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복수심
* * *
[이 근방이었던 건 확실한데. 어째 길이 다 똑같은 것 같냐.]
“수호대장님이 길치여서는 아니련지.”
[다키아야. 배려 없는 화법이 네년 전 대장님을 쏙 빼닮았구나.]
“수호대장님은 누굴 닮으신 거죠?”
[내가 좀 험하게 컸거든. 이 싸가지 밥 말아먹는 년아.]
바비룬의 기억을 더듬어 마티고스를 찾아 나섰지만, 그 여정은 순탄하지는 않았다.
예전 아티팩트를 얻어냈던 그 얼음 계곡의 위치를 찾기가 꽤나 어려웠다. 마왕성에서 북측으로 올라갈수록 괴팍하게 내려오는 폭설 때문에 발자국이 금세 지워졌던 탓, 그 폭설 자체 때문에 앞으로 걸어가기도 힘들었던 탓.
“...조금 춥습니다.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겁니까?”
다키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기모 가득한 옷에, 방한 기능이 있는 외투로 온몸을 뒤덮었고, 그 외투에 달린 후드까지 뒤집어썼지만, 그래도 이 추위에 익숙해지는 건 단련 정도로 극복할 레벨이 아니다.
차라리 고문 같은 거에는 면역이 있을지언정 온몸의 감각이 둔해지는 추위는 걸음을 지체시켰다.
[그러니까 고집 피우지 말고 내 품 안에서 가라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죽겠습니다.”
[직접 죽여줄 수도 있어. 원한다면 말 해. 고통 넘치게 보내줄게.]
말투는 톡 쏘아줬지만, 바비룬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털 수북하고 비대한 회색 늑대로 변하여 눈을 파헤치며 앞장서고 있었다. 그 옆에서 다키아는 쫄래쫄래 따라오고 있었는데, 가죽이 두꺼워 추위에 면역이 있는 바비룬조차도 춥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다키아가 얼마나 괴로운지는 얼추 알 수 있었다.
‘얘도 진 키아라가 떠난 이후로 누구한테도 기대질 않아.’
두 간부가 사라졌던 파급력은 상당히 컸다.
다키아의 경우만 보아도 명령은 따르지만 마음을 열지 않는다. 바비룬에게 말로 덤비는 건 농담으로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열었냐 아니느냐는 다른 문제다. 언제나 그녀의 눈빛은 지금 느껴지는 추위만큼이나 차가웠다. 공허함도 있는 것 같다.
악쿤 토든이 없어진 것이 뼈아픈 이유는 업무 때문만이 아니다. 마왕군의 몬스터들이 통제가 어려워졌다. 특히나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벤시나 뱀파이어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무력으로 제압할 수는 있겠다만, 그들은 시그니처를 완성한 마법사인 디안의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고서야 통제를 거부하고 있었다.
‘...힘들다 참.’
다키아는 끝꺼정 몸을 떨며 걷기를 택했다.
그때쯤 그녀의 손목에서 무언가가 부르르 울렸다. 특수 제작한 그림자 기동대만의 수화기였는데, 그곳의 어느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부하 중 한 명이 소리쳤다.
“수호대장님이 말씀하신 곳 찾았습니다!”
그제야 다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
얼음 계곡, 이번에는 예전처럼 설인이 없었다. 대신 계곡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는 화이트 드래곤들이 있었는데, 확실히 과거 자이키릭에게서 느껴졌던 생명력에 비하면 보잘것 없었다. 그는 다 꺼져가는 생명력이었는데도 방심할 수 없는 존재였었다. 새삼 드래곤 로드라는 이름은 단순한 명예 따위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마티고스, 마티(μτι)가 눈을 뜻하는 룬어니까 지 아비처럼 냉기 관련 마법을 쓸 터이다.
물론 아비보다는 못 하지만, 이 얼음 계곡에 있는 드래곤들 중에서는 월등한 생명력을 지닌 마티고스. 그는 제법 포스가 있었다.
[흠...]
그가 눈앞에 있었다. 바비룬은 위협의 의미가 없다는 걸 밝히고자 형변을 풀었고, 그는 추위에 흠칫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악쿤이나 진이 아니군.]
느껴지는 추위만큼이나 그의 손님맞이는 싸늘했다.
백색 비늘로 뒤덮인 마티고스는 새하얀 콧김을 내뿜으며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다.
“거 말 섭섭하게 하네. 어이! 내가 느그 아빠랑 으이? 서로 대화도 나누고 다 했어 인마!”
나름 유쾌한 인삿말이라고 생각하며 머리에 수북히 쌓인 눈을 탈탈 털고 들어왔다. 추위에 약한 다키아는 그녀의 부하들과 함께 저 구석에서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그렇군, 그대도 용사였을 터이니, 아버지를 만났었겠군.]
