.’
주술도 아니고, 마법이라기엔 어떤 룬어를 갖다붙여도 설명되지 않았던 마법.
공간과 공간을 잇는 마법, 차원석을 이용한 마도구라는 게 그나마 신빙성이 높았지만, 백뢰와의 전투에서 그의 코앞에 마법진을 즉석으로 설치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니 해석을 포기했다. 그 시간에 다른 인원을 어떻게 묶어둘까만을 고민했다.
저 고양이 가면의 마법의 근간이 뭐든간,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생각을 전환한 것이다.
‘저 여자를 먼저 해치우지 않으면 귀찮아져.’
마왕군 중 육탄전에 있어 가장 강력하다는 다르칸.
하지만 난전에서는 바비룬이 한 수 위다.
인간을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괴수를 상대한다고 봐야 한다.
그가 마음 먹고 몸을 부풀리면 마을 하나를 짓누를 수 있다고 했다.
그런 괴물을 상대하고 있는데, 바로 앞에 마법진으로 물줄기를 쏘아대면 바비룬을 잡을 수 없다.
살해가 아닌 포획이 주목적이라는 게 더욱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우선 순위를 정했다.
고양이 가면, 용 가면, 그리고 토끼 가면을 붙잡고 바비룬을 일제히 공격하는 것으로.
순순히 붙잡혀줄까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지만... 계획은은 있다.
[경기 시작합니다!!]
사회자가 말한 순간.
“{ μαρη ομχλη 검은 안개 }”
장은 마법진을 터트렸다.
경기장에 시커먼 안개가 드리웠고, 서로의 시야는 모두 차단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생명력이나 기, 마력마저도 서로 분간할 수 없게끔 혼란 룬어를 섞어두었기에 피아식별이 불가능하다.
“어라.”
토끼 가면, 진 키아라의 부관인 다키아가 습관적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가 독이 없다는 걸 알고선 천천히 손을 뗐다.
“시야를 가리려는 모양이네.”
붕 붕
단도를 휘둘러봤지만 안개는 사라지지 않는다.
광범위한 공격 수단이 없는 그녀로서는 제법 까다로운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종족 특성으로 본다면 이 필드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다크 엘프는 밤눈이 밝다. 시커먼 안개라고 뭐가 다를까.
눈이 적응하자 무언가 보이는 것 같다. 느껴지는 것도 같다.
애초에 마나이며, 기이며, 생명력이며 아무것도 느낄 줄 모르기에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은 것이다.
“...으음... 저기구나.”
손가락에 단도의 끝을 걸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한순간에 투척했다.
퍽! 반응이 왔다. 와이어를 위아래로 당겼고, 무슨 장치가 발동하는 듯한 철컥 소리가 났다.
그녀의 단검은 특이한 형태였다. 와이어를 위아래로 당기면 그에 반응하여 단검의 날이 사방으로 튀겨나간다. 단검이 꽂힌 대상은 스스로 이것을 빼낼 수 없다. 살점을 통째로 도려내지 않고서야.
마왕군의 연구실장 부아르의 작품.
그는 이것을 낚싯대라고 불렀다.
기이익 기이익
그 낚싯대의 끝에 걸린 와이어를 마구 당겼다.
손맛이 느껴진다. 안개 속에서 서서히 인영이 보인다.
바닥에 질질 끌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막 회쳐지기 직전의 생선처럼.
다키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와이어를 오른손에 칭칭 감고, 반대손에 자동 소총을 들었다.
“한놈.”
투두두두두
확실히 고정시키고 총탄을 무자비하게 갈겼다.
철컥 촤르르르 철컥
탄알집을 분리하고 다른 탄알집을 끼워넣었다.
그리고선 또 수십발을 후려갈겼다.
과잉 제압은 아니었다. 상대는 용사들이다.
그 괴물들을 상대로 어줍잖은 여유 부렸다가 죽기 일순이다.
자기 사천왕들만 보아도 용사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알고 있기에 이마저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용사가 아니라 듄이라는 그 녀석인가.”
그렇다해도 너무 손쉽게 제압한 감은 떨쳐낼 수 없었다.
거리를 두고 와이어를 마구잡이로 흔들며 상처를 마구잡이로 헤집었고, 총탄도 모두 파열탄이기에 파괴력이 상당하다지만, 이 정도에 죽을 인물이 결승까지 올라올 수는 없다.
‘...뭔가 이상해.’
다키아는 손을 확 당겼다.
벌집처럼 군데군데가 구멍난 인영이 다키아의 와이어에 이끌려 안개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만신창이가 된 실리콘 인형이 있었다.
“...당했네.”
말을 뱉은 찰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총 4개. 그들이 안개를 가르고 튀어나왔다.
“이제 하나.”
그 중심에 있는 케일이 검을 휘둘렀다.
*
‘구성식 자체는 단조로워.’
디안은 물방울로 몸을 방어하며 안개를 해쳤다.
그리곤 보이는 마법진을 모두 해제했다. 그녀가 지나간 뒷자리는 서서히 안개가 걷혀졌다.
‘하지만 한두 개가 아니야. 전날부터 준비해둔 건가?’
장의 손에 회전하는 마법진은 비유하자면 버튼이었다.
그 버튼을 누르자 미리 설치해둔 수십 개의 마법진이 안개를 내뿜으며 경기장을 모두 뒤엎은 것이다.
