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복수심
* * *
“야, 기장아.”
“말해.”
“이거 맞냐?”
빈의 목소리에 모두가 장에게 주목했다.
그는 로브를 펄럭이며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로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을 뿐이었다.
“떨어지기 전에 무슨 방법은 있는 거지?”
“아니, 알아서들 극복해야지. 부양 마법은 다른 사람한테 못 걸어.”
훅
땅이 가까워지는 걸 느끼자 장은 본인의 몸을 마법진으로 감쌌고, 일행은 장을 지나쳐 바닥으로 계속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은 무표정으로 이들을 훑었다.
“밑에서 보자. 둘 다 오러도 다룰 줄 아니까...”
“야 이 개새끼야! 나는 어쩌라고!!”
후우우욱!
어느새 천장은 희미해졌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암담한 어둠 속에서 차가운 칼바람만이 아래에서 위로 향한다. 밑에서는 강렬하게 비릿한 냄새가 올라온다. 바닷가의 것이 아니다. 마치 곰팡내. 혹은 음식물 썩은 듯한 악취가 솟아오른다.
“실레스틴(Syllestine)!!”
빈은 부리는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잠에서 막 깨어난 듯한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웅... 얼마나 잔 거지...’
“잠 타령 할 때가 아니야 인마!! 나 죽게 생겼어 도와줘!!”
‘...아 추락 중이구나... 근데 너 몸 튼튼해서 떨어져도 안 죽잖아... 나 졸려... 조금 더 잘래...’
“야! 야아!! 실레스틴 땅콩만 한 새끼야!!”
‘......흐아암.’
실레스틴의 대답은 하품이었다. 빈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곤 급기야 자신 스스로가 바람 원소를 다루기 시작했다.
휘이이 그 바람은 등에서 꺼낸 화살에 맺혔다. 그는 손에도 바람을 휘감으며 옆의 벽에 화살을 박았다.
카가가각!!
벽이 갈리는 소리가 울린다. 그 화살을 양 손으로 콱 부여잡곤 다리도 벽에 틀어박았다.
“끄으으 끄으으으!!”
치이익
떨어지는 속도가 점차 줄어든다. 벽에는 난폭한 굵은 선이 하나 생겼고, 그 선의 끝은 빈의 손에 들린 화살이다. 그는 겨우 자신의 몸이 멈췄다는 걸 알고선 바람을 휘감으며 천천히 하강했다. 그 옆으로 다가온 장이 둥실둥실 뜬 채 말을 걸었다.
“형은 참 신기해. 그렇게 좋은 능력을 가졌는데 왜 항상 약한 소리만 하는 거야?”
“이 새끼야! 난 조건부로 강하다고!”
“아티팩트 제일 처음 얻은 게 형인데, 아직까지도 적응을 못 했어?”
“넌 아티팩트 안 다뤄봐서 몰라! 이게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 건데!!”
“퀸은 잘 다루잖아.”
“뭐?”
“저기 봐.”
장이 가리킨 바닥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주먹 모양의 커다란 자국이 있었다. 그 자국은 무언가를 으깨 굉장히 질척거렸고, 그 무언가는 사람과 몬스터의 시신이었다. 두 용사는 바닥에 내려와 코를 틀어막은 케일과 퀸에게 다가갔다.
“벌써 능숙하게 다루다니, 역시 워록(Warlock)의 힘은 무지막지하네.”
“내 수련의 성과지, 내 특성의 덕은 아니다. 장. 말을 골라서 해라.”
“얌마 퀸, 그게 너 아티팩트 능력이냐?”
“그래, 강한 충격파 발산. 그게 내 아티팩트 ‘어느 기사단원의 녹슨 건틀렛’의 효과다.”
화륵 그녀가 주먹을 쥐어보이자 기(?)와 마나가 뒤섞인 뭉텅이가 붉게 타올랐다.
그 짙붉은 화염이 던전 안팍을 밝혔다. 다시 보아도 바닥에 깔린 건 오로지 시체들 뿐이었다.
“변색된 것으로 보아 부패가 느려. 냉동됐던 걸까? 퀸의 충격파로 녹아내린 걸지도 모르겠어.”
“뭐든간에 역겨워요.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일까요?”
“글쎄, 천국이랑 거리가 꽤나 멀긴 하지. 이곳은 던전이니까. 그것도 지독한 시련의 던전.”
장은 사팡팔방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4개의 원형 통로가 있었다. 그 안쪽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무언가에 막힌 건지, 케일의 후각 탐지도, 장의 마나 탐지도 하등 쓸모가 없었다. 그저 감각에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마치...’
