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105화 (105/152)

〈 105화 〉 투기장

* * *

대기실의 문앞에 서 있었다.

위대한 마법의 주인과 아해들의 심포니.

누가 팀명을 정했는지는 이미 알 것 같았다. 팀의 대장을 맡고 있는 노인이겠지.

“어이쿠, 이렇게 재회하게 되는군. 블랙 드래곤은 잘 지내고 있는가?”

“케일. 오랜만이군요.”

그 노인과 그의 옆을 수호기사처럼 지키고 있는 음이 저 복도를 통해 걸어온다.

상처가 없었기에 따로 치료실을 들리지도 않았다.

치렁치렁한 수염과 로브가 인상적인 헤인켈, 움직이기 편한 도복을 입은 음.

그들이 장과 케일을 반겼다.

*

“항복해주십시오.”

“흐음, 그건 어렵겠는데.”

헤인켈은 작게 도리질했다. 곤란하다는 투였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검은 촛불은 제 아티팩트입니다. 마왕군을 처부수기 위한 제 무기란 말입니다.”

“알고 있네.”

“어찌하여 남대륙의 대마장님이 제 앞길을 방해한단 말입니까?”

“나도 검은 촛불이 탐나기 때문이지. 그대만이 마왕군을 물리칠 수 있는 건 아닐세.”

“헤인켈님이 검은 촛불을 다룰 수 있다는 건가요?”

“글쎄, 시도해봐야 알겠지. 용사의 아티팩트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는 미지수이니 말일세.”

헤인켈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들 투성이에요. 어째서 대마장님을 도와 스승님들까지 움직이시나요?”

“주군의 명령이죠.”

“플라티넘 님이 용사를 방해하라고 하다니...”

“오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케일. 주군께서는 용사를 방해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검은 촛불을 헤인켈 님이 얻을 수 있게끔 곁을 지키라고 했던 거죠.”

“그게 같은 말 아닌가요? 검은 촛불을 어째서­”

“케일.”

양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예삿 예전에 수련할 때 따스했던 그 목소리와는 거리감이 있었다.

“그리고 장.”

“우리에게 가로막혀 아티팩트를 얻지 못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당신에게 검은 촛불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뜻이죠.”

음이 양의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왜 제 자격을 판단합니까?”

“마왕군은 강합니다. 진 키아라에게 고전했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제 몸이 기억하고 있어요.”

동문서답같지만, 질문의 핵심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아티팩트를 가질 수 있는 수준인지 가늠해주겠다는 거였다.

상당히 주제 넘는 발언이다. 양과 음은 케일의 스승이지만, 이들에게는 세계를 수호하라는 사명이 없다. 걱정은 뒤에서 조용히 하는 법. 직접 나서서 앞길을 방해하는 건 훼방에 불과하다.

“케일, 당신이 마왕군에 도전하고 싶거든, 저보다는 강해야 할 겁니다. 장이 아티팩트를 얻는다면 당신들은 곧장 마왕군에게 도전하겠죠. 그건 시기가 이릅니다. 과거의 당신들과 현재의 당신들의 수준 차가 극명하다는 건 굳이 검을 맞대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만, 여전히 마왕군에 닿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주군계서는 당신들이 섣부르게 죽음을 앞당길까 우려되어 저희가 당신들의 자격을 시험하라 하신 겁니다.”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건 사실이고, 목숨도 빚졌죠.”

터널에서 진 키아라를 막아준 것, 그때 양과 음이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 용사는 없었다.

“하지만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대마장 당신조차도.”

“하하하! 마법 용사. 그대의 서클이 어찌 되는가?”

“1~2년 내에 당신을 추월할 수 있을 정도라는 것만 일러두죠.”

“하, 하하하!! 이젠 제법 건방진 소리를 내뱉을 줄도 알게 되었군. 메일리에서 치욕을 딛고 한층 성장했을 때 그대의 서클은 겨우 5서클이었네. 그런데 본좌를 따라잡는다라? 이 얼마나 오만한 말인지 그대는 아는가?!”

“알죠. 현재 7서클인데.”

장이 덤덤하게 내뱉자 헤인켈의 얼굴이 살짝 주름졌다.

그는 놀란 눈으로 장을 담았고, 기다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애써 태연한 척 해봤지만 장은 그의 두 동공에 맞힌 당혹감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들은 강합니다. 그리고 은인이죠. 펙튼 스승님을 소개시켜주신 것은 잊지 못 합니다. 죽는 그날까지도.”

“7서클이라...... 전송자라는 놈들 어째 하나같이­”

“하지만 착각들 하고 계십니다.”

헤인켈의 중얼거림을 의도적으로 끊어내며 말을 뱉었다.

