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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92화 (92/152)

〈 92화 〉 복수심

* * *

빈은 멀끔한 일직선의 통로를 하염없이 걸었다. 가는 도중 무슨 기척이 들리면 화살을 날려보았으나 쥐 같은 소동물을 제외하곤 반응은 오지 않았다.

‘여기 꽝인 것 같은데 그냥 다른 곳으로 갈까... 아니면 가만히 있을까.’

와중에도 손에 꽉 쥔 활은 결코 놓지 하지 않았다.

설령 무언가 튀어나오면 곧장 반응하기 위함. 그는 이미 전투 만발의 태세다.

허나 그의 표정은 굉장히 어두웠다. 차라리 무언가가 튀어나온다면 깨부수면 그만이지만, 너무 조용하니 되려 더 불안한 것이다. 미지에서 오는 공포심.

수십 발짝 앞으로 걷자 그 공포심이 사라졌다. 저 멀리에서 무언가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드디어 무언가가 나타났구나, 화살에 바람을 두르고 숨을 죽이며 한 발짝, 한 발짝 서서히 그곳으로 다가갔고, 그 빛의 정체를 마주하자 빈은 허무감에 휩싸였다.

“차원문?”

푸른색의 차원문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막다른 길이다.

던전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숏컷 같은 걸까. 어느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빈은 차원문을 무시하려고 뒤를 돌았다. 그때­

크르륵­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화살을 휘갈겼다.

퓩­ 퓩퓩­ 수어 개의 화살이 몬스터의 온몸에 처박혔고, 빈은 비명을 들어보니 그 몬스터가 오우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통상적인 몬스터와는 조금은 달랐다. 이곳은 던전이고, 던전은 몇몇 개를 제하면 마왕군이 관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금 차원문에서 모습을 드러낸 오우거에게는 마왕군의 심볼이 박혀 있었다. 마왕 암두시아스 ­ 일각공을 뜻하는 거대한 뿔이 있는 검은색 말 심볼.

‘여긴 아티팩트가 잠든 던전인데...’

이 던전은 마왕군이 관리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길잡이 녀석이 틀렸다는 걸까.

그건 아닐 터다. 다른 던전 인도도 곧잘 해냈던 녀석이다. 이번에만 실수할 이유가 없다. 일행은 무언가에 쫓기지도 않았다. 여유도 넘쳤다. 비록 던전에 진입하고 추락할 때에는 여유라곤 없었지만서도 말이다.

“크륵­ 크르륵­!”

“용사! 죽여라 용사!”

오우거가 아닌 다른 몬스터들도 차원문을 통해 자꾸만 나온다. 빈은 바닥에 쭈그려앉아 대충 대충 활을 쏘며 두더지 잡기 하듯 몬스터를 제압하고 있었다.

“마왕군은 확실한데... 저 차원문을 깨부숴야 하는 건지, 차라리 들어가야 하는 건지...”

“크아아악­!”

이제는 활시위를 당기기도 귀찮았는지, 그저 화살을 허공에 쏟아내고 바람만으로 발사해 몬스터의 숨통을 끊었다. 하품마저도 나온다. 아까 느꼈던 공포와 긴장감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간부도 아니고, 계속 잔챙이 몬스터들만 나오는구나.”

“크륵­!”

“역시 들어갈까?”

차원문을 깨부수려면 복잡한 마법식을 모두 역산해야 하기에 빈의 영역이 아니었다. 장은 지금쯤 바쁠 수도 있으니 이 차원문을 파괴하는 방법은 건너편으로 건너가 차원석을 깨부수고 차원문이 사라지기 전에 곧장 복귀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나오는 몬스터만 봐도 위험할 것 같지도 않아.’

끽해야 하급 몬스터. 레벨 100언저리도 안 되는 녀석들이다.

지금이면 무더기로 덤벼들어도 화살 한 방에 모두 꼬챙이를 만들 수 있다.

결정하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빈은 천천히 일렁이는 차원문으로 발을 넣었다.

그로부터 5분이 흘렀다. 빈은 이 결정을 극명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장은 마티고스랑 그 아들놈이. 퀸은 던전에 있던 몬스터가. 케일은 던전의 시련을 받고 있어.”

마왕군의 수호대장 바비룬 필라이트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옆에는 저번 동대륙에서 보았던 참모장의 부관이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차원문은 진작에 무너져있다. 절망감이 겹으로 빈의 몸을 휘감는다. 바비룬은 말을 이었다.

“이곳에 널 도와주러 올 사람은 없다는 거지.”

