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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84화 (84/152)

〈 84화 〉 신살법(???)

* * *

20분. 체감이 아닌 현실 시각으로 20분 동안 전투를 치뤄 한 단계 성장을 이뤘다.

대단한 성과다 뭐다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잿빛 램프의 순기능은 오로지 치유와 아공간에만 편중되어 있다. 줄이 무슨 술수를 부린 거다. 예상컨대 시간의 파편을 쏟아부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는 그야말로 초월적인 공간을 만든 것이리라.

‘그 공간에서 조용히 힘을 기른다면 에이브(AYV)를 죽일 수도 있을 거야. 내게 부족한 건 오로지 시간이었는데 그게 해결되었어.’

악쿤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자리잡는다. 바비룬이 일지를 펼치며 말한 건 그때였다.

“메이블에게서 직접 받아온 거야. 너랑 디안이 애정행각하는 동안 조금 읽어봤는데, 꽤나 도움 될 정보가 여럿 쓰여 있었어.”

희소식에 희소식이 겹친다. 일이 술술 풀려간다.

악쿤 일행은 확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신살 계획에 모자랐던 퍼즐이 조금씩 맞춰지는 순간이다. 메이블의 일지는 퍼즐 중 하나였다. 이대로 순조로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건 너랑 나만 둘이서 읽었으면 해. 디안이랑 김철수 씨는 나가달라는 말이야.”

그런 착각에 빠진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일행에게 불협화음이 일어났다.

악쿤은 고개를 갸웃하며 바비룬에게 눈길을 보냈으나 그는 일부러 눈길을 피하며 말을 이어갔다.

“못 들었어? 잠시 나가달라고.”

“재홍, 갑자기 왜 그래.”

“길게 설명하기도 싫다. 디안은 어차피 들어서는 안 될 얘기고, 철수 형씨는 들어서는 내가 곤란해. 이 정도면 이해가 가나?”

디안의 경우에는 알 것 같았다.

실렉티스와 관련한 이야기는 디안의 정신을 무너트릴 가능성이 높았다. 뻔하고도 당연한 얘기지만 바비룬이 말하고자 하는 건 실렉티스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다르칸은 왜?

그는 같은 용사 출신이었으며, 실렉티스였다지만 지금은 명백히 아군이다.

그와도 정보를 공유하지 않겠다는 건 무슨 생각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바비룬의 태도는 굳건했고, 방 안에는 침묵이 감겼다.

“뭐, 그렇다면야... 디안, 일단 나가자.”

“앗, 네!”

그의 고집이 기어코 두 명을 쫓아냈고, 바비룬은 내게 수신호를 보냈다. 마나 장벽을 펼치라는 뜻. 도청될 일이 없게 겹겹히 쌓고 나서야 그는 입을 뗐다.

“너나 나나 뻘소리 싫어하지? 바로 본론 간다. 우리 사천왕 중 한 명은 실렉티스야.”

이야기 길어지는 건 당연히 싫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단도직입적인데.

“그게 무슨 개소리야.”

“말 그대로야. 우리 넷 중 한 명은 용사가 아니라 실렉티스라고.”

폭탄 발언.

농담할 분위기나 상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바비룬의 표정이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걸 알려준다. 골이 당겨온다. 그는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악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메이블이 말한 거야?”

“어, 농담할 이유도 없으니 진실이겠지. 언약 머시기는 못 받았는데 허투루 하는 소리 같지는 않았어.”

“증거는 어디 있는데.”

“증거? 내 감각. 네가 기억하려나 모르겠다.”

이프카리스토에서의 일을.

디안이 두통에 못 이겨 쓰러졌던 그때 숙소에 시야를 설치하라 일러뒀던 그 기억을 말이다.

“기억해. 조금 의아했지만 네가 하라는 대로 했었지.”

“나는 그때부터 한 명을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실렉티스로 의심한 건 아니었는데, 이제 보니 정황이 다 들어맞네.”

“지금 세린이가 실렉티스라는 거야?”

“줄도 최세린에 대해선 말을 아꼈지. 걔가 에이브(AYV)의 끄나불이겠지.”

“지금 장난쳐? 같이 전송됐던 날에 최세린도 같이 있었어. 우리는 동시에 지구에서 ONE(?)으로 왔다고.”

“그거 하나 꾸며내기 어려울까. 에이브(AYV) 안 만나봤어? 그 자식이 마음 먹으면 뭔들 못하겠냐고.”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메이블 그 자식이 내뱉은 말 하나 가지고 세린이를 실렉티스로 단정짓는 건 아니라고 본다. 여지껏 걔가 보여왔던 반응이며 웃음이며 그 모든 게 거짓말이라는 거잖아.”

