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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07화 (107/152)

〈 107화 〉 투기장

* * *

“그래, 나가기 싫다 해도 내보낼 거란 건 알겠소.”

마지못해 듄이 고개를 주억였다. 탄력 있는 근육이 꿈틀거린다. 팔을 움직여 퀸에게 향했다.

“그쪽에서는 누가 나갈 거요?”

“함정에 절대 면역이 있는 자.”

*

[...세상에, 검술 용사의 아티팩트 능력은 천운을 주는 걸까요?]

관객이 모두 쉬쉬한다.

케일은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발판도 절대로 밟지 않는다.

관객은 숨을 죽였다. 작두를 타는 것 같은 아찔함. 케일은 오러도 두르지 않은 채 신속하게 뚜벅뚜벅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서 악취... 이 골목으로 갈까.’

미로를 제 집마냥 헤집으며 다니는 것에 역시 용사는 용사라는 의견이 파다한다.

감각이 엄청나다는 그런 의견, 혹은 신의 은총을 받아 함정을 모두 피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

관객 사이에 가설이 나돌지만, 그나마 정답에 근접했던 것은 ‘감각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케일은 후각으로 함정을 구분한다. 여지껏 던전에서 용사 일행이 무사했던 것도 케일의 덕이 컸다.

‘보물만 찾아내면 되는데... 그건 쉽지 않네.’

하지만 만능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들에 대해선 지독한 악취를 느낀다지만, 그게 아니라면 통용성이 넓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보물의 냄새를 맡는다던가 그녀의 후각에 그런 능력은 없다.

‘듄 씨는 괜찮으려나.’

끄아아아­!!

하늘에 울리는 변조된 비명 속 듄의 목소리가 섞여 있지는 않을까 우려가 들었다.

“어우, 아파 죽겠네...”

케일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듄의 옷은 넝마만도 못하게 찢겨 있었고, 그가 지나온 곳곳은 케일과는 대조되게 모든 함정이 다 발동된 채였다.

“나였으니 망정이지 원...”

하지만 상처는 일절 없었다.

거대한 전기 톱날이 그의 몸을 쑤시든, 식인 식물이 아가리를 벌리든, 몬스터가 불똥을 튀기며 달려들든,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다리미 모양의 철퇴가 그의 몸을 짓누르든.

옷과 몸이 더러워질 뿐, 상처는 생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크게 다칠 뻔했지! 하하!!”

듄은 허공의 카메라를 의식하며 크게 떠들었다.

*

용사 일행은 반전 없이 2차 경기에서 승리할 것처럼 보였다.

확실히 강했다. 용사 중 최약체였던 케일마저도 이제는 어엿한 전사로 거듭나고 있었다.

저 기세로 꾸준히 성장한다면 아티팩트를 얻은 후 아마 1년도 걸리지 않아서 마왕군에 쳐들어올 것이다. 젠장, 조금만 시간이 넉넉하다면 더 원활하게 준비할 수 있을 텐데.

시간을 벌었다지만 그게 전부다.

신살 계획에 있어서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크허어어어­

그 계획에 있어 첫 타도 대상인 케다시는 나를 믿는다면서 방에 드러누운 채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다. 이제는 용사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귀찮아진 것이다.

아니, 조금만 긍정적으로 해석해볼까.

그만큼이나 내가 케다시에게 신뢰를 얻었다고 보는 건 어떨까?

...헛웃음이 나왔다.

신뢰?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다.

케다시는 그저 절망적이리만큼 안일하고 게으른 성품일 뿐이다.

그를 마왕성에 데리고 있으면서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이라면 칼로 목을 찌르는 것만으로도 손쉽게 죽일 수 있을 텐데...

갑자기 살의가 목끝까지 차올랐지만 화면 속 시끄럽게 떠드는 사회자의 경박한 목소리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저토록 안일한 놈이 에이브(AYV)의 신의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문득 이 세계의 장르는 코미디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하아.

한숨이 나오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머저리인 것에 안도감이 생겼다.

아직 이용할 가치가 많다.

뒤통수 거하게 쳐줄 테니 기대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케다시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문제는 저놈이었다.

내가 따로 조종하는 원격 시야에 얼굴을 비추는 녀석.

흑단발의 남성. 그는 무표정하게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법 용사 장. 저놈의 성장도가 심상치 않았다.

현 용사들 중 장을 제외하면 모두가 아티팩트를 얻어냈다. 궁술 용사 빈은 좀 논외라고 치더라도 아무튼,

요점은 무기가 없는 장이 타 용사에 비해 아직은 파워업이 덜 되었다는 것인데, 현재 서클 수준으로도 안주하지 않고 밤마다 수련에 매진하는 것을 보면 아티팩트를 얻어낸 용사들보다도 장의 존재감이 더 커질 것이 얼핏 당연해 보였다.

