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 투기장
* * *
“이야~ 저 늙은이 완전 날아다니네요?”
비유적인 말이 아니었다.
패이의 말대로 늙은이는 진짜 하늘을 활개치며 모든 함정을 농락하고 있었다.
“하하하! 이것이 마법이라는 것이다! 마법의 주인은 대마장이지!! 모두 본좌를 두 눈에 똑똑히 새겨두어라! 이것이 마법의 정수라는 것이다!! 알겠느냐!!”
경기가 시작됐고, 그 속에서는 자기의 명성을 자기가 읊조리는 대마장 헤인켈이 있었다.
그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음. 그는 미로의 벽을 잘라내며 천천히 보물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전쟁이 낳은 괴물 양, 음과 남대륙의 대마장이 한 팀으로 투기장에 참가했습니다! 잘못 들은 거 아닙니다. 마학(??)의 정점이라 불리는 대마장 맞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용사에 이어 수수께끼의 가면무도회라는 실력자들로도 모자랐는지 대마장까지 나오다니...!! 아아...... 게임이 길어질수록 배팅이 너무 재밌을 것 같아서 절로 몸서리가 쳐집니다. 으으으... 전율이 돋아요 전율이. 이런 거물들이 전투를 벌인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말이나!!]
사회자의 가면 속은 침으로 범벅이 되어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변조된 목소리지만 삑도 자주 났다.
사회자이기에 분위기를 돋구고자 열을 올리는 것도 있겠지만, 그를 제하더라도 대마장이라는 직책은 용사의 것과 견줄 수 있다. 어쩌면 그 이상이다.
헤인켈은 마학이 가장 발달한 남대륙에서 수십 년을 넘게 대마장의 자리를 지켜왔다.
그것만으로도 그에 대한 설명은 끝났다.
대마장이라는 칭호 자체가 인류 중 마법을 가장 잘 다루는 자를 뜻하니까.
“저, 저 사람 대마장님... 맞죠?”
“끼에! 끼에!”
“바둑아, 너 말대로 당연히 척 보면 알지... 아는데, 부정하고 싶어서 그래...”
그런 그가 어째서 이 투기장에 나왔단 말인가.
명예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검은 촛불을 탐해서? 용사의 아티팩트따위 가져가봤자 어디에 쓸모가 있겠는가?
모든 가능성에 붉은 선으로 곱표를 쳤다. 케일과 장은 큰 충격을 먹은 채였다.
“양, 음이랑 대마장이 왜 같은 팀이냐고.”
“끼에! 끼에!”
“농담할 기분 아니야.”
“...끼에.”
화면 속 날아다니는 헤인켈을 보자 일행은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퀸은 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터라 오히려 눈을 번뜩이고 있었지만.
“엥, 대마장이랑 아는 사이이십니까?”
패이가 의자를 드르륵 돌리며 말했다. 장은 복잡한 표정으로 의문에 답해주었다. 순간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든 것 같았다.
“제 스승의 스승이에요.”
“스승의 스승이라... 사제 관계의 사제 관계... 그럼 쌰제 관계라고 하나요?”
“......”
“이상하다, 늑대에서는 잘 먹혔는데.”
“선배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런 몹쓸 개그할 때마다 다들 뒤에서 욕했수다.”
“......”
“패이 폐급 새끼라면서.”
듄은 말을 이었다.
“줄여서 패폐.”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궁시렁거리듯 말을 흘렸다.
“펭귄 이름 같네.”
“...좀 닥쳐.”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 헤인켈이 화면 속에서 음을 향해 소리쳤다.
“오른쪽이다! 그래! 그 상태로 직진하라 음!!”
“예.”
음은 경기 내내 무표정이었다.
헤인켈의 명령에 따라 벽을 자르고 보물을 향해 다가가는 것의 반복이었다.
중간에 함정은 있었지만, 순발력으로 피하거나 오러를 터트리며 함정 자체를 깨부쉈다. 때로는 검을 휘둘러 몬스터를 일도에 양단내고 덤덤하게 보물을 향해 직진하고 있었다.
[대마장 쯤 되면 말의 무게가 무겁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늘을 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군요!]
사회자의 말에 객석에 웃음이 피었다.
헤인켈이 직접 보물에 다가가면 진작 경기는 종료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하지 않았다.
