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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78화 (78/152)

〈 78화 〉 최초의 수집가

* * *

악마 부에르, 그리고 그에 대적하는 3명의 용사.

악역 쪽은 준비됐다. 이제는 선역을 준비해야 했다.

또다시 홀라와 줄, 피아를 용사로 내세울까 고민했으나 새로운 용사를 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악마는 강하다지만 현재 모두 초월자가 된 세 용사를 상대로 버틸 수 없을 게 분명했다.

새로운 용사가 필요했다. 부에르에 맞설 수 있는 아직은 나약한 용사들 말이다.

[다른 용사가 있었으면 해.]

재능은 있지만 아직 개화하지 않은 것들을 찾아라.

케다시와 카티골은 그의 뜻을 따라 움직여야 했다.

마땅한 후보를 착출하는 건 꽤나 고된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과거 세대와는 달리 이들은 평화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 때문인지 두각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다.

신을 먹은 존재이든, 신 그 자체이든 모든 걸 관망할 수는 없고, 수많은 미래를 모두 관통할 수는 없다.

저 바글바글한 인간들 중 누가 용사에 적합한 재목인지 판단하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무나 뽑아 용사로 내세우면 어떨까.

허나 그들이 강해지려면 직접 힘을 주는 수 밖에 없었다. 전 세 명의 용사는 원체 강력했기에 간접적으로만 도움을 줬어도 됐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적당한 힘을 주고 그들이 몬스터와 부에르가 이끄는 마왕군을 물리치며 레벨을 올리는 건 어떨까?

그것도 힘들었다. ONE(?)의 주민은 결국 에이브(AYV)의 형제자매에게서 파생된 존재이고 그들에겐 한계치라는 게 있었다. 몇 예외는 있었고 그게 초월자지만, 그 경지에 도달하지 않고서야몬스터를 때려잡든 악마를 때려잡든 레벨 상승폭 효율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한계치는 무슨 얘기일까? 형제자매는 인간이 본인을 넘어설 수 없게끔 한계를 부여했다.

그 한계치는 에이브(AYV)로서도 없앨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전 세 용사는 되짚어보면 시간만 넉넉했더라면 스스로 초월자가 될 수 있었던 자들이었기에 상관이 없었다만, 현세대 젊은 층에서 그들만큼 간절하면서도 산전수전 다 겪은 전사는 없었다. 그들 중 초월자가 될 인재가 과연 있을까, 자신할 수 없는 얘기였다.

[계기도 그렇지만 간절함이 문제로군. 스스로 쟁취한 게 아니면 소중한 줄도 모르는 법이지.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어주면 망나니가 되어버린다. 성숙한 놈이 필요해. 하아, 마땅한 용사 후보를 찾기가 이토록 어려웠던가?]

“찾았다고 한들 길을 인도할 길잡이도 필요해요. 인간은 너무나 멍청하거든요.”

케다시의 목소리를 듣곤 지긋하게 그를 바라봤다.

에이브(AYV)는 무슨 좋은 생각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곤 생기발랄한 표정으로 케다시에게 말했다.

[그럼 네가 길잡이가 되어주거라.]

“...네? 아버님, 저보고 인간이랑 어울리라고요?”

[직접 후보를 고르고 내게 보고해라. 아, 인간인 양 행동해야 한다는 것 잘 새겨두도록.]

“왜, 왜 저예요? 카티골 얘도 있잖아요!”

[네가 제안하지 않았던가?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너처럼 믿을만한 녀석도 없지. 용사 3명을 고르고 그들과 함께 행동하며 부에르를 물리쳐라. 힘을 쥐어주면 멋대로 휘두르지 않을 녀석들로 잘 선별하도록.]

“아버님? 이거 아닌 것 같은데... 한 번만 다시 생각을­”

[즐거운 경험이 됐으면 좋겠구나.]

피슉­!

손을 휘두르자 케다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

시간이 흘러 노젤루스에 이어 세계 괴멸을 주장하는 괴이한 집단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스스로를 마왕군이라 칭했다.

그들의 포부는 진실이었다.

몬스터 대군을 필두로 ONE(?)을 쑥대밭을 만들었다.

