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 괜한 짓
* * *
신을 죽이는 방법.
첫 번째, 그의 육체를 무력하게 만든다.
두 번째, 그의 정신을 무력하게 만든다.
세 번째, 단 한 번의 기회를 얻어냈을 때 강력한 공격으로 죽인다.
줄은 미처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리는 악쿤을 보며 말했다.
“두 번째, 정신을 무너트린다... 내 기준에선 이 정도면 통과야. 어때, 좀 괜찮아?”
“...아니요. 죽을 것 같습니다.”
악쿤 토든은 온몸의 구멍으로 피를 토하고 있었다. 몸이 버티기엔 너무나 버거웠다.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약한 소리만 하며 겁먹어서는 에이브(AYV)의 털끝도 건드릴 수 없다. 누군가를 찔러 죽이려면 그 검을 꽉 잡아야 한다. 손이 팅팅 부을 정도로. 손이 터져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꽉.
“피아 자식아, 네가 보기엔 어때.”
“너는 항상 물러. 대가리가 꽃밭이지. 이 정도로는 턱도 없어.”
“그럼 뭘 더 해야 되냐?”
“글쎄... 이봐 악쿤, 신체 강화 배워볼 생각 없나? 격투술도 포함해서 말이야.”
“그 엄마에 그 아들, 뭐만 하면 신체 강화나 체력 단련. 지긋지긋하다.”
“나한테 말하는 건가?”
“예, 그쪽이요. 검에 미쳐 사는 홀라 씨랑 주먹만 휘두를 줄 아는 어딘가의 기사단원 씨... 어라, 얌마 왜 그래?”
줄이 말하는 와중 악쿤은 비틀거리다가 결국은 바닥에 엎어졌다.
바닥에 피가 튀겼지만, 잿빛 램프 속에서 핏방울쯤이야 금방 사라진다. 온몸의 상처도 금세 재생된다. 하지만 피로는 아니다. 정신적인 피로 말이다.
“말씀 중 죄송하지만 저 지금 좀 졸려서......”
모순된 말이지만 악쿤의 물리적인 상처도 잘 낫고 있지 않았다. 램프만 믿고 방치하기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상처였기에. 어찌하여 이런 커다란 상처가 생길만큼 미련한 마법을 썼노라면, 그것에 대한 대답 또한 이곳이 잿빛 램프 안이기에 그렇다. 적어도 죽지는 않으니까. 너무 죽을 것 같지만 죽지는 않으니까.
“조금만 있다가 뵙겠습니다. 하하...”
악쿤은 첫 세대 용사들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짓다가 그대로 말이 툭 끊겼다.
잿빛 램프 안에는 코골이 소리가 가득해졌다. 줄은 답지 않게 무거운 어투로 옛 두 동료에게 말했다.
“저 어린놈의 어깨를 저리 무겁게 하다니, 마음이 편치 않아.”
“쟤 이제 30살 넘지 않았냐? 나는 15살 때부터 기사단원 생활을 했어.”
“감상에 젖어있으니까 좀 닥쳐주시지, 너 같은 놈을 요즘 애들은 꼰대라고 하던데.”
“이 새끼가 진짜...”
“피아.”
발끈하는 피아에게 홀라는 무표정으로 말했다.
줄의 멱살을 콱 잡았던 피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천천히 손을 놨고, 줄은 살짝 혓바닥을 내밀어 그를 조롱했다. 사각지대였기에 홀라의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줄, 그 아이는 어떻게 지내는 거지?”
“다르칸 말하는 거지? 성실한 녀석이니 마왕성에서 틈틈히 수련하고 있을걸. 걔도 이제 슬슬 불러도 될 텐데 주술 용사 혼자서 마왕군 업무가 가능하려나 모르겠네. 내가 좀 도와줘야 하나.”
“그건 안 되지. 우리는 무대에서 퇴장했고, 다시 오를 수 있는 권한은 모두 박탈당했어.”
