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투기장
* * *
살의가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아니야.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속으로 고개를 격하게 절렜다.
미친 생각이었다.
그런 불상사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용사와 적대해서는 안 된다.
그럼 버려지게 될 테니까.
“...ONE(?)의 주민으로서 마왕군을 훼방 놓는 게 잘못됐나요?”
머리를 식히고 퀸의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스스로 말하고도 제법 괜찮은 대답인 것 같았다.
반박해볼 테면 해보시지?
방금 슈가리아가 내뱉은 말은 너무나 당연한 소리다. 진리를 꿰뚫는 소리다.
마왕군은 인류의 적. 슈가리아는 인간이다.
길드는 혼세에 가까워질수록 돈을 만지는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마왕군을 곱게 여기는 건 절대 아니다.
슈가리아는 본인이 실렉티스가 아니면 어떻게 행동할까를 생각했다.
나는 실렉티스가 아니다... 그저 한 길드의 수장일 뿐이다... 자가최면을 걸며.
좋아, 캐릭터는 정해졌다. 이제 그에 맞춰 행동하면 그만이다.
마왕군의 존재의의를 몰랐다면?
나는 그들에게 맞섰을 거야.
맞아. 그럼, 당연하지.
마왕군은 인류를 위협하는 절대악인 걸.
나는 그들을 증오했을 거라고.
...아마도 말이야.
확신이 없었다.
속에서 망설임이 가득해진다.
표정은 보이지 않는 가면을 써서 애써 감추고 있지만, 속내까지는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퀸은 감각이 발달한 야수 같은 면모가 있었다.
저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갈색 동공은 꽤나 불쾌하고 소름 끼쳤다.
“......”
그녀는 슈가리아의 눈을 지독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뗐다. 헛웃음을 지으면서.
“...아니, 지당한 행동이지. 무척이나 정의로워.”
잘 넘어간 걸까?
“하지만 당신과는 어울리지 않아.”
아니었다.
‘씨발, 웃기고 있네. 꼭두각시 따위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울컥했다. 목이 살짝 메어왔다.
여유가 사라진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말투에 날이 선다.
“저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듯 말씀하시는군요. 정작 방금의 대화를 제하면 일면식도 없던 격투 용사님이 말이죠.”
“그것도 내 주장에 힘을 싣는군. 일면식도 없는 우리를 어째 돕는가?”
“역으로 묻죠. 제가 일면식도 없는 마왕군을 도울 이유는 있나요?”
“난 마왕군을 돕는다고 말한 적이 없다만. 마왕군을 도울 생각이 있었는가?”
‘진짜 죽여버릴까?’
감정이 격해진다.
속에서 폭풍우가 몰아친다. 내면의 밤바다는 시커멓게 물들었고 물줄기가 요란하게 솟구쳤다.
“퀸...! 왜 그러는 거야...!”
그 바닷가에 고요가 맴돌았다.
원군의 등장. 다름 아닌 퀸의 동료인 장이다.
후우, 한시름 놓았다. 그가 퀸만큼의 통찰력을 지니고 있더라면 꽤나 피곤할 뻔했다.
‘그래, 이게 정상이지. 내가 준비한 대답은 아주 설계적이었어. 감히 어떻게 나를 의심해?’
심장 박동이 정상적으로 돌아온다. 냉철한 사고가 가능해졌다.
‘내가 예민하게 반응했어. 저 무식한 년은 떠오르는대로 아무렇게나 지껄인 것일 텐데.’
사람이 잘 속는 때는 본인이 속이는 입장이라 착각할 때이다.
용사에게 그것을 심어뒀다.
우리는 마왕군을 속이고 있다.
검은 촛불이라는 덫으로 그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 덫에 빠진 건 사실 장을 비롯한 용사들이었다.
봐라, 장은 보기 좋게 속아 넘어갔지 않은가?
‘멍청이들이 놀라게 하고 있어.’
결과는 슈가리아의 승리였다.
그녀는 장을 보며 생각했다.
바보야, 너는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실렉티스라는 이름을 지닌 세계를 조각하는 수집가들에 의해서 말이야.
그래도 괜찮아. 기분 상할 필요는 없어.
네가 정상이야. 너 동료가 이상한 거야.
