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괜한 짓
* * *
[악쿤 토든을 데려와라! 그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궁술 용사 빈, 이제는 본모습을 드러낸 케다시가 온몸에 마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대검은 마치 톱날 같았다. 저 날에 닿은 마왕군의 몬스터들이 찢겨나간다. 마왕성 외곽이 짐승에게 난폭하게 물어뜯긴 듯 부서진다. 하지만 넋놓고 당해주진 않았다.
[좆 까고 있네.]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을 지닌 독수리. 그것으로 변환을 마친 바비룬이 달려들며 케다시의 대검에 맞섰다. 4분의 3 확률로 빈이 케다시가 아닌 용사이기를 바랐건만 재수가 없었다. 밴시의 정신 지배 마법을 당해주는 척하며 계획을 모두 알아낸 케다시는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고, 바비룬이 막아섰지만,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케다시와는 달리 바비룬은 마왕성 병사들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다.
카가가각!
마기에 바비룬의 주술이 맞선다. 거대한 충격파에 잡졸들은 감히 다가가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는 아버지에게 용사를 키워낼 것을 약조했다. 이건 엄연히 약조 위반이 아닌가? 내가 말한 것 중 무엇이 좃 까는 소리라는 거지?]
[모두 다 병신아. 너네 지금 레벨 존나 높잖아. 그것도 우리 때보다도 훨씬! 네가 말해봐. 엘리트 코스로 레벨 높이고 있는데, 어느 부분이 우리가 약조를 위반했다는 건데?]
[용사를 납치해 정신 지배를 할 생각 자체가 시건방지다. 실렉티스를 흉내낼 셈이냐? 감히 나 케다시, 태초의 실렉티스를 앞에 두고서!]
[태초든 거시기든 알 바 아니야. 너희 용사 중 누가 실렉티스인지 알아내는 거랑 악쿤이 약조를 안 지키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내가 직접 처단한다!]
[와, 시발. 어지간히 말 안 통하는 새끼네.]
콰앙!
케다시가 검을 반달 모양으로 올려치자 바비룬의 몸이 밀려났다. 그는 허공에 날개를 퍼덕이며 어떻게 케다시를 제압할까 간을 보고 있었고, 내심 지하실에 박혀 오러 수련에 처박힌 다르칸이 빨리 합류해주길 바랐다.
바비룬 혼자서는 케다시 제압이 불가능하다. 차라리 죽이는 거라면 모르겠지만.
케다시의 머릿속도 바비룬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둘의 생각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다만 서로의 이해관계는 정립되지 않았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송곳니를 드세우고 있다.
[악쿤 볼 생각은 꿈 깨고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돌아가라.]
[하하하! 아버지께 힘을 빌린 미천한 놈이 내게 퇴각을 권하다니, 이보다 웃긴 일이 있을까! 벌레만도 못한 전송자여. 귀 잘 열고 듣거라. 하루라도 더 살고 싶거든 알아서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아버지의 전능함에 탄복하며 공포에 떨어라. 아버지라고 언제까지 네놈들의 편의를 봐주지 않아.]
[편의? 편의?! 너 아비가 우리를 언제 편하게 해줬지?! 전송된 날부터 지금까지 발 쭉 뻗고 잔 적이 없어. 용사일 때는 마왕군을 어떻게 해치울까에 대한 걱정, 지금은 네놈들을 어떻게 찢어 죽일까에 대한 걱정에 밤잠 설친다. 이게 편의를 봐준 삶이라면 자살이 더 나아 씨발 새끼야.]
[하등 종족은 입도 더럽군.]
[상등 종족은 말도 안 통하는군. 하루라도 빨리 뒈졌으면 싶은데. 혀도 깨물고, 접시에 코도 박고, 밧줄로 목도 조르고, 어떻게든 제발 죽어. 빈 씨발년아.]
바비룬의 욕이 선명하게 울릴 때쯤, 오른팔과 오른발에 부상을 입은 디안이 비틀거리며 마왕성 외각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고, 마왕성의 병사들이 눈 내리는 바닥에 대거 죽거나 큰 부상을 입고 널브러져 있는 걸 보곤 눈동자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얌마 들어가!]
바비룬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곤 소리쳤지만,
“...참모장님......”
