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투기장
* * *
“예전이랑 반대네?”
가면을 젖히고 옅게 미소 지었다. 백뢰는 이글거리는 눈매로 디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잔뜩 구겨진 인상은 안대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입가가 일그러진 것으로밖에 알아차릴 수 없었다는 말인데, 디안은 그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했다. 그를 모르고 싶어도 자연스레 알게 되는 것이었다.
“올려다보는 기분이 어때?”
“...상당히 더럽네.”
무릎을 탁탁 털고 겉옷에 묻은 흙도 털어냈다.
전격의 기세는 조금 약해졌다. 디안은 마법진을 금방이라도 발동할 기세를 취하곤 그와의 거리를 조금 띄어두고 있었다.
“하하, 무슨 총 겨누는 것 같네.”
“너는 어디로 샐지 모르니까. 이젠 안 놓쳐.”
“크, 크크크... 안 놓친다고?”
“그래, 또 도망갈 거잖”
콰아앙!!
미처 방어막을 겹중으로 쌓아두지 않았더라면 단박에 몸이 터졌을 것이다.
백뢰는 삽시간에 다가와 강렬한 전격을 퍼붓고 있었다. 몸이 저리다. 방어막을 유지하는 손끝이 타오를 듯 뜨겁다.
“내가 도망쳐? 너 따위를 상대로?!”
“끄으으윽”
“악쿤이 약했더라면 마탑을 다 부쉈을 거야. 내 모든 걸 앗아간 그 빌어먹을 마탑을 내 손으로 무너트렸을 거라고!!”
“앗아가? 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너야말로 아무것도 모르잖아!”
백뢰는 디안의 정면에 있었다.
이것 자체가 그가 격분했다는 걸 증명한다. 뒤에서 나타나는 전술이 아닌, 앞에서 나타나 힘싸움을 한다는 것은 기술에 의존치 않고 순수 마력만으로 짓누르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악쿤과 네년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
“참모장님과 내가 뭘 잘못했어?!”
“전부 다! 내게 치근덕거린 순간부터 네년놈들은 내게 있어서 죄인이다!!”
“{ αλυσδα νερο 물 사슬! }”
콰과과과!!
푸른 사슬이 백뢰에게 쏟아졌으나 그는 재빠르게 거리를 벌렸다.
디안은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물었다. 목소리가 떨린다. 지쳐서가 아니었다.
“...배반한 이유를 듣고 싶어 너를 찾아 헤맸어. 기껏 찾았더니 만남부터 잘못됐다면...”
“그래, 그 순간부터 나는 너희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발자취를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되겠지. 너는 악쿤 뒷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그럴 여유도 없겠지만.”
“그래서 한 짓이 고작 도둑질이야?”
“함부로 말하지 마.”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야.”
푸른 마법진과 새하얀 마법진이 서로를 겨누며 일렁인다.
회전은 무척이나 빨랐고, 그 세기는 굉장히 비슷했다. 흡사 동일 인물이 시전한 마법진처럼 색깔만 다를뿐, 크기나 회전의 세기가 거의 동일했다.
같은 스승을 두었기에. 악쿤의 수제자를 두고 경쟁했던 디안과 백뢰.
이런 구도는 몇 년 전에도 있었다.
‘누나, 언제 날 넘을래?’
‘...너 진짜 혼난다.’
달라진 거라곤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더 멋대로 입 놀렸다간 저 클론처럼 만들어주지.”
“해볼 수 있으면 해봐.”
살의가 가득 찬 컵처럼 위태롭게 넘실거린다.
둘의 서클이며, 마법 수준이 높아진만큼 필드도 엉망이 되어간다.
타닥... 타다닥...
전격에 타올라 매캐한 연기를 내뿜고 있다.
물에 범벅이 되어 무척이나 축축하고 웅덩이졌다.
“...더 끌어봤자 뭐 하겠어. 예전처럼 하자. 기억하지? 설거지 내기.”
백뢰는 감정을 마치 기계 부품 바꾸듯 다룬다.
아까 전 날카로웠던 기색을 거두곤 공통된 기억을 꺼내 디안을 바라봤다.
