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91화 (91/152)

〈 91화 〉 복수심

* * *

철퍽­

질척이는 소리와 함께 진 키아라의 오른팔이 떨어졌다.

“꺄아아악­!!”

“언니, 비명도 지를 줄 아셨어요?”

석­ 석­

샛노란 오러가 휘감긴 철검을 물 흐르듯, 나비가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듯 매끄럽게 휘둘렀고, 그럴 때마다 진 키아라의 신체 부위가 석석 잘려나가 바닥을 적셨다.

“살려줘! 살려줘!! 잘못했어! 잘못했어!!”

“언니 미안해요. 아직 입을 안 잘랐네요.”

푹­

입에 검을 구겨넣었고 그대로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반죽을 젓듯 휘젓는다. 카가각­ 이가 떨어져 나간다. 끈적이는 손맛이 썩 나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몬스터를 베어왔던 케일이다. 본성이 착하고 상냥한 용사로 통하지만, 결국 용사는 인간 병기이다. 병기에겐 감정이 없다. 검을 든 순간부터는 그녀를 한낱 예쁘장한 여자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그녀의 미소가 얼마나 아름답든,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검술 용사 케일 ­ 이지혜는 살육 병기가 되었다.

뿌직­! 검을 뽑았다. 그것에는 만신창이가 된 진 키아라가 있었다.

“자, 자모태, 탯어...”

진 키이라는 구슬 같은 눈물을 주륵 흘렸다. 그 눈물은 피에 뒤섞이며 바닥에 툭툭 떨어졌다. 혀가 잘려나간터라 발음이 부정확했지만 맥락상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

“헛소리 마요. 남 목숨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푹­ 검을 더 깊게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팔다리가 다 잘려나가 몸통만 남은 진 키아라는 몸부림조차 칠 수 없었다.

“자기 목숨은 소중해?”

석­ 서걱­ 얼굴 이곳저곳을 베어 낸다.

“그리고 사과할 대상이 틀렸잖아요.”

푸우우욱­

코와 양 볼을 동시에 칼로 쑤셨다. 일부러 진 키아라의 최후를 보다 선명하게 느끼기 위해 오러마저도 거둔 순수 근력으로만 찔러넣은 거였다.

뼈마저도 부숴내고 일정 수준까지 검이 들어가자 케일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그녀는 파르르 몸을 떨더니, 검이 더 박히지 않는다는 걸 깨닫곤 물러났다.

“......”

“죽었네. 시시하게.”

케일은 검을 한 번 휘둘렀고, 검을 타고 흐르는 진 키아라의 선혈을 바닥에 반달 모양으로 뿌려졌다. 케일은 앞을 보았다. 그리곤 허망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게 현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화아악­!

어두컴컴했던 통로에 빛이 쏟아진다. 조명을 켜듯 순식간에 밝아진 통로 내부는 더 이상 통로라고 부를 수 없는 형태를 띄고 있었다.

“응? 뭘 봐, 싸가지야.”

그곳의 중앙엔 소파에 누워 후줄근한 옷을 입고 배를 벅벅 긁으며 뒤돌아보는 앙숙 친오빠가 있었다.

“너는 허구한날 시비니!”

짝­!

걸걸한 목소리가 앞치마를 두른 채 오빠의 허벅지를 찰지게 때렸다.

“악! 때리지 마!”

“밥값 좀 해라 밥값 좀! 어찌 된 놈이 공부도 못하고, 일 하나도 진득하게 할 줄을 몰라?”

“나랑 맞는 회사를 찾는 중이야. 웅크린 호랑이, 그래서 내 이름이 웅호잖아!”

“그런 뜻 아니야, 곰 처럼 든든하고 호랑이처럼 용맹하라고 느그 아빠가 지은 거야 이 자식아. 지 이름도 모르는 놈은 나가 죽어, 나가 죽어.”

“아악!! 그러다 엄마 아들 진짜 죽어!!”

이 광경에 케일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내려보니 자신이 다녔던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체구도 조금 작아진 것 같고, 무엇보다 손에 가득했던 굳은살과 흉터도 없어졌다.

“지혜, 배고프지? 밥 먹어라.”

“나도 배고픈데!”

“너는 굶어도 싸.”

“엄마 진짜 장남한테 이러기야?”

케일은 천장으로 고개를 향하곤 깔깔 웃었다. 그 모습에 두 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재밌어요?”

석­ 오러를 담아 허공을 베어 갈랐고, 그 광경은 부러진 유리창처럼 깨지더니 바닥에 쏟아져 내려 흡수되었다.

