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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100화 (100/152)

〈 100화 〉 투기장

* * *

9시간 전,

“이 물건을 당장 넘겨드릴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유용하게 쓰자는 거예요.”

슈가리아가 살랑살랑 검은 촛불을 흔들었다. 장은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노려보며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용사님의 주적은 누구죠?”

“당연한 걸 묻습니까. 마왕군이죠.”

예전에야 정의를 내세우며 타도 마왕군을 주장했지만, 요새는 좀 식었다.

개인적인 복수심이 너무 거대해졌다. 장은 펙튼의 목소리를 떠올릴 때마다 몸이 굳는다.

“입장 바꿔 생각해봐요. 용사님이 절대빙결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아요?”

악쿤 토든의 이명이 들리자 순간 움찔했다.

슈가리아는 다시 베시시 웃으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장은 가면을 쓰듯 금세 감정을 숨기고 말을 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검은 촛불이 투기장 상품으로 나오면 어떻게 움직일 것 같냐구요.”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마왕군의 주적이 용사이니 당연 마왕군의 주적도 용사이다.

용사만 없다면 이들의 세계 지배 야욕은 금방 이루어진다. 가는 곳마다 초를 치는 게 용사라는 집단이니까.

“탈취하려 들겠죠. 제 손에 아티팩트가 들어가는 걸 원치 않을 테니까.”

“흐음~ 그걸 아는 분이 왜 떼만 쓰고 계실까. 검은 촛불을 지금 용사님께 드리면 안 돼요.”

“검은 촛불을 미끼로 쓰자는 겁니까?”

“네, 마왕군을 끌어들이는 미끼. 그들이 대놓고 차원문을 열고 투기장에 난입할까요? 아니요, 제가 아는 절대빙결은 절대 그러지 않아요.”

오히려 투기장에 인원을 파견할 터, 참가자로서 말이다.

라고 주장한 슈가리아, 그녀는 기세 좋게 말했지만 어디에도 근거는 없었다.

마왕군을 이끌고 투기장에 처들어오면 검은 촛불 탈취는 무척이나 손쉬울 텐데 어째서 투기장에 참가하여 남들과 똑같은 경쟁을 벌인단 말인가? 그건 무척이나 번거로운 일이다.

“모르는 소리, 그는 굉장히 정 많은 사람이에요~ 탈취는 가능하겠지만, 제가 넋 놓고 있을까요? 마왕군도 출혈을 감내해야 할 거예요. 그러니 침공은 없을 거라는 거죠. 악쿤은 절대빙결이라는 이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따뜻한 성격이니까.”

따뜻한 성격이라는 대목이 거슬렸다.

“당신이 악쿤에 대해 뭘 안다는 겁니까? 여지껏 마왕군 침공 때 돈을 받고 의뢰자를 지키는 것 말고 특별한 조취를 취한 적이나 있습니까? 그가 따뜻하다고요? 아니요. 그는 굉장히 잔혹합니다. 슈가리아 당신은 그의 부하들에게 죽은 희생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르니까 가볍게 말하는 겁니다.”

“초점이 잘못됐네. 인간에게 따뜻한 게 아니라, 부하들에게 따뜻하다니까요?”

“부하를 아꼈더라면 언제나 직접 움직였어야지. 뒤에 숨어서 부하들 사지로 내모는 자가 어딜 봐서 부하들에게 따뜻하단 말입니까?”

“참모장이 전장에 직접 나서라니, 본인이 말하고도 우스운 거 아시죠?”

“전혀요. 그의 마법을 겪어 보면 격하게 수긍할 겁니다. 대마장 하인켈님조차도 손쉽게 따돌리는 사내입니다.”

“푸핫!”

“어째서 웃습니까?”

“아뇨, 재밌는 이름을 들어서요. 그쵸, 하인켈님에게서 벗어나다니, 악쿤은 확실히 상당한 실력자네요 크큭...”

조롱하는 듯한 웃음에 미간이 찌푸려진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녀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진다.

“그가 부하에게 정이 많다고 칩시다. 그거랑 이번 투기장에 침공이 오지 않을 거라는 주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세요.”

“그들은 조용히 행동할 거라는 거죠. 우승하면 검은 촛불을 평화롭게 가져갈 수 있잖아요. 마왕군에 실력자가 많은 건 너무나 극명한 사실이니까 우승도 어렵지 않을 거고요.”

“제가 있습니다. 케일이 있고 퀸이 있습니다. 고용한 늑대의 용병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강인한 자들 뿐입니다. 한낱 마왕군 잡졸들이 실력이 아무리 좋은들 어떻게 우승한단 말입니까?”