“어찌 대마장이 직접 움직인단 말이냐? 아해는 고생을 하며 크는 법이다.”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이리 말했으니까.
그는 죽어도 보물을 제손으로 열 생각은 없었다. 무슨 자존심인지는 모르겠지만.
“야!! 대마장 이 늙은 여우야!! 대마장씩이나 되는 괴물 새끼가 왜 우리 밥그릇 뺏는 거야!! 마탑에 처박혀서 고리타분하게 책이나 읽을 것이지 씨바아알!!”
그 안일한 태도에 분이 차올랐는지 상대팀의 누군가가 소리쳤다.
3대 길드 중 하나인 족제비의 용병이었다. 시커먼 피부를 지닌 그는 하늘을 향해 삿대질했다. 그 손가락의 끝에는 헤인켈이 있었고, 그 궤적을 따라 목소리마저도 닿았다.
와아아아아!!
음이 단박에 보물을 찾을까봐 흥미를 잃어가던 관객들은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비로소 게임이 재밌게 흘러갈 것 같은 예감이 진하게 진동한다.
헤인켈은 비록 입이 방정이지만 실력만큼은 진품이다.
8서클. 그리고 대마장. 무얼 더 설명하랴.
그런 그를 도발하다니.
우레 같은 박수의 의미는 단지 환호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삶에 애도를 보낸다는 중의적 의미도 지니고 있을 터.
“무, 무어라? 늙은 여우?!”
헤인켈의 얼굴이 울긋불긋하다.
이마에 힘줄이 드리운다. 호쾌하던 얼굴이 험악한 표정으로 전환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냐, 본좌가 직접 네놈의 버릇을 고쳐주도록 하지!!”
상공을 배회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는지 그는 포환처럼 용병에게 달려들었다.
“목줄기 빳빳한 사람은 조금만 도발하면 금방 달려들더라. 끌어들이는 건줄도 모르고 자만감에 찌들어 있는 멍청이들.”
헤인켈에 대한 폭언을 쏟아냈으나 귀를 찢는 바람 소리 때문에 듣지는 못한 것 같았다. 얼굴이 더 험악해지지 않았다는 게 반증이었다.
조금 아쉽다는 듯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헤인켈의 뒤에 서서히 그려지는 녹빛 마법진을 보자 사내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자세를 잡았다. 조금은 특이한 자세였다.
오른 주먹을 꽉 움켜쥐고, 왼손으로 그것을 감싼다.
허리춤으로 양주먹을 끌었다. 오러를 다루는 자들이 허리춤에서 발도하는 자세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하지만 그의 몸 어딘가에도 검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 늙으셨으면서 화까지 버럭버럭 내면 담 와요. 연세도 연세인데 슬슬 조심하셔야죠 어르신아.”
“이, 이이익! 그 천박한 입을 반죽처럼 짓이겨주리라!! { μετωρο 운석 火!! }”
“그건 꽤나 어려울 겁니다. 내 몸은 곧 검이거든요.”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는다.
그의 몸이 마법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녹빛 운석의 그림자에 가려진다.
모두가 수어 초 이후의 광경을 어렵지 않게 예상했다. 저 사내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터져버리리라. 곧 핏빛으로 바닥을 물들이겠지.
˚ 형변(??) ?. ˚
짧은 울림.
사내가 발도하듯 손을 휘둘렀다. 순간 경기장이 빛난 것 같았다.
이변이 발생했다.
쩌어어어억
거대한 운석의 사이가 쩌억 벌어진다. 그 벌어짐은 점차 심해졌고, 매끈한 단면도를 보여주며 사내가 아닌 그의 양옆을 향해 천천히 떨어진다.
[반전!! 대반전!! 족제비의 용병 케이리다가 운석을 반으로 잘랐습니다!! 검은 어디에 있죠? 마법인가요? 저, 저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허나 대마장의 전력의 마법을 단 한 번의 몸짓으로 잘라냈다는 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족제비는 해괴망측한 녀석을 부하로 지니고 있군.”
퀸이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일순 일행에게는 운석이 잘리자마자 정적이 흘렀기에 그 목소리는 아주 선명했다.
“주술, 그것과 오러가 뒤섞였다. 저놈도 나와 같은 잡종이다.”
