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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10화 (110/152)

〈 110화 〉 투기장

* * *

“배후 같은 건 없어요.”

대답은 무미건조했다. 그녀의 특유 비웃는 듯한 어투가 아니다.

장은 어떻게 그녀를 더 몰아세울까를 고민했다. 조금만 더 긁어준다면 부스러기라도 떨어지지 않을까.

오늘 이후로 이런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것 같다.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불쾌감을 떨쳐낼 수 있는 기회.

‘희미했지만... 악취가 났어요.’

케일이 슈가리아를 처음 봤을 때 말했던 것.

무언가 숨기는 게 있을 것이다.

“당신의 행동엔 의아한 점이 많습니다.”

“어떤 부분이 말이죠? 얼마나 더 당신들을 설득해야 신뢰할 건가요?”

분위기가 스산하다. 그녀가 책상 밑에서 무언가 꼼지락거린다.

철컥­ 슈가리아는 석궁을 장전했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장이 무엇을 눈치챘을까. 이대로 화살을 날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든다.

“길드장님!”

그 분위기가 유리창처럼 깨졌다.

독수리의 길드원이 숨을 헐떡이며 있었고, 그곳에 시선이 맺혔다.

그는 그 시선에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뗐다.

“저... 가면무도회의 팀장이 길드장님을 뵙고 싶다고­”

“방해가 들어오네요.”

타이밍이 더러웠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빌어먹을 마왕군이 또 재를 뿌렸다.

우선순위를 정립했다. 슈가리아보단 확연한 적인 마왕군이 더 중요하다.

장은 탁자에서 손을 치우곤 거리를 벌렸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장은 의외로 순순히 방에서 나갔다.

얼마 안 가 사자 가면을 쓴 사내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전언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가면을 집어던지곤 그녀의 방을 뒤적거렸다.

“누구 왔었냐?”

“하, 윗사람처럼 말하시네요.”

“아닐 건 뭐야. 우리가 주역이고 너는 조연 축에도 못 끼는데, 당연히 내가 상전이지.”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걸 포착한 바비룬은 비릿하게 웃었다.

“왜, 좆같아?”

“...설마요.”

“좆 같으면 까. 나는 용사만큼이나 너희들도 마음에 안 들거든. 더러운 실렉티스.”

“용건만 말하세요.”

“우리 대장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지. 그러니까 표정 풀어. 죽여버리기 전에.”

“......”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날 같다.

죽일 수 있지만 죽이지 못하는 용사.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죽이지 못하는 사천왕이자 전 세대 용사가 자꾸만 슈가리아를 자극한다.

바비룬은 그녀를 흘깃 보곤 그녀가 물건을 장식해둔 선반으로 다가갔다.

“비싼 게 있네.”

흑수정을 가공한 악세사리였다. 마도구로서의 기능은 의심되지만 외형만큼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물건.

가격도 상당하다. 경매를 통해 얻어낸 그녀가 아끼는 물건 중 하나다. 그러니 슈가리아의 표정일 밝을 수가.

“왜, 내가 만지니까 기분 더러워?”

“내려놓으시죠. 본론만 말씀하세요.”

“싫어. 방 구경 좀 할 거야. 우리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나 용사 때나 거들먹거리면서 마주했었고. 아니야?”

“5년 쯤 되었던가요.”

“몰라 안 세봐서.”

바비룬은 그 목걸이를 어린아이가 신기한 물건 어루만지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거칠게 다뤘다.

툭­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끊어졌다. 촤르륵 하고 목걸이를 구성하던 마석들이 바닥에 쏟아진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아이구, 부러졌네. 미안해라.”

“지, 지금­”

뒷목이 당긴다. 얼굴이 붉어진다. 박차고 일어나 성큼성큼 바비룬에게 다가가 목걸이를 살피며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바비룬이 원했던 거였다.

갈 곳 없는 그의 분노를 풀어줄 대상이 필요했다.

이번 경기에서 그걸 해소할 생각이었는데, 디안의 고집 때문에 헤인켈을 묶어두기만 했었다.

더군다나 팀 강철의 인원이 전투에 멋대로 휩쓸려 리타이어됐으니 디안의 개인적인 감정도 풀지 못했고, 바비룬의 분풀이도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슈가리아가 있었다. 바비룬은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주술을 발동했다.

“미안한데, 예전이랑은 달라.”

“크, 크읍­”

오른손만이 비대해졌고, 그게 가냘픈 슈가리아의 목덜미를 움켜쥔다.

허공에 그녀의 몸을 들었다. 매달리며 발을 구르고 숨을 컥컥거리며 괴로워한다.

“너는 날 못 죽이겠지만, 나는 널 죽여도 되거든. 까짓거 신님한테 혼 좀 나면 되지.”

“커, 커흡­”

“장난 좀 친 건데 죽을라 하네. 그러니까 왜 까불어. 그깟 목걸이가 너 목숨보다 비싸?”

“크, 크흡­ 죄, 죄송합­”

“알았어 인마. 내가 원래 여자는 잘 안 때리는데, 너는 좀 때려주고 싶더라고.”

콰지직­!

탁자에 그녀를 집어던지자 반토막이 났다.

그녀의 이마에서 피 여럿 줄기가 흐른다. 목은 시퍼렇게 멍이 진다.

“4강 경기에 용사 팀이랑 헤인켈 팀이랑 붙여.”

“아, 아직... 용사가 올라가는 것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설마 지겠냐? 질 수 없게끔 배려해뒀는데 지면 용사 자격 박탈이지.”

“케, 케일과 퀸은 경기에 출전하지 않아요.”

