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신살법(???)
* * *
“무슨 얘기.”
“아까 내 이름 부르면서 뭐라 말하고 있었잖아.”
“......”
방에는 고요한 침묵만이 맴돌았고, 자칫 섣부르게 행동했다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먼저 말해야 해? 재홍 오빠. 아니, 바비룬 필라이트. 끝까지 발뺌할 생각이야?”
그저 ONE(?)에서 사용하는 이름일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에 이재홍은 표정이 굳었다.
‘...그래, 차라리 잘 됐어.’
이참에 확실히 끝맺음을 짓는 게 나을 것 같다.
최악의 경우, 서로에게 검을 겨누지는 않기만을 기도하며 천천히 입을 뗐다.
“전부 들었구나.”
“야 정윤상!!”
“이제와서 숨겨봤자 뭐 해. 세린이는 암기 용사인데.”
감청.
최세린에게 있어서 밥 먹는 것보다 쉬운 거다. 그녀의 귀는 작은 벌레 날갯짓도 들을 수 있다.
“철수 형도 불러올게. 괜찮지 세린아?”
“그래, 마음대로 해.”
“...어, 알겠다.”
문을 열고자 어질러진 잔해물을 피해 문으로 다가갔다.
최세린의 옆을 지나가야 했었다. 허나 그녀를 앞에 두었을 때는 이유 불문 멈칫했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날 훑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그녀의 옆을 지나가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잠깐만.”
텁.
최세린이 내 손목을 잡았다. 이재홍이 벌떡 일어나 형변을 시작했지만 반면에 나는 가만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세린은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전투 의사는 이미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푹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며 날 바라봤다.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 들었나 봐.”
“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내 뒷담 까는 줄 알고... 하하, 하하하?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내가 잘못했으니까 없던 일로 하자. 재홍 오빠, 갑자기 ONE(?) 이름 불러서 미안해.”
“...세린아.”
“응? 윤상 오빠. 없던 일로 하자고. 나 아무것도 못 들었어. 내 욕하는 줄 알고 더 욕 못 하게 창문으로 들어와서 말했던 거야. 더 듣고 싶었으면 가만히 창문 밖에 있었겠지. 안 그래?”
“......”
“아이고~ 농담도 못 하겠네~ 대체 무슨 욕들을 하셨길래 이렇게 풀이 죽었어? 괜찮아! 나도 뒤에서 욕 많이 하니까 이번에는 넘어갈게. 알겠지? 다음부터는 내 욕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넘어간다고. 어때? 응? 대답 좀 해봐.”
횡설수설 말하는 최세린을 보자 바비룬도 멍청하게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그녀에게서 어쩐지 측은지심을 느꼈고, 저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
“딴 소리 하지 말고 대답이나 하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마기였다. 시커먼 마기.
오러, 마법, 주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던 그녀의 몸에서 마기가 흘러나온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와 이재홍은 알고 있었다.
“하아... 하아...... 어, 어라?”
그녀는 씩씩거리다가 자기 몸에서 시커먼 마기가 흘러나온다는 걸 뒤늦게 눈치채곤 그 마기를 순식간에 몸 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최세린은 손을 뻗어 내 입을 강제로 틀어막았다.
“닥쳐. 입 닥치라고. 아무말도 하지 마!”
“야 최세린!!”
“오빠도 닥쳐. 다 입 닥치라고!!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너희 둘 모두 입 닥치라고!!”
“씨발, 이런다고 아무것도 안 달라져! 너는 지금까지 우리를”
“입 닥치라고 말 하잖아!!]
콰과과과!!
그녀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고, 나와 이재홍은 그 기세를 못 이겨 몸이 날아갔다.
쩌적! 쩌저적!
벽과 탁자에 처박혔고, 시커먼 연기가 방 안을 휘감는다.
그 중심에는 여지껏 보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다.
[아, 안 돼... 안 된다고...!! 보지 마! 보지 말라니까!!]
그 무언가는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고, 나와 이재홍은 전력을 다해 그것에게 달려들었다.
냉기 마법 얼음 사슬, 자연 주술 꿈틀거리는 나무 줄기. 바닥에 그려진 수어 개의 동그란 마법진에서 솟아오르는 시퍼런 사슬과 방 어딘가에 엎어져있던 작은 화분에서 급속도로 자라나는 나무 줄기가 그것의 몸을 휘감았다.
[...보지 마. 보지 말라고...]
온몸이 뒤묶인 인영.
시커먼 연기가 가라앉자 그 가운데에 있는 건 최세린과는 조금 다른 외형의 여성이었다.
단발은 장발이 되었으며, 그녀의 등에는 거대한 돌기가 여럿 있었다.