이 혼돈 속에서 인간들은 구원을 바랬다. 노젤루스로부터 세계를 구원해냈던 홀라, 줄, 피아(타나토스)가 다시 나타나 마왕을 물리쳐주기만을 기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난 복수를 이룰 것이다.”

마왕 부에르의 부하에게 부모와 여동생이 무참하게 살해당했던 용사 에일티암.

“더는 마왕의 악행을 두고 볼 수 없어요.”

무참히 희생된 원혼이 부디 좋은 곳에 가길 기도하듯 두 주먹을 꽉 쥔 큐(Q)를 받드는 신관이자 용사 페디아나.

“전 세대는 할 일을 마쳤다. 이제는 세계가 나를 부른다. 부에르를 죽인 후 그들은 내게 환호성을 지를 거다.”

아콜드의 죽음을 기리며 마법을 연구했던 5서클의 마법사 싸이키.

“...빌어먹을.”

부에르에게 마땅한 원한은 없지만, 어쨌거나 용사를 한 곳에 모으고 세계의 평화를 기리는 용사 케다실리아.

[하하하! 이젠 인간이라고 해도 믿겠어!]

에이브(AYV)는 투명한 유리에 비친 용사 케다실리아.

를 연기하는 케다시를 보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 옆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카티골은 표정이 밝지 않았다. 먼저 제안했던 것은 케다시와 본인이었지만, 에이브(AYV)는 점차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죽고, 마왕이 죽고, 누가 죽든 신경을 할애하지 않았다.

거기까지야 괜찮다만, 갈수록 포악해지며 생명이라는 것에 무덤덤해지는 그를 보자 조금은 이질감이 느껴진다.

마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인간을 죽였다. 에이브(AYV)의 입김이 들어간 탓이다.

용사는 원한에 가득 차 마왕군의 몬스터를 학살했다. 에이브(AYV)가 케다시에게 지시했던 탓이다.

그에 재미를 느끼는 에이브(AYV)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거스를 수도 없었다. 거스를만큼 그에게 불만이 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은 더 희생 없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었다.

그렇다지만,

인간 따위, 몬스터 따위, 무더기로 죽어봤자 잠시 인상을 찌푸릴 뿐이다. 그들에게 동정을 느끼진 않는다.

몇 분만 흘러도 무덤덤해졌기에 결국에 카티골도 몬스터나 인간 그 이상의 존재라는 얘기다.

*

마왕군과 용사 일행은 계속 격돌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용사는 강해지고 있었다.

허나 용사가 잘났기에 강해졌다기보단 결국은 케다시의 힘이었다.

그가 용을 써 일행을 이끌고, 이들에게 남몰래 힘을 나눠주어 레벨을 올리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진행시키고자 고군분투하는 게 화면 밖에서도 느껴졌다.

힘에 부친다는 생각도 들었다. 용사 일행은 전 용사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었다.

강함을 두말 할 것도 없고, 이들은 케다시의 도움 덕에 실패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으니 위기감이 무엇인지도 잘 모를 터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한 가지였다. 이번 용사와 마왕 이야기는 재미는 없었다.

[하아... 따분하다 따분해.]

에이브(AYV)도 언젠가부터 한숨만을 거하게 내쉬었다.

몬스터와 용사만 치고받고 싸우기만 하니 예전에 말했던 투견과 똑같다고.

케다시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만족시키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배역의 문제일까? 원인을 찾아도 달라지진 않겠지.

하루라도 앞당겨 이 지루한 놀이를 끝냈다.

4명의 용사는 마왕군을 물리쳤다. 그리곤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이렇게 두 번째 선역, 악역 놀이는 끝났다.

[......]

에이브(AYV)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는 저 용사들은 자격이 없다며 화도 냈고, 케다시를 호출해 혼을 내기도 했다.

죽어버린 마왕은 입을 열 수가 없었기에 예외. 용사를 탓하기엔 그들은 신의 존재를 모른다.

그들은 케다시가 신 포식자라는 것도 알 턱이 없었다. 저들과 같은 하등한 인간인줄로만 알고 멋대로 동료라고 부르는 꼴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이번 이야기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첫 마왕, 그리고 두 번째 용사.

이야기의 플롯 자체는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던 것 같다.

뭐가 문제였을까? 케다시는 말했다.

