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 투기장
* * *
“...네가 날 감당할 수 있겠어?”
케일의 표정은 착잡했다. 그녀는 눈앞의 에고 소드 클리브 솔리스.
그 검 자체가 케일에게 시련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종류가 다른 용사와는 달랐다.
퀸 처럼 전투를 하는 것도 아니며, 빈 처럼 궁술 실력을 점검받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적인 것이었다. 이 검이 지닌 과거, 그리고 그 과거로 인해 얻게 된 힘.
그 힘을 다룰 자격이 있는지, 피와 어둠으로 얼룩진 이 검을 휘둘러 세상을 바로잡을 자신이 있는지.
바닥에 박힌 클리브 솔리스에서 투영된 그녀의 모습은 케일과 똑같았지만 표정이 달랐다.
교복을 이지혜의 모습. 그녀는 피로 물든 교복을 입은 채 입을 열었다.
“언제나 나는 전쟁과 함께였어. 이 검을 다룰 수 있으면 너는 누구보다 강해지겠지. 하지만 절대로 과신해선 안 돼. 나와 함께한 자들은 모두 파멸의 길을 걸었어. 패왕의 길. 모든 걸 깨부수고 힘으로 권력을 얻어내는 자들.”
“......”
“너는 그들과 다를 것 같아? 자신이 있다면 나를 뽑아. 자, 어서.”
“...나는.”
시간이 흘러 던전의 중앙 홀로 나온 케일의 허리춤에는 레이피어 대신 클리브 솔리스의 검집이 있었다.
그곳에는 멍하게 서 있는 퀸과 장이 있었다.
퀸의 몸은 녹빛 진액으로 가득했고, 두 손에 끼워진 건틀렛은 정말이지 더러웠다. 그래도 새로 생긴 상처는 없었다. 그녀 나름대로 이 던전의 한 축을 깨부순 것이다.
장은 그녀에 비해 온전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온몸에는 서리가 가득했고 그곳에 화염을 지지며 녹여내고 있긴 하지만 녹록치는 않아 보였다. 그는 ‘마티고스’라는 이름을 중얼거리며 불쾌감을 표했다. 케일은 떨떠름하게 말했다.
“다 무사한 거죠...?”
“우리는 무사해. 근데.”
빠득 어깨춤에 있는 얼음 조각을 꽉 움켜쥐었다.
“형이 사라졌어.”
“...멍청한 녀석. 하여간 조심성이라곤 없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성빈 오빠가 왜요?”
“납치됐다.”
덤덤한 목소리였지만, 퀸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빈이 걸어갔던 통로 끝에는 차원문이 있었다. 그 차원문은 마왕성으로 좌표가 연결되어 있다고 하더군. 악쿤 토든의 짓임이 훤하지.”
“...그럼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당장 건너가서”
“지혜야.”
싸늘한 목소리.
“다 같이 죽자고?”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성빈 오빠를 구해야죠!!”
“이거 어린애들 히어로 놀이 아니야.”
차원문은 이미 닫힌 채였다. 그곳의 바닥에는 빈의 화살이 가득했다.
“지금 못 구해내. 악쿤 토든의 마법과 진 키아라의 실력을 봤잖아.”
“그럼 어쩌자는 거예요, 오빠 가만히 내버려두자고요?!”
“함정이야. 그들도 함부로 형 죽이지 않을 거라고. 설령 차원문을 다시 열고 건너가 마왕군을 깨부수고 사천왕을 맞이해도, 그들은 형을 인질로 잡고 우리에게 무언가를 갈취하겠지. 최악의 경우, 넷 다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어. 이럴수록 침착해야 돼. 지금 가면 그들이 원하는대로 흘러갈 뿐이야.”
“끼에! 끼에에!”
그의 옆에 다타리오가 소리친다.
장의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그에 힘입어 장은 말을 더했다.
“...전면전쟁은 무리야. 우리들로는 부족해. 아직 아티팩트도 다 모으지 못 했어.”
그는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서 피가 한 줄기의 선을 그으며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한시라도 빨리 내 아티팩트부터 얻는다. 성빈이 형 구출은 그 다음이야.”
*
동대륙 라스타. 플라금에 의해 흡수된 그곳에 도착했고, 이곳에는 용인이 가득했다.
거대한 전철이 덜컹거리며 움직인다. 그를 안내하는 승무원이 세 행인에게로 다가갔고, 이들은 입에 사탕, 쿠키를 비롯한 주전부리등을 씹고 있었다. 승무원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고개를 돌렸다.
“표 보여주세요.”