과거 에이브(AYV)에게 도전했던 게 커다란 실수였다. 지금이라면 셋이서도 그를 끌어내릴 수 있을 텐데, 성급했고 결국 패배했다. 패배했던 탓에 언약을 맺었다. 이젠 에이브(AYV)의 영역 근처까지 가는 것조차도 불가능하다. 홀라는 쓴 웃음을 지으며 혀를 찼다.
“신중에 신중을 가했어야 했던 것을.”
“어머니, 그래도 우리 대타가 여기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지 말거라. 우리가 해치우지 못 한 과오를 이들이 바로잡아준다지 않는가. 우리에겐 은인이다. 전 세대 사천왕도 그러하고. 결국... 내부의 불순물이 있는지도 몰라서 자멸하고야 말았지만.”
“안타깝죠. 메이블이랑 토텔리 녀석 싹수가 노랬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에이브(AYV)에게 도전했다.
하지만 결과는 암담했다. 전투 도중 묘하게 합이 안 맞았고, 에이브(AYV)는 이들이 준비한 모든 수를 꿰고 있었다고 메이블이 푸념하듯 말했으니까.
그 묘하게 안 맞았던 합은 오로지 한 명 때문이었겠지. 동료를 가장한 에이브(AYV)의 끄나불 실렉티스 케다시.
그 한 명 때문에 전 세대 사천왕은 패배했다.
그 한 명이 없었더라도 승리했을지 장담할 순 없었지만 그렇게 허무하게 패배하진 않았을 거였다.
‘메이블 녀석은 그 한 명이 누군지 죽을 때까지도 몰랐지.’
줄도 모른다. 홀라나 피아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금 중요한 건 아니다.
램프 밖에 느껴지는 존재부터 처리해야 한다. 홀라와 피아, 줄 모두가 눈치채고 있었지만 악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아 일부러 숨겼다.
“훼방을 놓으러 온 걸까?”
“그렇다기엔 적의는 느껴지지 않아.”
“쟤 암기 용사로 생활했었잖아. 기척 숨기는 것 정도는 진작에 터득했겠지.”
“저 녀석이 카티골인가.”
“맞을 겁니다.”
“램프를 열면 내가 선공을 취하겠다.”
“하지만 저 녀석은 실렉티스인뎁쇼. 에이브(AYV)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되려 좋은 거 아닌가? 전력을 줄여둠과 동시에 녀석의 정신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홀라는 줄의 만류에도 이미 마음을 다잡았는지 검 손잡이에 손을 뻗으며 램프 출구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피아와 줄도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홀라를 따라 날개를 펄럭이며, 마법으로 둥둥 뜨며 출구로 향했다.
“셋 하면 나갑니다잉.”
“그냥 열어라.”
“하나, 둘~”
빠지직 화르륵 휘이이...
세 원소가 난폭하게 몸부림친다.
“셋!”
콰드득! 출구를 깨부수고 조그마한 램프에서 세 명의 초월자가 튀어나와 진 키아라를 덮쳤다.
“{ 공놀이 ? }”
[ 일섬 들바람 ]
φλγα γροθι
전격구는 그녀의 두 팔목을 뒤묶었고,
홀라의 검은 그녀의 몸을 스쳐 지나갔고,
피가 울컥 솟구쳤을 때 피아의 주먹에서 커다란 화염구가 몰아쳤어야 했지만,
손맛이 전혀 없었다. 이상함을 감지했을 때에는 시야에서 사라졌던 진 키아라가 망토를 펄럭이며 골짜기 밑에서 다시 튀어나왔다.
“위험하게 이게 무슨 짓이죠 초대 용사들.”
“이젠 실렉티스인 거 숨기지도 않네? 왜 찾아왔어. 오랜만에 초월자들끼리 친목질 좀 하려는데 그게 고까웠어?”
“마법 용사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저 램프 속입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니까.”
쿠릉 쿠르릉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고, 그곳에서 샛노란 전격이 파도가 치듯 넘실거린다. 줄은 진 키아라를 금방이라도 죽일 기세였다. 피아도 형태를 변환하며 온몸으로 붉은 화염과 자주빛 독액을 툭툭 떨어트리고 있다.
