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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12화 (112/152)

〈 112화 〉 투기장

* * *

“당신도 한때 저를 스승이라고 부르셨죠.”

“지나간 과거일 뿐, 케일이랑 달리 나는 스스로 터득한 게 상당하지.”

카득­ 칵­ 칵!

검이 어지럽게 궤적을 그리며 퀸에게 다가오는 것을, 그녀도 그에 맞춰 주먹을 휘둘러 모두 쳐낸다.

둘이 흥겨운 노래를 틀고 춤을 추듯, 경쾌한 리듬에 맞춰 철 부딪히는 소리만을 자아낸다. 그에 관객들은 입을 벌리고 서서히 매료되고 있었다.

“정말이지... 두렵도록 강해졌군요.”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 대답은 남기지 않고 조용히 주먹을 휘둘렀다. 킹­ 캉­ 카각­ 캉­!

금속음의 간격이 줄어들었고, 불똥이 튀기며 바닥에는 난잡한 발자국이 가득해지고 있었다.

처음 합을 나눴던 반경에서 한참이나 벗어났다. 그건 중요치 않았다.

카가각­!

퀸의 주먹에 검을 맞대곤, 그녀의 다른 주먹을 오러를 두른 손으로 붙들었다.

그리곤 서로를 밀어낸다. 조금씩 앞뒤로 움직이곤 있지만 어느 누군가가 밀려난다는 양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기사단원의 녹슨 건틀렛... 그 물건이 당신을 강하게 만든 건 아닙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이면 되겠나?”

“어찌 보면 그렇죠. 순수하게 퀸 당신이 강하다는 뜻이니까.”

양은 검을 넓게 휘둘러 퀸을 밀쳐냈다.

그녀는 순순히 물러나며 마나와 오러를 정돈했다. 다음 일격을 위해서였다.

“속뜻을 잘도 감춰두었어. 내가 아티팩트를 잘 다루지 못한다는 걸 말하고 싶은가 본데.”

“제대로 짚으셨군요.”

“하! 이건 내 아티팩트다. 세상 어느 누가 이 물건을 나보다 잘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잠시 물러났던 건 그를 증명해주기 위해서였다.

짙붉은 마나와 오러가 그녀의 오른 주먹에 감긴다. 발도술하듯 주먹을 감싸 허리 뒤로 당긴 그녀는 총구를 겨누듯 주먹 끝을 양에게 조준했다.

φλγα γροθι!

콰과과과­!

붉은 용 머리의 형상이 양에게로 달려들었다.

그 기세에 주위 공기가 예열되었고, 점차 발생할 충격파에 같이 대련에 임하던 장과 헤인켈, 패이와 백뢰도 행동을 멈추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

화염구가 양의 검에 맞닿자 거대한 폭발이 일었고, 순간 귀가 먹먹해지는 폭음이 터져 대련장을 뒤덮었다. 충격파는 땅을 뒤흔들었고, 공기가 어지러히 휘둘린다. 시커먼 연기 속 우아하게 걸어나오는 퀸은 오른 주먹을 꼼지락거리며 양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연기 속 그의 인영은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엎어져 있었다.

“다시 말해 봐라. 누가 건틀렛을 다루지 못한다고?”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네놈 따위가 나를 감히 평가하냐는 듯한 사뭇 건방지게 느껴질 수 있는 어투.

허나 방금의 충격파가 그 어투가 건방진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건 자신감이다. 또한 그녀의 기세였다.

ONE(?)에 떨어진 후 한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세계에게 버려지기 않기 위해 피땀흘려가며 수련에 매진했고, 그것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점차 완성되어가는 워록은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거대한 공격을 날렸지만, 그녀는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으니까.

‘마왕군은 내 이름을 듣고 벌벌 떨게 될 것이다.’

언젠가 퀸이 말했던 포부.

현실이 되기까지 머지 않았다. 당장 이번 경기만 보더라도 그러했다.

“...그런 태도를 지적하는 겁니다.”

양은 중얼거리곤 연기 속에서 검을 찔렀다.

후웅­!

오러도 두르지 않은 단순한 찌르기에 연기 속 가느다란 구멍이 하나 뚫렸다.