“가만히 있어 봐라.”
“야, 너나 가만히 있어... 저 사람 말이 맞아. 내가 좀 성급했어. 그러니까 제발 너부터 가만히 있어 봐. 저 사람 우리 편이잖아...”
장은 속삭이듯 퀸을 다그쳤다.
그 모든 대사가 극도로 발달한 슈가리아의 귀에는 스피커를 틀고 말하는 거와 다름없이 선명하게 들렸다.
장은 잘못을 들킬까 우려 가득한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해 보였고, 한편으로는 사랑스러웠다.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장.
에이브(AYV)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케다시가 계획한 투기장이라는 이름의 연극.
주연 배우는 다름 아닌 슈가리아였다.
이 연극을 진행함에 있어서 가장 큰 벽은 장이었다.
그는 아주 의심 많은 사내이니까.
허나 기우(??)였다. 어제 밀담을 나눴을 때의 까칠한 장은 더 이상 없었다.
슈가리아의 설득에 완전히 탄복한 것이다.
베시시
또다시 특유의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 웃음을 거뒀다.
말마따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장이라면 몰라도 퀸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으니까.
그녀를 납득시키지는 못하더라도 이 대화는 정상적으로 끝맺음 내야 한다.
“...말꼬리 잡고 장난질이나 할 거면 가볼게요.”
정색하는 것을 택했다.
“어딜 가는 거지?”
소용 없었다.
퀸, 그녀는 슈가리아에 대한 의심이 가득했다.
근본적인 것부터 의심하고 드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최대한 감정이 들키지 않게 무표정을 고수하며.
‘저 년이 왜 저럴까. 혹시 실렉티스에 대한 걸 알고 있나?’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궁술 용사 빈을 연기하는 케다시가 실수하지 않았더라면 어디에서도 정보가 새어 나갈 일은 없었다.
설령 존재를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더라도 슈가리아 본인을 의심할 건덕지는 전혀 없었다.
“아직 얘기가 안 끝났는데.”
그런데 퀸은 당최 왜 이리도 물고 늘어지는 것인가.
그녀에게 물린 부분은 무척이나 아팠다. 뜨겁다. 피가 새어 나온다. 그 상처 부위를 마구 헤집는다. 그만 좀 해 제발.
둘러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준비한 대답은 진작에 다 내뱉었다.
피곤함이 배가 됐다.
허투루 입을 놀렸다가 문신이 불을 뿜으며 온몸이 재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기에 말을 신중히 뱉어야 한다. 온갖 신경을 퀸의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행히 윤기라고는 없는 그녀의 입술은 잠시나마 얌전했다.
대답을 기다려주는 것이다.
‘저 짐승이 내게서 흘러나오는 피 냄새를 눈치채고 반응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자.’
그래, 그게 좋겠어.
차가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저는 할 말은 다 한걸요. 그쪽이랑 대화할 필요는 더 없다고 봐요. 결승 전에 저희 쪽에서 사람을 보낼 테니 남은 경기나 무사히 치를 궁리나 하세요.”
“회피하는군.”
“네, 회피랍니다~”
뒤돌아 머리 위로 손을 붕붕 흔들며 계단을 올랐다.
여유 가득한 제스처였지만, 등줄기는 식은땀을 주륵 흘리고 있었다.
*
장은 그 뒷모습에 무심코 시선이 따라가다가 짧게 콧방귀를 뀌곤 쭈그려 앉았다.
“어렵다 어려워... 다 모르겠다... 누가 우리 편이고, 누가 적인지도 분간이 안 가...”
“이기장, 네가 말했어도 됐잖은가. 왜 나를 시킨 것이지?”
퀸은 장에게서 다타리오를 데려가 자신의 어깨에 앉혔다. 장은 기다란 머리칼을 위로 넘기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그러는 편이 슈가리아 옆에 있기 편하거든. 이제 슈가리아는 퀸 너를 경계하겠지. 너는 우연을 가장하며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던 거잖아.”
“그럼 뭐가 달라지는가?”
“슈가리아 속에서 내가 이 만남을 의도했다는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될 거 아니야. 나도 너를 보며 당황했었으니까. 네가 방해꾼이 된 거지.”
