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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02화 (102/152)

〈 102화 〉 투기장

* * *

방금 전 경기를 치렀던 조에 당황한 건 비단 가면무도회만이 아니었다.

“스승님...?”

케일의 표정은 가히 압권이었다. 그보다 더 압권인 건 패이의 얼굴이다.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경악하여 입을 쩍 벌리곤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츰 시간이 지나자 겨우 벌려진 입을 다물곤 그녀에게 물었다.

“저, 저 사람 이프카리스토의 양 아닙니까?”

“네, 맞아요...”

“그, 그렇다면 저 팀에 음도 있을 것 아닙니까.”

“아마 그렇겠죠. 두 분은 언제나 함께셨으니까요. 음 님께서도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어요.”

‘미친, 저 살육병기들이 누굴 가르쳤다고?’

패이의 머릿속에서는 양, 음이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았다.

두 남자는 전쟁귀다. 그들은 10대 소년 시절부터 동대륙에 이름을 날렸다.

집에서 과자나 사달라고 떼를 쓸 나이, 그때 양과 음은 인간을 썰고 다녔다.

인품 따위는 이미 무너졌다.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다.

그런 이들이 누군가를 지도한다는 건 물과 기름처럼 융합하지 못했다.

‘아니지... 물과 기름도 존나게 섞으면 잠시나마 섞이니까 가능하긴 하려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나 헛소리였다.

그러나 그 헛소리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케일이 눈앞에 있었다.

다시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봤다.

양과 음이 검술 용사에게 검술을 가르쳤다라... 그럼 케일도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숨기고 있을까?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왜 그러세요?”

어린아이 같은 얼굴. 조금은 울상이었지만 스승과 적대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괜한 생각이겠지.

케일은 아직까진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어도 뭐 어쩔 건데. 어차피 아군이다.

그래, 케일에 대한 건 그렇다고 치고.

문제는 양과 음이 투기장에 발을 들였다는 것이다. 그건 아주 곤란한 일이었다.

그들의 검술 경지는 오러 등급에 비해 아주 완성도가 높았다.

여기서 그치면 다행이지, 검술이 뛰어나다고 오러가 낮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기넨과 같은 소드 익스퍼트 등급이니까.

‘하이씨, 미치겠네. 저런 놈들까지 상대해야 돼?’

패이는 신체 강화를 주축으로 삼은 근거리 전투를 선호한다.

그게 발목을 잡았다. 원거리 마법 좀 연습해둘 걸. 후회한들 늦었지만.

양과 음에게 육탄전으로 승리하는 건 2가지 방법밖에 없다.

더 질 높은 오러로 짓누르거나 보다 완벽한 몸놀림을 구사하는 것.

그러니 동대륙의 국가들은 양과 음을 거느리는 왕국 플라금에 벌벌 떨었던 것이다.

소드 익스퍼트보다 높은 경지인 소드 마스터는 10년에 한 번 나오기도 어려운 귀재들이니까 오러로 저들을 압살하는 건 불가하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라에서 소드 마스터를 배출하는 건 애들 보는 동화에도 개연성 때문에 안 나온다.

그렇다면 검술로 짓누르는 건? 그건 더 불가능하다.

저들이 사용하는 검술은 보고 따라할래야 따라할 수도 없는 묘기에 가까우니까.

그러니 플라금은 세력을 키워왔던 것이다.

머지않아 동대륙 전체가 플라금에 지배당하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 선봉장 두 명이 투기장에 나온 것이다. 이쯤되니 절망감이 샘솟았다.

“검술 용사님. 저 사람들 상대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솔직하게 저들에게 이길 자신은 별로 없었다.

희망은 용사였다.

“모르겠어요. 스승님들에게 과연 제가 검을 겨눌 수 있을지...”

그러나 대답이 시원찮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다.

야, 네가 그렇게 대답하면 어떡해. 너는 괴물 같은 전송자잖아.

“아뇨, 각오의 문제를 떠나서 이길 능력이 되냐는 겁니다.”

이쯤 되니 애원하는 수준이었다.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그건...”

클리브 솔리스가 우우웅 떨렸다.

‘오러 등급도 같은 소드 익스퍼트고 검술 실력도 뒤처지지 않잖아? 모든 조건은 비등해. 근데 너 무기는 다름 아닌 나잖아?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 승리는 당연해. 안 그래 지혜야?’

사실 케일의 의견도 클리브 솔리스와 동일했다.

그럴 일 없으면 좋겠다만 스승님들이 앞을 가로막는다면...... 검은 불을 뿜을 것이다.

봐줄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 또한 뼈저리게 알고 있기에 힘 조절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기세로 임한다면 솔직히 패배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맞붙지 않기만을 기도해둬. 나도 저놈들이 예삿 놈들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대충은 안 할 거야.’

