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은 돌고 돈다-83화 (83/152)

〈 83화 〉 신살법(???)

* * *

사람은 생각의 동물이다. 홀라와 줄에게 수없이 얻어터져가니 이제는 육체적 공포보다는 이 끝도 없이 지겹고 지독한 챕터 1을 어떻게 타파해야할지에 대한 정신적 고통만이 유일했다.

답은 변수였다. 줄의 마법 캐스팅과 홀라의 보법은 너무나 재빨랐기에 반응속도로 따라가기는 굉장히 버겁다. 이들의 허를 찌를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무언가를 하고자 3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도 두뇌를 굴렸다.

홀라에게 3번의 접근을 허용해선 안 된다.

그 때문에 거리를 단 한 번도 주지 않고자 임한다면 어떻게든 성공하지 않을까 마법을 퍼부었으나 그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 마법 변형식 따위 홀라 앞에서는 별 성과를 낳을 수 없다.

그렇다면... 조금 생각을 틀어보자.

“쉬는 시간 끝났다~ 다시 시작!”

줄의 목소리와 함께 홀라가 내게 달려들었다.

눈 하나 깜빡했다가는 즉시 검등이 내 목에 있을 게 훤했기에 눈에도 온 신경을 집중하여 홀라의 극도로 빠른 움직임을 힘겹게도 쫓았다. 그 결과 내 마법을 지그재그로 회피하며 매섭게 돌격하는 바람에 휘감긴 인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일부러 내 주변의 마법진에 마나를 과투자하고 홀라를 겨누던 마법진은 견제 그 이상의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근처에 다가오면 그때 마법을 폭격하여 잡아낼 것이다. 지금의 접근 허용은 의도적인 것이었다.

휘잉­

검등이 맹렬한 칼바람을 머금고 내게 다가온다.

나는 입가에 조소를 띄우며 숨겨둔 다섯 개의 마법진을 가동했다.

“{ χορ με σπαθ ­ 칼춤. }”

카가가각­!

얼음 검이 홀라에게로 쏟아졌다. 촘촘한 빗방울처럼 도저히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게끔 설계한 마법, 내게 다가온 순간부터 속공으로 쏟아지는 얼음 검을 모두 쳐내는 건 불가하다. 홀라가 공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게끔 유도하는 것만이 이번 마법의 의도였다.

“쳇.”

그 의도대로 홀라는 백스탭을 밟으며 재빨리 벌어졌다. 이로써 접근은 한 번 허용. 그리고 이번에 결판을 내고자 설정한 장치를 발동했다.

“{ πγο πισιμο ­ 얼음 손아귀. }”

퍼석­

3분 전 전투에서 미리 설치해둔 함정이 빛을 내뿜으며 발동한다.

그곳에선 시퍼렇고 생기라곤 없는 음산한 손이 튀어나와 홀라의 몸을 휘감으려 했다.

무려 두 번이나 꼬아놓은 함정이다. 홀라라고 한들 피하기는 꽤나 버거울 거다.

[ 태풍(?風). ]

그러니 돌파하고자 오러를 터트렸다. 칼바람을 휘감은 강렬한 오러. 그녀는 칼춤을 추며 얼음 손아귀를 모두 베어냈고, 그 모습에 잠시 매료됨을 느꼈다. 이만치나 노력해도 홀라를 제압하는 건 버거웠다. 마취총을 맞고도 으르렁거리는 맹수처럼 홀라는 매서운 기세를 풍기며 검을 휘두르며 나를 노려봤다.

‘2단 함정까지 타파하다니... 치가 떨리네.’

그 기세에 움찔했으나... 그게 전부였다. 나는 무언가를 손에 꽉 쥐고선 홀라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홀라는 나를 미친놈 취급하며 바라봤지만, 결코 방심하지는 않았을 터다. 내가 무슨 마법을 펼칠 것을 알기에 그에 침착하게 검을 휘두르고자 자세를 잡고 있을 뿐이다.

역시 강한 사람이다. 하지만 승기는 내게 있었다.

한 가지 수를 더 숨겨뒀으니까.

“첫 번째 푸른 방패.”

손에 쥔 방패 팬던트를 앞으로 내세웠다.