“맞아, 제대로 이해했네.”

“너 입 조심해. 그 자식이 말 몇 마디 내뱉었다고 동료를 의심해? 그것도 몇 년이나 같이 용사 생활을 보냈던 동료를?”

“어. 최세린은 실렉티스야.”

“이 새끼가 진짜!”

탁자를 쾅 치며 일어났다. 격한 반응이 오자 바비룬도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그곳에 침을 뱉으며 난폭하게 일어났다.

“한 대 칠 기세다?”

“분명 입 조심하라고 말했어.”

“조심할 이유도 모르겠고, 조심했더라도 전달하려는 건 똑같아. 최세린이 아니면 누군데. 김철수?”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 내부 분열이라도 일으킬 셈이냐?”

“씨발 새끼야! 그럼 어쩌자고. 에이브(AYV) 안 죽일 거야?! 바로 옆에 스파이가 있다는데 가만히 놔두면서 신살이고 뭐고 떠들 거냐고 병신아. 그렇게 무른 생각으로 뭘 하겠냐. 우유부단한 씹새끼야.”

“메이블 그 자식이 실렉티스일 가능성도 있잖아. 그 새끼 한 마디 때문에 지금 마왕군 전체가 뒤흔들리는 게 말이나 되냐고.”

“미안한데 나는 지금 굉장히 침착해. 흥분한 건 너고 병신아. 왜, 디안이랑 껴안고 있으니 화라도 났냐?”

“...지금 화 났냐고?”

악쿤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는 탁자 위로 재빠르게 올라서더니 떨어지며 외쳤다.

“당연히 화 났지 개새끼야!!”

콰직!

악쿤은 주먹을 꽉 쥐곤 바비룬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그리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 하고 마구 바비룬의 얼굴을 후려쳤고, 악쿤의 주먹이 얼얼하게 달아오를 때쯤 바비룬이 손을 척 뻗어 그의 주먹을 잡았다.

“...먼저 쳤다?”

콰당탕­!

둘은 엉겨붙으며 주먹을 날렸고, 몸싸움이 지속될수록 방 안에는 핏방울이 가득해졌다.

서로의 주먹도 붉어진다. 마법, 주술. 어느 힘도 사용하지 않은 순수한 몸싸움. 난잡한 싸움이 이어지다가 쓰러진 탁자에 발이 걸려 악쿤이 넘어지자 바비룬은 그 위로 올라탔다.

“씨발아. 나라고,”

퍽.

“이런 말 하고 싶어서,”

퍽.

“하는 줄 알아?!”

퍽.

“나도 의심하기 싫어! 최세린이 실렉티스라니, 생각하기도 싫다고 개새끼야!!”

바비룬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며 악쿤을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과 주먹에 흐르는 핏방울이 붉은 선을 그으며 내려와 악쿤의 옷깃에 닿았다.

“...근데 어쩌겠냐.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있는데.”

가시 덩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바비룬의 능력.

메이블의 말과 줄의 반응으로만 추측하는 게 아니었다. 말 할 때마다 애써 침착한 척 했지만 누구보다 속이 타들어가는 건 바비룬이었다.

그는 용사 일행을 누구보다도 믿고 싶었다.

가족이 없었던 바비룬은, 만약 자신에게 가족이 있다면.

큰 형은 김철수. 작은 형은 정윤상.

그리곤 싸가지 없는 막내 여동생. 그게 최세린이라 생각해왔다.

그런 상상을 하며 히죽거리던 자신의 과거가 겹쳐 보인다.

메이블의 말을 들은 순간부터 예전 같은 관계는 이미 다 무너졌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

“나도 힘들어. 오늘 너무 바빴다고. 너 스승이 대뜸 마왕성에 처들어와서 신살이며 뭐며 개지랄하질 않나, 과거로 돌아가서 예전에 죽였던 사천왕을 만나고 오질 않나, 그 사천왕이... 믿기 싫지만 믿을 수 밖에 없는 말을 하잖아. 나보고 더 어떡하라고. 힘들다고. 쓰러질 것 같다고 윤상아.”

“...너한테도 뭐가 있구나. 내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는 것처럼.”

“그래, 내 눈에는 덩굴이 보여.”

악쿤은 붉은색의 덩굴에서 남색의 덩굴로 변하고 있었다.

