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 투기장
* * *
2차 경기가 시작한 첫 날, 8개의 조 경기는 모두 끝났다.
이후 찾아온 건 휴식 시간.
팀명 용사는 주문한 덮밥을 우물거리며 다음날 출전 카드로 누구를 내보낼까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8개의 경기 중 보물을 찾아서 승리한 팀은 단 하나였다.
함정에 지독하게 당하거나, 적에게 무력으로 짓밟혀 패배를 외치는 게 태반이었다.
그 팀은 팀명 가면무도회.
마치 진 키아라처럼 눈으로 좇기도 어려운 몸놀림으로 함정을 모두 농락한 토끼 가면, 함정을 되려 길들이며 인도받는 용 가면.
“그들은 인간일까요.”
기넨이 작은 입을 벌리며 소고기 덮밥이 담긴 스푼을 입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용 가면은 주술을 사용하는 것 같았어.”
“그럼 아까 대마장에게 덤볐던 그 족제비의 용병처럼 반쪽짜리 드루이드인가요?”
“오러를 사용하지 않았으니 그건 아닐 거다. 어쩌면 드루이드일 수도 있겠군.”
“그럼 토끼 가면은 뭐라고 생각하수?”
“아무런 형상도 사용하지 않았어. 숨긴 거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사용 안 할 이유는 없을 테니 단순히 신체 능력이 무지막지하게 높은 자라고만 생각된다. 그 이상은 더 분석해봐야 알 수 있겠지.”
일행의 모든 의문에 답한 자는 퀸이었다.
가면무도회의 경기를 다른 경기와는 달리 눈을 부릅 뜨며 분석했던 덕이다.
그들의 기술, 능력, 작은 행동마저도 아주 세세하고도 지독하게 눈에 담아두었다는 것이다.
‘토끼 가면의 정체는 진 키아라는 아닐 것이다. 그녀의 부하인가?’
일행 중 저 가면무도회가 마왕군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퀸과 장뿐이다.
머잖아 케일에게도 일러두겠지만, 늑대에게까지 그 정보를 공유할 필요성은 느끼지 않았다.
그러니 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저들의 전력을 분석할 책임감을 느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마왕군은 슈가리아의 말대로 상당히 강력하다는 것이다.
‘여하튼 까다로운 녀석들이라는 건 확실하지. 토끼 가면은 내가 잡아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용 가면은 무슨 능력인지, 정체가 무엇인지도 확실히 파악할 수 없었다. 드루이드라는 추측밖에 남기지 못했지.’
확실한 건 바비룬을 제외한 전력도 강하다는 것이다.
결승에서 만나더라면 룰의 정체가 승패를 가르지 않을까.
그 룰을 미리 알아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슈가리아가 과연 협조해줄 것인가?
그렇지 않더라면 승리는 불확실하다. 설령 룰을 안다고 하더라도 높은 벽인 건 마찬가지다. 여지껏 상대해온 잔챙이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적이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흠.’
퀸은 덮밥 용기의 바닥을 긁으며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넣었다.
“대마장 있는 팀도 골 아픈데 저런 해괴한 놈들까지 나오다니.”
패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헝클였다.
이미 덮밥 두 개를 해치운 듄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기 팔뚝만 한 거대한 커피를 쭈우웁 빨아들이고 입맛을 다셨다.
“첫 경기 나온 놈들도 강했수. 저놈들도 못지 않게 상당한 전력이었고.”
“더군다나 고양이 가면은 특이한 마법을 쓰던데요.”
“마도구겠지. 괴학자 물건일 거고.”
“마도구든 뭐든 다 상당한 녀석들뿐이군. 격투 용사 양반은 누가 가장 강할 것 같소?”
“사자 가면. 용 가면이 그다음으로 까다로울 것 같고.”
“근데 정작 보물 먼저 찾은 건 토끼 가면이었잖소.”
“간발의 차였다. 10초만 더 있었더라면 용 가면이 차지했을 거다.”
보물을 찾은 속도가 강함을 나타내는 건 아니다.
더군다나 보물 방에 도착한 건 거의 동시였으니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근데 참 터무니 없지 않았소?”
커다란 위험을 피해낸 후 개봉한 보물 상자에 대한 얘기였다.