카가각­ 순수 근력만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그러니 위력이 강력하지는 않을 터. 오러를 두른 퀸의 몸에 생채기 하나 낼 수 없는 공격이었지만, 그의 의중은 애초에 퀸을 노린 게 아니었다.

건틀렛의 결합부에 검끝을 꽂았다. 그리곤 오러를 터트리며 그 결합부를 집요하게 노려냈다.

일순 당황한 퀸은 오러를 둘러 그의 몸을 마구 내려쳤지만, 그에 양도 오러를 터트리며 방어했다.

몸에 상처가 생겨난다. 그래도 그는 건틀렛만을 노리고 검을 이리저리 비집으며 그녀를 밀어내고, 건틀렛을 자신에게로 당기고 있었다.

덜컥­

건틀렛이 그녀의 손목에서 빠졌다. 덜렁거리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의 표정은 굳었고, 조금 전의 공격보다는 위력이 현저히 떨어지지만, 양을 날려버리기엔 충분한 만큼의 오러와 마나를 투자하여 반대 주먹에 형상을 둘렀고, 휘둘렀다.

콰아아앙­!

또 폭음이 터졌다. 거짓말처럼 연기가 걷어졌다.

그 가운데에는 두 손을 교차하여 그녀의 주먹을 받아낸 양이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건틀렛의 한쪽이 떨어진 채 밟혀 있다. 저걸 회수해야 한다. 퀸이 발을 휘둘러 그를 밀어냈다. 양은 재빨랐다. 뒤로 한 바퀴 돌며 건틀렛을 붙잡고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한 쪽을 잃어버렸군요.”

건틀렛을 하늘로 던지고 받길 반복하며 그녀를 도발했다.

이에 넘어가주며 다시 육탄전에 돌입할까?

건틀렛 없이도 강한 퀸이다. 본인도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자신한다.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케일은 무기에 의존하지만, 당신은 너무 의존하지 않아요.”

한쪽 입에 붕대 끝을 물며 칭칭 감는 퀸에게 말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말했다.

“무기에 의존하지 않는 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만? 네가 말하고도 어폐가 있다는 걸 모르는가?”

“맞아요. 무기에 의존하지 않는 건 장점입니다.”

“방금 그게 문제라고 말했다.”

“네. 그러니 문제죠.”

던지던 건틀렛을 콱 잡고 자신의 왼손으로 가까이한다.

철컥­ 잘 끼워졌다. 손가락도 하나하나 잘 움직인다.

하지만 표정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결국 그는 다시 건틀렛을 탈착했다.

“근데 의존하지 않는 것과, 무기를 험하게 다루는 것이 다르다는 걸 당신은 착각하고 있습니다.”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했건만, 결국 빼앗아 간 건 너다.”

“그렇죠. 빼앗은 건 접니다. 하지만... 더 뺏기지 않게 몸부림 쳤어야죠.”

“이미 빼앗긴 걸 어쩔까. 다시 빼앗으면 그만이지.”

“그래선 무기와 혼연일체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검사도 아니다.”

“용사들의 고향은 몰라도, 이곳 ONE(?)에서는 언제나 통용되는 얘기죠. 검사이든, 마법사이든, 격투가이든, 심지어 정치인이든 자신의 것을 남에게 빼앗기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깨달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웃기는 소리를.”

낡은 기사단원의 건틀렛의 순기능은 화염 속성 마나를 충격파로 발산한다는 것.

하지만 마법사가 사용하기엔 대놓고 육탄전을 위한 무기인지라, 사용할 수 있는 자는 퀸이 유일하다.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은 아티팩트가 지닌 힘을 모릅니다. 다른 용사도 마찬가지고요.”

양이 건틀렛을 허공에 던지고 그 다음 행동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잘 보고 배우세요.”

야구 배트를 잡듯 검을 잡고 건틀렛이 내려오는 타이밍에 맞춰 휘둘렀다.

그러자 건틀렛이 붉은 기운을 머금고 깜빡거리며 퀸에게 다가왔다. 순식간이었다. 고개를 내리자 건틀렛이 퀸의 가슴 앞에 있었다. 치지직... 무언가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빙글 돌아간 건틀렛의 안쪽이 보였다. 황색 양의 오러가 번쩍인다.

“폭(?).”

콰아앙­!!

퀸의 몸이 날아간다. 폭발은 거대했다. 마치 마법을 쓴 것처럼.