남색이 나타내는 감정은 슬픔이었다.

“...그냥, 제발 그냥 믿어주라. 더 얘기하기 싫어. 그러니까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는 거잖아.”

“세린이... 세린이가...”

“그래, 그 최세린이­”

“내가 왜?”

흠칫, 선명한 목소리에 피범벅이 된 두 사내는 일순 행동을 정지했다.

고개를 돌려보자 창문에 걸터앉아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다리를 붕붕 휘두르는 진 키아라가 있었다.

“어머, 웬일로 싸우셨대들? 다 끝났으면 치료해줄까?”

“...너 지금 온 거야?”

목소리가 떨린다. 바비룬의 표정은 이미 경직됐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통금도 신경써야 돼? 임무 마쳤으니까 적당히 놀다가 왔지.”

“마나 장벽을 펼쳐뒀는데...”

“단검은 장벽을 찢어~ 물론 사람도 찢는답니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날쌔며 가벼운 동작으로 창문에서 바닥에 착지했고, 엉망이 된 바비룬의 집무실을 둘러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이게 가정 불화인가?”

“...임무. 그래, 임무. 수고했어.”

“싸우던 와중에 내 격려도 해주다니, 참모장님은 참 아량이 넓으셔요. 어쩌면 이게 오빠가 강조하는 공과 사 구분인가? ‘싸우는 건 싸우는 거고, 상관의 입에서 수고했다는 말은 의무적으로 나와야 하는 법이지. 임무 수고했다 진 키아라.’”

“아, 어... 응. 뭐, 그렇지.”

“뭐야, 반응 왜 이렇게 재미 없담. 비꼬는 거였는데. 그보다 무슨 얘기들을 하셨길래 마법이나 형변도 안 쓰시고 주먹다짐을 하셨대. 그리고 철수 아저씨는 왜 안 보여? 사내 따돌림이야?”

“그런 거 아니야. 싸웠던 것도 별 일 아니고.”

“별 일 아닌데 방을 이렇게 어지럽히는 거 보면 별 일 있으면 마왕성 뒤집어지겠네.”

그녀는 뒷짐을 지곤 깡총깡총 걸어가 다리가 하나 부러져 비스듬히 있는 소파에 몸을 던졌다.

“흐아아... 역시 재홍 오빠 소파가 제일 편하다니까?”

“...개소리 말고, 방으로 들어가.”

“어머, 제가 왜 수호대장님 명령을 들어야 하죠? 제 상관은 친애하는 참모장님과 귀여운 마왕님밖에 없답니다~”

바비룬은 도끼눈을 뜨며 그녀를 노려봤다. 이건 실렉티스를 향한 분노라기보다는 진 키아라의 캐릭터에 분노한 거였다. 그 분한 얼굴을 보자 진 키아라는 불이 붙었는지 더욱 노련하게 그를 약올렸고, 바비룬은 언성을 높이며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평소다운 모습이었다. 격양된 바비룬의 머릿속에서 진 키아라가 실렉티스라는 정보는 잠시 지워진 듯했다.

그 모습을 보자 악쿤은 가슴이 더 쓰려온다는 걸 느꼈다.

바비룬의 말이 맞다면 이 모습마저도 연기라는 것일까. 어쩌면 바비룬의 능력이 고장났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바비룬이 실렉티스일 가능성은... 그것도 상상하기도 싫은 미래였다.

어느 누가 실렉티스이든 단박에 믿을 수 없는 정보였다.

그녀를 믿고 싶었다. 동시에 바비룬도 믿고 싶었다.

욕심이 과한 걸까. 머릿속에 휘감기는 건 불쾌한 감정이 전부였다.

‘세린아. 실렉티스가 아니라고 말해.’

악쿤은 자꾸 열리려는 입을 앙다물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자칫 방심하면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갈 것 같다. 그녀와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그 욕구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잔뜩 뿔 나셨네. 알았어, 내가 미안해 오빠.”

“존나 요망한 년. 맨날 씨발 사과하면 나만 나쁜 새끼 되는 거지.”

“원래 나쁜 새끼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더 안 놀리기로 했으니까! 슬슬 나가보겠습니다~!”

그녀는 경쾌한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고, 악쿤은 그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철컥­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문을 당기거나 밀지 않았다. 대신 입을 뗐다.

“아,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

철컥­ 문고리는 다시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천천히 뒤돌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하던 얘기 이어서 해볼래?”

무표정이었다.

방 안에 살기가 가득 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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