“농담이야. 사실 별 기억은 없어. 대화라고 해봐야 기싸움 정도가 끝이었지.”
[내게 찾아온 이유는 뭐지?]
“부탁이 하나 있어. 너 아들이 던전을 수호하고 있다고 하던데.”
[잘못 찾아왔군. 내겐 자식이 없다. 오면서 보아온 화이트 드래곤들도 내 형제들이다.]
“아니? 있잖아. 인간이랑 혼혈. 용인이라고 하지.”
그는 멈칫했다. 옆으로 향하던 고개는 바비룬에게 돌려졌고, 조금은 목소리의 톤이 올랐다.
당황한 듯 보였다. 그는 육중한 몸을 일으키며 몸 위에 맺혀 있던 눈을 우수수 떨어트렸다. 그리곤 한 발짝, 한 발짝씩 다가온다.
그 기세에 다키아를 비롯한 부하들은 허리춤에 있는 무기에 손을 뻗었지만 바비룬이 손바닥을 척 뻗어 만류했다.
[가거라 드루이드. 나와 대화하고 싶거든 악쿤 토든을 데려와라.]
“거 대화 좀 해보자고. 우린 네가 필요해.”
[나는 할 얘기가 없다만. 더 어물쩍 내 공간에 머무른다면 적으로 간주하겠다.]
“너 아들 용사한테 뒈지게 생겼어. 그래도 안 도울래?”
거짓은 말하지 않았다. 던전의 수호자로 용인이 버티고 있다면 현재 복수에 미쳐 날뛰는 마법 용사가 통구이를 만들어 버릴 게 훤했으니까.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언제부터 마왕군이 이토록 정이 많은 집단이었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니겠냐. 너도 찔리는 게 있을 거 아니야. 한때 인간이랑 어울렸다며. 그때 뭐 느낀 게 없었어?”
[아버지의 심장을 위해 움직였을 뿐이다.]
‘...아, 곤란하네.’
마티고스는 용사를 괴롭히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직접 가서 방해하기엔 주피아의 군인들과 총독이 직접 관리하는 마도구병들은 꽤나 위협적이다.
전력을 다한다면 돌파하지 못 할 것도 아니고, 설령 바비룬 혼자서도 북대륙의 군인들과 용사를 모두 상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민간인이 휩쓸리게 된다. 그건 바비룬도 원하지 않았다.
반면에 마티고스는 북대륙 군인들에게서 비교적 자유롭다.
그는 아들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움직이면 될 것이고, 용사와 마티고스 부자가 전면전을 펼치더라도 마티고스 측이 밀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그 판단은 맞았다. 눈앞의 마티고스는 과거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척 보기에 꽤나 강하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악쿤을 돕는 일이야. 그래도 안 되겠어?”
[마땅한 대가 없이 한 드래곤 족의 수장을 부리려 하는가.]
“대가? 줄 수 있지. 이거면 어때?”
[...네놈이 그걸 어떻게 지니고 있는가!]
“담보로 받아뒀거든. 악쿤 그 녀석한테서 직접 말이야.”
자이키릭의 심장. 이 물건은 바비룬의 손에 있었다.
이 심장을 건네며 악쿤이 했던 말은 간단했다. 심장을 잘 보관해달라 따위의 것이 아니라, 신살을 향한 힘을 기르기 위해 이 심장은 나중에 찾아갈 터이니 그간 마왕성을 잘 부탁한다고. 그리고 현 용사들을 잘 부탁한다고. 말이다.
언약이라는 건 양심의 문제로 알고 있다.
악쿤이 에이브(AYV)와 맺었던 언약은 용사를 성심성의껏 키워내겠다는 것. 그에 대한 악쿤의 답은 그의 스승을 눈앞에서 죽여 복수심을 심어뒀으니 지금은 스스로 성장하게끔 놔두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바비룬이 참모장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고 있어도 그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악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때 최대한 용사 성장을 방해해야 한다.
같은 맥락으로 그림자 수색대를 통해 에톰에 있는 격투 용사의 던전도 입구를 막아두었던 것인데, 마법 용사는 예전에 비해 상당히 괴팍해졌다. 설마 입구를 부수고 던전 돌파를 진행할 줄은 몰랐지.
“너도 용사에 대해 알고 있잖아? 마왕군에 대해서도 알고 있고.”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군.]
의뭉을 떨어보지만, 마티고스 또한 에이브(AYV)와 실렉티스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마티고스의 나이는 바비룬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많고, 그의 아비는 드래곤 로드였으니 정보를 얻기 싫어도 들려오는 것에 의해 얻을 수 밖에 없었을 터.
“뭐,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모르는 척 도와줄 수는 있잖아. 부탁할게. 이 심장을 다시 너에게 맡길 테니 우리를 도와서 용사를 괴롭혀주라. 죽여달라는 말이 아니야. 그냥, 조금만 귀찮게 해주면 돼.”