“모순됐어. 사사로운 것까지 기억하는 주제에 원한을 입에 담다니.”
“마법진이나 만들어. 누나가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걸로.”
“후회하게 될 거야.”
“웃기고 있네. 매번 나한테 깨졌던 주제에.”
백뢰는 온몸에 두른 마나를 거뒀다.
디안도 시그니처를 해제하였다. 보다 집중하기 위해서다. 다른 곳에 마나를 흘리지 않고, 한 번의 기술로 끝장내기 위해서다.
서로 입가를 가리며 중얼거린다. 룬어를 내뱉는 것이다.
평범한 마법사였더라면 알아듣기도 어려울 속도.
과거와는 궤를 달리한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 Παρακαλ εμφανιστετε μπροστ μου. 내 부름에 답하라. }”
“{ Καταστρψτε αυτν τον νθρωπο 눈앞의 것을 처부술 것이다. }”
백뢰의 정면에 거대하고 새하얀 마법진이 나타난다. 회전은 점차 느려진다.
“{ αναπνεστε, ταλαντευτετε 깊게 숨을 쉬어라, 파도처럼 출렁여라. }”
“{ Κνε την ευχ μου πραγματικτητα, ρθε η ρα να εμφανιστε 내 소망을 이루어라, 이제 모습을 드러내라. }”
디안의 정면에 거대하고 시퍼런 마법진이 나타난다. 회전은 점차 느려진다.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듯 적막만이 흐른다. 긴장감이 이들의 몸을 휘감는다.
“...이제라도 돌아올 순 없는 거야?”
적막을 깬 것은 디안의 목소리였다.
그 음성에는 한도 서려 있었지만, 그리움의 크기도 그와 같았다.
물과 기름처럼 공존할 수 없는 두 성질의 것이 뒤섞인다. 그녀는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늦었어. 마왕군에 가세할 생각도 없고. 누나와 스승님의 앞에는 암담한 어둠 뿐이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세계를 조종하는 수집가들 정도는 알고 있지. 그 배후의 존재까지도 어렴풋이.”
“......”
“마나 장벽 쳐두길 잘했네. 지금까지의 대화가 밖에 들렸더라면 신이라는 놈이 우리를 처단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마법진은 완성되었다. 사실 두 마법진의 회전은 진작에 멈췄다.
“{ Αστραπ Δρκο 뇌룡! }”
“{ Δρκο του νερο ...수룡. }”
동일한 서클의 마법, 동일한 양상의 기술.
성질만이 다른 그것이 동일한 크기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디안을 향해 빠직거리고, 백뢰를 향해 넘쳐흐른다.
[경기 종료!!]
그때 마법진이 강제로 사그라들었다.
둘다 행동을 정지했다. 천천히 고개를 처들었다.
[ 가면무도회 : 2점 생존자 2명 ]
[ 위대한 마법의 주인과 아해들의 심포니 : 2점 생존자 2명 ]
[ 강철 : 0점 생존자 0명 (탈락!) ]
[ 몰아치는 폭풍 : 0점 생존자 0명 (탈락!) ]
[경기가 종료되었습니다! 가면무도회와 위대한 마법의 주인과 아해들의 심포니가 준결승에 진출합니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경기는 종료되었다.
*
다음 경기는 다음날에 진행된다고 공지가 떴다.
그에 전략을 정비하고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장은 슈가리아의 방으로 성큼성큼 다가가고 있었다.
“뭐 하자는 겁니까?!”
문을 벌컥 열고 내뱉은 것은 상당한 공격성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녀는 독한 위스키가 담긴 잔을 흔들고 있었다. 얼음이 덜그럭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천천히 입을 뗐다.
“뭐가요~?”
“분명 우리에게 협력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저희에겐 결승까지 가야 할 의무가 있어요. 틀립니까?”
“맞죠?”
“그런데 어째서”
다음 경기에 내보낼 수 있는 인원 중 퀸이랑 케일이 자동으로 제명되어있는지, 이 의문을 풀어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어라, 다른 분들은 못미덥나요?”