용사 각기 흩어져 저 통로를 각개격파하라는 것 같다. 던전의 의도는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쪽. 유독 한기가 몰아치고 있어. 얼음 마법을 쓰는 놈 같아.”
장은 동쪽 통로를 가리켰다. 그곳으로 잠시 걷자 한기가 싸악 몰려왔지만, 다른 일행이 느끼기엔 타 통로에 비해 큰 차이까지는 느끼지 못 할 수준이었다. 일행 중 유일하게 얼음 마법에 대해 지독하게 연구했던 장만이 이 추위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얼음 마법... 이 너머에 있는 게 악쿤 토든이라면...’
허튼 꿈을 버리기 위해 고개를 설레설레 절렜다. 장이 이곳을 선택한 건 그저 얼음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들이 싫은 게 전부였다.
‘정신 차리자. 악쿤이 이런 곳에 있을 이유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한들 아티팩트가 없는 나로써는 승산이 없다. 설령 악쿤이 맞더라도 곧장 도망칠 생각을 해야 해. 성장을 빠르게 가속하되 절대로 성급하지는 말자. 복수는 내 투기에 불을 지폈지만, 선택의 순간에는 냉철해야 해. 그래야... 악쿤을 태워 죽일 수 있다.’
허나, 그를 막상 마주하면 냉철하게 행동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장은 잠을 줄였다. 악몽을 꿀 때에는 온몸이 고슴도치처럼 꿰뚫린 피투성이인 채임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웃어주는 펙튼 포르시아가 있었으니까.
‘...아니길 바라야지.’
두 이유였다.
자신이 이성을 잃을 것 같아서.
아직 이길 수 없는 상대여서.
그래도 홀린듯 그 통로에 우두커니 섰다. 이미 그의 눈은 결의를 마쳤다. 일행도 그의 결정에 불만을 토하지 않었다.
“나는 이쪽으로 가지.”
퀸이 가리킨 서쪽 방면에는 유독 흉흉한 느낌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마치 귀신 소굴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직 감각에만 의존한 설명할 수 없는 흉흉함이지만, 진득한 원한 그 비슷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장이 가고자 하는 통로가 한기에 몸을 떨었더라면, 퀸이 향하는 곳은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오한이 느껴진다. 막상 비교해보니 네 개의 통로는 각기 특징이 있었다. 정말 미약한 특징이지만... 조금씩은 차이점이 있었다.
“...휴, 나는 이쪽으로 가련다.”
빈은 네 개의 통로 중 유일하게 빛이 조금 들어오는 남쪽을 택했다. 겁이 많은 빈인지라 일행 모두가 불만을 토로하진 않았다. 단지 퀸의 한숨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참자, 참아.’
그 정도는 빈도 딴지걸지 않고 넘기기로 했다. 괜한 자존심을 부리다가 다른 통로로 가게 될 지도 모르기에.
“저는 자연스레 이쪽이네요.”
북측 통로. 그곳은 다른 통로에 비하자면 별 특징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케일은 이곳을 택한 것이다. 일행도 그를 알기에 케일을 이 통로로 내몬 것이고.
던전을 탐험하는 이들에게 한해 명언이 하나 있다.
갈림길이 나오면, 가장 평범해 보이는 길은 무조건 피하라.
평범함을 가장한 악독하고 지독한 함정이 여러분을 반길 것이다.
그러니 이 비교적 평범한 통로는 던전에서 가장 큰 시련을 겪게 될 케일을 위한 통로였다.
“먼저 갈게.”
“서로 민폐 끼치지는 말도록 하지. 특히 활잽이.”
“야! 내가 겁은 많아도 할 때는 하거든?”
“...꼭 살아서 봐요.”
케일은 기도하듯 손을 모았다. 그리곤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에는 바닥에 널린 시체를 제하곤 아무도 없었다. 꿀꺽. 침을 삼키곤 뒤돌아 통로로 걸어갔다.
300보쯤 걸었을까, 이 통로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케일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현재 그녀의 오러 등급은 소드 익스퍼트. 마왕군 총군단장인 다르칸은 홀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랜드 마스터로 알려져 있다.
그와 대등해져야 한다. 오러 뿐만 아니라 실력과 담력마저도.
‘언제까지고 오빠, 언니에게 기대면 안 돼.’
그녀는 뒤쳐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짐이 되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녀는 후각이 예민한 것 말고는 일행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언젠가 자책은 좋지 않다며 복수심에 눈 멀기 전 상냥했던 장이 말했었지만, 자아성찰은 필요하다.
