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86화 (86/152)

〈 86화 〉 복수심

* * *

“줄 씨는 이걸 잘 이용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라 말했어.”

“이게 그렇게나 대단한 거야? 나는 잘 모르겠는데. 끽해야 대포일 뿐이잖아.”

“호오, 수호대장님. 무언가 착각하시는 것 같은데 이 물건이 대단한 건 위력이 아닙니다. 한 번 설정한 좌표는 무조건 맞춘다는 점에 있죠. 신일지라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바비룬이 이 물건에 대해 무언가 착각하고 있자 연구실장인 8대 부에르가 곧장 그의 생각을 수정했다. 차원포에 대한 얘기였다.

“그래, 명중률 100%. 무서운 기술인 건 인정. 그래서 그 좌표는 어떻게 얻어내는데?”

“그게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이죠.”

“결국 하등 쓸모 없는 물건이네. 나처럼 말이야. 나는 최종 결전에서 하등 도움 안 되는 드루이드니까.”

“또 모질게 말하지 말고. 줄 씨의 말은 네가 약하다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할 일이 왜 없어? 네가 에이브(AYV)의 자식을 막아서면 되잖아.”

“누구, 카티골?”

“뭐... 케다시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

“걔는 지금 용사일 거 아니야.”

“그렇겠지.”

마왕군의 정보력은 상당했다. 사천왕이 되기 전 친분을 쌓아둔 드래곤과 정령 등에게 에이브(AYV)와 그의 자식들에 대해 지독히도 캐물었고, 대장인 진 키아라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마왕군에 충성을 맹세하는 그림자 수색대를 통해 많은 정보를 수집했다.

끝내 이들은 에이브(AYV)를 비롯한 신군(??)의 전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얼추 알아낼 수 있었다.

에이브(AYV)를 필두로 두 명의 자식.

그 한 명의 자식(케다시)은 용사로 숨어 지내고 있고, 다른 한 명(카티골)은 전 세대 용사와 어울린다. 그들을 비롯한 수많은 몬스터와 실렉티스. 그리고 그와 계약을 맺은 악마까지.

현재 알아낸 건 이 정도다.

만약 병력이 더 존재한다면 그건 깨나 골머리 썩을 일이라 생각했다.

“하아, 용사는 점점 성장하고 있는데 차원포니 뭐니 뜬구름 잡는 무기나 헐뜯어봐야 하는 신세라니.”

“그래도 이걸 탈취하지 못 했으면 지금 마왕군은 무너졌을 거라잖아.”

“그냥 무너졌음 좋겠다. 부하 새끼들 불만들이 너무 많아. 배부른 새끼들.”

바비룬은 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하아암. 거하게 하품까지 내뱉고 나서야 직성이 좀 풀렸는지 비스듬한 자세를 수정하곤 탁자에 있는 서류더미를 집어들어 입에 펜을 물고선 읽기 시작했다.

현 마왕군 병력들의 안건 및 불만사항이었다.

띠리링­♬

그때 거대한 알람음이 마왕성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소리였다.

“어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일단 밥부터 먹고 마저 얘기하죠. 오늘은 연구실장님이 좋아하는 새하얀 생선찜 나온다고 들었습니다.”

“오오, 요리사 실력이 워낙 좋은지라 기대가 큽니다. 어서 가시죠 군단장님.”

“......”

“재홍아, 밥 먹으러 가자니까?”

“먼저 가. 할 일이 존나 많거든.”

“에이, 어서 가자니까. 먹고 살려고 하는 일 아니야. 밥 굶는 건 건강에 안 좋아.”

“됐어. 나 비이린에서도 정기만 받으면서 잘만 살았어.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꺼져. 정신 없어서 글자 눈에 안 들어오니까.”

바비룬의 태도는 굳건했고, 다르칸과 부에르는 시선을 교환했다.