커다란 푸른 방패가 되어 홀라의 검격에 맞섰고, 홀라는 묵묵히 검을 휘둘러 방어막을 깨부술 뿐이었다.

이런 구도는 이미 여러 번 있었다. 대수롭지도 않을 일이다.

하지만 이 마법은 제아무리 홀라라고 한들 예상치 못했을 거다.

{ η ­ 반전. }

사실 마법이라기보단 룬 문자에 가깝지.

“...어라.”

싸아아­

방어막은 거꾸로 뒤집혔고, 그건 감옥이 되었다.

한순간에 갇혀버린 신세가 되었지만 해야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았다. 방어막을 깨부수면 그만이다. 오러를 더욱 강하게 터트리면 그만이다.

근데,

πρωττυπη μαγεα(시그니처 매직)

누가 그걸 내버려둔대?

αντικατσταση τη καρδι(심장 교체) Ver ­ χιονδη παλι, δρκο!(설산의 고룡, 자이키릭!)

시퍼런 비늘과 날개, 뿔과 꼬리가 내 몸에 돋아난다.

냉기를 가득 머금고 방어막에 조금 뚫린 부분을 향해 입을 가져갔다.

ανσα δρκου ­ 용의 숨결

초근거리에서의 9서클 마법이 격돌한다.

조용한 냉기를 머금은 숨결은 홀라의 오러에 닿자마자 요란하게 폭발하며 램프 속을 헤집어놓았다.

그에 노출당한 홀라는 온몸이 얼음에 갇혔으나, 내가 마법을 취소하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빙긋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가 이겼다.”

“드디어...”

이 지독한 챕터 1을 끝냈다. 그렇다면 철수 형 쪽은? 고개를 돌려 전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이거 완전 미친놈이네.”

김철수의 에고 소드에 목이 겨눠진 줄이 보였다.

김철수는 온몸이 피칠갑이 된 채 온몸에 화염을 머금고 있었다.

“다섯 번째 붉은 팔찌. 그게 너한테 있었구나? 지금까지 숨긴 것도 변태다 변태.”

“허억... 허억...”

“마법을 정면으로 다 처맞으면서 돌진해오다니, 그걸로도 모자라 기절할 수준까지 오러를 끌어 써? 지독하다 지독해.”

줄은 사지가 멀쩡했고, 김철수는 툭 건드리면 죽을 기세다.

하지만 전투의 승자는 김철수였다. 줄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김철수의 어깨를 두드리곤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어라, 할망구도 졌어?”

스릉­

날 벼린 소리가 들리자 두 손을 머리 위로 들며 꼬리를 내렸다.

“하, 하하... 미안해요 누님.”

홀라가 다시 검을 집어넣기 전까진 항복을 취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의 홀라에게 스승은 입이 방정이라 말을 덧붙인 후에야 겨우 검을 집어넣었고, 그는 대망의 대사를 뱉었다.

“고생들 했다. 챕터 1은 끝이다.”

허억­

체력적인 문제는 없었지만 그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잠시간 앉아서 멍하니 있자 저 멀리에서 김철수가 이를 보이며 빙긋 웃곤 엄지를 척 올렸다.

...분위기 깨서 미안하지만 좀 구린 제스처였다.

*

챕터 1을 끝내고 곧장 챕터 2에 들어서는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줄은 준비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금은 챕터 1에서 홀라와 줄을 상대로 이겼던 그 기억만을 되새기며 이미지 트레이닝만 해두라고 말했고, 그렇게 우리는 램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다시 시계를 봤다. 램프 속에서 돌아갔던 시계는 푸쉭­ 푸쉭­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를 내뿜더니 시침과 분침, 초침이 동시에 힘을 잃고 6시를 향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줄이 만들어둔 공간에서 잠도 자지 않고 며칠간은 싸웠던 것 같다. 램프 특성상 체력 회복도 빨랐기에 수면을 취하지 않았어도 몸은 개운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나 지났느냐는 꽤나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는 다시 마왕성으로 걸어갔고, 하늘과 바닥을 가득 메운 눈더미 때문에 옷이 제법 축축해졌다. 그에 불쾌감을 느껴 김철수를 잡고 블링크를 발동하여 속도를 올렸다.