장은 배를 쓰다듬었다.
복통을 핑계로 나왔지만 이제는 진짜로 배가 아팠다.
너무나 긴장한 탓일까.
퀸이 혹시라도 말을 잘못 뱉을까 봐 속으로 간 졸였던 것은 장만 아는 사실이다.
“잘 해줬어. 마지막에 내가 널 말리는 액션을 취했으니까 이제 슈가리아는 나를 보다 투명하게 대할 거야. 모든 의심은 네가 독박 쓰는 거지.”
“나를 악역으로 세웠군.”
“신경도 안 쓰잖아?”
“호오, 이젠 제법 나를 파악했구나.”
“야, 같이 지낸 게 1년이야.”
장은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배를 감싸안으며 이번에는 진짜 화장실로 향했다.
“슈가리아 저 여자를 통해 진실을 알아내겠어. 운명이라는 이름의 장난질을 누가 조종하는지 말이야.”
“푸핫! 비장한 대사 치고는 몰골이 너무 볼품없지 않은가?”
“좀 봐줘라... 참느라 죽는줄 알았다.”
장은 벽을 짚으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
2차 경기가 시작되었다.
팀명 용사는 이번에 첫 조가 아니었다.
전략의 공정성을 위해 역순으로 진행한단다. 그러니 용사는 마지막 조가 되었다.
그러니 용사 팀에게는 대기실에서 전략을 가다듬을 시간이 하루는 있었다.
오늘자 경기는 총 4번 진행된다. 또한 1차 경기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들도 분석해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 때문에 옹기종기 모여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가 케일이 사온 팥빵을 입에 우물거리며.
“자기야, 아~”
듄은 그 팥빵을 먹기 좋은 크기로 조금 떼어 기넨의 입으로 향했다.
“치워.”
“에이... 여보야, 잘 먹어야 상처도 금방 아물지 않겠어?”
“각설하고, 나 피 터지게 싸우고 있을 때 다른 투기장에 기웃거린 기분은 어땠어?”
기넨이 그르렁거렸다.
엊그제 팀명 용사가 첫 번째 경기를 치를 때 듄이 대기실에서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다시 꺼냈다.
‘야이 씨! 거기서 카운터를 이렇게 슉 슈슉 하고 해야지 슉발놈아!!’
동시각에 듄은 임무 수행비로 다른 투기장에서 열 높이며 배팅을 하고 있었다.
케일과 패이, 퀸은 듄이 사라졌다는 것도 뒤늦게 알아챘다. 육중한 몸집과는 다르게 쥐새끼처럼 너무나도 조용하고도 은밀하게 잘 빠져나갔기에.
“다 잃었다며?”
기넨의 목소리는 서리라도 낀 것처럼 으슬으슬했다.
“...다 잃은 건 아니고 10골드 정도는 남겨왔는데...”
“아아~ 내가 말실수를 했네. 10분의 1로 줄은 걸 다 잃었다고 하다니 말이야.”
“하하, 목이 타는구만... 어라, 컵에 물이 10분의 1이나 남았잖아?”
“에라이 씨팔 새끼야.”
쩌억!
팥빵은 오른손에 들고 있었고, 왼손에는 애용하는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그 단도를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지며 일어났다. 패이였다.
“듄 이 새끼야, 너 사실 초월자지? 그러니까 맞아 죽어도 모자랄 짓 하고도 태평한 거지?”
패이가 까득 이를 물었다.
듄은 맨들맨들한 머리를 만지며 허허 웃었다.
“에이, 선배 또 말씀 섭하게 하시오. 그깟 거 다시 따오면 그만 아니겠소?”
“......기넨, 네가 알아서 해 줘라.”
“네.”
“어, 어허! 저번에도 말했지만 가정폭력 반드애애애액”
콰앙! 쾅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듄이 이리저리 벽면이나 바닥에 처박힌다.
그 모습에 잠시 주목했던 용사 일행은 거짓말처럼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패이 씨도 힘드시겠어요.”
“너무 힘들죠. 제가 저 녀석 때문에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도 말했던가요?”
“그건 변명이고요.”
‘안 통하네.’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피하곤 성급히 주제를 돌렸다.
“휘, 휘이~♬ 경기 내용이 제법 잔인한걸요?”
