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복수심
* * *
철퍽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진 키아라의 오른팔이 떨어졌다.
“꺄아아악!!”
“언니, 비명도 지를 줄 아셨어요?”
석 석
샛노란 오러가 휘감긴 철검을 물 흐르듯, 나비가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듯 매끄럽게 휘둘렀고, 그럴 때마다 진 키아라의 신체 부위가 석석 잘려나가 바닥을 적셨다.
“살려줘! 살려줘!! 잘못했어! 잘못했어!!”
“언니 미안해요. 아직 입을 안 잘랐네요.”
푹
입에 검을 구겨넣었고 그대로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반죽을 젓듯 휘젓는다. 카가각 이가 떨어져 나간다. 끈적이는 손맛이 썩 나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몬스터를 베어왔던 케일이다. 본성이 착하고 상냥한 용사로 통하지만, 결국 용사는 인간 병기이다. 병기에겐 감정이 없다. 검을 든 순간부터는 그녀를 한낱 예쁘장한 여자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미소가 얼마나 아름답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검술 용사 케일 이지혜는 살육 병기가 되었다.
뿌직! 검을 뽑았다. 그것에는 만신창이가 된 진 키아라가 있었다.
“자, 자모태, 탯어...”
진 키이라는 구슬 같은 눈물을 주륵 흘렸다. 그 눈물은 피에 뒤섞이며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혀가 잘려나간터라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맥락상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헛소리 마요. 남 목숨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푹 검을 더 깊게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팔다리가 다 잘려나가 몸통만 남은 진 키아라는 몸부림조차 칠 수 없었다.
“자기 목숨은 소중해?”
석 서걱 얼굴 이곳저곳을 베어 낸다.
“그리고 사과할 대상이 틀렸잖아요.”
푸우우욱
코와 양 볼을 동시에 칼로 쑤셨다. 일부러 진 키아라의 최후를 보다 선명하게 느끼기 위해 오러마저도 거둔 순수 근력으로만 찔러넣은 거였다.
뼈마저도 부숴내고 일정 수준까지 검이 들어가자 케일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녀는 파르르 몸을 떨더니, 검이 더 박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곤 물러났다.
“......”
“죽었네. 시시하게.”
케일은 검을 한 번 휘둘렀고, 검을 타고 흐르는 진 키아라의 선혈을 바닥에 반달 모양으로 뿌려졌다. 케일은 앞을 보았다. 그리곤 허망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현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화아악!
어두컴컴했던 통로에 빛이 쏟아진다. 조명을 켜듯 순식간에 밝아진 통로 내부는 더 이상 통로라고 부를 수 없는 형태를 띄고 있었다.
“응? 뭘 봐, 싸가지야.”
그곳의 중앙엔 소파에 누워 후줄근한 옷을 입고 배를 벅벅 긁으며 뒤돌아보는 앙숙 친오빠가 있었다.
“너는 허구한날 시비니!”
짝!
걸걸한 목소리가 앞치마를 두른 채 오빠의 허벅지를 찰지게 때렸다.
“악! 때리지 마!”
“밥값 좀 해라 밥값 좀! 어찌 된 놈이 공부도 못하고, 일 하나도 진득하게 할 줄을 몰라?”
“나랑 맞는 회사를 찾는 중이야. 웅크린 호랑이, 그래서 내 이름이 웅호잖아!”
“그런 뜻 아니야, 곰 처럼 든든하고 호랑이처럼 용맹하라고 느그 아빠가 지은 거야 이 자식아. 지 이름도 모르는 놈은 나가 죽어, 나가 죽어.”
“아악!! 그러다 엄마 아들 진짜 죽어!!”
이 광경에 케일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내려보니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체구도 조금 작아진 것 같고, 무엇보다 손에 가득했던 굳은살과 흉터도 없어졌다.
“지혜, 배고프지? 밥 먹어라.”
“나도 배고픈데!”
“너는 굶어도 싸.”
“엄마 진짜 장남한테 이러기야?”
케일은 천장으로 고개를 향하곤 깔깔 웃었다. 그 모습에 두 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재밌어요?”
석 오러를 담아 허공을 베어 갈랐고, 그 광경은 부러진 유리창처럼 깨지더니 바닥에 쏟아져 내려 흡수되었다.