고대에는 주술과 오러를 같은 개념으로 취급했었다.
심장에 마나라는 연기처럼 모호한 것을 담아 사용하는 마법과는 다르게 주술과 오러는 생명력과 정신력을 자원으로 사용한다.
강한 육체에는 강한 정신이 깃든다.
생명력과 정신력은 오묘하게 엮여 있는 구석이 많았다.
때는 과거 노젤루스가 활개치던 시절로 돌아간다.
기사단원이 오러를 깨우치는 과정 중에 저도 모르게 주술을 터득하는 사례도 간간이 있었다. 대조되게 주술을 갈고 닦던 자가 명상을 하며 생명력을 증폭시키던 중 은은하게 오러를 발산하는 경우도 있다.
허나 인간이 발현할 수 있는 그 두 현상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예 다른 개념으로 취급한다.
오러를 다루는 자는 차고 넘친다.
입문할 수 있게끔 정돈해둔 문서도 어렵지 않게 구매할 수 있다.
허나 주술을 다루는 자는 극소수다. 드루이드라 본인을 칭하는 야수와 인간 그 언저리의 존재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몇몇 학자들은 드루이드는 평화의 상징인 비이린에서 세계수의 그늘 아래 존재한다는 가설을 주장했지만 그곳은 선택받은 자만이 갈 수 있다는 전설 속의 지역인 터라 마땅히 밝혀진 건 없다.
그러니 주술을 다루는 인간은 희귀하다.
핏줄을 타고나지 않은 이상 스스로가 주술을 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궁술 용사 빈 같은 전송자의 경우는 당연히 제한다.
그럼 저 헤인켈에 맞서는 자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까?
장의 머릿속에 ONE(?)에서 읽었던 서적에 적힌 구절이 흑연이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문자로 떠올랐다.
‘옛적 주술과 오러를 양립하여 다루던 특별한 자들이 있었다. 현대로 거슬러 올라와 그들의 후손은 그 능력을 물려받아 여전히 오러와 주술 두 현상을 모두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천지(??)를 둘러싼 마기(??)의 영향으로 인해 생명력의 격을 높이기에는 조건이 따르지 않았다. 선조에 비하자면 그들의 능력은 확연히 약해진 게 사실이다. 서대륙의 국왕 학카르 프리브룩스는 그들을 일컬어’
“선인(?人)이라는 뜻의 네라이다(Νεριδα)라 칭했다...”
“네라이다가 뭐요?”
손톱을 깎던 듄이 물음을 던졌지만 장은 머리칼 끝을 매만지며 답하지 않고 화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양과 음, 더군다나 그들과 대마장 헤인켈이 손을 잡은 것도 적잖이 충격이었는데, 고대 종족까지 모습을 드러냈어. 투기장의 수준이 너무 높아. 검은 촛불의 파급력인가?’
용사의 아티팩트가 가지는 의미는 크다. 세계를 구원할 4개의 열쇠 중 하나이니.
방금 아티팩트를 열쇠라고 칭했다. 그렇다면 자물쇠는? 당연 용사이다.
당연히 열쇠는 맞는 자물쇠와 함께일 때 진가를 발휘한다.
열쇠가 금으로 치창하든, 찬란한 보석을 박고 있든 그 무슨 상관인가.
아무것도 열지 못하면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쓰레기일 뿐인데.
“얼씨구, 내 말은 깡그리 무시당했네.”
“듄 씨가 이해하세요. 기장 오빠는 한 번 생각에 잠기면 옆에 폭탄이 떨어져도 모르거든요.”
‘...이렇게만 보면 양, 음 제자라고는 안 보이는데.’
옆에서 일행들이 무어라 떠들든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 참가자가 네라이다라는 것에 의미를 둘 필요는 없었다.
네라이다가 왜 이 투기장에 참가했냐는 것이 중요했다.
얼핏 보면 같은 말같지만 참가의 목적에 초점을 두면 조금은 달라진다.
돈을 위해서였더라면 다른 투기장을 활개치고 다니면 된다.
장은 물끄러미 듄을 바라봤다.
시퍼런 눈동자가 그를 훑다가 듄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하자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엊그제 저 대머리가 임무 지원금을 내다 버린 곳만 나가도 이 투기장에 나오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가져갈 가능성이 커. 기회비용이 말도 안 되게 차이 난단 말이지.’