[하여간 저 유리멘탈 씨팔, 또 시작이네.]
들리지 않았다. 새하얀 눈에 물감을 뿌린듯 서서히 피가 번진다. 그녀는 양손으로 고양이 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 ...πρωττυπη μαγεα(시그니처 매직) κρυφτ(술래잡기). }”
지잉 케다시의 뒤통수 뒤에 손바닥만 한 마법진이 생겼다.
‘위협 축에도 끼지 못 하는 작은 마법진. 저 계집이 악쿤 토든의 제자였던가.’
그는 디안의 마법진을 그냥 무시하고 바비룬에게 다가갔다. 저런 조그마한 마법진이면 끽해야 2서클의 마법도 쓰지 못할 터. 그런 마법은 케다시의 외피에 흉터도 남길 수 없다.
“{ ικρωμα 단두대 ? }”
하지만 그 마법진은 디안의 앞에 일렁이는 거대한 마법진과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시그니처를 모르던 케다시의 뒤통수에 푸른색 물로 빚은 거대한 칼날이 쿵 떨어지기 시작한다. 바비룬에게만 시야가 고정되어있던 케다시는 머리 위에 생긴 묘하게 거대한 그림자에 의구심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쿠우웅!!
[끄악!]
적중. 직격당한 케다시는 대차게 넘어졌고, 그의 외피를 뚫지는 못하였지만 상처를 남기는 데에는 성공했다. 미처 방어를 두르지 않은 곳에 거대한 마법이 직격했으니 제아무리 신 포식자라 할지라도 온전할 수는 없었다.
[나이스!]
어린아이처럼 세상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기뻐하는 바비룬의 옆에 디안이 다가왔다.
“수호대장님. 저 사람이 궁술 용사인 거죠?”
[그래, 에이브(AYV)가 장남인 케다시란다. 태초의 실렉티ㅅ 아 시발.]
“이제 괜찮아요.”
[아, 맞다. 이제 괜찮지?]
디안은 시간 역행을 다녀온 지 며칠이 흘렀을 때부터 바비룬과 다르칸이 실수로 내뱉은 실렉티스 발언에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뱀 문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 아마 단탈리온의 덕이 아닐까 싶다. 그녀가 마기를 주입한 게 계기였을 테니까.
[악쿤의 제자년도 이제는 약조를 어기는가!]
케다시는 용사 출신도 아닌 고작 5서클의 인간이 자신을 넘어트렸다는 것에 커다란 치욕감과 수치심, 분노를 생생히 느꼈다. 그는 격분하며 과장스러운 움직임으로 디안에게 달려들기 시작했고, 그녀가 귀걸이를 분리하여 앞에 방패를 세우려고 하자
[송곳!]
방패의 사각지대, 디안의 머리로부터 수십 미터 위에 검은색 차원문이 생겼다.
그 차원문에서 꾸멀꾸멀 무언가의 대가리가 기어나왔고, 그것은 아주 예리한 송곳이었다.
[야!! 위에!!]
[이미 늦었다. 바비룬 필라이트.]
“아...”
바비룬은 그녀를 보호하고자 날개를 펼치며 성급히 움직였지만, 그때 그의 앞에 검은색 마법진이 수십 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마법진에서 튀어나온 수십 개의 송곳은 새장 같은 형태가 되어 바비룬을 가두었고, 그는 몸부림쳤지만 곧장 부서질만큼 허술한 게 아니었다. 설령 곧장 깨부수더라도 이미 디안의 머리에 송곳은 달려들고 있었다.
“끄윽!”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방패를 위로 세워 송곳에 맞댔지만 조금 느렸다. 방패의 끝부분만이 송곳에 닿았고, 궤도는 조금 틀어졌지만 디안의 정수리에서 뒤통수를 노릴 뿐이다.
‘참모장님......’
디안은 질끈 눈을 감았다. 저 기세의 공격을 막을 수단은 그녀에겐 없었다.
“{ Ταχεα ψξη 급속 냉각 (α,τ) }”
하지만 송곳은 허공에서 멈췄다. 한쪽 눈을 부스스 뜨며 고개를 올렸고, 웅크렸던 몸을 세웠다. 그녀는 커다란 푸른 눈동자를 꿈뻑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참모장님.”
[야! 너 왜 왔어!!]
