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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11화 (111/152)

〈 111화 〉 투기장

* * *

8강 경기는 예상대로 손쉬웠다.

‘마왕군에서 친히 손 써주셨는데, 아무렴 기대에 부흥해야지.’

패이 클라우드, 그는 확실히 실력이 좋았다.

신체 강화를 두른 것은 놀랄 게 아니었지만, 상황에 따라 마법진을 구축하여 그것을 통과시킨 신체를 단계적으로, 순간적으로 다시 강화하는 기술은 방식을 알고 있더라도 구사하기 어려운 기술이었다.

그렇다고 장의 임팩트가 그에게 밀리지는 않았다.

경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8서클의 마법을 대련장 전체에 폭격했으니, 경기는 10여분도 되지 않아 종료되었다.

그리고 4강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가면무도회를 상대하는 것은 독수리의 용병 집단인 거친 날갯짓.

경기는 순식간에 끝났다. 진 키아라 같은 움직임을 구사하는 여성과 사자 가면이 돌격, 그 뒤를 보좌하는 것은 특이한 공간 마법을 사용하는 고양이 가면과 용 가면.

그들의 팀워크가 좋았다고는 못 하겠다. 경기를 직관하는 내내 따로 노는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수준 자체가 달랐다. 거친 날갯짓도 나름 선전했으나, 그들과의 커다란 격차를 메울 수는 없었다.

반전 없이 올라가는 팀은 가면무도회였다.

그리고 2차 경기를 앞둔 지금.

상대 팀 출전자가 공개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헤인켈, 양, 음, 백뢰.

대진표에 쓰인 이름만 봐도 넌더리가 났다.

‘미치겠네, 온갖 네임드들이 다 나왔잖아.’

패이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본인의 실력을 의심한 게 아니다.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기에 더 곤혹스럽다. 자기 실력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몇 년 전, 자기 분수를 모르고 위험천만한 의뢰를 맡아 호되게 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들이 조금만 마음을 달리 먹었더라면 곧장 죽었을 수도 있었던 의뢰.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어봤어도 그날만큼 목숨이 위태로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인기척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던 암살자랑 드래곤 같은 마나를 지닌 대마법사였지. 그들이 누구였는지 아직도 머리에 연막이라도 뿌려놓은 듯 떠오르지가 않아.’

그래도 상관 없었다. 그들이 누구인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날 살아남아서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때의 기억은 큰 교훈을 얻었다.

주제 파악하고, 본인 능력 밖의 일은 무조건 피할 것.

목숨은 단 하나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말 것.

그때부터 패이 클라우드는 ‘괜히 까불지 말자’라는 신조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나랑 퀸, 케일이 나서야겠죠. 당신들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저들은 정말 강합니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기분 안 나쁘오. 내가 몸이 튼튼하긴 하지만 한계치는 분명 있거든.”

“저도 부끄럽지만, 양, 음의 오러보단 급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등이 떠밀린다면 얘기가 다르다.

압박감이 서서히 차올라 목구멍까지 치닫았다.

“패이 씨?”

“선배, 아까부터 왜 말이 없소?”

시선이 몰린다. 머리 끝까지 수면에 잠긴 듯 눈이 안 떠지고 숨이 막힌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태연한 척 대답을 남긴다.

“...저요?”

“네.”

“하하... 무슨 얘기 중이었더라?”

“참가자 명단 제출 얘기 중이었죠.”

못 들은 척, 대답을 망설이자 장이 퇴로를 막았다.

또박또박, 조금도 발음을 흘리지 않고.

“같이 경기에 나가주셔야 합니다.”

“...이런 시발.”

“예?”

“.........아닙니다. 나가야죠. 네, 나가야죠...”

*

“시발.”

그래서 대련장에 패이가 있었다.

[4강 2차 경기~ 시작~~ 합니다­!!!]

허허벌판, 32강, 16강, 8강과 다르게 룰 따위 없는.

한 팀이 항복을 외칠 때까지 펼쳐지는 데스매치.

