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괜한 짓
* * *
“말했잖아!! 내가 분명 말했잖아...!!”
“이렇게... 되, 될 줄은 나도 몰랐... 어...”
“위험하다고!! 우리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겁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미안해. 미, 미안하다는 말 밖에...”
악쿤의 애절한 목소리가 필라기리아 에볼린의 광장에 울렸다.
그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바비룬을 몰아붙였다. 떨리는 두 손으로 그의 양어깨를 부여잡았고, 그 손에 묻은 잔뜩 묻은 몬스터의 진액과 피가 바비룬의 외투를 적셨다.
“우리를 지키려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어...”
“....나, 나라고 이렇게 될 줄은... 몰, 흐, 크읍 끄윽...”
“우린 아직 약하다고... 마왕군에 대적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파칸 대장님이 얘기했잖아... 나도 널 말렸잖아... 그런데 왜 그랬어...”
그의 목소리에는 애환이 담겨 있었다. 바비룬에 대한 원망도 섞여서.
용사를 지키려다가 죽은 원혼들을 달래려는 걸까, 그렇다기엔 너무나도 많은 인명이 터무니없이 죽었다. 시체로 이루어진 산의 주를 이루는 것은 태반 기사단들이다.
그들의 초점 잃은 눈매가 마치 용사를 원망하는 것 같아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자꾸만 곁눈질로 그 눈을 바라보게 된다. 그 시선에 압도되어 몸을 움찔하고 시선을 다시 돌려본들 오뚜기가 제자리를 찾아가듯 자꾸만 시체 산으로 고개가 향한다.
어째서일까. 용사를 위해 희생한 원혼들에게 죄스러워서? ONE(?)의 어두운 일면과 마왕군의 악독함을 직면해야 해서? 무엇이든 변하는 건 없었다. 수많은 사람이 용사를 대신하여 죽었다. 이게 전부다.
기사단 대장 파칸, 그가 기사단에게 명령한 것을 사명을 다하여 용사를 지켜내는 것.
목적 자체는 달성했다! 용사 중 누구도 죽지 않았으니까.
떠나면 남겨진 이들이 괴로운 법이다. 그걸 증명하듯 용사 중 어느 누구도 웃음 짓지 못했다.
웃음만 짓지 못 하면 다행이지. 이들의 얼굴 굴곡에는 그늘이 가득했다. 얼굴 선을 타고 액체가 흐른다. 그것은 바닥에 점을 찍었다. 눈물일까?
툭, 투툭,
알 수 없었다. 때마침 비가 바닥을 두드린다.
후두두둑
그 기세는 거세지며 바닥을 더욱 요란하게 때렸고, 물통에 붉은 물감을 닦아내듯 이들의 몸에 있던 피는 바닥에 얼룩졌다. 소나기가 모든 걸 청소하듯 시체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마저도 하수도로 내리고 있었다.
핏빛 거리가 투명해진다. 허나 큰 소동 후 진정 같은 표현은 썩 어울리진 않았다.
암울함만이 더해진다.
더러운 날씨만큼이나 심경은 복잡했고 얼룩졌고 더러웠다.
우르르쿠릉
천둥 번개가 번쩍이며 악쿤과 바비룬의 오른쪽 얼굴 면을 비췄다.
악쿤은 숨을 겨우 고르곤 말을 뱉었다.
“재홍아, 왜 괜한 짓을 했어...”
다르칸과 진은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
‘...이젠 악몽도 꾸네.’
끄응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보았지만 개운하진 않았다.
탁자 옆에 있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묘하게 목이 욱신거렸다. 다시 물을 마셨지만 나아지지 않는다. 물에 가시라도 있는 듯 여전히 통증은 계속됐다.
크르륵
인상을 쓰며 잠시 목을 갈았다. 여전한 통증에 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묘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서 뭐 하냐?”
바비룬 필라이트의 부관 숲의 엘프 드리아스. 그가 무표정으로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나무 껍질처럼 갈라진 손으로 바비룬의 볼을 쓰다듬었다. 홱 고개를 젖히며 그 손길을 뿌리쳤지만, 다시 천천히 바비룬에게 향했다. 그 손길은 묘하게 부드러웠다. 다시 뿌리치면 또 손길을 천천히 뻗을 것 같고, 그 묘하게 느린 행동은 굉장히 심기에 거슬리기에 그냥 손길을 받아들였다.
“고통... 악몽... 슬픔...”