“직접 모습 드러낼 자신은 없고... 끽해야 시련이라는 게 환상 보여주기? 내가 오빠 엄마 그리워하면서 질질 울 것 같았어요?”

집안 풍경이 무너지자 진 키아라의 시체도 없어졌다.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애초에 진 키아라가 기습을 당할 만큼 약할 리가 없지. 케일은 처음부터 모든 게 환상임을 알고 있었다.

“후각도 마비되고... 오감을 지배하는 건가.”

목소리가 울린다. 느낌상 지금은 환상을 따로 펼친 것 같지는 않았다.

“자꾸 그러면 저도 강행수단 쓸 수 밖에 없어요. 좀 나와요. 대답을 하시던가요.”

역시나 묵묵부답, 던전의 주인은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추호도 없는 듯했다.

“...이러기 진짜 싫은데.”

케일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곤 검에 오러를 스멀스멀 휘감았다.

그리고선 손으로 벽을 척 짚었다. 이쯤이 좋겠다. 중얼거리곤 검을 양 손으로 콱 부여잡곤 그 곳에 검을 쑤셔박았다. 오러 덕에 두부를 자르듯 검은 부드럽게 벽을 파고들었다.

[ 케일식 검술 2번 ­ 일몰. ]

석­!

그대로 검을 머리 위로 초승달을 그리듯 휘둘렀다.

쿠구구구­

통로는 두 토막으로 잘려나갔다.

“안 나오신다니까 다 부술게요.”

“...잠깐만!!”

목소리가 들리자 일순 행동을 멈췄다. 케일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거기였구나?”

[ 태극류 오의 ­ 행성참 ]

오러가 휘감긴 녹슨 검은 다시 휘둘렸다.

*

“드래곤이 이렇게나 컸던가?”

“끼에? 끼에!”

“장난하냐고? 당연히 드래곤은 거대하다고?”

“끼에! 끼에에!”

“그래, 너도 언젠간 다 크겠지. 하지만 아직은 조그맣잖아.”

“끼에­”

[시끄럽다. 블랙 드래곤. 마법 용사 장.]

통로를 쭉 걷자 나온 드넓은 공간, 이곳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 말고는. 천장은 막혀있지만, 이곳은 눈으로 가득했다. 퍼석­ 퍼석­ 발을 옮길 때마다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눈이 거슬렸다.

“이상하다 싶었어. 분명 문지기가 있다고 우리 검둥이가 재차 강조했는데 아무것도 없고, 통로 끝 어두운 돔에는 시체만 가득하더라고.”

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기 이 둘이 있다면 다른 일행은 무사하다는 말일 테니.

그들이 케일을 지원하러 갈 수도 있을 거다. 그보다 더 안심되는 건, 드래곤이지만 저들은 얼음 마법을 사용하는 화이트 드래곤이라는 것.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백룡의 수장 마티고스, 그리고 그의 버려진 아들 프로토마티(Πρτο μτι).”

“입을 함부로 놀리는구나 전송자.”

“반쪽짜리 용 주제에 멋대로 떠들기는. 다치기 싫으면 그쪽은 찌그러져 있어.”

화르르륵­!

장의 화염 한 줄기가 프로토마티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닿지는 않았다. 순간적으로 펼친 프로토마티의 반쪽짜리 날개가 눈에 뒤덮여 그 화염을 막아냈다.

“그래도 용의 핏줄이라는 건가? 꼴에 날개는 있네. 반푼이.”

[물러서거라 프로토마티, 네가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당신은 닥쳐!!”

마티고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로토마티는 능숙하게 룬어를 읊었고, 그 주문식이 신체 강화를 뜻한다는 걸 장은 곧장 알아챘다.

“끼에! 끼에에!”

“괜찮아 검둥아. 저런 반푼이도 못 이겨내면 악쿤 토든한테는 평생 못 닿아.”

“무시하는 것도 한두번이다 전송자!!”

프로토마티는 분노한 눈매를 머금고 장에게 달려들었다. 이 일격이 마티고스에 대한 분노도 얼기설기 섞여있었다는 걸 장은 알 턱이 없었다.

푸쉬익­

“이, 이럴 수가...”

“마지막 경고야, 물러나.”

하지만 그의 공격은 장에게 닿지 못했다. 마나 감지를 펼치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옅고 탄탄한 화염 장벽이 장과 다타리오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끄윽­!”