건너편 저 멀리에 점처럼 있는 4명이 시선에 맺힌다.

“본좌에게 경고할만큼의 실력이 있는지 한 번 보자꾸나 장!”

한 명은 공중에 떠올라 거대한 녹빛 마법진을 만들고 있었고,

“케일, 퀸. 저희에게 증명해보십시오.”

“아티팩트를 지닌 만큼 적당히 하지는 않을 겁니다.”

양쪽 맨 끝에 배치된 검사는 오러를 머금고 발도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나는... 자연스레 저 늑대 용병인가.”

그들 사이에 있는 새하얀 소년은 손에 전격으로 구성된 창을 만들며 투척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마... 본인을 향하고 있는 것 같다.

패이는 어젯밤 침상에 누워 생각했다.

이 괴물들 사이에서, 나약한 내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생각보다 답은 금방 나왔다.

‘튀자.’

사용할 마법도 이미 정해뒀다.

“{ Ενσχυση του σματο ­ 신체 강화! }”

여기까진 평소에 사용하던 것과 다를 게 전혀 없다.

하지만 어떤 룬 문자를 추가하면 그 기능은 달라진다.

α ­ 속력 강화로 가속, υ ­ 대폭으로 그 기능을 극대화, ε ­ 연속성 부여.

이 룬 문자로 마법진을 휘감았다. 공격성은 완전히 거두고 단지 도망치기 위해서만 사용한 마법.

그리고 눈앞을 바라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백뢰의 새하얀 창이 보인다.

“으아­!!”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땅을 밀어내며 경기장의 구석으로 도망쳤다.

하얀 전격 줄기가 빠직하고 패이의 뒤를 쫓는다. 하지만 잡힐듯, 잡힐듯. 간신히 잡히지 않으며 애매한 거리를 유지한다.

“이 녀석은 내가 붙잡아둘게요!”

크게 외쳤지만, 목소리가 흩어진다. 그리고 그의 태도는 얼핏 보기에도 굉장히 다급했다.

한마디로 볼품없었다.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니.

“...그래도.”

한 명 묶어둔다는 게 희작용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케일은 검을 잡았고, 퀸은 건틀렛을 꼈다.

장은 마법진을 그리며 천천히 옆으로 이동했고, 헤인켈은 그와 눈을 마주하더니 경기장 저편으로 같이 그와 서서히 이동한다.

대결 구도가 성립했다.

케일과 음이 서로를 마주하곤 검에 오러를 불어넣는다.

[ 태극류 발도술 제 1식 ­ 출근길 ]

[ 태극류 발도술 제 1식 ­ 출근길 ]

카가가각­!

동일한 검무가 맞닿는다. 경기장에 폭풍이 일었다.

*

“단조로워요.”

카가각­

케일의 검을 십자로 맞대곤 위로 치켜올린다.

생긴 빈틈, 자신의 검날을 잡고 리치를 줄여 재빠르게 찔러넣었고, 케일은 오러를 머금으며 그 검끝을 콱 붙잡았다.

“반응은 좋아요. 하지만 조금만 느렸더라면 죽었습니다.”

혈전이라기엔 대련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케일은 이를 악물며 오러를 터트렸다.

콰아아아아­! 그에 음의 오러도 대응한다. 거의 동일한 격의 오러. 서로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케일은 음의 검을 콱 붙들었고, 하늘 위로 치켜세워진 검을 내려찍었다.

음은 자신의 검을 놓고 몸을 비틀며 한끝 차이로 피해냈다. 그리곤 케일의 검이 잡힌 손목을 붙들었다. 그 손을 바닥으로 내리고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위에서부터 아래로 발을 휘둘렀다. 케일의 어깨가 맞았다. 그녀가 일순 표정을 찡그렸다. 그 상태로 다리를 접어 케일의 등에 무릎을 올렸고, 힘을 주어 꾸우욱 짓누른다. 요령 좋게 그녀의 손목을 비틀곤 클리브 솔리스를 뽑아 손에 쥐었다.