“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냐고, 악몽이라도 꿨냐고? 악몽에서 깨어났는데도 왜 표정이 슬퍼 보이냐고? 악몽도 악몽인데 하필이면 개 같은 기억이었거든.”
“위로... 감내... 나눌 것...”
“필요 없어.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 언제까지 질질 짤 것도 아니고.”
드리아스의 손을 천천히 내려놓곤 살짝 기울어진 소파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알람 마도구에 적힌 시간보다 1시간이나 일찍 깼지만, 드루이드는 잠이 필요한 몸은 아니었다. 그냥 심란해서 생각을 안 하려고 뇌를 쉬게 해준 것이다. 어제는 상당히 좆 같은 날이었으니까.
“가서 일 봐. 마왕성 수복해야 되잖아.”
위로는 고맙지만, 할 일이 많았다. 쑥대밭이 된 마왕성 수복이 우선이다.
“완료... 동료... 치유... 다른 이가...”
“어제 대충만 해놓고 말았는데 마왕성 수복을 다 마쳤다고? 아니, 그건 그렇다고 쳐. 야, 드라이아. 사상자는 없고 부상자만 있다고? 그게 무슨 개소리야. 내가 눈앞에서 죽은 마왕군을 봤는데.”
“용사가... 주술을...”
“하, 하하... 기가 차네. 죽은 생명도 살려낼 수 있다니.”
헛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그만큼 헛소리였다. 드라이어가 거짓말을 할 성격은 아니니 진실이겠지만,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아직 꿈에서 깨지 못한 걸까. 그렇다면 빨리 깼으면 싶다. 희망 후 절망보다 그냥 절망이 차라리 나으니까.
“진실... 거짓... 안 함...”
“알아. 아는데. 그냥 안 믿겨서.”
케다시의 주술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마왕군의 육체를 치유했고, 그 육체에 아직 떠나가지 못 한 영혼을 다시 가져다 붙였다고 했다. 무슨 재봉틀 인형 봉합하는 것처럼 생명을 살려낸 것이다.
악쿤에게 묻고 싶었다.
‘여기까지 의도한 거냐?’
그럴 리는 없겠지.
내가 괜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케다시가 마왕성을 깨부술 일도 없었을 테니까.
우연히 들어맞은 거겠지.
이런 생각만이 뇌를 채웠지만,
우연이고 아니고가 뭐가 중요할까. 무조건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바비룬은 왜인지 휘청이는 몸을 소파에 뉘었다. 아직 몸이 잠에서 덜 깬 게 아니다. 그냥 휘청거렸다. 기뻐서 웃음이 나온다. 헛웃음에 가까웠다.
그렇게 한참이나 웃었다. 광기에 찌든 것처럼 웃는 바비룬의 모습에,
“수호대장... 미친... 것...?”
드리아스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이나 웃었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고 딸꾹질까지 시작했지만 여전했다.
*
균형이라도 맞추려는 건지, 웃음기를 거두자 이번에는 그 자리에 분노가 채워졌다.
언짢은 무언가가 대놓고 눈에 밟힌다.
“밥까지 같이 먹을 이유가 있나?”
도저히 선한 느낌의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손아귀에 꽉 쥐어진 종이 뭉치처럼 잔뜩 구겨진 얼굴은 얼마든지 지어줄 수 있지만 말이다.
“이유? 내게 친애하는 악쿤 참모장님이 자랑스러운 주방장의 요리를 대접하고 싶으시대잖냐~ 그치 악쿤?”
새삼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 악쿤, 그 건너편에서 묵묵히 앉아 있는 다르칸.
그 가운데에는 궁술 용사 빈의 모습을 한 케다시가 있었다.
원래는 본인의 자리였지만, 떡하니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악쿤이 케다시의 손 위에 두 겹으로 상냥하게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말씀대로입니다. 바비룬 뭐 하는가? 얼른 착석하게. 곧 파리오 부자의 요리가 나올 거다. 아, 케다시님. 이번 아침 식사를 설명드리자면 한때 광포의 드루이드로 이름을 떨치실 때 즐겨 드셨던 햄버거입니다. 다만 우리 요리사의 특제 양고기 패티를 넣은 햄버거죠. 부디 입맛에 맞으시면 좋겠습니다.”
설명을 마치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하하... 괜히 떨리네요. 신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제가 아무리 ONE(?)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어도 처음인지라...”