“......확실히 악취미 가득한 룰이군요.”
듄보다는 나았기에 그의 대화 회피를 너그러히 받아들이며 화면 속 투사들을 보았다.
용인으로 구성된 조 한 쌍.
그에 맞서는 상대편은 서대륙 별의 마탑에서 추방된 떠돌이 마법사와 용병 조합이었다.
이들은 ‘잔을 채워라’ 경기랑은 다르게 박터지게 싸우고 있지 않았다.
애초에 맞닥뜨리지도 않았다. 그러니 싸울 일도 없다.
허나 이들은 모두 피투성이였다. 이유는 룰에 있었다.
경기장은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있었다.
저 공간의 존재의의는 공간 마법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걸 장은 파악했다.
“제법 솜씨가 좋은걸.”
공간 마법 중에서도 아공간에 속한다는 설명도 이어진다.
근거도 분명했다. 참가자들은 어떠한 차원문을 넘었고, 그 차원문 너머의 장소가 곧 경기장이었으니.
그 경기장에는 드넓은 미로가 펼쳐져 있다.
웬만한 마을의 지름과도 같이 무식하리만큼 큰 미로.
‘잔을 채워라’ 경기장보다 10곱절은 거대한 크기. 그러니 아공간이다.
“오빠, 저건 어떻게 한 거예요?”
“시야 공유 마법. 원래 파수꾼 골렘 같은 거에 쓰는 건데 인간한테도 부작용은 없어.”
객석과 대기실에서 보이는 화면은 총 5분할 되어 있다.
각 4명의 1인칭 시야, 그리고 이 미로를 위에서 바라보는 시야. 그리하여 총 5개.
룰의 이름은 ‘보물찾기’.
먼저 보물을 찾아내면 승리하는 아주 간단한 룰이지만...,
겉보기와는 다르다. 보물 찾는 것부터가 난이도가 상당하다.
사실 찾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살아남기만 해도 소거법으로 승리할 수 있다.
미로에는 수없이 많은 함정이 있었다.
하나같이 끔찍한 함정들이.
벽에서 튀어나오는 톱날,
꺼지는 바닥, 그 밑에 있는 창과 송곳들.
발목을 뿌리로 붙잡고 살점을 뜯어 먹는 식인 식물,
암시장에서 사온 것인지, 하나 같이 목줄이 채워져 있는 수많은 몬스터들까지.
이 말고도 잔혹한 함정은 많았다. 하나하나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던전 같군.”
“그러게요... 아, 저 사람 곧 죽겠네... 아... 어떡하면 좋아...”
케일이 안타까운 반응을 보였다.
떠돌이 마법사가 함정에 제대로 걸린 것이다.
그의 허벅지 살을 회전하는 도끼가 깔끔하게 반쯤 도려냈다.
“끄아아아아!! 끄, 끄아아아아!”
덜렁거리는 허벅지에서 나오는 핏물이 바닥을 물들인다.
그 핏물이 흘러 옆칸에 있는 식인 식물의 몸집이 살짝 거대해졌다.
사실상 리타이어였다. 바닥에 피를 질질 흘리며 고통에 몸부림치고만 있었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보던 사회자가 이마를 턱 짚었다.
정확히는 이마가 아니라 가면 윗부분이지만.
[어이구 저런. 함정명 ‘도끼병 공주님’에게 제대로 걸리셨네요. 떠돌이 마법사 폰 아르키나 씨는 곧 죽을지도 모르겠군요. 모두 미리 손가락으로 X를 그리며 조의를 표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도끼라서 도끼병 공주님? 작명 센스가 참으로 최악이다.
그에 역접되게 함정의 기능은 온전했다.
저 마법사는 곧 죽겠지. 게임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끄. 끄아아아아!! 기궈어언! 기궈어어어언!!”
촤아아아아
떠돌이 마법사가 목 놓아 기권을 외치자 경기장의 벽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허억... 허억......”
“비명이... 후욱... 들렸는데...? 후우욱......”
용인들은 끝없는 몬스터와의 전투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위에서 바라본 시야를 통해 알 수 있던 사실은,
용인들은 현재 대치하고 있는 몬스터를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직진한들 결국 보물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떠돌이 마법사는 20보 정도만 걸으면 보물 상자에 도착할 수 있었고.