“알아. 근데 장 있잖아. 그리고 패이였나? 그 녀석 실력 좋다고 우리 참모장님이 칭찬하더라고. 둘 나가면 되겠네.”

“...알겠어요. 근데 왜 직접 오셨나요? 평소 연락망으로 보내도 그만인데.”

줄 물건이 있거든.

바비룬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척 보아도 고급진 종이에 감싸진 것이었다.

녹빛 무언가가 은은하게 비친다. 그의 정체를 묻자 덤덤하게 말했다.

“독.”

“용사를 독살하라는 겁니까?”

“아니, 설마 그러겠냐.”

“그럼 누구죠? 늑대의 용병?”

“다 아니야. 너 용사 옆에 붙어다니는 검은색 용 기억하지? 다타리오. 카이루스의 아들.”

그 녀석의 먹이라고 말했다. 먹이라기보단 각성제라고 해야 올바르겠지만 편의상 생략했다.

피아의 독 속성 마나를 정제하여 만들어낸 스틱. 그걸 다타리오에게 먹이면 한층 더 성장할 거라고 말했다.

마왕군의 업무라기보단 파라소스 다크 드래곤들의 개인적인 일이다.

다타리오에게 넓은 세상을 알려주고자 카이루스는 용사 옆에 그를 붙여뒀고, 그에 대한 연출을 돕는 대가로 다타리오는 마왕군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그냥 다타리오는 이 독을 먹고 쓰러져야 한다는 것밖에. 그럼 다타리오는 절로 파라소스에 찾아오게 될 거고, 거기에서 다타리오를 다시 둥지로 품을 거란다.”

“저보고 용사에게 독을 건네라는 건 똑같지 않나요. 다타리오가 쓰러지면 용사들은 제 탓을 할 텐데요.”

“알 바야?”

“......”

“까라면 까. 다타리오도 지 할아버지 마나 쯤은 비늘로 느낄 것이니 알아서 하겠지.”

그리 말하곤 미련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떠나간 슈가리아의 집무실은 처참했다.

바닥에 거대하면서도 세심하게 조각된 흑수정이 굴러다니고 있고 책상은 무너진 채다.

슈가리아는 이를 빠득 물었다. 바비룬과 장. 둘을 향한 분노가 좀처럼 식지 않았다.

그녀는 널브러진 위스키를 병째로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나 같이 날 무시하고...... 으아아­!!”

거의 다 털어낸 위스키 병을 집어던지고 오러를 터트리며 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 소동에 그녀의 부하가 성급히 달려와 그녀를 만류했다.

히끅­ 술에 취한 그녀는 반쯤 감긴 눈으로 부하들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

‘귀 아파.’

삑­

굉음이 들려오자 장은 귀에 머금어진 마법진을 부쉈다.

‘...엄청난 걸 들었네. 순순히 물러간 게 더 소득이 있을 줄이야.’

도청 마법. 세밀하게 조작하였고, 바비룬과 슈가리아는 마나를 다룰 줄 모르기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마나를 많이 투자하지 못한 만큼 완전히 듣지는 못했다. 태반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4강에 대한 것, 대진표, 바비룬이 슈가리아에게 명령조로 얘기했다는 것. 그 중 가장 충격적인 건....’

다타리오마저도 마왕군과 관련이 있었단 말인가?

바비룬이 말했던 내용을 무작정 휘갈겨 놓은 노트로 눈을 돌렸다.

다타리오, 그리고 파라소스. 타나토스의 독을 정제한 마나. 그걸로 만든 먹이.

어쨌거나 독이라는 것인데, 바비룬은 타나토스가 다타리오의 할아버지라고 말했다.

비유적인 표현일 수도 있었다. 먼 조상이라거나, 이런 느낌으로.

하지만 파라소스에 다타리오를 다시 품는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다타리오는 버려졌던 용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상처 투성이인 채로 용사에게 찾아왔던 것 아니었던가.

그를 구원해줬던 게 용사였다. 그 만남은 완전한 우연이었다.

그 자체를 의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슈가리아와 바비룬의 상하관계가 불쾌했던 예감에 들어맞는 것 같아 한편으론 통쾌하면서도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역시나 믿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왕군을 함정에 빠트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함정에 스스로 찾아온 건 본인이었다.

슈가리아와 바비룬의 관계에 갈등이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점을 파고들어야 할까? 아니, 설득에 실패한다면 개죽음이다. 방금 전 그녀에게서 차가운 반응을 느끼지 않았던가. 당장이라도 석궁을 발사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결승에 진출하더라도 검은 촛불은 커녕 목숨이 위협받는다.

그럼 꼬리를 말고 도망칠까. 어떤 명분으로? 슈가리아의 경계망을 피해 도망치는 건 어렵다.

이곳은 그녀의 영역이다. 자유의 도시 달리아락 자체가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와 마왕군에게 지금이라도 전면 전쟁을 펼친다?

무슨 힘이 있어서? 한 나라의 권력과 맞먹는 독수리를 상대로. 세계를 위협하는 마왕군을 상대로.

달랑 용사 3명이서?

그렇다면 누굴 의지해야 한단 말인가.

바로 옆에 있던 다타리오마저도 베일에 쌓여 있는데 도대체 누구를.

‘...어떻게 할까.’

펜을 돌리며 상념에 잠겼다.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쉰다. 머리칼을 헝클인다. 미칠 것 같았다. 펜을 던졌다.

멍하니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끼이익­ 너무 몸을 젖혔다. 의자가 넘어졌다.

바닥에 나뒹굴며 장은 볼품없이 넘어졌다. 그대로 멍하니 있었다. 바닥에 몸을 기대고.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창밖을 보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장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선 수화기를 눌러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시오?”

*

4강이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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