‘지금쯤이면 디안과 이재홍도 복귀했으려나?’

문득 그러한 생각에 도달하자 급속도로 걱정과 불안감이 내 몸을 휘감았다. 나는 블링크의 속도를 올렸다. 다급했기 때문인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아서 마왕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디안의 방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디안! 있어?”

돌아오는 건 침묵. 다시 방 문을 두드려봐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벽에 기대 주르륵 미끄러졌다. 심장이 격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설마 돌아오지 못한 건가? 금기고 뭐고 내가 따라갔었어야 했나?

그렇다면 이재홍도 과거에 갇힌 걸까. 메이블이 협력하지 않았던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때 누군가 내 볼을 쿡 찔렀다.

“여기서 뭐 하세요? 줄 님을 따라가지 않았었나요?”

“...디안.”

“네... 네? 차, 참모장님? 지금 무, 무슨...”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앉았다. 마력 탐지를 했었으면 됐는데 홀라에게 하도 얻어맞아 뇌가 맛이 갔던 건지 나는 멍청하게 행동했고, 그 때문인지 디안을 직접 보자 안도감이 몇 곱절이 되었다.

“잘못됐을까봐 얼마나 걱정을...”

“저 참모장님 두고 어디 안 가요.”

디안은 살짝 손을 뻗어 내 등과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길 몇 분, 묘한 시선과 함께 껄렁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발, 적당히 좀 해야지. 기다려주기도 지쳤다 이젠.”

반가운 목소리. 디안을 밀어내곤 그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떤 책 하나를 든 채 벽에 기댄 이재홍이 있었다. 그 뒤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오는 김철수도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무언가 애매했는데, 이유가 무엇인지는 곧장 추론하기 어려웠다.

“연애하는 거 다 좋은데 급한 일은 끝내고 방으로 들어가서 해라. 나는 시발 목숨 걸고 일지 가져왔는데 여자친구랑 시시덕거리면 내가 기분이 좋겠니 안 좋겠니 윤상이 새끼야.”

“...그렇게 오래 안고 있었나?”

“거진 5분 거지 같은 새끼야.”

“...큼, 그랬을 줄은 몰랐네. 미안해 디안. 너도 당황했겠다.”

“아니요. 앞으로도 감정이 벅차오르면 언제든지 괜찮아요.”

“확실히 쟤도 보통 년은 아니야.”

이재홍은 고개를 절레곤 짧게 한숨을 쉬며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시선을 교환하곤 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집무실로.

턱­

이제홍은 겉옷을 비롯한 무언가가 잔뜩 올려져있는 소파에 주저앉으며 탁자에 일지를 던졌다. 그리곤 호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에라 시발.”

그는 주섬주섬 라이터를 찾기 시작했고, 보다못한 내가 손가락을 튕기며 그의 담배에 불을 지펴주자 그는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게 일지다. 이 시간대에서는 10분만에 찾아온 거니까 내가 고생 안 했다고 보이겠지만, 씨팔 내가 누구 때문에 진짜 뭐 빠지게 고생해서 겨우 가져온 거다. 그러니 빨리 끝내자. 막 돌아온 차라 피곤해 죽겠다. 이거 대한 것만 알려주고 엎어져서 잘라니까. 누구는 이미 많이 자서 괜찮겠지만.”

그는 디안을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봤다. 그에 깨갱 시선을 피하는 디안을 보자 무언가 마찰이 있었겠거니 예상이 갔다.

근데... 그보다 지금 막 돌아왔다는 말이 거슬렸다. 나는 그의 방 안에 있는 시계를 바라봤다.

“너 출발한 시간이 언제였지?”

“응? 너 병신이냐. 20분 전이잖아.”

“그리고 지금 복귀한 거라고?”

“너 지금 뭔 소리하냐? 막 복귀하자마자 디안 껴안고 지랄했잖아 네가. 그보다 줄이랑 수련인지 뭔지 한다며. 그건 어떻게 됐냐. 나중에 찾아오라든?”

이게 무슨 소리인지 감이 안 잡힌다.

램프 속에서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게 기껏해야 현실에서는 20분 남짓이었다니, 머리가 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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