주술은 정령과 화합하여 대지를 뒤흔들고 바람을 조종한다.
그로도 모자라 몸의 가죽과 뼈를 부풀리기도 하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현상이다.
오러는 보다 낮은 경지를 지닌 자에게 있어서는 뚫어내기 힘겨운 방패이자 피격당하면 뼈를 으스러트리는 둔기와도 같다.
네라이다는 그 두 개를 모두 다루는 존재이다.
심지어 그 두 현상을 융합하여 예측 불허한 기술을 선사할 수도 있다.
이는 네라이다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웬만한 인간은 아기 다루듯 제압할 수 있다는 말과 직결된다.
“...서, 설마 네놈은 네라이다인 것이냐? 족제비는 끔찍한 잡종을 기르는구만그래!”
“거울은 보고 사십니까? 당신도 용이랑 인간 섞인 잡종이잖아요.”
보아라, 화면 속 천하의 대마장조차도 당황하고 있다.
‘양, 음, 대마장으로도 모자라 네라이다까지 투기장에 참여했어. 라인업이 높아도 너무 높잖아.’
이 투기장에서는 우승을 하지 않더라도 위로금이라는 게 나온다.
참가하여 관객의 열을 높여준 것에 대한 독수리의 최소한의 호의랄까.
경기를 치뤄 높이 올라갈수록 그 위로금은 눈덩이처럼 몸집을 부풀린다.
4강까지 올라가면 위로금에서 상금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어쨌거나 돈을 준다는 맥락은 같다.
여까지 생각이 도달했을 때 장은 속으로 계산에 들어섰다.
그 4강까지 올라간 자의 상금이 타 투기장의 우승 비용보다 값질까?
투기장의 규모, 관객의 수, 배율 등등 부가적인 요소까지 모두 고려하여 나온 답은,
그럴 수는 있다. 하지만 큰 차이는 안 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거대 투기장에서 4강에 진출하는 것과 타 투기장에서 연승가도를 이어가는 것은 비슷한 재화를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인데, 타 투기장의 수준은 이 독수리의 거대 투기장에 비해 현저히 낮다.
당장 듄이나 기넨만 투입하더라도 10연승 이상을 유지할 것이다.
“할 말 있나?”
퀸은 그곳을 오러나 마나를 사용하지 않고도 재패하고 왔다는 게 근거였다.
그러니 의문점은 커져만 간다.
헤인켈과 양, 음. 이들이 어째서 투기장에 참여한 것일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족제비의 실력 있는 용병조차도 어째서 이 투기장에 참여한 것일까.
마찬가지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승 상품을 위해서라기에는 장에게 맞는 열쇠이지, 남들에게는 쓰레기인 물품이다.
어째서 그걸 우승 상품으로 내걸었는지도 처음부터 의문이었다.
하지만 슈가리아의 입에서는 통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날 밤의 밀담에서도, 퀸과 셋이서 보이지 않는 공방이 오갔을 때에도.
...아직은 말이다.
‘내 의문점과 연결되어 있는 걸까?’
어째서인지 누군가에 의해 조종받고 있다는 느낌.
터무니없지만 어째서인지 머릿속에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시커먼 것들.
“그러게 입을 잘 놀리지 그랬나. 미천한 아랫것.”
“허어... 허어... 쿠, 쿠흐흡! 우웨에엑!!”
그때 승부가 났다.
[아아!! 신인의 등장이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가!!]
그는 연속되는 헤인켈의 운석 폭격에 지쳐가고 있었다.
운석의 잔해 때문에 피할 발판도 사라지고 있다. 머지않아 음이 보물에 도달하기도 전에 저 네이디라가 패배를 외칠 것이다.
“항... 항복...”
게임은 끝났다. 기세 좋게 떠들었지만 그는 대마장에게 무릎 꿇었다.
그리곤 5개의 화면이 하나로 통일되면서 사회자의 가면을 부담스럽게 비췄다.
꼴보기 싫은 가면. 중얼거리며 장은 케일에게 손짓했다.
“지혜야.”
“응?”
“잠시만 나랑 어디 좀 가자.”
“대기실 가세요?”
“예.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팀명 ‘위대한 마법의 주인과 아해들의 심포니’의 대기실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