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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15화 (115/152)

〈 115화 〉 투기장

* * *

“제길.”

“왜 그러시죠?”

퀸이 어금니를 꽉 깨물자 양이 물었다.

두 오러가 맞부딪치며 경기장을 난폭하게 휩쓴다.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가?”

“안타깝네요.”

“동료가 죽었다.”

“당신 동료도 죽었죠.”

헤인켈이 죽었다. 음이 죽었다. 패이도 죽었다.

동요하는 퀸과는 다르게 양은 무덤덤했다. 전혀 변하지 않는 표정과 덤덤한 그의 말투를 느끼자 소름이 돋았다. 정녕 같은 인간이란 말인가?

“슬퍼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안 죽어도 됐었다. 항복해도 됐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의미 있는 죽음입니다. 용사의 양분이 되겠죠.”

“아티팩트를 원한다고 큰소리 치지 않았던가.”

“대마장만 그랬습니다. 저와 음은 주군의 뜻을 받아 움직일 뿐입니다.”

“그게 본심인가?”

“아니란들 믿을 겁니까?”

캉­!

검으로 건틀렛을 던졌고, 그것은 다시 퀸의 몸에 닿아 폭발했다.

그 폭발력에 의해 다시 양에게로 되돌아왔고, 그는 건틀렛을 다시 던졌다. 퀸은 주먹으로 건틀렛을 쳐내 하늘 높이 띄웠고, 양이 검을 들고 달려들자 그녀도 반대 주먹에 오러와 마나를 뒤섞어 그에게 겨눴다.

콰아아앙­!

주먹과 검이 맞닿자 충격파가 일었다.

피부가 저릿저릿 진동한다. 퀸이 말했다.

“너도 죽을 셈인가?”

전투를 주도하던 건 양이었다.

전투가 길어질수록 달라졌다. 퀸의 오러와 마력은 바다처럼 마를 틈이 없었다.

이제는 비등해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퀸에게로 승기가 다가온다.

“때에 따라서는요.”

“아직 동대륙 재패를 하지 못했잖은가. 그게 플라티넘의 염원 아니었던가.”

“아니요. 주군께서 원하는 건 그게 아닙니다. 그리고 플라금에는 인재가 많습니다. 저나 음이 없어도 주군을 받들 대체자는 차고 넘칩니다.”

“왜 명을 재촉하지?”

“목표가 없거든요.”

카가각­ 검과 건틀렛이 거칠게 미끄러진다.

“지금 죽어도 미련 없습니다.”

“죽일 생각은 없다. 너와 음은 우리에게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줬지. 지금껏 살아있는 것도 너희 덕이다.”

“너무 치켜세워주지 마세요. 저희가 아니었더라도 가르쳐줄 사람은 많았어요.”

텁­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양이 물러났고, 허공에 뜬 건틀렛을 향해 뛰어올랐다.

언제까지나 자기 물건을 멋대로 휘두르는 건 불쾌했다. 퀸은 양을 조준했고 손에 머금은 화염구를 발사했다.

직격했다. 건틀렛과 같이 양은 떨어졌다.

뛰어올라 건틀렛을 잡았고, 뒤에 던졌다. 그리곤 양을 후려쳤다.

콰직­! 바닥에 직선을 그리며 처박힌 양은 깊게 한숨 쉬었다.

그도 지쳐가는 것이다. 퀸은 뒤로 물러나 건틀렛을 장착하며 말했다.

“다른 얘기다. 이게 최악의 드래곤 타나토스의 물건이라고?”

“예... 그가 인간 시절에 썼던 물건이죠.”

“왜 한숨을 쉬지?”

“지쳐서 그래요.”

그는 천천한 몸동작으로 검으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퀸의 온몸에 마나와 오러가 휘몰아친다. 양의 표정은 착잡했다.

“와오...”

“새삼 놀라는군. 이제 자격 따위는 증명한 건가?”

“자격은 처음부터 의심 안 했어요. 건틀렛을 제대로 못 다뤄서 안타까웠던 거죠.”

“너는 잘 다뤘다고 생각하는가.”

“예 뭐... 비교적?”

헛웃음이 나왔다. 퀸은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퍼석­ 퍼석­ 눈더미에 퀸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얼룩진다.

그때였다. 순간 모든 참가자들의 몸에 다각형 수정 크리스탈이 씌워졌다.

[경기 종료­!! 용사 팀이 3명을 물리치고 결승에 진출합니다!!]

사회자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선 케일이 씩씩거리며 오러를 터트리고 있었고, 백뢰는 두 손을 들고 실실 웃고 있었다.

“네가 패이 씨를­!!”

“진정해요, 죽이려고 죽인 건 아니었다니까.”

