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97화 (97/152)

〈 97화 〉 투기장

* * *

“3시간.”

이나 늦었다는 것. 장의 표정은 벌레를 보는 듯한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케일도 떨떠름한 반응이었고, 퀸은 애초에 공석이다. 순수 격투술을 더 연마하고자 암거리 투기장에서 건달 및 용병들과 주먹을 교환하고 있다.

“장난하십니까?”

“하하... 면목이 없네요.”

“선금을 지불했다고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요.”

“이곳 식사는 저희가 대접하겠습니다... 참가비도 저희 길드 측에서 모두 지불할 테니 너무 노여워 마세요.”

“그러시던지.”

흥, 콧방귀를 뀌며 본론으로 넘어갔다.

“알려드렸다시피 이틀 후 이곳의 암거리에서 열리는 투기장. 그곳에서 저희 팀이 반드시 우승해야 합니다.”

라스타에서 쭉 전철을 타고 올라가면 있는 곳, 북대륙에서 국경을 표시하는 장벽을 따라 내려오면 있는 곳.

북대륙과 동대륙의 중심. 또한 3대 길드 중 하나인 독수리가 있는 곳.

자유의 도시 달리아락,

이곳은 유흥가로 아주 유명하다. 법의 경계망에서 묘하게 벗어난 덕이다,

북대륙 국민과 동대륙 국민이 애매하게 걸쳐 있는 터라 어느 법을 적용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하니 말이다.

유흥가 못지 않게 유명한 것이, 길드의 용병들과 주먹 깨나 쓰는 모험가들 및 탐험가들. 전국에서 한가닥 한다는 사람들은 죄다 모여 있는 투기장이다.

퀸이 현재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곳도 투기장의 일부 중 하나이다.

“상품이 마법 용사님의 아티팩트라고 하셨죠?”

패이는 눈치를 살폈다. 기분이 조금은 풀린 것일까, 장의 억양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다행히도 지속하여 불쾌감을 표하진 않았다.

“맞습니다. 검은 촛불.”

마법 용사의 아티팩트.

그리고 거대 길드 독수리가 직접 개최하는 투기장에서의 우승 상품이다.

원체는 동대륙에 발생한 아티팩트이다.

이에 일행은 동선을 짜서 퀸의 ‘어느 기사단원의 녹슨 건틀렛.’, ‘클리브 솔리스’, 이후에 ‘검은 촛불’을 순서대로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제대로 꼬였다.

독수리의 용병들이 탐험대를 구축하고선 멋대로 던전을 공략하고 아티팩트를 얻어낸 것이다. 그 탐험대의 선두에는 독수리의 길드장이 있었다.

용사의 사명은 마왕군을 물리치는 것. 또한 세계를 구해내는 것.

그를 위해서라면 모두가 발 벗고 나선다? 모두에 길드의 용병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들은 누구를 지킬 필요도 없으며, 되려 세상이 혼란스러워질수록 돈을 만진다.

타도할 수도 없는 대상이다. 이들의 영향력은 웬만한 국가 그 이상이니까.

길드에는 강자가 많다. 길드장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힘은 사천왕 급이라는 소문도 파다하니까. 권력도 못지 않고.

그래서 이번 ‘검은 촛불’은 곧장 용사의 손에 떨어지지 않았고, 협상도 불가했다.

아티팩트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용사는 투기장에 참가할 것이다.

용사는 세계를 구해내야 하니까.

아티팩트는 용사를 위한 무기니까.

그 무기가 있어야 세계를 구해낼 수 있으니까.

‘용사가 참가하는 투기장! 여지껏 열렸던 투기장 중에서 가장 뜨거울 것 같지 않아요?’

독수리 길드장에게 연락이 닿았을 때 오히려 펄쩍거리며 좋아하던 그 목소리를 생각하면 장은 험악한 표정을 거둘 수 없었다.

그러니 우승해야 했다. 무조건. 무슨 일이 있더라도 검은 촛불은 장의 손에 떨어져야 한다. 그를 위한 용병이었다. 더욱이 독수리와 사이가 좋지 않은 늑대이기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독수리가 개최한 투기장은 팀전이다. 개인전이 아니다.

팀의 최대 단위는 6명, 최소 단위는 4명. 토너먼트로 붙어 결승에서 만나는 매치. 총 32강. 그래서 머릿수가 필요했다. 그 머릿수를 채웠다.

다크호스는 당연히 용사 팀이다.

“...그러니 준비나 잘하죠.”

가장 경계해야 하는 건 독수리 길드에서 나오는 용병들. 그들을 제외하면 아마 없을 터다.

*

“너희는 ‘검은 촛불’이 누가 사용했던 물건인지 알고 있어?”

“...잘 모르겠습니다.”

“흑염! 이래도 기억나는 게 없나?”

“...메이블 토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녀석이 사용하던 물건이 마법 용사의 아티팩트래!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이야, 안 그래? 전전 마법용사가 쓰던 게 현 마법 용사가 쓰는 아티팩트라니!”