그 보물상자 속 물건은 과자였다. 놀리는 것인지, 나름 비싸고 인기 많은 과자들.
“비싼 마도구라도 주는 줄 알았더니, 무슨 과자야.”
“목숨 바쳐 얻어낸 보물이 저따위라면 맥 빠지긴 하겠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자 절로 허탈한 반응이 나왔다.
객석이나 각 팀별로의 대기실에서나. 심지어 사회자도 몰랐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진실된 반응인지, 연기인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쨌든, 우리는 누가 나갑니까?”
룰 자체가 더럽고 위험하다.
함정이 두려운 이유는 그 함정 자체에도 있지만 언제 어디에서 나올지 몰라 항시 경계해야 한다는 거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정신적인 고통도 동반한다. 게임이 길어질수록 피로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차라리 적팀에게 돌진하여 쓰러트리는 게 훨씬 편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 적이 어디 있는지 찾는 것조차 불가능하니 허튼 소리겠지만.
“보물을 찾는 감을 지니고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기보단 함정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를 선발 기준으로 뽑는 게 이롭다.”
전략적인 말을 뱉었지만, 대답이라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었다.
“어차피 마법 용사님이랑 기넨은 출전 못 하니까 1차 때처럼 한 명은 용사가, 한 명은 우리 늑대 쪽에서 나갑시다.”
“함정에 면역이 있는 자가 있던가? 나는 케일과 나를 생각하고 있었다.”
“에이, 용사 두 명이 나갈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저희도 돈 받아먹은 값은 해야죠.”
그러나 본인이 나간단 말은 아니었다.
패이의 시선이 조금씩 돌아가며 누군가에게 맺혔다.
“왜 쳐다보쇼?”
그 시선의 끝에 닿은 자는 커피 속 얼음을 으적으적 씹어먹는 듄이었다.
*
“헤인켈 님도 아닌 일개 용병이 검은 촛불을 사용한다고?”
장이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백뢰에게 다가갔다.
그는 입끝을 올리며 쾌활한 투로 대답했다.
“안 될 건 뭡니까? 그리고 용병이 아니라 심부름꾼이라니까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나 있어? 대마장이라는 배경도, 대국 플라금이라는 배경도, 용사와 친분조차도 없는 네놈 따위가 감히 검은 촛불을 탐해? 세계가 너를 우롱할 거다. 저들은 한때 우리를 가르쳤던 스승이었으니 자격을 시험한다는 말이라도 내뱉었지만, 너에겐 무슨 대의명분이 있지?”
헤인켈이 삿대질에 모욕감을 느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양, 음이 그를 다그쳤다.
덕분에 대화의 흐름이 끊기지 않았다. 장의 분노의 화살촉은 온전히 백뢰를 향하고 있었다.
“어... 대의명분이고 뭐고 그런 거창한 건 없는데요...”
“그래?”
장은 꼼지락거리던 주먹에서 검지만을 치켜세웠다.
그 끝을 백뢰의 눈앞에 가져갔다.
안대를 썼기에 보이진 않겠지만 기세 정도는 느낄 수 있을 터다.
장이 백뢰를 굉장히 적대하고 있다는 그 기세를 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내 앞길을 막는다는 뜻이네. 그렇다면 관객들이 너를 가엽게 여길만큼 대놓고 짓밟아줄 뿐이야. 용사를 적대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다.”
“워후. 무섭게 그러지 마요...”
“비단 당신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백뢰를 지나쳐 방의 중심에 선 채 이죽거리듯 말했다.
“용사의 자격을 시험? 어디 실컷 해보시죠. 보란 듯이 무너트려줄 테니까.”
“마법 용사야. 심보가 상당히 고약해졌구나.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어찌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그리도 건방지게 구느냐?”
“당신이 알 필요 없습니다.”
쾅!
그 말만을 남기고 장은 사라졌다.
케일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장과 스승들을 바라보곤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요약 좀 해주시지. 도대체 그 언쟁에서 뭘 얻어냈다는 거지?”
여까지 상황 설명을 마쳤을 때, 퀸이 복잡하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계속 도발해봤지만 섣불리 나서는 사람은 없었어. 자존심 강한 헤인켈이 발끈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참아냈다고.”