“당장 신체 강화를 둘러!! 누구 마음대로 경기를 종료해!!”

“심판 마음이지 않을까요?”

케일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의 앞에 있는 백뢰는 온몸이 엉망진창이었고.

상흔이 가득하다. 하지만 검에 베인 듯한 상처는 아니었다.

대포라도 맞은 듯한 움푹 패인 자국. 그의 오른쪽 볼은 피로 범벅되었고, 시퍼런 멍이 드리우고 있었다.

“멀쩡했으면 한 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패이 씨를... 패이 씨를 돌려줘...”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몸이 흐릿해져간다.

필드에서 다시 독수리의 길드로 전송되는 것이다. 차원문을 이용할 때와 비슷한 감각이다.

슉!

모두의 몸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곧 치료실에 전송된 장과 케일이 보였다.

패이는 없었다. 시체는 치료할 이유가 없다.

‘...아직도 부족하구나. 그 용병이 너무 강했던 건가.’

그들과 다른 치료실에 전송된 백뢰는 간호사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러자 비틀거리며 치료실로 들어오는 양이 보였다. 음과 헤인켈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도 지독하게 당했네요.”

“그쪽도 별반...”

둘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것도 잠시, 시선을 치웠다.

양은 치료실 침상에 몸을 뉘었고, 백뢰는 달리아락에서 벗어나고자 인적 드문 길로 향했다.

상처 가득한 자기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구경거리로 내놓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나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패이에게 얻어터진 상처가 욱씬거렸다.

옷깃을 찢으며 가슴팍을 바라봤다. 냉기가 독처럼 퍼지고 있었다.

미치겠네, 손에 불길을 머금고 가슴팍을 지졌다. 있어서는 안 될 치료법이었다.

치이이익­ 검은 연기와 함께 지독한 냄새가 으슥한 골목에 풍긴다. 누군가가 킁킁거리며 인기척을 드러냈다.

“어우, 많이 다쳤네?”

미역 같은 머리칼의 음침한 사내, 그 옆에는 두건을 덮어 얼굴에 그림자진 두 사람이 있었다.

“지독하게 당했군.”

“꺼져.”

“그렇게 치료하면 상처가 낫겠나~”

“꺼지라고 말했다.”

“저 자식이 감히­! 이분이 누군신 줄 아느냐!”

두건을 쓴 사람 중 한 명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섰다.

미역 줄기 남성이 가죽만 있는 것 같은 손을 뻗어 그를 만류했다.

“어허­ 물러나. 내가 말하고 있잖아.”

“죄송합니다.”

“......”

재밌게들 논다, 중얼거리며 백뢰는 다시 골목길을 걸었다.

“아직 내 얘기 안 끝났는데 어딜 가지?”

“친구들이랑 놀아... 상대하기 귀찮아.”

“...내 호의를 무시하는 건가?”

“......”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미역 줄기 사내가 뒤로 손을 척 뻗었고, 옆에 있던 남성은 그의 손에 권총을 쥐어줬다.

“달리아락의 법을 잘 모르나보군.”

“......”

“내가 친히 알려주지.”

철컥­

권총을 장전하고선 백뢰의 뒤통수를 조준했다.

호탕하게 외쳤다. 미소가 드리운다.

“힘이 곧 법이다!”

“나도 알아.”

빠지지직­!

새하얀 전격 줄기가 2번 울렸다.

권총에 겨눠지던 백뢰는 시야에서 벗어났다. 그곳엔 미약한 전격이 남았을 뿐이고, 미역 사내는 목소리에 이끌려 흠칫 뒤를 돌아봤다.

자기 옆을 지키던 두 남성의 입에 전격의 창이 있었고, 그것은 뒤통수를 뚫고 바닥에 꽂혀 있었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곳에는 다른 이가 있었다. 백뢰가 비틀거리며 말했다.

“내가 지금은 귀찮다고 말했잖아...”

“나, 나를 건드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내, 내가 누군줄 모르나보지!”

당혹스러웠으나, 미역 줄기 사내 또한 칼밥 좀 먹은 자이다.

되려 거들먹거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표정이나 말투에 서린 공포까진 숨길 순 없었다. 백뢰는 피식 웃었다.

“알아, 궁지에 몰린 초식동물. 살아남으려고 몸 부풀리고 씩씩거리는 거. 센 척하는 거.”

“나, 나는 늑대 길드의 13번 대장­”

“스콜피온이라고 불렸던가. 이름은 스파키 포이진.”

“그, 그걸 어떻­ 크, 크허억­ 크허헉­”

말을 하기도 전, 그의 몸에도 전격의 창이 꽂혔다.