[......]
그는 대답을 망설이고 있었다. 시선은 바비룬의 오른손에 쥔 자이키릭의 심장에 고정된 채.
*
용사는 북대륙으로 진출했고, 그곳에서 주피아 절대 요새의 중장 저불과 마주했다.
“이 근처에 던전이 있다는 말입니까?”
“네, 이 녀석이 저희 길잡이거든요. 정보는 확실합니다.”
다타리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끼에, 끼에’하며 귀여운 울음을 방에 울렸고, 빈과 상처투성이인 퀸도 각자의 아티팩트를 손에 들어보였다.
“드래곤을 기르는 용사라... 지금껏 들어보지도 못 했습니다.”
“이곳에서도 용이 생활했었다고 들었는데요?”
“마티고스를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그는 언젠가 말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제 부하들이 조사한 바로는 자신의 레어에서 지내고 있다더군요.”
“그는 어째서 인간과 화합했습니까?”
“찾던 물건이 있었습니다. 그 물건이 뭔지는 저도 모르고요. 오직 총독님만 그가 원하는 바를 알고 계십니다. 그걸 이뤄서 떠났는지, 저희에게 협력한들 얻어낼 수 없었다 판단해서 떠난 건지는 마티고스 자신만이 알고 있겠죠.”
장은 턱을 짚었다. 화이트 드래곤 마티고스. 아직 로드 드래곤이 된 존재는 아니기에 신경쓸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렇군요... 아무튼, 저희 방문 목적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아티팩트를 얻어내고자입니다. 길잡이를 한 분 지원해도 괜찮을까요.”
“그러시죠. 화이트, 거기 있는가?”
“부르셨습니까?”
“용사님들을 모시고 아티팩트가 잠든 던전으로 모시도록.”
“본부대로.”
철컥
그는 벽에 진열된 총기 중 하나를 집고는 호주머니에 있는 총탄을 결합하곤 들처멨다.
그의 손짓에 따라 용사는 움직였고, 이번 던전은 검술 용사의 아티팩트가 잠들어있는 던전이다.
그러니 이번 던전은 검술 용사에게 시련이 부여할 것이다. 그에 맞서 부러진 레이피어를 대체할 무기가 필요했다. 장은 말했다.
“염치 불구하고 한 가지만 더 부탁하고 싶습니다. 저희 검술 용사가 사용할 검을 하나만 지원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시죠. 화이트. 출발하기 전 무기고로 먼저 모셔라.”
“알겠습니다.”
장의 어투 자체는 굉장히 공손했으나 그에겐 전혀 미안한 기색이나 고마운 기색 따위는 없었다. 마왕군으로부터 세계를 구해낼 용사들이니 이보다 더한 지원을 바라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얼마 안 가 일행은 아티팩트가 잠든 던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타리오의 인도가 없었더라면 찾기도 어려웠을 곳에 있었다. 절대 요새에서 벗어나 한참이나 눈을 맞아가며 남측으로 걷다보면 조금 이질적인 눈동산이 있었다.
“끼에! 끼에에!”
이곳이 던전의 입구라고 다타리오는 말했다. 대체 어디란 말인가? 눈동산을 제하곤 아무것도 없는 평지인데. 간혹 바위나 형태만 남은 새하얀 나무는 존재하지만, 저것이 던전의 입구를 뜻하지는 않을 터. 화이트는 던전의 입구를 찾고자 두리번거렸으나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여기인 것 같아.”
“나도 그래.”
하지만 이미 던전에 익숙해질때로 익숙해진 용사들은 진입 방법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장은 화염 마법진을 둥실 띄웠고, 빈은 바람 정령을 호출해 눈으로 덮인 바닥을 모두 거둬내기 시작했다.
“슬슬 화이트 씨는 돌아가보셔도 좋습니다.”
“네? 설원에서 미아가 되면 죽습니다. 어떻게 용사님들만 두고 간단 말입니까.”
“괜찮습니다. 그렇게 약하지 않거든요.”
화르르륵!!
장은 빙긋 웃으며 바닥에 화염구를 폭격했다.
포탄이 터지듯 굉음이 울렸고, 눈바닥은 형체를 잃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약하다는 표현과는 괴리감이 있었다.
장의 마법을 넋 놓고 바라보던 화이트는 문득 바닥이 더 패이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눈을 모두 녹여버리고, 날려버린 것이다.
바닥에는 거대한 문이 두 개 있었다. 눈동산의 바로 밑, 퀸과 케일은 각자 그 문을 잡고 당겼고, 땅은 흔들렸다. 던전이 열린 것이다.
“진입.”
“오케이~”
용사는 그곳을 향해 무작정 뛰어내렸고, 그들이 땅에 닿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화이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불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던전의 입구에 고개만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