그곳에 막혀 프로토마티의 몸을 두른 신체 강화는 새하얀 연기와 함께 산화되었고, 그의 오른 주먹에는 커다란 화상 자국이 새겨졌다. 장이 프로토마티를 해칠 생각이었으면 그는 이 장벽에 휘감겨 잿더미가 되었을 터였다.

“마티고스, 언제부터 드래곤이 던전을 수호하는 역할도 맡았지? 네놈의 레어는 마왕군 넘어 북대륙의 설원이 아닌가?”

[괜찮느냐 프로토마티?]

“...나는 안중에도 없네.”

그럼 신경쓰게 해 줘야지, 바닥을 뒤덮은 눈더미 중간중간이 싱크홀이라도 생긴 듯 퍼석 가라앉았다. 그곳에는 짙붉은 마법진이 재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치이이이­! 그 마법진들은 마법을 발산하기도 전, 예열하듯 열기만을 내뿜고 있을 뿐인데 주변의 눈을 모조리 녹이기 시작했다.

“{ θλασσα τη φωτι ­ 불바다 (οκτ). }”

8개의 마법진에서 화산이 용암을 분출하듯 뜨거운 화염을 퍼트린다. 그 화염은 눈을 녹이는 것도 아닌, 눈을 장작삼아 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염은 태울 물질이 없으면 사그라들어야 한다. 하지만 장의 마법은 달랐다. 그의 화염은 마치 굶주린 아이처럼 처절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태울 게 없는데도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화염 마법이 지닌 특성이었다.

‘내 화염 마법은 확실히 시그니처에 가까워지고 있어. 대마법사가 정리해둔 문서에도 나 같은 자는 없었다.’

고작 1년. 장은 7서클에 올라섰고, 이건 전송자라고 해도 비이상적인 성장도였다.

전송자의 성장력은 상식을 벗어난다는 게 상식이다. 그 상식마저도 벗어났다. 비상식에 비상식이 더해진다. 이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악쿤, 확실히 바비룬의 말대로 시간이 촉박하다.’

마티고스는 지독한 열기에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서서히 다가오는 장은 마치 모세가 바다를 가르듯 눈더미를 가르며 전진하고 있었다. 한 발짝, 한 발짝, 그의 걸음 뒤에 처절하게 녹아내린 마티고스의 눈은 정말이지 볼품 없었다.

‘막아설 수는 있다. 마음먹는다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불안감은 무어란 말인가.’

“예전부터 당신의 존재가 의심됐었지. 마왕성과 당신의 레어는 굉장히 가까운데도 서로를 적대하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지... 마왕군이 부리는 와이번도 결국 용과 조상은 같지만, 그들의 지능은 현저히 낮아. 애초에 몬스터로 분류되니까. 하지만 당신들은 아니야. 드래곤은 내가 사용하는 이 마법의 주인이잖아? 고등한 존재라고. 그 위대한 놈들을 마왕군은 이용하거나 제거하지 않고 어째서 내버려두는 거지?”

치익­ 치이익­

바닥을 뒤덮었던 눈은 완전히 녹아내렸다. 대신 게걸스럽게 타오르는 짙붉은 핏빛 화염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야 정답을 알 것 같아. 고명한 용사의 앞길을 막는다는 건 마왕군과 한통속이라는 말이겠지.”

[...피하거라 프로토마티!]

룬어를 세세하게 읊음으로써 장의 마법은 그의 경지인 7서클이 아닌, 8서클의 마법이었다.

그날, 악쿤 토든을 죽이고자 대마장 헤인켈이 사용했던 그 마법.

“{ κκκινο δρκο ­ 붉은 용 }”

장은 프로토마티를 감싸는 마티고스를 보며 비웃었다.

“용이 용을 잡아먹다니, 재밌는 그림이야. 안 그래?”

거대한 용 형상의 불덩이는 마티고스의 날개를 향해 우아하게 날아갔다.

*

한편 퀸은 부상당한 몸에 두른 붕대를 스르륵 풀고 있었다.

그녀는 제자리에서 몸을 통통 튀기곤 만족스러운 얼굴로 손을 풀듯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 무기의 성능을 시험해볼 좋은 차례군.”

■■■■­!! ■■■■■­!!

그녀의 앞에 인간과 괴수를 한 군데 밀어넣어 반죽한 듯한 기괴하고도 끔찍한 괴수가 그녀를 향해 포효했다. 귀가 찢어질 듯 했지만, 퀸은 이미 온몸을 붉은 오러와 마나로 휘감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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