세계를 구해내고자 하는 정의감인가?

케다시를 납치한 영향인가?

아니면 그의 눈앞에서 펙튼 포르시아를 죽인 영향인가?

원인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성장세에 찬물을 뿌려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라고 떠들었지만.

내 심장이 문제였다.

빌어처먹을 언약. 내용은 성심성의껏 용사를 키워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이재홍을 보낸 것이다. 그의 아티팩트를 탈취해 오라고.

눈앞에서 본인의 물건을 빼앗긴다면 그는 아티팩트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힘을 보충할 테니까. 그때 아티팩트를 얻는다면 그때야말로 나를 죽일 힘을 지니고 있을 테니까.

결국 키워낸다는 언약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투기장에서 지저분한 전투 방식을 배울 수도 있을 거고, 경험 많은 강자들을 상대하는 법도 배울 테니까 그의 성장을 위한다는 것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니 내 심장이 타오를 일도 없겠지.

그래서 문제다. 결과적으로 적을 내 손으로 키워내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문득 내가 용사였을 때를 떠올려본다.

메이블, 그리고 다른 사천왕들.

그들과의 마지막 전투, 그들이 각기 우리 4명을 동시에 상대했기에 승부라는 형태나마 띨 수 있었지만, 저 괴물 같은 놈은 계속 내 숨통을 죄어온다.

2년.

아마 2년 내에 나는 장에게 죽을 것이다.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에이브(AYV)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윤상아?”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땀으로 웃통을 흠뻑 적신 김철수가 있었다.

“용사들 보고 있구나.”

혼잣말인지 대화의 서두인지도 분간 안 가는 애매한 말을 던져놓고선 냉장고에 있는 생수병을 벌컥벌컥 들이켠다. 그에 무덤덤하게 답해줬다.

“응, 하루가 멀다하게 성장하고 있네.”

“케다시는?”

“방 안에서 주무시고 있어.”

존칭은 내 마음에도 들지 않지만,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그에 김철수가 복잡한 표정을 짓는다. 잠시 케다시가 있는 방에 시선이 머물렀다가 내 건너편에 있는 의자에 몸을 앉혔다. 나는 바람 마법진으로 그를 둘러싸고 땀을 식혀주기 시작했다.

“형은 별 탈 없는 것 같네.”

며칠 전 보았을 때와는 달리 상처가 꽤나 아물었다.

이젠 수련을 제법 따라가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응... 타나토스 씨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서.”

“다행이네.”

타나토스의 이름을 듣곤 허리춤에 있는 그의 검을 보았다.

확실히 매일 보아왔지만 예전보다 거대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머잖아 장검 수준이 아니라 대검의 반열에 들 수 있겠지.

먹보라는 그의 아티팩트이자 한때 파라소스를 다스렸던 블레드의 송곳니 얘기였다.

“지금은 잠잠한 모양이네.”

“응, 이것도 타나토스 씨가 지도해준 덕분이지.”

타나토스는 블레드의 자식이다.

그러니 저 아티팩트를 다루는 법에 대해서도 김철수보다도 타나토스가 더 전문성이 있었다.

현재 김철수의 하루 일과는 대충 군단장의 업무를 대충 해치운 후 나머지는 부관에게 집어던지고 줄의 램프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타나토스에게 지도를 받는다.

“참... 나한테 너무 과분한 물건이었더라고.”

먹보에 대한 평가였다. 지금은 바라만보아도 강렬한 기운이 풍긴다. 저 먹보 또한 굳이 숨기려는 노력 자체를 안 하고 있으니 그 기운은 내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었다. 크기도 물론이고 이 무기가 지닌 아우라 자체가 말이다.

문득 파라소스의 광경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뭣도 모르고 용사라는 이름에 취해 놀이터에 나도는 어린 꼬마들처럼 가볍게 행동하던 그 시절의 기억이 말이다.

“과분하기까지야, 잘 쓰면 그만이지.”

“그치... 잘 써봐야지.”

그 결의에 반응한 것일까, 먹보가 우우웅 진동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뭐야.”

일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등줄기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케다시가 무언가에 분노했나? 그가 자고 있는 방으로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마나 감지를 펼쳐봤지만, 그는 아직도 코를 골고 있었다.

휘이이이...

여전히 스산한 기운이 내 방을 뒤덮는다. 나는 마법진을 머금으며 주위를 살폈고, 마나 장벽을 넓게 펼치며 언제 어디에서 올지 모를 적습에 대비하고 있었다.

“왜 그래 윤상아?”