“킬러 형제보단 강할 텐데 너무 자만감에 찌들어 있는 것 아니에요?”

“당신 진짜...”

“아하하! 농담, 농담!! 그렇게 노려보지 마요! 미안하다니까요. 히히히.”

눈을 감고 진정하자는 뜻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 모습마저도 재미있는지 슈가리아는 싱글벙글한 표정이었다. 저 천진난만한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고 싶은 강한 충동이 속에서 용솟음친다.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녀가 눈치 좋게 웃음을 거뒀으니 망정이었다.

“후우, 용사님 놀리는 맛이 각별하네요.”

“이런 씨­”

못 참고 박차고 일어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구석에 있는 덧니가 잠깐 반짝였다.

“당신 저와 대화할 마음은 있습니까? 적정선이라는 게... 하아, 씨­ 진짜... 후우...”

“푸흐흐흐... 아, 진짜 미안해요. 화 풀어요. 히히히...

룬어를 읊으려다가 아직 얘기가 끝나지 않았기에 오른 가슴팍을 쿵쿵 치면서 이를 악 물었다.

그런 장을 살짝 끌어안으며 등을 툭툭 두드린다. 밀쳐내려고 팔로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했으나, 슈기리아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다. 한 길드의 수장이다. 힘이 무척이나 강했기에 마법 없이 뿌리치긴 버거웠고, 나름의 사과 방식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었기에 아랫 입술만을 깨물 뿐이었다.

“진정~ 진정~”

“인내심이 바닥을 칩니다. 조심 좀 하는 게 어떻겠어요.”

“알겠어요. 내가 미안해요. 화 풀어요, 응? 응??”

사르륵­ 황색 머리칼이 쏟아진다. 머릿결은 엉망이었지만 향이 참 좋았다. 복숭아 향기.

그녀는 아직도 장을 꼬옥 껴안은 채 눈을 피하는 장의 얼굴을 쫓아다니며 시선을 맞추고자 이리저리 목을 움직였다.

“안 할게요. 약속~”

“가까워요, 떨어지세요.”

짜증 가득한 장과 겨우 시선이 맞닿자 그녀는 또 애교살 많은 눈을 휘며 베시시 웃었다. 얼굴이 무척이나 가까웠다.

장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남녀 둘이 밀실에서 껴안고 있지만 야시시한 분위기와는 이어지지 않았다. 장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정말로 싫다는 듯 표정을 짓고 있으니까.

‘자존심 상하네.’

마법을 쓰지 않고서야 떨어질 생각이 없어보였던 슈가리아는 그의 심장에 손을 얹고는 장을 풀어주었다.

“헹!”

혀를 차며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방금까지 대차게 웃던 여성과는 꽤나 상반된 태도였다. 장으로서는 현 상태의 슈가리아가 더 대처하기 편했다.

“킬러 형제에게 위험했던 건 사실입니다. 제가 그들을 얕잡아봤어요. 투기장은 목숨을 내놓은 곳인데 웬만한 각오로 용사에게 덤빌 리가 없죠. 그런 안일한 태도 자체가 그들에 대한 모욕이었고, 어깨에서 피가 솟구친 건 그에 대한 응보겠죠.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도 오만일 수도 있어요. 제가 그들보다 잘난 건 서클 뿐입니다. 그들은 아주 치열하게 전투를 계획했어요. 제가 전송자가 아니었더라면 단박에 죽었을 겁니다. 투기장에 발도 들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죠.”

“생각보다 엄청 오만하진 않네요?”

웃기는 말이지만, 조금 대화를 나눴다고 슈가리아의 성격을 파악한 것인지 이번에 들려온 그녀의 말에는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사실이기도 하고, 비꼬는 게 아닌 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말고도 여럿 이유가 있을 테지만 너무나 자잘한 것들이기에 하나하나 나열하기에는 번거로웠다.

“그래도 방심을 거둔다면 저와 동료들의 레벨, 서클, 오러 등급이 상당히 높은 경지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건 오만이 아닌 객관적인 사실이고요.”

“그건 맞아요.”

“마왕군의 잔당이 앞을 가로막는다면 전력을 다해 깨부술 겁니다. 방심은 오늘에서 그칠 겁니다. 말로 하는 각오야 아무나 할 수 있다지만, 저희는 아닙니다. 마왕군에 대한 원한의 골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어요.”

빈이 마왕군에 납치된 순간부터 그것은 곱절이 되었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슈가리아 씨가 보시기엔 저희의 승리가 불안정합니까?”

“죄송하지만 네.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어요.”

돌아오는 대답은 기대와는 달랐다. 이유를 듣고 싶어졌다.