양은 차분하게 걸어와 바닥에 덩그러니 있는 건틀렛을 다시 주웠다.

그리곤 피투성이가 된 퀸을 바라봤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확실히 무서운 물건입니다. 룬어도 못 읽는 제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니.”

방식은 달랐다. 마법진이라곤 없었고, 마나의 흐름 같은 것도 없었으니.

하지만 양이 방금 보인 것은 분명히 마법이었다. 아직도 대기에 화염 속성 마나가 넘실거린다.

마법을 익혔단 말인가? 아니, 양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건틀렛에 묻은 흙을 닦으며 말했다.

“이 물건의 주인은 본래 오러를 사용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직 마나만 사용할 수 있었던 기사단원. 그때는 신체 강화라는 마법 양식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으니 그는 저급한 오러 유저들에게 된통 당했겠죠. 아무런 형상도 나타내지 않은 단순 격투로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지만, 오러를 사용한 대련에서 마나를 사용할 순 없으니 말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살아남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오러는 노력하면 발전할 순 있지만, 발현한 수 있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그 기는 선천적인 것이니까요.”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그게 무엇일지 감이 잡히십니까?”

“......”

“마나를 오러로. 오러를 마나로 바꾸는 술식을 건틀렛 안쪽에 새겨넣은 겁니다. 고작 16살 짜리 꼬마가.”

건틀렛을 잡으며 오러를 발산하자 거짓말처럼 화염이 피어오른다.

“이 건틀렛 덕분에 그는 기사단에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20살이 되던 해에 은퇴하여 마법을 가르치는 학원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스승을 만나고, 스승을 통해 자신이 만든 건틀렛이 얼마나 기괴한 물건인지 깨닫게 되죠.”

“분석해보니, 인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문자가 섞여 있었습니다. 그 또한 무의식 중에 새겨넣은 룬어였으니 다시 만들라면 만들 수가 없었죠. 분석도 할 수 없었고요. 이 물건은 우습게도 우연으로 생겨난 물건이라는 겁니다.”

“이 물건의 주인이 상당한 멍청이라는 소리를 참 길게도 하는군.”

끄응­

천천히 일어났다. 탈골된 어깨를 힘으로 맞추고 뿌득 소리가 났다. 그럼에도 표정은 조금도 찌푸리지 않았다.

‘역시... 타고났다.’

양은 그녀의 투기에 경외심이 들었다.

‘하지만...’

건틀렛의 주인으로 부족하다는 생각은 떨쳐지지 않았다.

말을 이었다. 이 물건의 주인이 누구였는지에 대해.

“알아볼 수가 없었겠죠. 다른 인격이 쓴 문자이니.”

“이중인격자였던 건가?”

“맞습니다. 사실 인격이라 표현하는 것도 틀렸을지도 몰라요.”

그는 종족 자체가 달랐으니까.

자신이 인간이라 믿고 있었던 멍청이.

“어느 기사단원의 낡은 건틀렛. 그 안쪽에는 데미투 꼬마들이 만든 암호가 적혀 있습니다. 룬어와 에볼로기아의 언어를 뒤섞은 문자가.”

'μN... π...ηγWθ...I'

안쪽마저 녹슬었기에 중간중간이 흐릿하게 보이지 않는다.

‘무슨 뜻이지?’

의중을 파악했는지 양은 말했다.

“다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누군지 몰라도 사이가 좋았나보군.”

“연인이었답니다. 저도 건너들은 얘기라 확실치는 않지만.”

“그래서 이 물건의 주인이 누구란 말인가?”

“...이만치나 말했는데 아직도 모른다니... 제가 역사를 알아야 마왕군을 처부술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잖습니까.”

“책 읽는 건 질색이라­”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자신이 선생인 것마냥 훈계하는 꼴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뭐, 더 힌트를 드려봐도 달라지는 건 없겠군요. 그냥 말하겠습니다.”

건틀렛의 끝부분을 꽉 움켜쥔다. 반댓손에는 검이 꽉 쥐어져 있다.

그녀는 퀸에게 달려들었다. 황색 오러와 붉은 마나가 같이 넘실거린다.

“멍청한 피아. 그의 물건이었습니다.”

......!!

다시 폭음이 이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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