“...말만 전해주시죠. 마왕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뻔뻔하다 자이리지아 신관.”
“그 이름을 아직도 기억하시네요. 검술 용사 홀라님.”
“기억하다마다. 블레드와 아콜드가 죽었던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해.”
스멀스멀, 홀라의 몸에서 칼바람과 오러가 새어나오자 진 키아라도 멈칫했다.
그 기세는 줄과 피아가 내비치는 것보다도 더욱 원한이 깊었다.
“다 네년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났던 거였지. 불쾌하게도.”
“옛일은 잊는 게 서로에게 편합니다.”
“시건방진 소리.”
“...최세린?”
타이밍이 더러웠다. 램프에서 비틀거리며 나온 악쿤은 손에 쥔 낡은 시계를 떨어트렸다.
순간 진 키아라의 표정도 착잡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왔고,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악쿤에게 말했다. 줄과 피아는 호들갑을 떨며 악쿤을 몸으로 막아섰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진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악쿤 토든. 마왕성으로 복귀하십시오.”
“어디에 있었어.”
“아버지께서 경고하셨습니다. 용사로서의 본분을 다하세요.”
“어디에 있었던 거야.”
휘이이
악쿤의 몸에 냉기가 휘몰아친다. 줄과 피아도 그 냉기가 버거워 더는 그를 막아서기 버거웠다.
“너를... 얼마나 찾았는데.”
째깍 째깍
시침 소리가 울렸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악쿤은 도망치려던 진 키아라의 팔목을 꽈악 붙잡고 있었다.
“얘기 좀 하자.”
“아직도 저를 동료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그건 이제 정할 문제지. 얘기 좀 하자니까.”
“더러운 손 치우십시오. 옛정으로 넘어갈 수 있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콰과가!
그때 검격이 진 키아라를 노렸고, 그녀는 또 순간적으로 잽싸게 달아나 광산의 위에 안착했다. 홀라는 광산을 바라봤다.
“내게는 옛 기억은 버리라더니 모순 덩어리. 신이라는 놈들은 다 이러한가?”
“말하던 도중이지 않나요.”
“적이 대화를 기다려주던가? 단검을 뽑거나 추악했던 본모습으로 돌아가 나와 붙어라.”
“아버님이 두려우시지 않나 봅니다.”
“에이브(AYV)가 강하다고 네년까지 강하리란 법은 없지.”
둘의 신경전이 이어지는 와중에 악쿤은 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의 표정은 허망해 보였다. 복수심과 그리움이 얼기설기 섞여 무슨 감정을 나타내야 하는지 본인도 모르는 상태. 램프 속에서 세 초월자를 상대했던 그 악쿤이라기에는 너무나 한심한 몰골이었다.
“정신 차려.”
“...세린아.”
“정신 차리라고 인마!!”
짝 짝!
줄은 그의 볼을 후려쳤고, 피아는 인간 시절 어미였던 홀라를 돕고자 신체 강화를 마쳤다.
“......”
진 키아라가 신 포식자일지라도 두 초월자를 상대하긴 버겁다. 이대로 후퇴하기로 결심하곤 악쿤을 바라봤다.
“복귀하십시오. 바비룬 필라이트가 괜한 짓을 했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재홍이가?”
“두말 않겠습니다. 이런 불쾌한 일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군요. 용사가 다 성장하면 그때 다시 보게 될 겁니다. ”
“멈춰라!”
“어머니, 위험해요!!”
스륵
그녀의 몸을 검은 마기가 휘감았고, 홀라의 검격이 날아갔지만 무너져내리는 건 광산 뿐이었다. 진 키아라의 형체는 사라졌고, 그 기척도 마찬가지다. 악쿤은 허망한 표정만을 지었고, 줄은 진 키아라의 뜻을 파악하고자 마왕성에 연결해둔 원격 시야를 가동했다.
“오 쉣.”
마왕성은 전쟁이라도 난 듯 초토화가 되고 있었다. 언젠가 줄이 그러했던 것처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