“...그치. 그래야겠지.”

“뭐라고요?”

“아뇨, 전력을 다하겠다는 말이었어요.”

조금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었는지 패이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그럴 일 없으면 더 좋겠지만......”

반면 케일은 고개를 떨궜다.

검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부여잡고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

“뭘 어물쩍거리는 거지? 지금이라도 습격해야지. 이지혜를 불러오겠다.”

“저도 동감입니다. 지금 경기 끝내고 휴식하고 있을 때가 기회에요.”

장의 의견에 퀸이 더해졌다.

두 용사는 슈가리아에게 바비룬이 머무르는 방의 위치를 고하라고 말했다.

“바비룬이 아무리 강한들 한계는 있을 겁니다. 용사 셋이서 급습하면 승산은 있어요. 그를 납치하고 악쿤 토든에게 인질 교환을 신청할 겁니다. 그러니 어서,”

검은 촛불을 내놓으십시오.

용사라서 그런지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었다.

슈가리아는 깊게 탄식을 뱉었다. 팔짱을 끼고 오른팔로 미간 한가운데를 짚었다.

“글쎄...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니까요.”

조금 난감했다.

아니, 많이 난감했다.

“급습하여 모조리 죽여버리면 간단한 일 아닙니까? 슈가리아 씨 말대로 저들은 소수 인원으로 움직였어요. 사천왕도 바비룬 하나잖아요. 어렵지 않습니다.”

“아니~ 진짜 왜 이러세요? 지금 당장 바비룬을 죽이거나 포획했다고 쳐요. 그럼? 그다음은요?”

“악쿤을 만나보는 거죠.”

“퍽이나 만나주겠네요. 그가 과연 차라도 대접할 테니 찾아오라고 할까 봐요? 대신 다르칸이 대검 뽑고 대군 이끌어서 제 영역으로 쳐들어오겠죠. 이 말고 다른 미래가 있겠냐고요.”

“말이 또 달라지시네요. 검은 촛불로 마왕군 끌어들인다고 떠든 건 다 헛소리였습니까? 덫을 밟은 사냥감은 죽여야죠.”

“제발... 시기라는 게 있어요. 바비룬 일행은 검은 촛불 얻기 전까지는 절대 이곳에서 안 벗어나요. 그러니 조급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요.”

슈가리아는 일단 대기하자는 것. 반응을 지켜보자는 의견인데,

그럴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저들의 전력이 약해지는가?

전혀 아니다. 급한 감은 분명 있었지만 장의 말은 어폐가 없었다.

지금이 최적의 습격 타이밍이다.

바비룬과 고양이 가면이 생명력과 마나를 소모한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겠는가?

비록 상대편은 바비룬과 고양이 가면의 상대가 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힘을 쓴 게 사실이다.

승산이 0.1%도 올라간 이 순간을 놓칠 생각은 없었다.

“그럼 슈가리아 씨가 말해보십시오. 지금 아니면 언제 저들을 상대한단 말입니까?”

몰아세웠을 때 도장을 찍어야 한다.

하지만 슈가리아는 준비해둔 대답이 있었다.

“결승에서 만나야죠.”

...무슨 소년 만화도 아니고.

“도대체 왜요? 결승에서 정정당당히 이기라는 뭐, 대충 그런 겁니까?”

“아, 진짜 짜증나게 하네. 바비룬 하나만 잡을 거예요?”

“?”

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슈가리아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생각 좀 해봐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린다.

슈가리아는 하이톤이다. 그런 그녀가 성난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며 말하니 귀가 저릴 정도로 음이 높아졌다.

“다 잡아야 할 것 아니냐고요. 바비룬이 검은 촛불을 얻으면 어떻게 할 것 같아요.”

“어... 도망치겠죠.”

조금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장이 뒷걸음칠수록 슈가리아는 삿대질하며 성큼성큼 걸어온다.

“도망 수단은?”

“차원문... 아.”

“그 차원문을 여는 순간이 승부처에요. 거기서 지친 바비룬 일행을 저와 제 부하, 또한 인원을 더 불러들여서 기습하고 추가 병력까지 모두 포위해서 잡아내면 돼요. 지금 공격하면 바비룬 하나만 잡는 거라고요. 큰 숲을 봐야지 왜 자꾸 나무에만 집착하는 거예요. 이럴 거면 검은 촛불을 미끼로 내세우지도 않았다고요.”

거리가 가까워진다. 날카로운 슈가리아의 손톱을 피해 뒷걸음치고 있었는데, 쿵­ 소리와 함께 그 손가락은 장의 가슴팍을 따끔하게 찔렀다. 뒤를 돌아보니 회색 콘크리트 벽이 있었다.