그는 감전된 탓에 몸을 앞뒤로 흔들며 비틀거리다가 털썩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는다. 미역 같은 머리칼은 마른 미역 같았다.

“패이도 대장이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이리도 다른 거지.”

중얼거리며 골목에서 벗어나려 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존재에 몸이 굳었다.

“대장끼리 같냐고? 당연히 다르지. 패이는 2번 대장이었다.”

그는 등에 쥔 폴암을 붕붕 휘두르곤 바닥에 처박았다.

“13번 대장 저놈은 나도 마음에 안 들었어.”

스파키의 볼품 없는 시신을 바라보곤 혀를 찼다.

그의 늑대 심볼이 쪽팔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약한 주제에 비겁하거든. 뭐... 대신에 임무 성적은 좋았으니 대장으로 임명했다만... 솔직히 후회된다. 늑대의 위신을 깎아먹는 것 같아서. 차라리 듄을 세워둘 걸 그랬지.”

텅­ 텅­

눈앞의 사내의 손에 들린 폴암의 끝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대지가 진동한다.

이 장소에 마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영역 전개를 위해.

“저 녀석은 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패이... 녀석은 유능한 놈이었건만.”

그의 표정은 착잡했다.

백뢰도 겨우 입을 떼며 물었다.

“...왜 이곳에 있습니까?”

“부하들 보러 왔지. 너 때문에 2명 밖에 못 보겠군.”

“......복수입니까?”

안대를 풀었다.

그를 잔뜩 경계하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도망쳐야 한다. 몸이 온전했더라면 몰라도 현 상태로는 상대 되지 않는다.

“복수라...”

사내가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머리를 잘랐는지, 굉장히 길던 장발은 시원하게 옆태를 드러냈다.

허나 피보다도 짙은 붉은색의 머리칼은 여전했다.

얼굴의 흉터는 더 많아졌다. 민소매 갑옷 덕에 더욱 부각되는 우락부락한 근육은 더욱 박력이 생겼다.

그의 흉 가득한 팔에 얌전히 쥐어져 있는 폴암이 붉은 기운을 머금고 진동한다.

“늑대의 우두머리... 워 울프.”

“그냥 워 씨라고 불러주게. 다 부르면 몬스터 이름 같거든.”

폴암의 이름은 전갈이다.

“아니, 부를 일도 없겠지.”

“{...Σκαλωσι (τσσερα) ­ 발판 4개.}”

빠직거리는 새하얀 전격 발판을 허공에 깔고 그곳에 발을 딛자 백뢰의 몸이 저절로 움직이며 그의 영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

쿵­

허나 백뢰는 벗어나지 못했다. 허공에 그의 몸이 부딪치고 그는 바닥에 떨어졌다.

부들거리며 그의 온몸이 부르르 떨린다. 충격도 있었지만, 워의 위압감에 몸이 짓눌린 탓이다.

“너 하나 죽이려고 내가 직접 왔을까 그러나? 그건 오만이다. 늑대는 거대 길드다. 너 하나 견제하는 데 시간을 쓸 만큼 너는 거물이 아니야. 마왕군도 아니니까.”

“......”

“하지만 걱정 마라. 다른 이유로 왔거든. 설마 길드장한테 직접 의뢰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내뺄 수도 없잖아. 나에게도 득이 되는 얘기이니까.”

“...무슨 말입니까?”

“알 필요 없다. 너한테 일러둘 건 패이의 복수를 위해 온 건 아니라는 것. 방금 내 장벽에 몸 박은 것만으로도 기분은 풀렸어.”

“본 목적을 말하시죠.”

“독수리는 무너질 거야.”

달리아락에 찾아온 건 워 뿐만이 아니다.

늑대의 길드원들이 대거 찾아오고 있었다.

광장을 가득 채우는 인파는 그들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큰 전쟁이 펼쳐질 거다. 알아서 몸 사려. 패이가 죽어서 널 원망하는 자들이 많거든.”

“...당신은 아니라는 겁니까?”

“복수심... 들긴 했어. 지금도 널 짓눌러 터트리고 싶다.”

워는 폴암을 거뒀다.

당혹어린 백뢰의 눈길을 보자 괜히 착잡해졌다.

“여기서 널 죽이면 패이를 볼 면목이 없잖냐.”

“...그는 강했습니다.”

“알아, 그러니까 2번대 대장이었지.”

“......절 보내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 텐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워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잠시 눈을 감았다. 워는 말했다.

“어쩌겠냐, 녀석이 선택한 죽음인 것을. 존중해줘야지.”

“......”

“가라, 괜한 장난 쳐서 미안했다.”

화아악­!

영역은 해제되었고, 백뢰는 쏜살 같이 벗어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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