어깨춤에서 자라나 있는 회색 선은 그녀의 몸을 동그랗게 휘감고 있었고, 복장도 인간의 것과는 달랐다. 마치 뼈가 살 밖으로 튀어나와 갑옷을 이룬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세린아.”
[그냥... 그냥 모른 척 할 수도 있었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웠어...?]
“그게... 너 본모습이구나.”
[...하하하!! 하하하하!!!]
그녀는 실성한 듯 크게 웃었다. 그 웃음은 멈출 줄 몰랐고, 나와 이재홍은 그녀를 경계하며 거리를 벌렸다.
[왜? 기괴해? 징그러워? 인간인 줄 알았더니 아니라서 실망했어?!]
“인간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게 아니야. 우린 너한테 묻고 싶어. 실렉티스일지라도 혹여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악을 쓰며 외쳤다. 그녀가 몸부림칠수록 포박은 끊어진다. 가방 속 자이키릭에 심장에 손을 뻗었고, 이재홍도 세계수의 수액을 뒷짐진 채 손에 쥐고 있었다.
[지금 너희는 날 두려워하잖아!! 사천왕이나 단탈리온을 볼 때보다 더욱 공포에 질려 있잖아!!]
“그, 그게 아니야... 우린 그저”
[어떤 감언이설도 다 필요없어!! 집어치워!! 너희는 날 적으로 판단했고 나도 그에 맞춰 행동할 뿐이야!!]
뿌득 뿌드득
줄기가 터져나간다.
뿌득... 뿌득... 챙그랑!!
얼음 사슬이 모두 부숴졌다.
그녀는 완전해진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냈다. 흡사 마신에 가까운 외형. 지금껏 보아온 최세린의 모습과는 꽤나 거리가 멀었다.
[내가 실렉티스냐고? 맞다! 에이브(AYV)의 자식이자 신을 포식한 카티골!! 그게 내 이름이다!!]
“진정해 세린아.”
[지금 진정하라고 말했나? 마법 용사 악쿤 토든?!]
지이이
그녀가 손을 휘두르자 시커먼 마기 덩어리가 내게로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방어막을 펼쳐 막아냈지만, 충격이 꽤나 컸기에 요란하게 엎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최세린은 대차게 웃었다.
[얌마 최세린!! 정신 차려!!]
[주제도 모르는구나 주술 용사 바비룬 필라이트. 너희는 아버지께서 던져둔 장기말에 불과하다. 아직도 나와 대등하다고 생각하다니 오만하기 그지없어.]
[자꾸 개소리할래? 빨리 원래대로 안 돌아와?!]
[원래대로? 헛소리. 이게 내 본모습이다. 너희가 여지껏 보아온 진 키아라의 모습은 내 수많은 분장 중 하나에 불과해.]
“그게 어쨌다고, 세린아.”
끄응, 몸을 일으키며 둥실 떠 있는 최세린을 똑바로 마주했다.
심장은 가방 속 깊숙히 넣어두었다.
에이브(AYV)의 자식이든 신 포식자든,
설령 신일지라도 최세린은 최세린이다. 그 기억마저도 거짓은 아니다. 설령 연기였을지라도 기억만은 진실이었다.
우리는 동료다. 나는 그녀를 되돌릴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말문을 열었다.
“나는 네가 필요해. 내가 멍청한 행동으로 널 위협했다면 사과할게.”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곤 모든 마나를 거뒀다. 이제 난 일반인과 다름없는 상태다.
[너 뭐하는 거야 병신아!!]
“재홍아. 시끄러우니까 좀 닥치고 있어.”
그것도 이재홍과의 몸다툼으로 인해 온몸이 피투성이인 일반인. 지금이라면 최세린의 숨결만으로도 죽음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이건 성공적인 도박이었다. 순간 그녀가 당황하는 걸 느꼈다.
[사과라고?착각도 유분수,사과는 대등한 자들끼리나 통용되는 단어다. 어서 마나를 불러모아라. 직접 격의 차이를 보여줄 테니.]
“연기 잘 하는 줄 알았었는데 내 안목도 쓰레기였네. 지금 너 당황하고 있잖아.”
[...닥쳐라 악쿤.]
“대화로 해결하자. 여지껏 그래왔던 것처럼.”
[닥치라고 했거늘!!]
콰아앙!
그녀는 다시 마기 덩어리를 던졌다. 재빨리 이재홍이 몸을 날려 날 보호했지만, 그 마기 덩어리는 내 옆을 스치고 벽면에 처박혔다.
역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죽이지도 못 하면서 큰소리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어, 멍청아. 빨리 울면서 그동안 속여서 미안하다고 말해. 그럼 다 용서해줄 테니까.”