“이해돼요? 만약 아직도 이해가 불가하면 지금 당장 검은 촛불 줄 테니까 가서 바비룬을 태우든 뭐든 알아서 하세요. 나한테는 일말의 협조도 바라지 말고요.”

물리적으로도 물러날 곳이 없는 것처럼, 장에게도 이 불편한 화답에서 물러날 곳은 없었다.

그는 꼬리를 내렸다. 슈가리아는 주먹이라도 휘두를 기세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네요.”

“진작 좀 듣지 그랬어요. 답답하게 진짜­”

헹, 혀를 차며 손가락을 거뒀다.

어젯밤 장의 반응에 자존심이 상한 게 아직 앙금이 되어 남아 있었다.

“다음 경기나 잘 지켜봐요. 결승까지 가야 할 것 아니에요. 그쵸?”

까칠하게 쏘아주곤 특유의 베시시한 웃음을 지어줬다.

그 웃음을 끝으로 뒤돌아 터벅터벅 걸어갔다.

발걸음이 조금은 온순해졌다. 기분이 풀린 걸까?

슈가리아의 뒷모습은 참으로 읽기 어려웠다.

‘...흐히.’

그러니 용사들은 아마 꿈에도 모를 것이다.

‘좋아, 아주 좋아~’

지금 그녀가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잘 흘러가는 용사에게 감사를 표하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다는 것을.

슈가리아는 속이 후련했다.

실렉티스로서의 임무를 마친 것이다.

그녀는 힐끗 고개를 돌렸다. 장은 허망한 얼굴로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좋아, 저 흑룡의 반응은 어떨까?’

눈을 가늘게 뜨며 살펴봤지만, 다타리오는 태평하게 장의 머리칼 위에서 앞발로 얼굴을 부비며 고양이 세수를 하고 있었다.

그에 입가가 더 올라갔다. 당연히 그 헤픈 웃음을 용사들에게 보여주진 않았다.

‘...그래도 너무 들뜨진 말자.’

자칫 콧노래가 나올 뻔했다. 기분이 풀렸다는 걸 증명하는 건 미소를 지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콧노래는 조금 과하다. 겨우 참아내었다.

관계의 주도권은 슈가리아에게 완전히 넘어왔다.

너무 순조롭게 흘러간다. 의심스러울 정도로 순조롭게.

또각­ 또각­

걸음에 자신감이 붙는다. 복도에 구둣발 소리가 가득 찼다.

슈가리아는 규칙적인 발소리에 신경을 꺼트려봤다. 용사의 반응을 다시 살피기 위해서였다.

“......”

다행히 침묵만이 맴돌고 있다.

심장 소리마저도 들릴 것 같이 지독한 침묵이 말이다.

“하나만 묻지.”

그 침묵을 갑자기 깨트린 건 퀸이였다.

‘...저 년이 갑자기 왜?’

슈가리아의 구두 소리가 멈췄다.

그녀의 얼굴에 만개한 미소가 옅어졌다.

이 타이밍에 왜? 대화는 잘 끝냈을 텐데?

호응해주지 않는 방법도 있다.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다.

혹시 모를 불안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불만 가득한 얼굴을 마주했다.

‘...괜한 걱정이겠지?’

하기사, 일행의 리더인 장도 더는 의문을 표하지 않고 조용히 있는데 뇌까지 근육으로 똘똘 뭉친 퀸 따위가 무엇을 눈치챘겠는가.

질문을 던진 자가 장이 아닌 퀸이라는 것을 다시 인지하자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독수리는 어째서 우리에게 협조하는 거지?”

......순간 사례가 들릴 뻔했다.

그녀의 질문은 예상치도 못하게 무척 날카로웠다.

퀸 따위가 교묘하고도 정성스럽게 감싸둔 근본적인 의문점을 풀어낸 것이다.

슈가리아는 여유 넘친다는 걸 증명하는 듯한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녀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었더라면 분명히 표정은 완전히 굳었을 터. 그만치나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슈가리아는 혀로 앞니를 훑으며 대답을 망설였다.

이 순간이 고비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생각을 가속했다.

“잘 대답해야 할 거야.”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내면에서 퀸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멍청하기는 무슨, 아주 소름 끼치는 년이었다. 그 소름 끼치는 년은 말을 이었다.

“여지껏 당신이 떠든 게 무슨 말인지도 잘 알겠고 근거도 충분하지만 당신한테는 우릴 도울 이유가 전혀 없거든.”

대화를 회피하려 했지만 퀸은 녹록지 않았다.

......죽일까?

살의가 머리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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