“헉, 허억... 제길, 이게 함정이였다니...”

“장난하냐? 눈치가 이렇게 없어서야 용사 짓 하겠냐.”

척­ 바비룬이 앞으로 손을 내지르자 수많은 몬스터들이 사내를 둘러쌌다. 훈련된 쥐, 뱀파이어, 웨어울프, 악마, 와이번, 다크엘프, 밴시 등등.

“아무튼 마왕성에 온 걸 환영한다. 궁술 용사!”

그어어어어­!

몬스터의 포효 소리와 함께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에 절망적인 표정으로 활을 겨우 붙들고 있는 빈의 표정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으악! 꺼져! 꺼져어!!”

“잘 싸우네! 하긴 레벨 500쯤 됐었지?”

“바비룬! 어떻게 던전에 침입한 거냐!!”

“잘도 떠든다. 미안한데 마왕군 중에서 아무도 던전에 침입 안 했어.”

정확히는 마왕군 중에서는 침입을 안 했다는 뜻. 마티고스는 마왕군이 아니다.

바비룬이 자이키릭의 심장을 담보로 그에게 부탁한 건 두 가지. 용사 중 한 명을 괴롭혀 줄 것, 그리고 차원석 하나를 던전 통로 중 어딘가에 던져둘 것.

“네가 멋대로 차원문 넘어왔잖아.”

그 차원문을 디안의 시그니처 마법으로 원격에서 연결했다. 그리고선 빈은 건너왔다. 그곳은 원래 아무것도 없는 통로였지만, 가장 끔찍한 통로로 변하였다. 바비룬은 이번 기회에 용사 중 한 명을 심문할 생각이다.

‘4분의 1만 피하면 돼. 얘가 진짜 용사라면 정신을 무너트리고 가짜 용사에 대한 정보를 강제로 캐내면 된다.’

신살에 있어서 바비룬은 큰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줄이 대못을 박아 두었다.

선천적으로 그렇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허투루 하는 소리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최대한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몸부림 칠 생각이었다.

에이브(AYV)는 강하다. 직접 겪어봐서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도 열심히 훈련하고 있을 악쿤과 밤에 조용히 오러 수련을 하고 있는 다르칸을 대신하여 귀찮고 더러운 것은 본인이 모두 해치울 작정이다.

에이브(AYV)의 자식인 케다시와 카티골. 이들만큼이라도 붙잡아두어야 한다.

그를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기로 했다.

‘슬슬 체력이 빠지고 있겠지.’

마왕군은 훈련받은대로 궁술 용사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저 멀리서 마법과 화살을 쏟아붓곤, 웨어울프나 오거, 검을 든 다크엘프가 그를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복잡하게 공격해왔고, 궁술 용사에게 반격할 타이밍이 나오면 그때는 모두 후퇴하여 그의 공격을 무산시켰다.

“허억... 허억......”

그는 꽤나 지쳐 보였다. 이제 바비룬이 직접 나설 차례였다. 그는 부하들에게 물러날 것을 권하고선 터벅터벅 그의 앞에 섰다.

“왜? 비겁하다고 생각해?”

“허억... 허억...”

“대답할 기력도 없나 보네. 아무튼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라. 비겁이라는 말에 발끈할 거였으면 마왕군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가.”

“그래,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거야.”

쿵­

바비룬이 발을 구르자 바닥에서 나무 뿌리 같은 것들이 튀어나와 빈의 몸을 뒤묶었다.

“우리 진득하게 얘기 좀 할까?”

“......”

“너무 겁 먹진 마. 잡아먹진 않으니까.”

뿌득­

뿌리째로 바닥을 뜯어내곤 어깨에 빈을 들쳐멨다. 만신창이가 된 빈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그 상태로 심문실이라는 간판만 세워진 아무 방에 질질 끌려 들어갔다. 실상은 바비룬의 업무실이었지만 빈이 알 방도는 없었다.

“앉아 있어라. 차 마실래? 율무차, 녹차, 홍차든 뭐든 원하는 거 말해봐.”

그의 안색은 밝을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사천왕과 아직은 마주할 순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도 못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어찌 이렇게 된 거란 말인가. 그저 길잡이의 뒤를 따랐을 뿐인데.

“나를 어떻게 하려는 거지? 원하는 게 뭐야!”

억울함도 있었다. 하필이면 왜 그 통로를 걸어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마왕군과 연결될 수도 있는데 차원문을 넘은 건 너무나도 섣부른 판단이었다. 약한 몬스터만 차원문 건너로 보낸 것 자체가 빈을 끌어들이는 미끼였다.