[......너, 너희는......? 꺄, 꺄아아악!!!]
그때였다. 최세린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나는 손을 뻗어 일어나려고 해봤지만, 이재홍이 내 몸을 강제로 짓누르며 가만히 있으라 말했다. 결국 멀리서 소리를 지르는 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세린아!!”
[꺄아아아아!!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야 최세린!! 정신 차려!!]
[제가 잘못.... 잘... 잘못했습... 니... 다......]
털썩,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수어 초간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고, 이재홍도 나와 생각이 같았는지 슬금슬금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더는 다가오지 마라.]
그때 최세린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곤 천천히 무릎을 딛고 일어나 언제 괴로워했냐는 듯 굉장히 태연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이제야 머리가 맑아지는군. 지금껏 굉장히 역겨운 연기를 했으니 배알이 뒤틀렸던 걸지도 모르겠어.]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등한 인간 놈들과 동료니 뭐니 시시덕거리는 건 내 취향이 아니란 말이지. 또 최세린이라는 배역에 맞춰 행동하다보니 속으로는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많이도 느꼈다. 좋은 기억은 아니니 그만 떠들지 그래.]
“...너 지금도 연기하는 거지?”
[연기?]
“커, 커흡!”
꽈아악
최세린이 손아귀를 꽉 쥐자 나와 이재홍은 동시에 컥컥거리며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것처럼 강하게 조여온다. 숨도 쉬어지지 않는다. 힘을 주어 발버둥쳐봤지만 목을 조여오는 힘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가여워서 더 들어주려 했건만 헛웃음이 멈추질 않아. 지금 죽어서는 곤란해서 살려주는 건데, 어째 죽고 싶어 안달인지... 부탁이니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소중히 여겨라. 너희에겐 아직 역할이 남았지 않는가. 6대 용사에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사명 말이다. 마법 용사. 네놈은 언약까지 하지 않았나? 왜 아직도 나를 동료라고 착각하는 건가. 진심으로 불쾌하니 그만해주는 게 어떻겠어. 간곡히 부탁하지.]
“커, 커흑... 허, 허억... 허억...”
그녀가 측은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다가 손아귀를 풀었다. 그제야 나와 이재홍은 땅을 밟을 수 있었고, 목이 얼얼해 제대로 말하기도 힘들지만 겨우 말을 뱉었다. 지금이 아니라면 말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불길한 예감이 내 몸을 휘감고 있다.
“...너, 너를 어떻게 포기해. 우리가 너를 어떻게...”
[흠... 내 생각보다도 더 멍청한 사내였어. 그럼 포기하게끔 만들어주면 되겠나?]
“포, 포기 못 해... 무슨 말을 들어도 절대 포기 못 한다고...”
[못 지킬 말은 뱉지도 말아야지. 안 그래 윤상 오빠?”
착
다시끔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바닥에 착지한 최세린을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돋아났다.
그녀는 빙긋 웃곤 흑단발을 뒤로 잡아 올렸다.
“야한 생각 하면 안 돼요, 알겠죠?”
찌지직
그리곤 뒤돌아 단검으로 옷을 찢었다. 펄럭하고 내려간 옷은 골반에서 멈췄고, 휑하니 드러난 그녀의 등에는 선명하게 S자 뱀 모양 문신이 있었다. 그녀는 뒤돈 채 말했다.
“오빠, 기억해? 나랑 디안 샤워 좀 하게 오빠보고 마법 좀 써달라고 한 거. 그때 오빠가 마법은 이런 데 쓰는 게 아니라고 궁시렁거렸잖아.”
“...어, 분명 그랬지.”
“그리고 얼마 안 가 오빠가 그토록 사랑하는 수제자 디안은 뱀 문신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죽을 뻔 했었잖아.”
‘......설마.’
표정이 구겨지는 걸 느꼈다. 손이 조금씩 떨려온다.
제발, 더는 말하지 마. 속으로 바랐지만 최세린은 잔인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지껏 보아온 미소 중 가장 환하게 웃으며.
“그때 걔가 내 등을 봤었거든. 무슨 문신이냐고, 멋있다고 뭐라뭐라 하는 거 보고 얼마나 우습던지. 그때 죽여둘까 고민 좀 했었지.”
“......최세린...!”
“이제 미련이 안 남으려나? 아무튼 잘 있어. 현 용사들 다 성장하면 그때 사천왕으로써 다시 보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말이야.”
“최세린!!”
화아악!!
검은 연기가 방을 휘감았고, 나는 그녀가 사라지지 못하게 사방으로 마법을 폭격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연기가 가라앉았을 때에는 이미 카티골은 사라진 후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