“직접 모습 드러낼 자신은 없고... 끽해야 시련이라는 게 환상 보여주기? 내가 오빠 엄마 그리워하면서 질질 울 것 같았어요?”
집안 풍경이 무너지자 진 키아라의 시체도 없어졌다.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진 키아라가 기습을 당할 만큼 약할 리가 없지. 케일은 처음부터 모든 게 환상임을 알고 있었다.
“후각도 마비되고... 오감을 지배하는 건가.”
목소리가 울린다. 느낌상 지금은 환상을 따로 펼친 것 같지는 않았다.
“자꾸 그러면 저도 강행수단 쓸 수 밖에 없어요. 좀 나와요. 대답을 하시던가요.”
역시나 묵묵부답, 던전의 주인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했다.
“...이러기 진짜 싫은데.”
케일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곤 검에 오러를 스멀스멀 휘감았다.
그리고선 손으로 벽을 척 짚었다. 이쯤이 좋겠다. 중얼거리곤 검을 양 손으로 콱 부여잡곤 그 곳에 검을 쑤셔박았다. 오러 덕에 두부를 자르듯 검은 부드럽게 벽을 파고들었다.
[ 케일식 검술 2번 일몰. ]
석!
그대로 검을 머리 위로 초승달을 그리듯 휘둘렀다.
쿠구구구
통로는 두 토막으로 잘려나갔다.
“안 나오신다니까 다 부술게요.”
“...잠깐만!!”
목소리가 들리자 일순 행동을 멈췄다. 케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거기였구나?”
[ 태극류 오의 행성참 ]
오러가 휘감긴 녹슨 검은 다시 휘둘렸다.
*
“드래곤이 이렇게나 컸던가?”
“끼에? 끼에!”
“장난하냐고? 당연히 드래곤은 거대하다고?”
“끼에! 끼에에!”
“그래, 너도 언젠간 다 크겠지. 하지만 아직은 조그맣잖아.”
“끼에”
[시끄럽다. 블랙 드래곤. 마법 용사 장.]
통로를 쭉 걷자 나온 드넓은 공간,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 말고는. 천장은 막혀있지만, 이곳은 눈으로 가득했다. 퍼석 퍼석 발을 옮길 때마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눈이 거슬렸다.
“이상하다 싶었어. 분명 문지기가 있다고 우리 검둥이가 재차 강조했는데 아무것도 없고, 통로 끝 어두운 돔에는 시체만 가득하더라고.”
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기 이 둘이 있다면 다른 일행은 무사하다는 말일 테니.
그들이 케일을 지원하러 갈 수도 있을 거다. 그보다 더 안심되는 건, 드래곤이지만 저들은 얼음 마법을 사용하는 화이트 드래곤이라는 것.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백룡의 수장 마티고스, 그리고 그의 버려진 아들 프로토마티(Πρτο μτι).”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전송자.”
“반쪽짜리 용 주제에 멋대로 떠들기는. 다치기 싫으면 그쪽은 찌그러져 있어.”
화르르륵!
장의 화염 한 줄기가 프로토마티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펼친 프로토마티의 반쪽짜리 날개가 눈에 뒤덮여 그 화염을 막아냈다.
“그래도 용의 핏줄이라는 건가? 꼴에 날개는 있네. 반푼이.”
[물러서거라 프로토마티,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당신은 닥쳐!!”
마티고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로토마티는 능숙하게 룬어를 읊었고, 그 주문식이 신체 강화를 뜻한다는 걸 장은 곧장 알아챘다.
“끼에! 끼에에!”
“괜찮아 검둥아. 저런 반푼이도 못 이겨내면 악쿤 토든한테는 평생 못 닿아.”
“무시하는 것도 한두번이다 전송자!!”
프로토마티는 분노한 눈매를 머금고 장에게 달려들었다. 이 일격이 마티고스에 대한 분노도 얼기설기 섞여있었다는 걸 장은 알 턱이 없었다.
푸쉬익
“이, 이럴 수가...”
“마지막 경고야, 물러나.”
하지만 그의 공격은 장에게 닿지 못했다. 마나 감지를 펼치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옅고 탄탄한 화염 장벽이 장과 다타리오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끄윽!”
