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 투기장
* * *
“박쥐 같은 년.”
사자 가면이 말했다. 화면에는 빙긋 웃고 있는 슈가리아가 있었다.
“실렉티스 이 개씨팔 갈아 마셔도 모자랄 연놈들은 참 재밌겠어. 용사랑 마왕군이 삽질하는 거 보고 있으면 얼마나 즐거울까?”
“대장님.”
시커먼 복장에 온갖 암기로 무장한 토끼 가면이 단도를 닦던 손을 멈췄다. 앙칼진 목소리가 대기실에 울린다.
“알아, 안다고. 듣는 귀가 많다는 거.”
“제가 어차피 장벽 펼쳐 뒀어요.”
“역시 정윤상 새끼랑은 다르게 넌 눈치가 빨라.”
고양이 가면을 칭찬함과 동시에 참모장을 까내렸다. 비록 가면을 쓴 채지만 왜인지 사자 가면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듯한 용 가면이 천천히 입을 뗐다.
“...사돈남말... 대장도... 상당히... 느림...”
“미친, 너 그런 말 어떻게 알아? 뭐, 사돈남말?”
“군단장이... 알려줌...”
“아니 시발, 쓸데없는 말은 왜 알려주는 거야.”
참모장에 이어 군단장까지 까내렸지만, 그들에게 은혜를 입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이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한심하게 술이나 마시며 몽마들에게 기를 빨리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을 테니까.
본인도 그 방탕한 생활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존감이 바닥을 향하고 있었기에 생활을 고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은 마왕군에 있어 해가 되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진단했던 탓이다.
그 한심했었던 이는 가면을 머리 위로 걸쳐올리고 병에 담긴 물을 한 모금 홀짝였다.
세계수의 수액이었다. 사자 가면 속 사내는 바비룬 필라이트였다.
‘그 자식들 덕분에 나올 수 있었지.’
며칠 전을 떠올렸다.
“얘기 좀 하자.”
누군가 벌컥 문을 열었다. 어지러운 시야 속 흐릿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아마 다르칸이었다.
바비룬은 만취한 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일부러 주술을 발동하지 않으며,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아무렇지 않게 죽을 수 있을 수준으로 몸을 망가트리고 있었다.
모든 게 거지 같았다. 케다시를 납치한 순간부터 마왕군에 있어 본인은 피해만 주는 짐덩어리인 것 같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술만 퍼마시고 방에서 조용히 지내면 괜찮겠지. 그래도 그전까지는 열심히 일했잖아. 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 있어. 이젠 쉬자. 괜한 짓 그만 좀 하고.
이렇게 자위하면서.
“너 뭐가 문제야?”
다르칸의 눈에는 곱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문제는 뭐가~”
“윤상이한테 시위하는 거야?”
“어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우리 군단장님~? 안 그래 레이지아?”
옆의 서큐버스의 봉긋 솟은 가슴을 주물거렸다.
“후후후후... 아잇, 그만 주물거리세요, 살 늘어나요.”
조그만 앙탈은 오히려 불을 지폈다.
그녀를 아끼는 장난감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구석구석을 매만졌다. 몸 곳곳 골이 깊은 곳에 손끝이 닿을 때마다 침이 절로 넘어간다.
꼴깍,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빙긋 웃어준다.
목을 살짝 당겨 시선을 맞추곤 입술을 포갰다. 츕, 츄웁...
강렬하게 코를 휘감는 향수의 향이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든다. 술냄새와 뒤섞이자 더욱 아찔했다.
혀를 섞으며 다르칸 앞에서 대놓고 그녀를 더듬었다. 취기가 너무 오른 탓에 사리분별도 불가능했다. 지금은 뇌가 성욕에 지배당한 상태였다. 부드러운 살결이 손에 착 감긴다. 그것은 막 익은 하나의 과실처럼 매끄럽고 부드럽고 탄력있다. 그녀의 허리에 손을 감고 귀를 살짝 핥았다.
“푸흐흐... 수호대장님 저도 예뻐해주시는 게 어때요?”
볼을 핥짝이며 몽마 한 명이 더 다가온다. 그녀가 푸짐한 가슴을 팔에 비비며 분내를 풍긴다. 그녀의 허리에도 손을 휘감고 귓가에 속삭였다.
“히히히... 그래, 이리와. 내 위에 올라와.”