“살랑살랑 논점에서 벗어나지 마세요. 퀸이 아니라 늑대의 용병이 제명되었어도 저는 이 자리에 있었을 거예요. 이 자리에서 저를 납득시켜야 할 겁니다.”
“얘기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텐데... 굳이 듣고 싶어요?”
대답 대신 그녀의 책상을 강하게 내려치곤 허리를 숙여 눈을 맞췄다.
자기 물건이라 주장할 수 있는 담보로 마왕군을 끌어들이는 것도 상당히 불쾌했다.
그럼에도 정당하게 승부하여 8강 진출을 얻어냈다. 헌데 어째서 협력하겠다고 떠든 주제에 훼방을 놓는 것인가.
‘역시 이 여자는 꿍꿍이가 있어.’
아직 이유를 듣지도 않았지만, 슈가리아가 신뢰할 수 없는 자라는 근거는 충분히 더해졌다.
얼마나 합당한 이유를 내놓던 분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온전히 표출해서는 안 된다. 지금 검은 촛불을 미끼로 잡혀있는 건 다름 아닌 장이다.
그 때문에 본인은 호구인 것마냥 연기했고, 미리 입을 맞춰둔 퀸을 통해 그녀를 떠보지 않았던가.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그날 이후로 슈가리아는 장에게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결승 때 사람을 보내겠다는 그 말을 진짜로 지키기라도 할 것인지, 장을 은근하게 피하고 있었다.
장뿐만일까? 용사 일행마저도 피하고 있었다. 계획을 공유해도 모자랄 판에 일말의 소통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대화에서 무언가를 얻어내야 한다.
슈가리아의 행동을 기다리다간 아무것도 얻어갈 수 있는 게 없다.
슈가리아가 원하는 것이 막대한 돈이든, 아니면 마왕군의 궤멸이든.
무엇이든지 속내를 알아내야 한다. 그녀가 어째서 용사를 방해하고 있는지.
“결국 길드라는 게 돈으로 움직이거든요~ 맞잖아요?”
마왕군을 들먹이며 헛소리를 내뱉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 나왔다.
“더 자세하게 말해요.”
“저도 한몫 챙겨야죠. 흉흉한 마왕군을 끌어들이면서 용사님들을 돕겠다고 떠들었지만, 솔직히 순수한 선의로 움직일만큼 제가 선량한 사람은 아니라서요.”
“말 돌리지 마세요.”
“퀸과 케일은 4강에 나서야 해요. 그 경기를 원하는 자가 있거든요.”
“그게 누굽니까?”
“그건... 영업 비밀~ 마왕군이랑 연관 없다는 것만 말해둘게요.”
분명 장을 도발하는 것과 다를바 없는 대사였지만, 장은 흥분을 감췄다.
오히려 속으로는 그녀의 주장에 납득하기도 했으니 흥분의 도가 넘칠 정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일전에 퀸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를 물고 뜯었을 것이다.
단순한 대답이 오히려 신뢰를 산 것이다.
처음 그녀와 통화했을 때에도 용사를 질 좋고 유명한 투견으로만 취급했던 그녀였으니까.
허나... 이게 그녀의 본심일까?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더 숨기고 있는 게 있을 수도 있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에 대한 의문도 남아 있고.’
마왕군을 끌어들여 붙잡자고 얘기했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돈을 위해 움직인다라?
둘 중 하나는 거짓된 이유였다. 전자일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미처 보지 못한 게 있을 수도 있다.
“저만 한몫 챙길 수는 없으니까 용사님들에게도 상당한 금전을 드릴 거예요. 억울하게 제명 당한 값은 치뤄야죠.”
“돈...”
물론 중요하다. 이번 늑대의 용병을 고용하면서 금전에 꽤나 많은 출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돈 때문에 다음 경기에서 패배하게 되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배정된 조에서 패배할 정도면 바비룬을 상대하긴 커녕 그 잡졸한테도 쓸려나갈걸요?”
틀린 말은 아니다.
가면무도회랑 위대한 마법과 아해들의 심포니.
견제되는 팀들은 이미 경기를 치뤘다. 그렇다고 안주하기엔 무언가 석연찮았다.
다른 팀들의 분석도 모두 끝낸 상태다.