그곳에 막혀 프로토마티의 몸을 두른 신체 강화는 새하얀 연기와 함께 산화되었고, 그의 오른 주먹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이 새겨졌다. 장이 프로토마티를 해칠 생각이었으면 그는 이 장벽에 휘감겨 잿더미가 되었을 터였다.
“마티고스, 언제부터 드래곤이 던전을 수호하는 역할도 맡았지? 네놈의 레어는 마왕군 넘어 북대륙의 설원이 아닌가?”
[괜찮느냐 프로토마티?]
“...나는 안중에도 없네.”
그럼 신경쓰게 해 줘야지, 바닥을 뒤덮은 눈더미 중간중간이 싱크홀이라도 생긴 듯 퍼석 가라앉았다. 그곳에는 짙붉은 마법진이 재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치이이이! 그 마법진들은 마법을 발산하기도 전, 예열하듯 열기만을 내뿜고 있을 뿐인데 주변의 눈을 모조리 녹이기 시작했다.
“{ θλασσα τη φωτι 불바다 (οκτ). }”
8개의 마법진에서 화산이 용암을 분출하듯 뜨거운 화염을 퍼트린다. 그 화염은 눈을 녹이는 것도 아닌, 눈을 장작삼아 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염은 태울 물질이 없으면 사그라들어야 한다. 하지만 장의 마법은 달랐다. 그의 화염은 마치 굶주린 아이처럼 처절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태울 게 없는데도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화염 마법이 지닌 특성이었다.
‘내 화염 마법은 확실히 시그니처에 가까워지고 있어. 대마법사가 정리해둔 문서에도 나 같은 자는 없었다.’
고작 1년. 장은 7서클에 올라섰고, 이건 전송자라고 해도 비이상적인 성장도였다.
전송자의 성장력은 상식을 벗어난다는 게 상식이다. 그 상식마저도 벗어났다. 비상식에 비상식이 더해진다. 이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악쿤, 확실히 바비룬의 말대로 시간이 촉박하다.’
마티고스는 지독한 열기에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장은 마치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눈더미를 가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의 걸음 뒤에 처절하게 녹아내린 마티고스의 눈은 정말이지 볼품 없었다.
‘막아설 수는 있다. 마음먹는다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무어란 말인가.’
“예전부터 당신의 존재가 의심됐었지. 마왕성과 당신의 레어는 굉장히 가까운데도 서로를 적대하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지... 마왕군이 부리는 와이번도 결국 용과 조상은 같지만, 그들의 지능은 현저히 낮아. 애초에 몬스터로 분류되니까. 하지만 당신들은 아니야. 드래곤은 내가 사용하는 이 마법의 주인이잖아? 고등한 존재라고. 그 위대한 놈들을 마왕군은 이용하거나 제거하지 않고 어째서 내버려두는 거지?”
치익 치이익
바닥을 뒤덮었던 눈은 완전히 녹아내렸다. 대신 게걸스럽게 타오르는 짙붉은 핏빛 화염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야 정답을 알 것 같아. 고명한 용사의 앞길을 막는다는 건 마왕군과 한통속이라는 말이겠지.”
[...피하거라 프로토마티!]
룬어를 세세하게 읊음으로써 장의 마법은 그의 경지인 7서클이 아닌, 8서클의 마법이었다.
그날, 악쿤 토든을 죽이고자 대마장 헤인켈이 사용했던 그 마법.
“{ κκκινο δρκο 붉은 용 }”
장은 프로토마티를 감싸는 마티고스를 보며 비웃었다.
“용이 용을 잡아먹다니, 재밌는 그림이야. 안 그래?”
거대한 용 형상의 불덩이는 마티고스의 날개를 향해 우아하게 날아갔다.
*
한편 퀸은 부상당한 몸에 두른 붕대를 스르륵 풀고 있었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몸을 통통 튀기곤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을 풀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 무기의 성능을 시험해볼 좋은 차례군.”
■■■■!! ■■■■■!!
그녀의 앞에 인간과 괴수를 한 군데 밀어넣어 반죽한 듯한 기괴하고도 끔찍한 괴수가 그녀를 향해 포효했다. 귀가 찢어질 듯 했지만, 퀸은 이미 온몸을 붉은 오러와 마나로 휘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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