뭐 그렇다면야... 별 방도도 없었기에 둘은 식당으로 향했다. 쿵­ 문이 닫히자 바비룬은 업무에 속도를 올렸고, 20여분이 지나자 오늘치 안건은 얼추 결재를 완료했다. 남은 건 조금 쉬었다가 할까. 바비룬은 입에 담배를 물고선 성큼성큼 어딘가로 걸어갔다.

“좌표를 얻어낼 방법이라...”

다가간 곳은 차원포였다. 쉴 새 없이 괴롭혀서 먼지 한 톨도 남지 않은 육중한 대포.

설계도를 한 손에 든 채 차원포에 손을 얹고 한 바퀴 빙 돌다가 무언가에 발이 걸려 휘청였다. ‘뭐야 시벌.’ 작은 욕설과 함께 발에 걸린 물건을 확인했다.

“아아, 이게 그거구나.”

차원포에 대한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해낸 차원총의 부품 무더기들이 담긴 박스였다. 아직 무기라고 부르기엔 민망한 외형이었지만, 디자인 하나만은 완성되었다는 걸 박스 안에 있는 제작도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총열은 고풍스러운 사자 머리가 휘감고 있고, 그립에는 금태로 덩굴 같은 디자인을 박아 두었다. 설령 이 물건을 발견한 장소가 연구실이 아니더라도 부에르의 작품이라는 걸 눈치채기란 너무 쉬운 일이었다.

“디자인 신경쓸 시간에 하루라도 빨리 만들라니까. 하여간 사자 새끼 말 더럽게 안 들어.”

그 총을 쥔 채 손목을 돌리며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다시 박스에 던져넣었다.

‘...에휴, 이따위 무기로 진짜 신을 죽일 수 있는 걸까.’

그보다는 진 키아라를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걸까.

바비룬도 바보가 아니었다. 그날의 진 키아라는 척 보아도 일행과 에이브(AYV)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정신 지배 마법을 당한 건지, 무슨 협박을 받은 건지 일순간에 그에게 순종적으로 변했으니까.

하지만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누구의 간섭 없이 대화가 이어졌더라면,

진 키아라는 마왕군 곁에 남는 것을 선택했을까.

아니면 다시 에이브(AYV)의 품 안으로 돌아갔을까.

디안에게 정신 지배 마법을 걸었다는 전례가 있기에 그녀에 대한 정을 넘어서 동료로 대할 수 있나 없나는 다른 문제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골머리가 아팠다. 당최 그 계집애가 무슨 생각인지 바비룬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할 거나 마저 해야지. 정윤상 시발 새끼.”

바비룬은 다시 서류 더미를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악쿤 토든은 진 키아라가 자신은 카티골이라 밝힌 날부터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자신이 제작해낸 공간에서 마법 수련만을 거듭하고 있기에 참모장은 공석이다. 그 업무는 자연스레 바비룬에게 떨어졌다. 마찬가지로 그림자 수색대의 업무는 다르칸에게 떨어졌고.

그를 회상하자 잠시 짜증이 확 피어올랐으나, 자기 품 안에서 두근거리는 무언가를 느끼자 그 분노는 순식간에 식었다.

자이키릭의 심장이었다. 수련을 떠나기 전 바비룬에게 맡기고 간 악쿤 토든의 아티팩트. 이 물건이 두근거리는 건 악쿤의 몸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걸 뜻한다.

‘뭐, 줄이 옆에 있으니.’

죽을 일은 없겠지. 그래도 악쿤도 나름대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 익숙해질 때도 됐어.’

진 키아라와 악쿤 토든이 마왕성을 떠난 지 벌써 3달이나 되었다.

*

타닥. 타다닥.

고요한 새벽. 안개가 자욱히 깔렸고, 모닥불은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불침번을 맡던 마법 용사 장은 그 모닥불에 장작을 하나 던졌다. 그 장작은 불길에 휩싸였으나 안개 때문인지, 잘 타오르지는 않았다.

“......”

장은 그 장작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검지와 중지를 천천히 앞으로 뻗어 위로 향했다.

“τ ­ 출력 강화.”

화륵­!