가장 뒤쳐진 건 케일이다. 명백한 사실이다.
퀸은 언제나 강했고, 장은 일행을 보조해주면서도 가장 화력 높은 공격으로 적진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빈은 비록 겁은 많을지언정 언제나 저 멀리에서 저격으로 강렬한 선공을 먹여 혼란을 일게 해 용사가 유리한 구도를 만들었다.
케일은 그들의 품 안에서 은근히 보호 받으며 안전하게 검을 휘둘러왔다.
일행은 어린아이 돌보듯, 구멍을 메꾸듯, 그렇게 케일을 대했다. 저들이 그리 행동한다는 것조차도 이제는 망각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히 케일은 보조를 받으며 싸워왔기에.
‘...레이피어. 플라금에서부터 함께했던 내 무기.’
그녀는 허리춤에 매달린 레이피어의 검집을 바라봤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부러진 검이 고스란히 있다.
부러진 검은 쓸모가 없다. 무엇도 찌르지 못하며, 무엇도 베지 못한다.
본분을 잃어버린 것은 버려지기 마련이다. 케일은 이 검을 버릴 수 없었다. 자신도 이 검처럼 버려질 것 같아서.
용사의 본분은 마왕군을 물리치는 것. 세계를 구해내는 것.
그 본분을 다하기엔 이 레이피어처럼 모자랐다고 느꼈기에.
‘...이젠 나도 달라져야 해. 레벨, 오러만 올린다고 될 게 아니야. 정신부터 바로잡아야 해.’
이 던전에겐 고마움마저도 들었다. 다른 동료들에게 기대지 않을 환경을 강제로 조성해줬으니까.
그녀는 주피아에서 받은 녹슨 검을 꽉 잡았다. 설원기동대 대장 화이트는 비싼 강철을 솜씨 좋은 대장장이가 제련한 탄탄한 검을 추천했지만, 그녀는 일부러 이 녹슨 검을 골랐다.
레이피어가 부러진 건 본인의 탓이다. 검술 실력이 더 뛰어났더라면, 눈이 더 좋았더라면, 오러가 더 강했더라면 검은 부러지지 않았다.
이 보잘것없는 녹슨 검을 통해 속에 응어리진 나약함을 떨쳐낼 것이다. 이 던전은 그를 위한 던전이었다. 케일에게 있어서 이 던전은 아티팩트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악취.”
케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코가 썩을 듯한 악취가 저 건너편에서 구렁이가 몸을 휘감듯 스멀스멀 몰려왔다.
“익숙해... 이 구도도... 이 냄새도...”
어두운 통로. 그리고 곰팡내와 먼지가 가득한 곳.
시련이 시작된다. 그 시련은 케일에겐 트라우마나 다름 없었던 사건이자 인물이다.
“안녕?”
상냥한 말투와 함께 어둠 속 모습을 나타냈다.
터벅, 터벅, 그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악취는 심해졌다. 오러를 터트려 빛을 발산하자 저 존재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진 키아라...”
“오랜만이야 예쁜아. 오! 예전보단 더 강해진 것 같네? 이젠 코 틀어막고 구토 안 해? 그보다 잘생긴 마법 용사님은 어디 가셨대? 너보단 그 남자한테 더 관심 있는데.”
“저로는 만족하기 어려울까요?”
“그럼, 너는 누가 보아도 예쁘고 귀엽지만 난 그쪽 취미고 없고, 나와 놀아주자니 너는 끔찍할만큼 약하잖아?”
조롱하듯 말하는 진 키아라는 손에 쥔 단검 끝에 고리에 손가락을 넣고 붕붕 돌리고 있었다.
독도, 사슬도, 바늘도 꺼내지 않았다. 오로지 단검만을 쥔 채 장난스럽게 케일을 응대하고 있었다.
“너는 너무 시시해서 요깃거리도 안 돼. 다른 곳으로 가볼까나...”
그녀는 뒤돌아 통로를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작은 엉덩이가 씰룩거리며 움직이고 있을 때, 케일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해요 언니.”
“어머! 귀여운 구석이 있었네? 나보고 언니라고 했어?”
“네 언니. 그렇게 무시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거잖아요...”
진 키아라는 의아한 표정을 머금고 뒤돌았다.
케일은 특이한 자세로 검을 꽉 잡고 있었다.
[ 케일 검술 첫 번째 일출 ]
번쩍!
빛 한 줄기가 통로에 번쩍였다.
“...나는 당신 때문에 하루하루를 지옥에서 살았는데.”
철퍽.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건 진 키아라의 오른팔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