“......”
그그그극! 쿵!
무언가 무너지는 굉음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무척 깔끔한 단면도를 지닌 탁자가 ㄴ자로 무너졌다. 그곳에는 검을 뽑은 다르칸이 있었다. 오러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분을 겨우 삭히곤 입을 뗐다.
“...다 나가.”
“형! 왜 이래~ 그렇게 빼지 말고 형도 앉아! 우리 술 안 마신지 좀 오래 됐잖아!”
분위기가 급변했는데도 바비룬 혼자서만 흐느적거리며 말하고 있었다.
옆의 몽마는 살금살금 움직였다. 옷을 챙기고 주요부위만을 가리며 문으로 다가간다. 바비룬은 눈치 없게 그녀들의 옷자락을 잡았고, 다르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 장난 같아?!”
휘이이!!
바비룬의 방 안에 음산한 오러가 몰아친다.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 방이 급격히 추워진 것 같다는 느낌마저도 들었다. 쩡 머리가 아파온다. 피부가 오러에 저릿저릿 진동한다.
“야 김철쑤! 지금 뭐 하는 거야?!”
“얘기 좀 하자고 했어. 주술 써.”
“지금 내 여자친구들한테”
“쓰라니까.”
쿠구구구
방이 부러질 듯 요동친다. 다르칸은 뱀눈으로 바비룬 방 속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이들은 맹수 앞 초식동물처럼 몸을 말고 성급히 벗어났다. 다르칸은 방문을 강하게 닫고선 바비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너 출장 가라.”
“출장? 무슨 출장.”
주술을 사용하여 취기를 거둬내고 있었다.
“윤상이가 케다시 설득시켰어. 용사 두들기러 가도 돼.”
“...그게 진짜야? 아니, 진짜는 무슨. 도대체 뭔 개소리야. 앞뒤 다 짜르고 얘기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들어.”
“설명하자면 길어. 디안한테 이미 말해뒀으니까 자세한 건 디안한테 직접 들어. 북대륙 놈들 때문에 차원문을 이용할 수도 없으니까 한시가 급하다. 일단 출발해.”
“이 무슨”
“언제까지 한탄만 하면서 한심하게 있을 거냐? 윤상이 어깨 무겁다. 너까지 그러지 마라.”
“...”
“괜한 짓 어차피 했으면 더 해도 상관 없잖아.”
덤덤한 척 말하지만, 다르칸의 표정은 모래알을 씹은 듯 바비룬보다도 착잡했다.
“...그래, 뭐든 지르고 봐야지.”
무언가 혼잣말도 중얼거렸지만 들리진 않았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케다시 새끼도 정신머리가 맛탱이 간 게 틀림없어. 지랑 같은 세대 용사한테서 아티팩트를 탈취해 오라는 걸 허락해? 정윤상이 도대체 어떻게 말한 거야?”
질문이 향한 곳은 고양이 가면이었다.
그녀도 바비룬을 따라 가면을 비스듬하게 머리에 걸쳤다. 그러자 변장이 풀리고 기다란 푸른 머리칼이 은하수처럼 쏟아진다. 방에 그녀의 머리 향이 맴돈다. 디안이었다.
“이 투기장이 현 용사에게 없던 처절하고 비열한 수 싸움을 배우게끔 할 거라 하셨어요. 아티팩트에 기대기에는 아직 시기가 너무 빠르다고도 덧붙였고요.”
“그걸 믿어?”
“단박에 믿던걸요. 케다시가 참모장님 무척 아끼고 신뢰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렇긴 하지. 윤상이 그 놈은 배우 해도 될 거야. 나까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니.”
가끔 보면 종교에 미친 광신도 같은 면모도 있었다. 그 신앙심에 감동받는 건 당연 에이브(AYV)와 케다시다.
모든 게 연기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일행에게도 케다시에 대한 뒷말을 일절 용납하지 않는 걸 보면 조금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사실 진작에 미쳐있던 건 아닐까에 대한 의심 말이다.
이를 지켜보는 에이브(AYV)가 무슨 생각을 할지는 몰라도, 케다시가 바라보는 악쿤은 분명한 충신이었다. 에이브(AYV)를 만족시키기 위해 용사 육성에 사력을 다하는 성실한 참모장.
참으로 병신들이다. 라고 생각했다.