“절대빙결이 과연 투기장에 불확실한 카드를 내놓을까요. 단순한 침공이 아니라 용사의 아티팩트를 탈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마왕군의 전력이 그토록 거대합니까? 평등하게 적용되는 룰 속에서도 저희를 굴복시킬만한 인재가 그토록 많습니까?”

“당연하죠. 대놓고 4명이나 있잖아요.”

굳이 되묻지도 않았다. 마왕군의 간판인 사천왕 얘기다.

“그들이 직접 나올 거라 보시는 거네요.”

“네. 모두 나오진 않겠죠. 하지만 한 명쯤이야 여유가 되지 않을까요?”

한때 진 키아라가 제13터널을 습격했던 것처럼.

악쿤 토든이 메일리를 습격했던 것처럼.

다른 사천왕이 출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확실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사천왕이 투기장에 나온다면 누구라고 보시죠?”

“음, 둘 중 하나일 것 같아요. 군단장 다르칸이거나~”

*

“저들 중 한 명이 바비룬 필라이트라고?”

“아마도.”

아직 정확한 건 없지만 가면무도회에서 출전한 2명 중 한 사내의 전투 방식을 보니 확신이 커져간다.

형변을 하진 않았지만 그는 아마 주술을 사용하여 전투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 몸의 일부인 것처럼 아주 부드러웠고 능숙했다.

“수준이 높네요. 저 가면 사내들 상대방도 제법 이름 좀 날리는 투사였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으니까요.”

슈가리아의 평가는 정확했다.

눈에 띄는 건 사자 가면을 쓴 사내. 그의 전투를 잠시만 보아도 수준이 느껴졌다.

전력을 다하고 있음이 아닌 것을 아는데도 그의 전투 방식은 무척이나 간결하고 묵직했다. 한 마디로 군더더기 없다.

주먹으로 상대방을 후려치곤 바닥에 발을 구른다.

그에 맞춰 바닥이 살아있는 것처럼 일어나 날아가던 상대방을 들이받는다. 그 후 사내의 방향으로 또다시 밀쳐낸다. 그를 주먹으로 허공에서 다시 후려친다.

마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었다. 마법진도, 마나의 흐름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주술이 유일한 답이었다. 하지만 주술을 저렇게 파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는 들어본 적도 없다.

그러니,

“저 남자가 바비룬 필라이트일 거야.”

상대방 팀의 키퍼가 사자 가면에게 총을 마구잡이로 휘갈겼지만, 사자 가면의 사내는 그걸 겸허히 다 맞으며 어태커를 때려눕히고 있었다.

무식하리만큼 터프한 전투 방식이다.

총알을 날파리 정도로만 여겨도 저렇게 무시하진 않을 텐데, 그마저도 못하다는 건지 아예 신경을 끄고 있었다.

“그만 좀 하자.”

그는 어태커의 멱살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그의 머리칼과 얼굴은 피로 떡져 있었다.

“멀리서 총을 쏘던 육탄전을 하던 부질없다는 거 아직도 모르겠냐? 죽이긴 싫으니까 좀 알아서 기어.”

“히, 히익­!”

“괴, 괴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서로 힘 빼지 말자. 그냥 가만히 있어.”

그가 걸죽한 욕설을 내뱉자 관객석이 떠들석해진다.

용사를 위협할 다크호스의 등장이라며 열광한다. 사회자도 혀를 열심히 내두루고 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사자 가면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가 보여준 전투는 압도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첫 경기는 무력으로 제압하는 게 승리 조건이 아니다. 가면무도회 팀은 물을 퍼나르고 있지 않았다. 그냥 단순 무력으로만 제압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서서?

“사자 가면이 바비룬이라면, 저 뒤에서 주문 읊는 고양이 가면은 누구지? 그보다 저건 무슨 마법인가.”

아니었다. 이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물을 옮기고 있었다. 블루 드래곤이 조용히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은밀하게, 또한 신속하게.

“...뭐야, 저런 마법은 없어.”

“마왕군은 별 해괴한 마법사도 기르나 보네요.”

수조 한 가운데에서 물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가면무도회 팀의 잔에는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즉석 차원문을 만든 것 같은 마법.

저런 기괴한 마법은 어느 대마법사가 기록해준 서적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자 가면은 고양이 가면에게 말했다.

“야, 유리멘탈. 다 끝났냐?”

“곧 끝나요.”

데엥~♬ 데엥~♬

상대방이 항복을 외치기도 전, 경기가 종료되는 종이 울렸다.

가면무도회의 잔이 가득 찼다.

마법을 아는 자는 모두가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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