얼핏 보기에도 피로에 쩔어있었다. 전철 운행을 시행한지 막 몇 달도 안 되었기에 아직 시스템이 확립되지 않은 탓이다. 관리하는 인원도 많이 없었고, 그 몇 안 되는 인원 중 한 명이 눈앞의 승무원이었다.
“표는 없는데.”
“그럼 구매하고 다시 오세요. 이곳에 계시면 전철 이용자들이 지나가기 힘듭니다.”
“저희도 전철 타려고 기다리고 있던 거예요. 장장 30분을 기다렸어요.”
“...표 구매하고 오세요.”
“늑대.”
“...? 가시라니까요.”
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손사래를 친다. 말이 나오기 전 잠시간의 침묵과 노골적인 짜증난 표정이 그의 심경을 대변했다.
“당신보다 더 높은 자는 없습니까?”
“나가주세요.”
“...잠시만요. 통화 한 번만 하시죠.”
“말로 하면 못 알아들을”
뚜르르르
철컥
승무원이 떠나가거나 직원을 부르기 전, 타이밍 좋게 곧장 전화는 연결되었다.
그 건너편에서 졸린 목소리가 들린다.
“나 오늘 휴가... 잠 좀 자자... 술 덜 깼다고...”
“대장님, 오늘 무슨 날인지 까먹으신 겁니까?”
“무슨 날인데...”
“독수리로 파견가는 날이잖습니까. 표 없어도 괜찮을 거라며 떵떵거리더니, 이게 뭡니까.”
“...늑대라고 말 했어?”
“모르는 눈치인데요.”
하아아 깊은 한숨.
“확인해볼게, 일단 끊어.”
“그냥 직접 바꿔드릴게요. 잔뜩 뿔나신 우리 승무원님이랑 통화 좀 하시죠.”
“그래, 바꿔봐.”
고개를 돌리니 딱 봐도 진상들이라 생각하는 표정이다.
승무원은 일행에게서 거칠게 수화기를 낚아챘고, 영업 방해라며, 당신 누구냐며 목소리를 드높였다.
“나 늑대 길드장이요.”
“늑대 길드장이면 다... 늑대 길드장님이라고요?”
“그래, 애들 보내줘요. 이미 다 얘기된 거니까요.”
놀란 표정을 거두지 못 하고 다시 일행을 바라보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늑대 심볼이 눈에 들어온다. 일행 중 중심에 있던 남성은 이제야 믿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모, 목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할 일은 해야겠다는 건지, 끝끝내 패이 클라우드에게 말을 물었다.
“용사님들 지원이요.”
“허, 허어... 혹시 성함이?”
“패이 클라우드.”
들어는 봤죠? 만족스러운 얼굴로 거칠게 수화기를 낚아채고 일행과 같이 전철에 올랐다. 그 뒷모습을 보며 승무원은 넋이 나간 표정을 거둘 수 없었다.
*
늑대, 독수리, 족제비.
ONE(?)을 지탱하는 3대 길드이다.
그들의 주 돈벌이는 보수를 받으며 의뢰를 해결해주는 것.
합법적인 내에서만 움직이지만, 때로는 암암리에 해결해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보수에 따라서이다.
“자, 이번 임무 점검. 마법 용사 장의 아티팩트를 구하는 데 협조하는 것. 여기서 듄한테 질문. 우리가 용사를 만나서 뭘 협조할 것 같아?”
패이 클라우드가 화염 낙인이 찍힌 서류를 보며 말했다.
드문 일이다. 의뢰자가 용사 본인이라는 것은.
이번 던전의 돌파를 지원해달라고 말했다. 보수도 선불로 넉넉하게 지불했고, 사실 용사의 일이니 보수를 받지 않아도 어차피 돕기는 했을 거였다. 임하는 태도는 조금 달라졌겠지만.
아티팩트가 잠들어 있는 시련의 던전.
웬만한 전문가보다 던전에 더 빠삭한 용사 일행이지만, 이번만큼은 남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은 사실 던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투기장에 가까웠으니까.
무력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다. 머릿수가 필요했다.
웬만하면 실력자들로. 그러니 거대 길드 중 하나인 늑대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패이 씨, 말씀 중 죄송하지만.”
패이 건너편의 여성이 엄지로 옆자리의 남성을 가리켰다.
“크어어어”
대답 대신 코골이가 들려왔다. 패이는 기도하듯 미간에 주먹을 올리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깨워.”
“네.”
붉은 머리칼, 양갈래로 묶어올렸지만 작은 체구와 귀여운 외모로 인해 이질감은 없다.
그러나 착각은 금물이다. 그녀의 나이는 올해 스물 다섯을 넘겼다.
