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투기장
* * *
“허허...”
4개의 팀이 정글과 같은 굉장히 우거지고 습한 숲에 전송되었다.
“이게 무슨 장난질인지 원...”
“오랜만이네 영감.”
“어찌 들짐승이 이런 곳에 모습을 드러낸단 말인가... 끌끌...”
처음 대면한 것은 각 팀의 조장들이었다.
사자 가면과 대마장 헤인켈. 사자 가면은 풀숲을 파헤치고 헤인켈의 목덜미를 향해 앞발을 휘둘렀으나 그는 반응 좋게 방어막을 펼쳐 막아내었다.
카가가각
칼 갈리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얇지만 탄탄한 방어막을 사이에 두고 두 남자는 서로를 향해 그르렁거렸다.
“마왕군의 간섭이 있으리라는 건 들었건만... 네놈이 직접 나올 줄은 몰랐군.”
“노인 안전 귀가 서비스 팀장입니다. 빨리 보내드릴게.”
“입만 살어서는!”
헤인켈의 녹빛 마법진이 사방에서 바비룬을 덮쳤다.
그에 주술을 발동한다. 수풀이 그의 몸을 휘감았고, 나무 줄기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겹겹히 쌓여 방어막이 되었다.
화염은 작렬했으나 우거진 나무를 뚫어내지는 못했다. 그을려 녹빛 연기를 내뿜곤 있지만, 몸에는 생채기 하나 없었다. 방어에만 모든 걸 치중한 탓이다.
“형변해라! 네놈을 짓이겨 악쿤 토든에게 절망감을 주리라!”
“안 되지. 내 역할은 당신 묶어두는 거거든.”
나무 줄기가 사방에서 헤인켈을 휘감는다. 그의 방어막은 완전히 나무에 뒤덮이고 말았다.
“필드가 참 좋았어. 정글이라니, 내 안방이나 다름없는 거잖아.”
“네 이놈 바비루우우운!!”
“그런 사람 모릅니다. 저는 사자 가면이에요.”
*
8강 경기의 룰은 단 하나였다.
각 팀별로 난전을 이루고, 그 난전에서 한 명을 쓰러트릴 때마다 1포인트를 얻는다.
제한시간이 종료되었을 때 그 포인트가 가장 많은 2팀이 4강으로 올라간다는 아주 간단한 룰.
‘어디에 있지?’
고양이 가면은 마나 장벽을 펼치고 정글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독사 몬스터나 여러 함정이 그녀를 덮치는 경우는 다번했지만, 모두 그녀의 짙푸른 방어막을 뚫어내지는 못했다. 첫 번째 푸른 방패. 악쿤에게서 건네받은 아티팩트.
“죽어라!!”
그때 돌무더기 사이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서슬 벼린 단도였다. 디안의 목덜미를 향해 날아왔고, 그곳의 끝에 흐르는 자줏빛 진액은 강력한 맹독이었다.
킹
허나 푸른 방패의 범위 내였다. 단도는 바닥에 떨어졌고, 디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στλη νερο 물기둥. }”
푸쉬이이이!
물 줄기가 한 기둥 하늘로 솟구쳤고, 그와 동시에 허공에 있는 점수판이 수정되었다.
[ 가면무도회 : 1점 생존자 2명 ]
[ 위대한 마법의 주인과 아해들의 심포니 : 2점 생존자 2명 ]
[ 강철 : 0점 생존자 1명 ]
[ 몰아치는 폭풍 : 0점 생존자 0명 (탈락!) ]
독수리의 용병끼리 구성한 팀 중 하나인 몰아치는 폭풍은 두 명이 모두 리타이어 되었기에 자동 탈락.
‘아... 괜한 불똥이 튀었네.’
방금 디안에게 덤벼들었던 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가슴팍에 독수리 문양이 있다는 걸 확인했다. 조금만 더 숨어있었더라면 탈락하지 않았을 텐데 상대를 잘못 만난 탓이다.
그래도 별 수 없나.
디안은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마나의 기척을 더욱이 선명하게 느끼고자 눈을 감았다.
사람을 쓰러트려놓고서 죄책감을 겉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듯이 버려내는 그녀의 모습은 가히 사천왕의 부관이라는 자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외견만으로는 어느 누구도 저 가녀린 소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가면 속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 말고는 표현할 방도가 없었으니까.
그녀의 바다 같이 깊고도 청량한 눈동자가 꿈틀거렸다.
저 멀리에서 뜨겁고 강력한 무언가가 다가온다. 아주 빠르다. 짙은 속눈썹을 꿈틀거리며 눈을 떠 그곳을 향해 방어막의 전방을 향했으나
“{ δρυ αστραπ 전격의 창 }”
빠지지직!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디안의 몸이 뒤로 밀린다.
크그극 방어막에 땅이 끌린다. 그녀의 발 뒤에 흙이 벽을 쌓고 있었다.