하지만 기권을 외친 건 마법사였다.
그는 경기장 밖으로 전송되었다.
혼자서 나오진 않았다.
그의 팀원인 용병도, 두 용인도 마찬가지로 반강제로 경기장에서 벗어났다.
“기구한 운명이네.”
경기는 종료되었다.
기권패로 승리는 용인 팀이 가져갔다.
[자! 보물찾기 1차 경기 종료! 수고한 참가자들에게 뜨거운 박수 부탁드립니다!!]
와아아아...
관객들은 시원찮은 반응이었다. 확실히 재밌는 경기는 아니었으니까.
사회자는 그 차가운 분위기를 파악하곤 어떻게 말을 이어갈까 두리번거리다가 대상을 포착했다.
“야, 괜찮아? 폰! 괜찮냐고!!”
“끄아악. 끄아아아아!! 말 걸지 마, 마 제바아아알...!”
허벅지가 도려내진 떠돌이 마법사였다.
사회자는 용병을 팔로 밀쳐내곤 마법사의 옆에 착 달라붙어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어휴, 폰 아르키나 씨.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요? 어서 치료실로 가서 치료받으세요. 근데 공짜는 아니라는 거 아시죠? 탈락한 부상자는 탈락 위로금에서 치료비가 자동 차감됩니다~]
“끄으으으! 됐어어어! 됐으니까 빨리 어떻게 좀 해줘어어어어!!”
[아 시끄러워... 괜히 말을 건넸네요. 삼촌들~ 저 사람 좀 데려가세요.]
마법사는 구릿빛 피부에 듄만큼이나 우락부락한 덩치를 지닌 복면의 사내들에게 들려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황상 치료실이 분명할 텐데, 저 꼴만 보면 장기라도 뜯기러 가는 것 같았다.
[아무튼, 저는 다음 경기 때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잠시만 휴식!!]
문득 사회자의 가면을 벗기고 싶어졌다.
저 안의 표정은 과연 어떨까?
*
“저거 완전 너네를 위한 게임 아니냐?”
토마토 주스에 빨대를 꼽고 쭈왁쭈왁 빨아 마시던 바비룬이 다른 의자에 올린 다리를 건들거리며 말했다.
“미로... 숲... 내 영역...”
그에 용 가면이 중얼거렸고,
“당연합니다. 저따위 어린애들 함정에 제가 걸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수호대장님처럼 덤벙거리지도 않는데요.”
토끼 가면은 언제나처럼 바비룬을 비꼬았다.
“아오 씨팔, 너한테 말 한 내가 병신이지.”
“자아성찰을 이제야”
“제발 닥쳐 이 씹년아.”
“이런, 삐치셨습니까?”
“진짜 죽인다.”
대사는 살벌했지만, 바비룬 특유의 찰진 욕설이 마치 꽁트를 하는 듯한 풍경을 자아낸다.
그에 언제나 쿡쿡거리며 미소 짓는 역할은 디안의 몫이었지만, 그녀는 아직도 표정이 착잡했다.
“유리멘탈 또 멘탈 나갔네.”
바비룬의 목소리가 닿자 눈을 번뜩이며 일어났다.
손으로 휘휘 앉으라고 지시하자 마지못해 기다란 치마를 뒤에서부터 정돈하며 다시 천천히 앉았다.
“아... 죄송해요.”
“뭘 죄송해. 백뢰인지 뭔지 그 허여멀건한 새끼 패 죽이면 되는 거잖아.”
“네... 꼭 죽여야죠.”
“......나는 농담이었는데, 너는 무슨 밀린 숙제는 꼭 해야 한다는 톤으로 죽인다는 말을 하냐.”
“죽여야죠... 그쵸......”
“어휴.”
디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놀려주면 당황한 반응이 돌아와야 정상이었는데 어제부터 말투와 태도는 고사하고, 눈빛부터가 달랐다.
‘다시 느끼지만, 얘도 정상은 아니야. 아니 존나 비정상이지.’
그녀의 눈은 잔잔했지만, 마치 조용히 끓는 기름처럼 분노는 가득하다는 게 느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