“그게 어쨌다는 거지?”
“우리 자격 시험, 이따위는 허울 좋은 거짓말이야. 그들도 아티팩트를 노리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그게 가당키나 한가? 검은 촛불은 네녀석 물건이 아닌가.”
“그러니 혼란스러워. 너희 아티팩트도 다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걸까?”
탁자 위에 놓인 클리브 솔리스, 어느 기사단원의 녹슨 건틀렛을 가리켰다.
“어... 음... 제 클리브 솔리스가 말하는데요...”
케일이 눈치를 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검은 촛불은 가능하대요.”
잠시 침묵이 인다.
시선이 케일에게 맺혔고, 클리브 솔리스는 다시 케일의 손에 쥐어진 채 우우웅 진동했다.
“검은 촛불은 가능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먼저 설명하자면 용사의 아티팩트는 각기 파동을 지니고 있는데, 그 파동은 용사에 맞물리며 반응해요.”
“검은 촛불은 예외인가?”
“예외는 아닌데, 아직 오빠의 파동과 맞물리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대요.”
눈을 감고 검과 교감하더니 다시 조그마한 입술을 살짝 벌렸다.
“다른 사람 손에 먼저 들어가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거예요.”
녹슨 건틀렛도, 클리브 솔리스도. 스톰브링거도 그렇다.
용사의 손에 먼저 들어갔기에 비로소 용사 전용의 아티팩트가 된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다른 사람도 이용할 수 있어요. 오빠의 손길을 거치질 않았으니까요.”
“...처음 듣는 얘기야.”
ONE(?)에 막 전송됐을 때 용사 일행은 플라티넘을 비롯한 그의 가신들에게 여럿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특히나 용사에 관한 내용. 이들의 사명과 아티팩트에 관한 것을.
그들은 아티팩트는 온전히 용사를 위한 물건이라고 했다.
다른 이는 다룰 수 없는 용사만의 물건이라고 말이다.
부디 그것을 얻고 마왕군을 물리쳐달라고 했다.
그 옆에는 양과 음이 있었다.
“너무 태도가 모순되잖아.”
자격을 시험한다는 명분이 있지만, 이미 증명했다고 스스로가 생각했다.
오만이 아니었다.
성장도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년만에 7서클을 달성한 것 자체가 장의 자격을 증명한다.
장은 헤인켈과 백뢰가 검은 촛불을 얻어내겠다고 말했을 때, 살살 해주진 않을 테니 각오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대화가 길어지고 그들의 반응을 살필수록 자신의 추측을 의심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그 추측 자체가 완전히 빗나갔다는 답에 도달하였다.
그들은 진정으로 검은 촛불을 원하고 있던 것이다.
“왜 일이 이렇게 굴러가는 거지?”
아티팩트는 다른 이도 사용할 수 있는가? 조그마한 의문이었는데 클리브 솔리스에 의해 진실이 되었다.
‘...빌어먹을.’
한때 아군이라고 생각했던 자들마저도 앞을 막아선다.
‘그대만이 마왕군을 물리칠 수 있는 건 아닐세.’
헤인켈이 말했던 것.
그가 검은 촛불을 얻어내면 용사를 대신하여 악쿤 토든을 비롯한 마왕군을 죽여줄 것인가?
설령 그렇더라도 양도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마왕군에 대적하기에 용사는 아직 부족한 게 사실이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만 마왕군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언제 마왕군이 어찌 움직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강해질 수 있을 때 강해져야 한다.
누구도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나약한 마음가짐으로는 빈을 구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악쿤을 죽일 수도 없겠지.
그러니 헤인켈이든 양이든 음이든, 백뢰라는 불쾌한 소년까지도.
모두 깨부술 수밖에 없다. 그들이 항복을 거절한 순간부터 정해졌다.
“결국 대적하게 되겠네요... 스승님과 전력을 다해 싸워야 될 줄은...”
케일의 표정은 착잡했다.
퀸이 그녀의 어깨를 딛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들은 전투의 베태랑이다. 이겨내면 우리는 지금보다 한층 더 강해질 것이다.”
그녀는 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우승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곧 2차 경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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