“당신들이 두려워 항복을 권한 게 아닙니다. 까다롭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예전과 달리 저희는 성장했어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장.”

“알아서 몸 사리라는 겁니다. 당신들 정도 되는 강자들 상대로 힘조절은 어려우니까요. 더 직설적으로 말할까요? 죽이기 싫으니까 꺼지라고. 어차피 마주하게 될 게 뻔하잖아?”

“오빠!!”

장의 목소리가 변했다. 케일이 당황하며 그의 어깨를 잡았지만 장은 팔을 휘둘러 그녀를 뿌리치고 헤인켈의 얼굴에 삿대질하며 다가갔다.

“이건 경고입니다. 제 말을 듣지 않는다면 선전포고가 되겠죠. 떠나십시오. 검은 촛불은 제 아티팩트입니다.”

“하하하하­!! 어째 날이 갈수록 자네는 악쿤을 닮아가는지 모르겠군!”

“헛소리 집어치워라! 그놈과 날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묘욕이다!!”

버럭 고함치자 저도 모르게 마나가 터져나왔다.

방이 순간 뒤흔들렸다. 그러자 양과 음이 서서히 검을 향해 손을 뻗었고, 헤인켈의 표정이 무표정하게 바뀌며 허공에 녹빛 마법진을 둥실 띄웠다.

“그만들 좀 하죠.”

그 분위기를 냉각시킨 건 다름 아닌 구석에서 조용히 누워 있던 백발의 소년이었다.

“대기실에서 싸우면 안 된다는 조약 모두 까먹었어요?”

그가 몸을 일으켰다. 눈에 낀 안대는 수면을 위한 용도가 아니었는지 여전히 벗지 않고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를 남기며 장에게 다가왔다.

“마법 용사 장. 초면이겠네요. 저는 백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전격 마법 쓰는 무소속 용병이라고.”

“용병이란 거창한 표현은 안 어울리고, 그냥 심부름꾼 같은 거죠.”

“당신은 이번 투기장에서 얻는 이득이 뭡니까? 어째서 헤인켈 님을 따르는 거죠?”

“저도 검은 촛불에 관심이 있거든요.”

백뢰라는 수수께끼의 사내까지 이리 말하니 장의 속에서 아티팩트에 대한 개념이 재정립됐다.

어쩌면... 아티팩트는 용사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저는 화염 마법은 영 젬병이었거든요. 검은 촛불이 저를 한층 강화시켜줄 수도 있잖습니까?”

*

“그래서.”

대뜸 말을 뱉었다. 멍하니 있던 디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팀명 가면무도회. 그들의 대기실에는 디안과 바비룬 둘만이 있었다.

토끼 가면과 용 가면은 2번째 경기에 출전한 채였다. 바비룬은 딱히 화면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어차피 승리는 너무나도 당연했다.

함정을 다 무시하고 신속하게 맵을 핥고 다니는 토끼 가면, 미로에 있는 모든 생명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골 때리는 용 가면.

[뭐야! 저들 정체가 도대체 뭔가요!! 함정을 농락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토끼 가면 씨는 함정이 발동하기도 전에 그 자리를 지나가고 있고, 용 가면 씨는 함정을 조종하고 있어요. 이런 미친!! 저거 만드느라 우리 마도구 개발자가 야근을 얼마나 했는데!! 이 얼마나 속상한 일이냐고요!!]

이들의 능력에 사회자가 혀를 내두루고 있었지만, 한낱 소음에 불과했다.

“관계가 어떻게 되는데. 그 백뢰라는 놈이랑 너랑.”

질문을 던진 바비룬은 디안의 옴짝달싹 못 하는 입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굴리며 기억을 더듬고 있었는데, 수 초가 지나고 나서야 생각이 정리된 듯했다.

“동생이요.”

“아, 동생... 동생?!”

“네. 동생이에요.”

분명 고아라고 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일인가.

디안은 한때 소매치기로 삶을 연명했었다고 들었었다. 그때 도둑굴에서 같이 지냈던 동생인가?

“참모장님의 수제자이기도 하고요.”

미처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정보를 추가했다.

괜한 얘기를 꺼낸 걸까 바비룬은 뒷머리를 긁었다.

*

천재(??), 하늘이 하사한 재능.

“너 진짜 마법 처음 배우는 거 맞아? 사실 마탑 입탑하고 시퍼서 몰래 접근한 거 아니야?”

“헤헤... 진짜 처음이라니까요.”

디안은 서클의 상승폭이 조금 빠른 축에 속했지만 이것은 별달리 놀라울 것도 아니었다.