건너편에서 강력한 마나가 느껴진다.
첫눈처럼 새하얗다. 무엇보다 순수하다. 그만큼 본연의 성질을 담고 있었다.
“어때, 이젠 완전히 하얗지?”
“......스프라임.”
“백뢰라고 불러줘 누나.”
“가면을 썼는데 어떻게 알아본 거야?”
“내가 누나 목소리를 모를까. 설령 변조했더라도 마나 성질만으로도 알아챌 수 있지. 우리가 같이 지낸 세월이 있는데.”
디안은 인상을 팍 구기며 가면 속 조그마한 눈구멍으로 백뢰를 담았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키가 조금 컸다는 것, 그리고 검은 안대를 끼고 있다는 것.
새하얀 머리칼은 그가 마나 성질을 각성한 이후의 변화였으니 익숙했다.
“이제야 왜 엔트리에 나를 포함하라고 슈가리아가 말했는지 알겠네. 스승님 입김이었구나?”
“함부로 참... 마탑주님을 부르지 마.”
“참? 참이 뭐지...? 아하! 이젠 참모장이시지. 인사라도 한 번 드려야 하는데 건강하시지?”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어.”
울컥 울컥
짙푸른 마법진이 꿀렁거리며 디안의 주위에 넘실거린다.
마법진의 회전은 빨랐지만, 저것이 예전부터 그녀가 즐겨 사용하던 공격기 중 하나인 물기둥이라는 걸 백뢰는 단박에 알아챘다.
“무섭게 물기둥은 왜 꺼내는 거야? 우리 이러지 말고 얘기 좀 하자. 그러려고 엔트리 이렇게 짠 거 아니야?”
“얘기는 무슨, 나는 참모장님 대신해서 널 쳐부술 뿐이야. 이 배반자.”
“누나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좀 아픈걸. 실리주의자라고 정정해줄래?”
“{ ...στλη νερο 물기둥. }”
백뢰가 말하던 도중, 디안의 마법진에서 물기둥이 솟아났고, 그것은 곡선을 그리며 바닥의 백뢰를 향해 처박혔다.
“무섭다 무서워...”
닿지는 않았다.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려보니 나뭇가지를 꽉 붙들고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백뢰가 보인다. 그의 온몸에 미세한 백색 전격이 아른거리고 있다.
“근데 너무 느리잖아. 나랑 실전 했을 때도 누나 물기둥은 다 피했었는데, 지금이라고 맞아주겠어?”
“신체 강화...”
“맞아. 신체 강화ㅇ”
빠직
그가 있던 곳에 새하얀 전격 한 줄기가 남았고, 그의 인영은 애초에 없었다는 듯 사라졌다.
“{ Απαλλσσω 방전 }”
!!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백뢰는 디안의 방어막에 두 손을 짚고 있었다.
필드의 하늘이 새하얀 전격으로 물들여진다. 그 광원의 중심에서 백뢰는 외쳤다. 그의 온몸은 새하얀 플라즈마에 휩싸여 있다.
“어라? 익숙한 걸 가지고 있네? 이것 봐. 스승님이 결국 누나 편애한다는 내 말이 맞잖아?”
“스프라임!”
“나는 죽음까지 감수하며 겨우 얻어냈는데, 누나한테는 아무런 댓가도 없이 주는구나. 나는 사실 푸른색 첫 번째 방패가 더 가지고 싶었어.”
그의 손가락에 있는 반지가 빛을 받아 번쩍인다.
여덟 번째 유리 반지였다. 그 기능은
“{ Απαλλσσω 방전 }”
마나 혹은 오러에 한 가지 특성을 부여한다는 것.
백뢰가 선택한 건 관통이었다.
“미안해 누나.”
푸슉!
새하얀 전격이 등에서부터 심장을 관통했다.
붉은 핏줄기가 흘러나왔고, 당황하는 그녀의 짙푸른 동공이 방어막을 살펴본다.
멀쩡했다. 흠집조차도 나지 않은 푸른 방패.
하지만 그녀는 숨이 차오르고 있었다. 울컥이며 목에서 피가 덩어리로 나온다.
“누나 나 이긴 적 한 번도 없잖아... 지금이라고 다를까...”
그녀의 심장을 꽉 움켜쥔 채 작게 한숨 쉬었다. 질척한 핏물이 그의 팔을 타고 흐르지만 전격에 타버려 바닥에 투둑 떨어진다.
[아아 수수께끼의 고양이 가면! 여기서 무너지고 마는가]
사회자의 경박한 목소리와 함께 스코어가 변경된다.
가면무도회의 생존자가 한 명 줄어듬과 동시에 위대한 마법의 주인과 아해들의 심포니에 1점이 추가되었다.
“...진짜 죽었네.”
잠시 처량하게 엎어진 디안의 사체를 바라보곤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가 자신이 돌진했던 그 길을 따라 발을 뗐다.
“...만졌다.”
그때였다.