저편에서 악쿤이 홀몸으로 냉기를 휘감고 고고히 뜬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냉기가 발자국처럼 선을 그으며 따라왔고, 그 냉기는 멀리서 보기에 마치 별 같았다. 굉장히 반짝였다.
“케다시 님, 저를 부르셨다고요.”
[악쿤!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는구나!]
“용사 생활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텐데요. 현재 검술 용사의 시련 중이 아닙니까?”
[그래, 이번 방문은 그 도중에 용사를 납치할 생각을 한 너희들을 지도해주기 위함이지.]
“하아... 그 또한 계획의 일부인데... 어찌도 이리 비협조적이십니까.”
[허? 그게 무슨 소리지?]
“용사 납치가 용사 성장을 위한 발판이라는 말입니다.”
악쿤의 발언에 바비룬은 흠칫했다. 상의되지 않은 내용인데 악쿤은 모든 걸 꿰뚫고 있는 듯 태연하게 의뭉을 떨고 있었다.
“용사 중 한 명이 마왕군에 납치되면 어떨 것 같습니까? 정 많고 당신을 따르던 케일, 티격거리지만 서로에게 등을 믿고 맡기는 퀸. 이 둘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어, 어어...]
“마왕성에 당장이라도 쳐들어가자고 하겠죠. 하지만 장은 이들을 만류할 것입니다. 당신을 미끼로 불러들인다는 걸 알만큼 생각 많고 의심 많은 사내이니까요. 저처럼, 한때는 당신의 동료였던 메이블처럼. 어찌 보면 마법 용사들은 모두 의심이 많은 자들로만 이루어져 있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장이 마왕성 진격을 반대한다면 제자리걸음이지 않는가.]
“어찌 제 마음을 이토록 몰라주십니까. 섭섭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됩니다.”
[내 말이 틀려? 네놈이 대답해봐라 바비룬! 나를 납치하고 정신 지배를 거는 것이 어째서 용사 성장을 가속화시키는 방법이란 말이냐!]
곤란한 표정을 짓는 바비룬에게 악쿤은 한쪽 눈을 깜빡이곤 중지로 자신을 까딱까딱 가리켰다. 용사 생활만 몇 년이던가, 간단한 수신호로도 서로의 뜻은 통했다.
[나는 사실 잘 몰라. 악쿤 지시대로 했을 뿐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바비룬은 제 명령을 따랐을 뿐입니다.”
[정신 지배로 너희들 마음대로 부리려던 것 아닌가!]
“아닙니다. 용사들 곁에는 카넬루아와 넬피가 있고, 이들은 밴시 따위 몬스터의 정신 지배쯤이야 우습게 풀어낼 수 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겁니다. 해결하지 못했더라면 동료를 눈앞에서 잃을 위기였다는 그 상황 자체가 말입니다.”
케다시는 악쿤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흐름이 넘어오자 그는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 계획이 성사된다면 마왕성에서 용사를 구해내는 것이 그들의 1차 목표가 될 것이며, 구해낸 후 용사의 동료가 유린당했다는 데에서 오는 분노는 겉잡을 수 없이 커져 더욱이 성장하는 것이 2차 목표가 될 것입니다. 이번 용사는 무척이나 강하지만, 스승을 눈앞에서 잃은 장을 제외하곤 저희 마왕군에 그토록 골 깊은 원한을 지닌 자는 없습니다. 그 원한을 심어둘 겁니다. 아무리 강하단들 저희를 쉽사리 따라잡기란 어렵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습니까? 광포의 드루이드 브룩.”
[...네 이놈, 내 정체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가?]
“글쎄요, 말하자면 기니까 우선 엉덩이 좀 붙이고 싶군요. 따라오시죠.”
[...네놈이 말하기에 따라서 협조 따위 없다는 걸 잘 알아두어라.]
“이견이 있겠습니까?”
철퍽
악쿤은 마왕군 병사를 밟으며 성으로 걸어갔고, 그 모습에 바비룬은 분노하여 그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지만, 악쿤의 눈매를 보자 손을 내렸다.
‘왜 괜한 짓을 했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
지금 자신의 실수를 수습하고 있는 건 악쿤이기에 그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헹, 멍청한 짐승놈.]
케다시는 바비룬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곤 악쿤의 곁에 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