‘꽤나 공들였어. 참모장님 수준의 마법사가 아니고서야 한방에 파훼하긴 어려워.’
번거롭더라도 하나씩 없앨 수밖에.
그래야 디안이 맡기로 한 상대와 대면할 수 있을 테니까.
끄아악!
꺄악!
으으윽!
그러나 소리가 상당히 거슬렸다.
안개 마법에 오감을 혼란하게 하는 주문식도 섞어둔 탓에 환청이 귀를 간지럽힌다.
변조된 것처럼 이질감 넘치는 목소리.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저들끼리는 입을 맞춰뒀을 테니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만, 마왕군들에게는 저런 유치한 비명조차도 은근한 공포로 다가왔다.
왜냐면 잠시만 정신을 놓고 있어도
‘...설마 누군가 당한 건 아니겠지.’
금방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되니까.
고개를 도리질했다. 아콜드의 서를 펼쳤고, 걸음에 속도를 붙이며 마법진을 더욱 빠르게 해제했다.
“어... 발견...”
그러자 한 사람이 보였다.
아니... 한 엘프가 보였다.
“드리아스 씨?”
“사담할 시간... 없음... 토끼 가면... 생명력... 꺼져가고 있음...”
“어디죠?”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디안은 몸을 돌리며 사방을 살폈다.
역시 감지되는 건 없다. 드리아스는 어떻게 알아챈 것일까?
...그보다 다키아가 위험하다는 걸 안다면, 왜 그쪽으로 원호하러 가지 않는 거지?
“이쪽으로...”
“...잠시만요.”
드리아스를 말로 붙잡았다.
조용히 뒷짐지고 그 손에 마법진을 수어 개 만들었다.
“토끼 가면이라고 했어요?”
“그래... 토끼 가면 위험...”
“...비비안 씨가 위험하다는 건가요?”
“...맞음. 비비안 위험...”
“얼른 앞장서요. 그게 어디인지.”
드리아스는 물끄러미 디안을 바라보다가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곤 어디론가 척척 걸어갔다.
“...진짜 공들였네요. 근데...”
디안은 조용히 그의 몸에 철구슬을 던졌다.
딱! 여러 개의 철구슬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진다.
“비비안이라는 사람 나는 모르는데.”
화아아악!
그의 몸에서 물줄기가 솓구쳤다.
드리아스의 몸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디안이 하늘로 붕 떠오르며 사방에 마법진을 폭격했다.
“수호대장님!!!”
*
“야! 드리아스! 다키야! 디안!!”
바비룬이 목 놓아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길, 곤란한데.
가면을 벗었다.
시야가 트이기는 했으나 여전히 안개 속이라는 점에서 별로 달라지진 않았다.
몸집을 키울까?
아직이다. 자칫했다가 아군까지 바비룬의 형변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었다.
상황을 지켜볼까. 그랬다간 용사 새끼들이 원하는대로 흘러가는 셈이겠지.
뾰족한 수를 내야 했다.
“...정윤상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일 자체가 없었을 거다.
마법진을 처음부터 역산했을 테니까.
아니면 대규모 마법 캔슬로 연기를 없애버렸겠지.
“김철수 그 양반이라면?”
다크 오러로 존재감을 풀풀 풍겨서 아군을 끌어들였겠지.
안개로 다크 오러까지 감출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마법도 모르고, 오러도 몰라.”
덩치 키우는 것밖에.
그러나 표적을 늘릴 뿐이다.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자살행위를 하고 싶진 않았다.
답지 않게 고민에 빠졌다. 근래 조금은 신중해지자고 매일밤 다짐했던 것이 효과를 보는 걸까.
조용히 앉아 있었다. 소음이며 시각이며 모든 게 차단된 이곳에서 상황을 역전하려면 무슨 수가 있을까...
“......아나 씨발.”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마법, 오러를 쓰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지닌 전 용사.
걔는 진짜 아니야. 되새기며 고개를 절렜다.
하지만... 이런 예상치 못한 상황일수록 가장 의지되던 건 역시나 그녀였다.
“......하아. 그래 너라면 어떻게 했을 거냐?”
머릿속에 최세린의 얼굴이 그려진다.
그녀의 대답을 유츄해봤다.
아마 빙긋 웃으며 이리 말했을 것 같다.
‘멍청한 오빠, 이 장소에 얽메일 이유가 있어?’
“...그럴 이유는 없지.”
방법이 떠올랐다.
장소가 문제라면 벗어나면 된다.
˚ 형변(??) 응!(?) ˚
˚ 모델 이름 없는 것을 이끄는 창백한 폭풍 베드르폴니르(Veðrflnir) ˚
작은 매로 변신한 바비룬은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러자 시야가 확 트였다. 안개 사이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뻗어나왔다.
“수호대장님!!”
디안의 목소리였다.
바비룬은 허공에 날개를 천천히 휘둘렀다.
펄럭 펄럭 날갯짓의 속도를 높였다.
거칠지만 느릿하게, 차분하지만 맹렬하게.
바람이 바비룬을 중심으로 모여든다.
연기가 다른 극에 끌리듯 바람을 향해 모여든다. 하나의 기둥이 세워진다.
˚ 폭풍(?風)의 눈. ˚
화아아아아
경기장의 연기가 휘몰아치며 바비룬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커먼 소용돌이가 경기장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