“조력자가 필요해요. 저와 마왕 둘이서 이야기를 구성하기에는 꽤나 버거워요. 입체감도 없고요.”

[조력자?]

“실렉티스. 저와 카티골이 아닌 다른 인간이나 몬스터를 실렉티스로 포섭해야 합니다. 아버지께 충성을 바치는 충견을요.”

[그들이 있다면 뭐가 달라지지?]

“용사에게 협력하고, 때로는 용사를 위협하는, 마왕군이 아닌 다른 세력을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다채로워져요. 용사는 1차적인 목표인 마왕을 물리치고자 움직이게 되지만 옆에서 간섭하는 자들이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며 새로운 시련을 부여할 수도 있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제안할 게 있어요. 이번 용사는 쓰레기였지만 그럼에도 마왕을 물리쳤잖아요? 사실 저는 별 도움도 안 줬는데 알아서들 죽이더라고요. 그만큼 마왕군은 성장한 용사에 비해 너무나도 약했어요.”

[더 강한 악마를 소환하면 되겠는가? 그 악마에게 힘을 주면 되겠는가?]

“그것도 좋지만, 아버지 구미가 당길 이야기를 제가 하나 생각했거든요.”

케다시가 손을 흔들자 용사의 얼굴들이 피슉­ 하곤 떠오른다.

그는 카티골을 보며 빙긋 웃었다.

“용사는 4명이었죠. 이들을 마왕의 보좌역으로 돌리면 어떨까요? 새로운 용사와 전 세대 용사가 싸우는 그림. 재밌지 않을까요?”

[...오호라.]

“이미 입꼬리가 웃고 계시니 새로운 용사를 준비할게요. 현 용사가 불가피하게 마왕군에 합류하게 되는 계획은 이미 준비했으니 아버지는 구경만 하시면 돼요.”

케다시는 다음 선역, 악역 이야기의 준비가 철저했다.

억울함을 느꼈던 것이다. 본인이 쌔빠지게 고생했으니 카티골도 똑같이 당해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번 새로운 용사는 카티골이 준비하는 걸로! 저는 마왕군 쪽을 준비할게요!”

[옳지, 그게 공평하겠구나.]

“히히, 제 뜻을 알아줘서 고마워요 아버지.”

케다시는 고개를 돌려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카티골은 이마를 턱 짚으며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

다음 용사도 ONE(?)의 주민이었다.

이들도 케다시의 경우처럼 길러내면 될 것이고, 카티골은 이름을 카탄으로 바꾸어 인간 검객을 연기했다. 그리곤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한편으로 케다시는 전 세대 용사들을 잘 구슬려 마왕군에 합류시켰다.

부에르는 나쁜 악마가 아니었고 그는 누군가에게 협박받아 세계를 위협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전달했고, 마왕군이 존재해야 세계가 유지된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방법은 모르지만 어떻게든 납득시켰다.

새로운 마왕을 보좌할 사천왕은 완성되었다.

또한 어느새 8서클에 도달한 마법 용사 싸이키가 전대륙 사람들의 뇌리에서 전 용사라는 기억을 지움으로써 이번 용사는 현 사천왕이 전 용사라는 걸 깨닫지 못하게끔 조작했다.

이제 남은 건 마왕 후보의 문제였다.

여럿 악마를 소환하고, 이들 중 가장 이야기를 재밌게 이끌어갈 악마를 케다시가 직접 골랐다.

최종 후보는 7위 악마인 아몬이었다.

준비는 끝났다. 카티골이 선별해낸 신 용사와 케다시가 재건축한 신 마왕군은 격돌하기 시작했다.

2대 악의 탄생이자, 3대 용사의 탄생이었다.

그리곤, 이번 용사 세대는 최악으로 마무리되었다.

[아이고야, 용사가 죽을 줄이야.]

카티골을 제외한 용사 중 두 명의 용사가 마왕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다행히 마왕도 죽였기에 평화를 찾기는 했다만.

결국 이들도 에이브(AYV)를 만족시키진 못했다.

[다음 용사는 ONE(?) 출신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불러오는 게 좋겠다.]

결국 성장치가 낮은 ONE(?)의 주민은 이제 용사 후보에서 제외됐다.

에이브(AYV)는 차원문을 열었고, 그 너머에는 낯선 복장의 인간이 3명 비치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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