“안 느껴져? 지금 엄청 흉흉한...”

“아... 먹보가 깼구나. 몰랐네.”

그제야 내가 크게 착각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기운은 잠에서 깨어나 밥을 달라 진동하는 먹보의 소란에서 비롯했다.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수련의 성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김철수에게서 홀라의 기운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겨져있는 흉흉한 기운과 살기, 그리고 존재감.

“아이고, 나는 먹보 밥 주러 가봐야겠다. 얘 때문에 주인인 내가 못 자네... 어휴...”

그는 괜히 내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방에서 떠나갔다. 시계를 보자 대화를 나눈지 10분도 안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다행히 착실히 나아가곤 있다.’

램프 속에서 수련을 시작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김철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날로부터 여러 밤낮이 바뀌고 3차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때 독수리 길드장의 도움을 좀 받아 내가 임의적으로 대련표를 작성할 수 있었다.

‘8강, 벌써부터 용사 놈들이랑 재홍이를 붙여뒀다간 전멸할테니 그건 결승 때로 미루고...’

헤인켈이 있는 팀과 맞붙일까, 아니면 칼밥 먹은 용병들과 붙여서 실전 감각을 더 기르게 해줄까.

그리 고민하고 있을 때쯤, 이재홍에게서 연락이 왔다. 눈치껏 지금쯤 내가 대련표를 작성하고 있으리란 걸 알아 맞춘 것이다.

[야, 나 부려먹으면서 놀고 있으니 좋냐?]

첫 대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한소리 하려다가 그냥 웃고 넘겼다.

이재홍이니까... 라 되뇌이면서.

“왜, 나 바빠 새끼야.”

[대련표 짜고 있는 거 다 알아.]

“그러니까 바쁘다고.”

입이 방정인 사회자가 8강의 룰을 선공개한 게 문제였다.

4개의 조로 나뉜 팀끼리 맞붙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이번 룰은 그야말로 투기장이라는 이름과 가장 어울린다.

4개의 팀에서 2명씩 출전하여 대련장에 각기 던져놓고 개싸움을 붙인다.

한 명을 리타이어 시킬 때마다 +1점, 쓰러질 때마다 ­1점.

게임이 끝났을 때 더 많은 점수를 지닌 2팀이 올라간다.

게임이 끝났을 때 1등을 제한 팀의 점수가 같다면 그들끼리 데스매치가 진행되는 잔혹하면서도 간단하고 통쾌한 룰.

하지만 대진표를 짜는 입장에서는 간단하지 않다.

용사 일행에게 걸맞은 3팀을 붙여야 한다.

그 팀으로 헤인켈 팀과 좀 수준 있는 용병들을 붙이는 게 괜찮지 않을까란 생각에 미치고 있었는데 이재홍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늙은이 있는 팀 있지?]

“헤인켈?”

[어, 그 팀 우리랑 붙여. 용사는 다른 조로 보내버리고.]

“그 양반 아무리 너라도 제대로 안 하면 상대하기 힘들걸? 그보다 헤인켈한테 무슨 억하심정 있어? 갑자기 왜. 아니면 양이나 음 때문이야?”

[어떻게 오답만 기가막히게 고르냐, 다른 한 명 더 있잖아.]

“......”

애써 모른척 해왔건만, 이미 눈치챘던 것 같다.

[그래, 너 여자친구가 그짝한테 볼 일 있으시단다.]

...할 말은 많았지만, 그냥 내버려두고 싶다.

현 상황에서 과거 관계까지 청산하고자 에너지를 쓰기 싫다.

지금은 용사랑 에이브(AYV)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다. 떠나갔던 제자까지 혼내줄 여력이 없다는 말이다.

“허락 못한다고 전해.”

차갑게 말했다.

[허락해주세요.]

이에 반응하여 반대편에서 더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구슬 굴러가는 듯한 청아한 음색이었지만, 확실히 차가웠다.

[이건 참모장님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에요. 부탁드려요.]

“그럴 필요 없대도.”

[그럴 필요 있어요. 배반자를 처리하는 건 수제자의 몫이에요.]

“쓰읍­”

무언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한숨을 내쉬며 다시 삼켰다.

[제발...]

“......”

애원하듯 간절하게 말하자 더는 몰아세우기 어려웠다.

한참이나 수화기를 붙들고 멍하니 있다가,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슥­ 스슥­ 펜이 종이 위에서 미끄러진다. 저항 없이 그려지는 종이에는 ‘가면무도회’와 ‘위대한 마법의 주인과 아해들의 심포니’가 같은 곳에 적혀 있었다.

그걸 슈가리아에게 보냈다.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간 탓인지 글씨는 굵고 선명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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