“원하는 거라... 굳이 따지자면 정보?”

바비룬은 빈에게 다가와 그를 휘감았던 뿌리에 후 입김을 불었고, 그를 휘감았던 뿌리는 모두 물을 과하게 먹은 화분처럼 썩어버리더니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비로소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곧장 바람 정령을 부리며 공격하려 했지만, 바비룬은 눈앞에 휘몰아치는 칼바람을 보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를 타고 있었다. 그에 멈칫했다. 함정이 더 있는 걸까?

“아니면 커피?”

“지금 뭐 하자는 거지?”

“손님 대접. 그리고 손님도 손님다워야 손님 취급을 해주지 이렇게 난동 피우면 손놈이야 새끼야.”

바비룬은 느긋한 얼굴과 몸짓으로 그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를 들고 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곤 빈의 바람을 손으로 휘휘 젓더니 모두 파훼해버렸다. 애초에 빈도 공격하기 껄끄러워서 바람을 제대로 부리지 않았기에 쉽게 파훼된 거지만, 이 짧은 순간만으로 바비룬의 강함도 곧장 체감할 수 있었다. 역시 장과 퀸이 거듭 말했듯 아직은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무슨 생각인 거지?’

빈은 당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꿈이라기엔 몸 구석구석이 너무나도 쑤셔왔고, 감각이 선명하다.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제일 안전할 것 같던 통로를 따라 걸었을 뿐이고, 차원문이 있길래 건넜을 뿐인데 마왕성에서 사천왕인 바비룬 필라이트와 차 한 잔 하며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 사실을 동료에게 말한들 믿기나 하련지 모르겠다. 증거로 마왕성 특산품이라도 들고 가야 하나. 웜의 이빨로 만든 목걸이, 이런 거라도 말이다.

반쯤은 농담이지만, 명백하게 굉장히 위기 상황이다. 이곳은 적진 한복판이다. 심지어 그 상대방은 세계를 깨부수겠다는 마왕의 수하이다. 폭염의 드루이드. 그의 손에 죽어났던 인간들은 셀 수도 없다...고 들었다. 지금 곧장 자신을 죽이지 않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인질로 삼겠다는 거구나? 내 동료가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 같아? 꿈 깨시는 게 좋을 거야.”

죽이지 않는다면 본인을 통해 용사에게서 무얼 얻어낼 속셈이지 않을까.

그를 위한 인질이겠지. 추악한 마왕군의 머리에서 나올 생각이야 뻔하다.

빈을 미끼로 살랑살랑 흔들어서 다른 용사를 유인하고 모조리 죽이겠다는 것 아닐까. 마왕성에서는 전대륙의 인간들에게서 보호를 받을 수 없으니 말이다.

“인질은 무슨, 그리고 호락호락한 거 맞아. 지금도 다 죽이려면 죽일 수 있어.”

하지만 바비룬은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차를 가리켰다.

“마셔. 독도 없어. 진 키아라 공석이거든. 뭣하면 내가 먼저 마셔주리?”

“드루이드 생명력이면 독이든 뭐든 못 마실까. 속셈을 말해.”

“자꾸 개소리야. 정보를 원한다니까. 너 해칠 생각 없어.”

‘해쳐서도 안 되고.’

때려주는 것 정도는 몰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

그래선 에이브(AYV)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용사의 뒷배는 인류의 응원이 아닌, 에이브(AYV)다. 동시에 흑막이지만 말이다.

‘...슬슬 괜찮겠지.’

바비룬은 힐끔 뒤를 바라봤다. 그때 쿵­ 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를 낸 자가 디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문고리 틈으로 바비룬을 바라보다가 마나 장벽 설치가 끝났다고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이제 다른 이의 눈에 바비룬과 빈의 대화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너 입장은 알고 있지? 순순히 대답하면 서로 편해.”

“...빌어먹을.”

손을 꽈악 쥐며 부들거리는 빈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을 굳이 감추지도 않으며 말했다. 뱀이 S자로 그려진 종이를 펼치며 말이다.

“...문신?”

곧장 반응이 왔다. 바비룬은 그 반응에 빙긋 웃었다.

“그래 문신이다. 너희 용사 중 문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해.”

“......”

빈의 시선이 바비룬에게 고정된다. 방금 전까지는 다채로운 표정을 보였던 빈이었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너무나도 차가운 무표정이었다. 한때 진 키아라가 적에게 보였던 그 무표정처럼.

‘...죽여도 될까요?’

빈의 오른손에 마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의 발바닥에 있는 문신이 살짝 빛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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