어릴 적부터 길드에서의 생활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늑대 길드의 기넨이라는 이름은 피도 눈물도 없는 붉고 작은 악마로 통한다. 다른 별명은 살육 전차라던가.
그 소문의 주인공인 기넨은 앙증맞은 머리칼을 촤르륵 늘어트렸다. 차가운 무표정은 살육 전차라는 이름과 제법 어울렸다.
“듄, 패이 씨가 너 깨우래.”
“크어어어”
“난 말했어.”
우우웅
전철 내에 무기 반입은 금지다. 때문에 기넨의 무기는 보관함에 실린 채 이동중이다.
그러니 주먹이었다. 꽉 쥔 작고 새하얀 주먹. 하지만 그곳에 가득한 흉터가 그간 그녀가 겪어왔던 고난들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덜컹!
전철이 조금 흔들렸다. 같은 칸에 있던 승객들은 모두 잠에서 깨어나거나 화들짝 놀라며 패이가 있는 곳을 바라봤고, 기넨의 주먹에 얻어맞은 대머리의 사내는 눈을 꿈뻑이며 기넨과 패이의 얼굴을 노골적으로 보았다. 깨어난 걸까?
“...치즈 돈까스.”
크허어어 흠냐...
듄 이라는 이름의 우락부락한 근육질의 사내는 다시 고개를 파묻고 깊은 잠에 빠졌다.
어느덧 복부에 머물렀던 기넨의 오러는 흐리멍덩하게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하 씨바.”
“더 강하게 깨울까요?”
“아니야, 네가 더 세게 치면 전철 무너지겠다. 내가 할게.”
치이이
허공에 자그마한 마법진 세 개가 둥신 뜨며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 마법진을 일렬로 세웠다. 그것은 모두 듄의 가슴팍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배가 말 하면 듣는 척이라도. 이 새끼야.”
후웅!
패이의 주먹이 세 개의 마법진을 통과한다. 그대로 듄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그로부터 10분이 흘렀다.
“제발 나가주세요. 제발... 제발요......”
“소동 안 피울게요. 길드의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그건 알겠는데, 그냥 손님들이 무서워 하고 있어요. 제발 나가주세요. 환불도 해드릴게요.”
“...알았어요, 나갈게요.”
모두 쫓겨났다. 늑대라는 뒷배가 있음에도 이번에는 아무 소용 없었다.
전철이 탈선되었기 때문이다. 그걸 힘으로 끼워 맞춘 것도 패이 일행이었지만, 엎지른 물을 다시 쓸어담는다고 한들 모두 담을 수는 없다.
수습했다고 전철을 탈선시킨 것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아니, 거 어깨 좀 흔들면 일어날 텐데 그렇게 무식하게 힘쓰니까 이 사단이 나죠 대장! 크하하!!”
듄은 호쾌하게 웃으며 패이의 뒤를 따랐고, 기넨은 무표정으로 듄을 바라보고 있었다.
“패이 선배, 제가 그렇게 무식한 놈으로 보였소? 기넨의 사랑스러운 손길 한 번이면 알아서 일어났을 것을 왜 주먹을 휘두르냐 이 말이오! 안 그런가 여보님?”
“너 지금 사랑스러운 손길이라고 했냐?”
“그렇소. 내 여자친구 기넨이 볼 한 번 쓸어주면서 ‘일어나 자기야.’ 했으면 벌떡 일어났을 것을 쯔쯧... 순간의 감정을 못 이기는 건 사랑 말고는 있어서는 안 된단 말이외다.”
“...기넨, 사랑스럽게 너 남편 좀 만져줘라.”
“네.”
치이이이
기넨의 주먹에 자줏빛 오러가 마구 휘감긴다. 그것은 기세만 보면 군단장 다르칸의 것이라 해도 믿길 정도로 탁한 오러였다. 전철 안에서 풍겼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기도 했고.
“어, 어? 여보?”
“여보가 아니라 원수.”
“잠깐만? 잠깐만! 가정폭력 반ㄷ”
콰아앙!
평지에 모래바람이 인다. 그 중심에는 거구의 사내가 처량하게 엎어져 있었고, 기넨은 콜록거리며 재빠르게 패이 뒤로 따라붙었다.
“얼마나 이동해야 하죠?”
“글쎄다, 걸어서 2시간은 넘게 걸릴 것 같은데.”
“저 덩어리는 어떡할까요.”
뒤에 듄을 가리킨다.
“알아서 발자국 따라 오겠지. 고통도 못 느끼는 몸인데 무슨.”
“끄어어어 같, 같이 갑시다!”
“거 봐.”
뒤를 돌아보자 듄은 거대한 몸을 쿵쿵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