‘개씨발, 우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순순히 뒈져주겠냐?
악쿤은 바비룬에게 만회할 기회를 준 것이다.
이번 투기장에서 용사의 아티팩트를 빼았든, 용사를 불구로 만들든, 어떻게든 더욱 시간을 벌고 오라고. 찢어죽일 케다시를 마왕성에 풀어놓은 죄를 이것으로 갚으라고.
“무조건 우승해야 돼.”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아티팩트를 빼앗는 것이 용사의 성장을 막는 것과는 다르다고 악쿤이 못을 박아 두었으니까 언약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토끼 가면이 막대 초콜릿 과자를 가면 밑 틈새로 으적거리며 말했다.
“수호대장님, 1차 경기가 곧 다 끝납니다.”
“눈에 띄는 놈들 있어? 용병이나 투사 수준이야 다 거기서 거기겠지만.”
“그렇지만도 않은데요? 우승에 걸리적거리는 자들이 있어요.”
“뭐? 누구.”
사념에 빠져있느라 떨궜던 고개를 들었다.
화면을 바라보자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한때 괴팍한 꼬마가 장난감을 다루듯 거칠게 다뤘었던 꼬마들 중 하나. 이제는 꼬마라기에는 조금 이질감이 있는 외모였다.
“양? 저 새끼가 왜 여기 있어.”
“음도 있겠군요. 근데 저 사람이야 제 수준에서도 제압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옆에서 키퍼를 맡았던 자입니다.”
덮수룩한 백발, 양눈을 모두 가린 검은색 안대는 신비로운 느낌을 풍긴다.
우유 같이 새하얀 피부, 작은 키에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한 몸의 굴곡.
성인은 아니기는 무슨,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도 아닌 듯하다.
저 소년은 과거 마도구 시장에서 마주했던 때의 양보다도 어려 보였다.
“저게 누군데.”
“백뢰(白雪)라고 용병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마법사입니다.”
하얀 번개, 퍽 오그라드는 이명을 지니고 있었다. 사천왕도 아닌 주제에.
“그래봤자 애새끼지 뭐.”
파이프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미 화면에서 시선을 거둔 지 오래였다.
오른 다리를 왼 다리의 무릎 위에 올리며 흔들거린다. 쓰읍 담배를 깊게 빨아들이자 챔버가 잠시 붉게 빛났다. 바비룬의 입에서는 주술을 쓸 때와 마찬가지로 연기가 머금어진 채였다. 조금 다른 것이라고는 새하얀 연기가 아니라 시커먼 연기라는 거지만.
“맛 쥑이네. 역시 동대륙 담뱃닢이 맛이 좋아.”
“좀 끊으시는 건 어떠신지.”
“독소 같은 건 몸이 알아서 해독하는데 내가 왜?”
“같이 있는 사람이 괴롭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습니까?”
“응, 안 해봤어. 꼬우면 내 상관 하시던지.”
“시켜만 주신다면 지독하게 부려드릴 자신있는데요.”
“그래서 안 시키잖아?”
바비룬은 이미 백뢰라는 꼬마에게서 관심을 꺼트렸다.
토끼 가면과 용 가면도 마찬가지로 인상을 팍 구긴 채 과자를 으적거리며 먹거나 조용히 벤치에 앉아 명상을 하는 등 백뢰에 대한 관심을 거뒀다.
“엥, 너 왜 그러냐.”
“담배 연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진짜로? 야 유리멘탈, 평소에는 마나 장벽 잘만 펼치더니 오늘은 왜 연기 정직하게 맞으면서 괴로워하고 있냐.”
디안의 태도가 이질적이었다.
얼굴을 가득 구겼다. 마치 분노했다는 듯 손을 꽉 움켜쥔다. 손톱이 뽀얀 살갗을 뚫고 들어갔는지 바닥에 붉은 점이 하나둘 떨어진다. 호수처럼 새파란 동공은 있을 수 없는 것을 보았다는 듯 요란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경기 치르고 와서 피곤할 수도 있잖습니까.”
“왜 자꾸 네가 대답하냐.”
“디안 양이 침묵하기 때문이죠.”
바비룬과 토끼 가면이 열심히 떠들고 있었지만, 디안의 귀에는 어느 무엇도 들어오지 않았다.
“어째서 저 녀석이...”
그녀는 백뢰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였다. 그 눈빛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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