그들은 물론 강하다. 8강까지 올라왔다는 게 그를 증명한다.
그렇다고 장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킬러 형제와의 경기 때처럼 방심하지 않고서야 패배하지 않는다.
이 주장은 오만감을 거둔 지극히 객관적인 분석이었다.
“왜 굳이 도박을 해야 하냐는 겁니까.”
그래도 그녀의 주장이 옳다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불확실한 확률에 뛰어들어야 하는가? 그깟 돈 때문에?
32강 경기와는 달리 이제부턴 제명되는 경기도 없다.
용사들끼리만 경기에 출전하면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 장의 불만이었다.
확실하게 할 수 있으면 확실하게 해야 한다. 지금 이들은 사천왕 중 한 명을 붙잡는다는 굉장히 위험한 계획을 세웠으니까.
“둘 다 챙기면 더 좋잖아요?”
서로의 방향성이 조금 뒤틀린 채였다.
슈가리아는 바비룬을 붙잡은 이후 본인의 투기장 복구 비용을 생각하고 있었다.
장은 포획한 후 인질 교환만을 생각하고 있었고.
“돈도 챙기고, 마왕군도 박살내고~ 돈을 벌어둬야 마왕군으로부터 일어나는 피해도 복구하죠. 제 생각도 좀 해주세요.”
주장에 근거가 더해진다. 어째서 두 용사를 제명시켰는지를 그녀는 이유야 불순했지만 확실히 설명했다.
그녀는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그에 발을 동동 구르는 연기를 했던 건 장이었다.
이제와서 캐릭터를 역변하기엔 아직은 리스크가 있었다. 자신의 꾀가 자신의 발목을 붙잡은 격이었다.
“아니면...”
슈가리아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혹여나 패배할까 그러세요?”
웃음기를 머금고 말하는 게 비웃는 것 같았다.
역시나 불쾌한 화법이다.
웃는 얼굴이 저토록 인상을 찌푸리게 할 수가 있었다니, 이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일까.
‘......’
머릿속에 무언가가 끊어진 듯했다.
지독히도 싸늘한 무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하며 말했다.
“정말 돈만이 목적입니까?”
그냥 저지르기로 생각을 바꿨다.
홧김에도 섞여 있었다.
“돈이 아니면 뭐가 있나요?”
“당신의 의지냐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어차피 슈가리아가 자신의 영역이라는 것을 주장하며 제멋대로 용사를 휘두르고, 계획도 멋대로 수정하기 시작한 것부터 바보 연기를 지속할 이유가 없으리라 애써 자위했다.
리스크? 엿이나 처먹으라고 해라. 그녀는 앞으로도 장에게 틈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그냥 몰아치기로 했다.
“배후가 누굽니까?”
나쁘지 않은 판단이었다. 그녀의 표정이 일순 흔들렸다.
딴에는 여유 있는 표정을 유지하려는 것 같지만.
쩌엉
그녀의 손에 들린 글라스가 바닥에 강하게 닿은 것과, 그녀의 입가가 살짝 찡그려진 것을 이미 포착했다.
“배후라니,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네요.”
“발뺌할 셈임니까?”
사실 근거는 없다.
그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배후에서 자신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슈가리아에게서도 그 느낌을 떨쳐낼 수 없었기에 그냥 넘겨 짚는 것이다.
두 가지의 반응을 예상했다.
그에 대한 장이 취할 태도 또한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녀가 불쾌감을 느낀다 할지라도 용사에게 여전히 협력한다면,
슈가리아는 형태나마 아군이라고 생각해도 될듯하다.
설령 이 대화 때문에 검은 촛불을 잃는다면,
슈가리아는 애초에 적이었던 것이다.
“대답해요.”
“......”
슈가리아의 손이 천천히 책상 밑으로 내려간다.
덜그럭 손에 석궁을 끼웠다.
“......”
“......”
고요한 침묵이 인다.
금방이라도 손목을 들어 장의 목을 꿰뚫을 수 있다.
“배후 같은 건 없어요.”
얼굴은 웃고 있다. 손에는 싸늘한 철화살이 들려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