호들갑을 떠는 플라티넘, 그 옆에서 조용히 반응을 살피는 양과 음.

그들의 건너편에는 한 남성이 있었다. 턱수염도 기다랗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이 더욱 장관이었다. 어떻게 관리한 것인지, 마치 비단과도 같았다.

“재밌으시겠어요 어르신. 오랜만의 실전 아닙니까?”

“악쿤 토든 녀석이 본좌의 영역을 침범했었지. 여럿 제자가 속수무책으로 죽었어.”

“마왕군도 투기장에 모습을 드러낸답니까?”

“모른다. 그냥 나 또한 ‘검은 촛불’이 탐날 뿐이야.”

호들갑을 떠는 플라티넘, 그 옆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양과 음.

그 건너편에는 한 남성이 있었다. 턱수염도 기다랗지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이 더욱 장관이었다. 어떻게 관리한 것인지, 마치 비단과도 같았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대마장 헤인켈이다.

차원문을 통해 이프카리스토에 입성한지 며칠이 되었다.

“내일이 시작이랍니다. 투기장이요.”

“알고 있네! 이 두 아해가 내 곁을 지킬 테지, 다른 한 명은 누구인가?”

“마음에 드시려나 모르겠네요. 나와볼래?”

어둠 속에서 백발의 사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보자 헤인켈은 헛웃음만을 뱉었다.

“허어... 이 천방지축을 어찌 데려왔을꼬...”

“전력이 될 겁니다.”

“되다마다! 굉장히 든든하다네!”

“저희로서도 ‘검은 촛불’은 의미가 큽니다. 에이브(AYV)님께서 용사의 아티팩트를 최초로 탈취해도 된다고 선언하셨으니까요. 무언갈 얻으려면 마땅한 투자를 해야죠.”

플라티넘은 옆에 기웃거리는 소년에게 말했다. 백발, 그리고 시커먼 안대로 눈을 감싼 어딘가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는 소년.

“안 그래 백뢰?”

“......”

*

“얘기 좀 하자.”

벌컥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전라로 여성과 뒤엉키고 있는 바비룬이 있었다.

그는 만취한 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일부러 주술을 발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취하지도 못하니까. 그 한껏 흐트러진 모습을 보자 다르칸은 기분이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너 뭐가 문제야?”

“문제는 뭐가~”

“윤상이한테 시위하는 거야?”

“어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우리 군단장님~? 안 그래 레이지아?”

“후후후후... 아잇, 그만 주물거리세요, 살 늘어나요.”

“좋은데 왜애~”

“...다 나가.”

“형! 형도 앉아! 우리 술 안 마신지 좀 오래 됐잖아!”

“장난 같아?”

휘이이­!!

바비룬의 방 안에 음산한 오러가 몰아친다. 그에 바비룬이 양옆에 끼고 있던 마왕군 병사들은 살기에 얼어붙었고, 그 가운데의 바비룬이 홍조를 띠며 벌떡 일어났다.

“야 김철쑤! 지금 뭐 하는 거야?!”

“얘기 좀 하자고 했어. 주술 써.”

“지금 내 여자친구들한테­”

“쓰라니까.”

쿠구구구­

방이 부러질 듯 요동친다. 다르칸은 뱀눈으로 바비룬 방 속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이들은 맹수 앞 초식동물처럼 몸을 말고 성급히 벗어났다. 다르칸은 방문을 강하게 닫고선 바비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게 진짜야?”

“그래, 그러니 썩 나가. 빨리.”

10분 남짓, 다르칸과 바비룬의 대화는 끝났다.

바비룬은 마왕성을 떠났다.

*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번 투기장도 무탈하게 개막!!! 완료!!!!]

와아아아­!!

투기장이 열렸다. 마치 투견장처럼 되어 있는 장소. 투명한 유리벽을 통해 관중들이 인파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열기에 하늘이 뿌옇다. 원래도 강 건너 불구경이 그토록 재밌는 법이다. 강 건너도 아닌 유리창 너머이니 흥분은 배가 될 것이고.

[언제나처럼 32강으로 진행됩니다! 여러분은 그저 즐기며 배팅만 하면 됩니다! 그 배팅은 무척이나 자유롭죠. 하지만 정배, 역배라고 하지요? 치열한 신경전! 너무 강력하고 이름 널리 알려진 자에게 승리를 배팅하면 안전할지언정 얻어가는 건 별로 없다는 거 모두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너구리 가면을 쓴 사회자가 구두를 경쾌하게 바닥에 치며 열을 올렸다.

중앙에 있는 투기장에서는 그 혼자만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지만, 시원시원한 발성 덕인지 존재감은 꽉 차 보였다. 저 위 특등석에서 구경하고 있던 독수리의 길드장은 씨익 웃었다. 그 웃음에 호응하여 사회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부디 재밌는 경기를 만들어주길 바라며. 첫 게임 룰부터 소개하겠습니다. 투기장이라고 마구잡이로 싸우기만 하면 재미 없잖아요? 다름 아닌 초거대 길드 독수리에서 개최한 투기장이니까요!!]