“뭐든 좋아~ 아무거나 다 잘 먹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제게 너무 많은 도움을 주시고, 수호대장과 제 부관이 주제도 모르고 케다시님께 위해를 끼쳤던 무례도 너그러히 용서해주셨는데...”
“다 지난 일 아니겠어? 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카티골 그 계집애랑 용사 순서를 바꿀 걸 그랬어. 메이블 그 자식은 꽉 막힌 녀석이었는데, 악쿤 너는 센스가 있단 말이야?”
“감사합니다! 그리 후하게 평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도저히 못 봐주겠네.”
쾅
소음에 잠시 멈칫했다. 흔들리는 문에 시선도 머물렀고, 악쿤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무례한 녀석! 감히 신을 앞에 두고 저런 태도라니...!”
울그락불그락 표정이 변화된다. 씩씩거리곤 탁자를 강하게 내려치다가 옆에 케다시의 눈치를 보곤 행동을 멈췄다.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하십시오. 저렇게 못난 놈이지만 제 동료입니다. 용사의 외형이시라 원한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생각이 짧은 놈이라 그렇습니다.”
“그래, 그래. 악쿤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다르칸. 식사가 나오기 전 엄하게 녀석을 꾸짖고 오거라.”
“...알겠습니다.”
쿵
다르칸은 조용히 눈을 감고 바비룬의 기척을 감지했고, 그가 지나간 방향이 옥상으로 다가가는 복도임을 알았다. 눈을 떴다. 그리곤 그 방향으로 같이 걸었다.
‘어지간히 화 났구나.’
벽에는 움푹 패인 자국이 상당했다. 그 패인 정도는 딱 바비룬의 주먹 크기였다.
주먹으로 행선지를 나타내는 바비룬이 빵조각을 흘리는 남매와 비슷하다 생각하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다르칸은 기척 감지를 그만두고 주먹 자국을 따랐다.
“재홍아.”
옥상에 도착하고 나서야 주먹 자국이 멈췄다. 문 건너편에는 역시나 바비룬이 있었다.
그는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발밑에는 벌써 3개피나 떨어져 있었고, 다르칸은 그의 곁으로 다가가 주섬주섬 그것들을 주웠다.
“윤상이를 아직도 몰라? 왜 화났어.”
“...푸흐”
“담배 몸에 안 좋다니까...라기엔 몸에서 해독이 되겠구나.”
“푸흐...”
연기만 내뿜을 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진득하게 기다렸다. 조금 지루할 때에는 검을 닦았고, 오러를 몸 일부분에 집중시키며 바비룬이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형.”
바닥에 꽁초가 12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목소리가 들렸다. 휘두르던 먹보를 허리춤에 성급히 꽂아 넣었다.
“내가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괜한 짓?”
“용사를 납치하고, 정보를 캐내 누가 실렉티스인지 알아내고 싶었어. 그렇게라도 형이랑 윤상이한테 도움이 되고 싶었어.”
“성공한 거 아니야? 빈이 케다시라는 걸 알아냈으니까.”
“그게 내 힘으로 알아낸 게 아니잖아. 정윤상 안 왔으면 마왕군 병력은 더 죽었을 거고, 마왕성 수복도 아직도 못 끝났을 거야. 거기서 끝났을까. 정윤상이 입 잘 털어서 케다시가 다 고쳐준 거잖아.”
착잡한 표정처럼 그는 힘이 없었다. 그래도 마음에도 없는 소리까지 하며 위로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 걸 바리지도 않을 터이니.
“그렇긴 하지.”
“걔 없었으면 또 나는 민폐였다는 말이지. 하등 쓸모 없는 드루이드.”
“재홍아. 우리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잖아. 그렇게 스스로 깎아내리지 마. 결과론이야. 다른 용사였으면 큰 도움 됐을 거야. 분명해.”
“아니야, 그냥... 괜한 짓을 한 것 같아.”
무슨 말을 해줘야 힘을 복돋을 수 있을까, 다르칸으로서도, 김철수로서도 모르겠다.
자기가 없었더라면 더 나았을까에 대한 끝 없는 기우는 회사 시절 많이 겪었던 고충이었고, 그에 대한 해답을 못 찾았으니 위로할 형편이나 되는지 스스로를 의심하며 망설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그냥 어제부로 생각이 많아져서 그래. 들어가서 쉬어. 나도 쉴게.”
문은 닫혔고, 옥상에는 멍한 표정의 다르칸만이 남았다.
터덜터덜 걸어가던 그 뒷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건 왜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