그의 룬 문자에 반응한 모닥불이 드높게 치솟았다. 1M는 넘게 솟구치는 화염은 맹렬하게 타올랐고, 장이 두 손가락을 내리자 그 불기둥은 금세 진정되었다. 그리곤 다시 손가락을 올린다. 화르르륵­!! 전보다 더 높게 치솟은 불기둥. 다시 손가락을 내리자 진정되었고, 또 다시 손가락을 올려 아까보다도 더욱 드높게 불기둥을 만들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불장난하는 거예요?”

검술 용사 케일, 그녀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빗으로 정리하며 다가왔다.

그에 피식 웃곤 장은 옆의 목조 의자를 툭툭 두드렸고, 그녀는 빙긋 웃었다.

“좀 더 자둬. 다음 던전까지 움직이려면 꽤 많이 걸어야 할 거야.”

“5시간은 잤을 걸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나저나 예전보다 불길이 거세졌네요.”

“아직 부족해. 악쿤의 마법을 따라잡으려면 아직 멀었어.”

“앗.”

케일은 입가를 가렸다.

펙튼 포르시아. 절대빙결 악쿤 토든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장의 스승.

장은 그가 죽은 후 모든 시간을 마법 연마에만 투자했다.

언젠가 악쿤을 태워죽일 그 날을 위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그 훈련광이던 퀸조차도 감탄할 정도로 잠도 줄여가며, 밥 먹는 시간에도 마법 서적에 머리를 박고, 자청하여 불침번을 설 때도 직접 마법을 실험하는 등 무수한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서클도 7에 도달했고, 역대 마법 용사 중 가장 빠른 성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괜찮아. 이젠 슬프다는 감정은 없어. 오히려 잘 됐지. 복수심은 내 기폭제가 되었으니.”

“...복수. 전 걱정돼요. 오빠.”

“뭐가?”

“복수심이 오빠를 갉아먹을까봐요. 요즘 오빠한테서는... 조금씩 악취가 나거든요.”

킁, 킁킁.

장은 자기 몸 이곳저곳의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리곤 의아하단 표정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케일을 바라봤다.

“나 그래도 매일 씻고 환복하고 있는데... 그렇게 냄새가 심해?”

“그 말 아닌 거 알잖아요.”

“아... 너 능력 말하는 거구나.”

“네. 타는 듯한 악취. 그 냄새는 본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걸 뜻해요.”

화염은 어느 무엇보다도 뜨겁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모든 걸 불사르고 나면 힘없이 꺼진다. 꺼진 불은 사라지고 만다.

지금이야... 악쿤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이 그가 타오를 수 있게끔 해주는 장작이라지만,

그를 죽인다고 장이 행복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허망감만이 남을 것이다. 화염이 꺼진 곳에 남아있는 회색 빛깔 재처럼.

손에 쥐면 모래처럼 사르륵 사라져 버리는 재.

“오빠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복수는 긍정적인 원동력이 아니잖아요.”

“스승님은 우리를 위해 죽었어.”

“알아요, 알지만... 전 오빠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바라봤으면 해요. 복수심으로 살아간다는 게 말이 돼요? 그건... 지옥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오빠 펙튼 님이 전사하신 이후로 너무 변했어요. 예전처럼... 웃지도 않잖아요...”

케일의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를 듣고 장은 잠시 고개를 떨궜다.

진정 서로를 아끼고 걱정하기에 뱉을 수 있는 말. 그녀도 장의 심정을 이해하듯, 장도 케일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장에게 있어서 펙튼의 존재는 너무나도 컸다. 그는 케일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문제지. 걱정은 고마워. 하지만 너무 간섭하지 마.”

“오빠!”

“세수 좀 하고 올게. 어차피 안 잔다고 했으니 불침번 잠시만 서 줘.”

케일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장은 호수를 찾아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그에 허망감이 케일의 몸을 휘감았다. 그녀는 울컥 눈물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목제 의자에 쪼그려 앉았고, 모닥불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쩌적­ 툭.

모닥불 속에 쌓아둔 장작 하나가 쪼개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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