이 게임 룰이라는 게 상당히 재밌는 부분이다.

매년마다 바뀌는 룰은 32, 16, 8, 4강 결승전까지 모두 제각각이다. 그걸 아는 건 독수리의 길드원밖에 없다. 외부인들에게는 정보가 새어나가지도 않는다.

사실 새어나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오러의 질이 높거나 마력이 높다고 무조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다는 건 헛소리다.

전략을 요구한다. 또한 게임마다 인간 상성도 분명히 존재한다.

때문에 아무리 강한 자가 출전한다고 해도 그쪽에 무지성으로 배팅할 수는 없다.

[게임의 이름은 ‘잔을 채워라’!]

사회자가 댄서처럼 멋지게 척, 자세를 잡으며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그 가운데에는 고풍스러운 문양이 새겨진 잔이 있었다. 사실 외형만 보면 너무나 성스럽게 생긴 게 마치 성배에 가깝다.

[각 진영에는 한 개의 잔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거대한 우물이 있죠. 각 팀별로 출전하는 인원은 2명! 이쯤 되면 우리 투기장의 VIP 분들은 감이 오실 겁니다!! 우물에서 물을 퍼와서 본인 진영 잔에 채우는 게 이 게임의 전부! 제한시간이 끝났을 때 더 많은 잔이 채워진 팀이 승리하게 됩니다!!]

상당히 평화로운 룰이다. 하지만 경기장이 땅에서 구구구구­ 올라오자 관객들은 흥분을 멈추지 못 했다.

[양 팀에 대한 방해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이곳이 어디입니까?!]

자유 도시 달리아락!!

[저희에게 법이 있던가요?]

없이도 잘 산다!!

[그겁니다!! 2명의 출전자는 각기 키퍼와 어태커로 칭합니다. 어태커는 우물로 달려들어 물을 퍼오거나 상대 잔을 무너트리는 사람이고, 키퍼는 그 잔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잔을 옮기는 도중에 실수로 누군가가 죽더라면...... 어떡하죠? 흑흑... 정말 어떡합니까...]

눈물을 훔치는 척 고개를 파묻고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순간 돌변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가면 때문에 진짜 울고 있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바는 없었지만, 이곳에 있는 모두가 사회자의 가면 속 표정이 당연히 미소가 만개했으리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뭐, 아무렴 어떱니까. 여기는 자유 도시 달리아락인데요. 안타깝지만 아무도 책임져주지 않잖아요? 그게 재밌는 거죠? 그게 흥분되는 거죠?!]

와아아아아­!!

사회자는 관객과의 소통이 아주 능숙했다.

하지만 대기실에서의 장은 상당히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케일이 금발을 늘어트리며 장과 시선을 맞췄다. 사슴처럼 초롱초롱한 눈을 꿈뻑이며 말했다.

“오빠? 왜 그래요?”

“사람이 가벼워보여서. 남 목숨이 저리도 우습다는 건지.”

“원래 저럽니다. 독수리 길드 자체가 불한당들 모임이죠.”

“뭐... 그렇겠죠.”

언짢음은 여전했지만, 슬슬 출전 카드를 정해야 한다.

“굳이 전략 짤 필요도 없어. 간단한 게임이고, 우리는 출전자들 중 가장 강한 축에 속할 테니 원칙대로만 하면 돼. 키퍼는 원거리 원호와 방어가 모두 가능한 사람이 하고, 어태커는 재빠른 사람이 한다. 자 키퍼 먼저 제출해야 돼. 누가 할 거지?”

“이미 정해진 거 아닌가?”

퀸의 음성에 시선이 장에게 쏠렸다. 패이도 마법을 다루는 사람이니 키퍼가 가능하긴 하다만, 그는 근접 전투 마법에 특화되어 있다. 생각을 더듬어봐도 역시나 키퍼는 장이 제격이었다.

“...그래. 그럼 어태커는 늑대 길드 쪽 도움을 받고 싶군요.”

32강과 16강은 2명씩 나간다.

하지만 중복은 불가하다. 말인즉슨 이번에 장, 그리고 같이 나가는 인원은 다음 경기에서 저절로 제명된다는 거다.

“확실히 용사 2명이 같이 나가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죠. 확실한 승리 카드니까.”

“그쪽들이 발목 잡으실 분들도 아니잖습니까. 지각은 좀 한다만.”

“......미안합니다.”

패이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빨리 어태커의 이름까지 제출하고 이 주도권 빼앗긴 대화를 끝내고 싶은 탓이다.

“네가 나가라.”

패이의 시선에 머무른 두 명.

작은 체구의 여성의 어깨에 거대한 머리를 부비적거리는 듄이 아니라.

“네.”

기넨이었다.

장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곤 아무말 없이 명단을 제출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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