쐐애애액!!
백뢰의 머리위에 수어 개의 작은 마법진이 생겼고, 그것에서 강렬한 물줄기가 내리꽂힌다.
반사적으로 겨우 피했지만 백뢰가 있던 곳은 처참했다. 바닥에는 깊이도 가늠하기 힘든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었고, 그곳에서 물이 울컥이다가
“{ η 반전 }”
콰아아아!
그 구멍에서 물줄기가 용솟음치듯 올라온다.
그것들은 곡선을 그리며 백뢰를 추적하였고, 그는 장애물에 몸을 숨기며 물줄기를 따돌렸다.
“뭐야, 마나 흐름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당혹감이 얼굴에 맺혔다. 원격 마법진은 본래 하나의 선을 그으며 생성되어야 한다.
저 수십 미터 밖에 마법진을 설치하려면 마나를 땅을 타고 흘려보내든, 대기에 흘려보내든, 어떤 방식으로라도 선을 그어야 시전자가 마법진을 가동할 수 있다는 거다. 이건 마학(??)에 있어서 불변의 진리였다.
‘내 머리 위에 갑자기 마법진이 생겼어.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디안이 한 짓인가?’
생각을 정리할수록 오히려 혼란이 드리운다.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자라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스프라임은 마법사다. 신체 강화를 필두로 한 고속 전투를 선호하지만 그의 본질은 악쿤 토든에게서 직접 마법을 배운 마법사라는 것이다.
마법사끼리의 전투는 본래 마법진을 읽고,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 그것에 걸맞게 반격하는 게 정석이다. 악쿤의 마탑에서 수제자 소리를 들었었던 백뢰는 우등생이었다.
마탑을 떠났음에도 그 공식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이 뼈에 새기고 살아갔으니 지금 그가 용병으로서 이름을 날리는 것이다.
그것이 발목을 잡았다.
“{ χορ με σπαθ (νερ) 칼춤 ? }”
“이런 씨발”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디안의 사체에게서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으나, 이번에도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마법진이 대뜸 생겨났고 물로 빚은 날카로운 검이 그의 몸을 쑤시고자 달려든다.
파지지직!!
전격을 터트리며 방어에는 성공했으나, 상황은 여전했다.
이 정체불명의 마법을 파훼하지 못하면 제아무리 백뢰라고 한들 절체불명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당황스러워?”
사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익숙했던 청아한 목소리가 들린다.
“너 같이 경험이 적은 먹잇감일수록 변수에 대처하는 건 어설프다고 참모장님이 알려주셨거든.”
“분명 죽였는데... 클론 마법을 익혔구나?”
“게으름 안 피운 보람이 있네. 너를 놀라게 하는 건 아마 처음이지?”
디안의 사체는 녹아내리며 바닥에 흡수되었다.
7서클 마법 클론. 디안의 서클은 아콜드의 서까지 합하여 6서클에 불과하지만, 룬어를 세세하게 모두 읊는다면 한 단계 위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이 양상은 그 결과물이었다. 백뢰는 허탈하게 웃었다.
“클론 마법이야 그렇다고 쳐. 누나도 서클은 올랐을 테니까. 근데 내 주위에 마법진들은 어떻게 한 거지?”
“내 패는 가급적 숨겨라. 참모장님이 가르치신 말씀 중 하나잖아. 벌써 잊었어? 우등생.”
“...하하, 누나한테 한 방 먹을 줄은 몰랐어. 그래, 말할 생각 없다는 건 잘 알겠어.”
주먹을 깍지끼곤 앞을 향해 뻗는다.
뚜둑 뚝 관절 뒤틀리는 소리 이후엔 팔을 어깨 뒤로 펴며 몸을 풀었다.
“그럼 알아내면 그만이지.”
파지지직!
그의 몸에 휘감겨 있던 은은했던 전격은 난폭하게 일렁인다.
“{ μετατρπεται σε αστραπ 전격화 }”
그의 신체 강화를 넘어선 기술이 몸을 감싼다.
그리고선 시야에서 또다시 사라졌다. 난폭한 전격만이 자리에서 빠직거린다.
‘방심해선 안 되겠어. 이토록 빨리 움직이면 마법진을 만들지도 못하겠지.’
그의 몸은 마법의 이름과 같이 한 줄기의 전격이 된 것처럼 재빨랐다.
미세하게 하얀 선을 그리며 디안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그 회전의 간격을 줄여가며 또다시 디안의 심장을 노리며 손을 뻗었을 때.
“{ κρηξη 폭발 (τ) }”
“개 씨발!!”
콰아아아!!
허공에 물줄기가 터졌고, 전격 한 줄기가 바닥에 엄청난 기세로 꽂혔다.
흙바닥이 밀린다. 온몸이 진흙으로 물든 백뢰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디안을 노려보았다.
“예전이랑 반대네?”
가면을 살짝 젖히곤 눈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마법진을 하나둘 생성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