[ 태극류 방어술 제 1식 ­ 갑옷 ]

콰아앙­!

오러를 터트리며 거리를 벌렸다. 케일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음의 검을 잡고 있었고, 음의 손에는 우우웅 진동하는 클리브 솔리스가 있었다.

음은 오러를 집중했다.

자세를 잡았다. 태극류 공격술 제 4식, 만원통닭의 자세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 케일식 검술 2번 ­ 일몰­! ]

카가각­!

초승달처럼 검을 휘둘러 찌르기를 위로 쳐냈다.

피슉­ 그녀의 볼에서 피가 솟구쳤다. 조금만 늦게 반응했더라면 얼굴이 잘려나갔을 거란 공포심이 조금씩 차갑게 차오른다.

“주도권을 다시 찾아와야죠. 방어만 하다간 먼저 지칠 겁니다.”

“끄윽­”

케일은 음의 검을 쳐내 거리를 벌렸다.

오러를 캡슐처럼 덮어 출혈을 막았다. 허나 이 자체가 불리해진 그녀의 상태를 나타냈다.

음은 너무나도 멀쩡했다. 점점 피로 물드는 건 케일이다.

같은 오러, 같은 검술을 구사하는데 왜 격차는 점점 벌어지는 것인가.

음은 검끝을 바닥을 향하곤 스슥­ 땅에 선을 그으며 입을 열었다.

“케일 당신은 강합니다. 곧 저보다도 오러 등급이 더욱 높아지겠죠. 하지만... 당신은 마왕군 몬스터들에게나 두려운 존재죠.”

그 선을 다 긋곤 검을 들었다.

투둑­ 돌조각이 그의 클리브 솔리스에 이끌려 튀겼다. 데구르르 굴러와 케일의 발끝에 닿았다.

“하지만 경험의 차가 너무 큽니다. 당신에겐 아직 시간이 필요해요.”

“저도... 알아요.”

“저는 여기서 당신을 막을 겁니다. 빈이 행방불명되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성급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세계를 구해내야 하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해줘야 해요.”

“지금 저희를 막는 게 바른 길인가요?”

“바른 길이죠. 제자가 섣불리 마왕군에 덤벼들지 않게끔 보듬어주는 귀중한 시간입니다. 허투루 보낼 생각은 없어요.”

그는 검 손잡이 끝을 잡곤 반시계 방향으로 붕붕 돌렸다. 그리곤 바닥에 꽂았다.

스으으으­ 그의 온몸에 휘날리던 공격적인 오러가 한줌에 집중된다.

그의 도신이었다. 폭발할 것만 같던 그의 오러는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집중하세요. 검과 하나가 된 것처럼.”

신검합일(???一).

양과 음이 항상 강조했던 그 경지.

음이 보기에 케일은 아직 그 기준에 미치치 못했다.

“당신은 아티팩트가 지닌 힘을 모릅니다.”

“...스, 스승님? 그거 가동하면 안 돼요!”

“저도 압니다.”

화아아악­!

하늘이 커튼을 펼친 것처럼 어두컴컴해졌다.

소음이 멈춘다. 시야가 어두워진다.

자신의 발끝조차도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보이는 건 건너편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음의 오러와 찬란하게 빛나는 케일의 황색 오러 뿐이었다.

“...이건­”

[마법사들 표현을 빌리자면 ‘공간 지배...’라고 부르더군요.]

음은 피식 입가를 기울였다. 바닥에서 클리브 솔리스를 뽑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소드 익스퍼트 급의 검사가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절대로 아닙니다만.]

쿠구구구­

하늘이 잘려나가며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하게 빛나는... 거대한 검이었다.

[클리브 솔리스, 이 물건이 있다면 가능하군요.]

쩌어억­

전조 없이 떨어지는 여우비치럼,

우아하게 떨어지는 거대한 검들의 끝은 오롯이 케일에게 몰려 있다.

[비로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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