악쿤이 감탄한 것은 그녀의 마법을 이해하는 방식이었다. 마학(??)에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 상태이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나쁜 버릇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좋아. 오늘 할 일은 마쳤고, 난 따로 연구해야 할 게 있으니까 숙제를 내줄게. 이 마법을 한 번 구축해봐. 아마 한 일주일 정도는 걸릴 거다.”

“{ σιωπ ­ 사일런스 }”

“......그럼 저 소파를 공중에 띄워봐. 마나 방출은 사용해서는 안 돼. 음... 이건 너무 어렵나? 아마 머리 좀 굴려야 할 거다.”

“{ αξηση τη βαρτητα ­ 중력 증가 ( τ, η ) }”

소파를 발로 살짝 올려차자 그것은 둥실 떠올랐다.

디안은 악쿤이 건네준 과제의 답이 맞는지 고개를 갸웃했고, 악쿤은 얼이 나간 얼굴로 디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16살이었다.

“......”

“스승님? 혹시 답이 아닌가요?”

“...아니야, 잠깐 멍해져서.”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빨려나간 듯한 얼굴.

‘나는 반전 룬 문자 구사하기까지 3달 걸렸는데 얘는 무슨 룬어 익힌지 2주일만에 반전 문자를...’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한 당혹감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런 원석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더 뼈아팠을 테니까.

그리고 제자의 성취는 곧 스승의 기쁨이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간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그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아마 이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설마 8서클에 도달하기도 전에 시그니처를 완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만은.

악쿤이 가르침을 주는 지식을 스펀지처럼 재빠르게 흡수한다. 그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재구성하여 변화시키곤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었다.

디안은 천재라고 불려 마땅했다.

비단 시그니처를 완성하기 전에도 그 말은 뜻이 통했다.

“디안, 이 녀석도 갈 곳 없는 녀석이야. 네가 누나이자 선배니까 동생처럼 잘 돌봐줘.”

그때 새하얀 머리칼의 꼬마 아이가 두리번거리며 악쿤의 손을 꼭 잡고 등장했다.

진짜 천재의 등장이었다.

“...아저씨. 여긴 어디죠?”

‘......아저씨.’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잠시 멈췄다.

“여긴 내 마탑이다. 이제부터 네가 먹고 자고 무언가를 배울 집이라고 생각하면 돼. 저기 너 앞에 있는 예쁜 누나 보이지? 저 누나가 너한테 이것저것 알려줄 거야. 그러니 까불면 안 돼. 저 누나 말 잘 들어야 한다?”

“그렇게만 하면 밥 주나요?”

“밥만 주겠냐, 용돈도 줄 거야.”

“...용돈은 됐어요. 밥만 주셔도 돼요.”

악쿤이 베풀 수 있는 조그마한 호의였을 뿐인데, 이 소년에게는 그마저도 부담스러웠던 걸까. 혹시라도 자신이 버려질까 최대한 겸손하게 나오는 걸까, 굉장히 곤란하단 기색이었다.

‘나는 악덕 마탑주가 될 생각은 없는데.’

허나 당분간은 저 상태로 두는 게 오히려 적응하기에는 더 좋을 것 같다.

용돈이라는 이름의 월급은 기록해두었다가 때가 되면 한방에 주도록 할까.

악쿤은 아이의 등을 다정하게 살짝 떠밀어 디안에게 다가가게끔 했다.

“디안, 급한대로 아무거나 꺼내서 밥 좀 먹여줄래? 나는 이 녀석 욕실이랑 방 좀 준비해야겠다.”

“아... 아, 네. 알겠어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악쿤의 지시가 못마땅한 것은 아니다.

디안의 반응은 아이의 상태에 있었다.

눈앞의 아이의 눈빛은 죽은 것처럼 생기라곤 없었고, 못 먹은 지 며칠이나 된 것처럼 볼은 핼쑥하였다. 어린아이임에도 피부에는 탄력이라곤 없었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거울로 보는 듯하다.

밥을 먹이려면 마탑의 2층으로 올라가면 그만이다. 악쿤이 지시해온 과제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주 쉬운 문제다.

허나 당혹감이 디안을 휘감는다. 마학을 이해하는 영특한 지력과는 맞물리지 않게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쉽사리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가냘픈 팔뚝을 보자 그 당혹감은 배가 되었다.

계단을 오르려던 악쿤은 문득 뒤를 바라보았다. 디안이 아이를 앞에 두고 쩔쩔매는 것을 지긋히 바라보다가 계단에서 발을 뗐다.

뒤돌아 다시 디안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머리 위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던대로 해. 얘 배고프잖아. 뭘 당황하고 있어. 너답지 않게.”

“아... 네.”

“잘 지내. 얘 이름은 스프라임이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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