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최초의 수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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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라, 아콜드, 블레드 대 노젤루스.
결과는 노젤루스의 승리였고, 홀라는 겨우 살아갔으나 다른 두 용사는 처참하게 죽었다.
여기서 놀이는 끝났어야 했다.
[홀라가 살았군. 또한 초월자로 각성했어. 지금이라면 노젤루스와 얼추 대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 전의 전투는 너무나도 일방적이었으니 말이다.]
에이브(AYV)는 만족할 줄 몰랐다. 꽤나 과몰입한 상태였다.
복수에 쫓겨 여유없던 삶이 아닌 저 멀리에서 관전자로 남아 인간들의 엎치락뒤치락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도 신선하면서도 즐거웠다.
그래서 케다시와 카티골이 말하지 않아도 에이브(AYV)가 먼저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다음 이야기를. 홀라의 복수극을 말이다.
노젤루스는 승기를 타 전대륙을 박살내기 시작했고, 홀라는 초월자가 되었으나 노젤루스에게 다시 도전하기엔 혼자서는 힘이 부족하다 느꼈다.
그가 두려운 이유는 빛 마법을 사용해서가 아니다.
마법을 제하더라도 그는 강인했다. 설령 육탄전에 돌입하더라도 홀라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다.
더군다나 노젤루스는 홀라가 강한 전력임을 그녀의 상관이었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방심의 여지가 없다. 홀라도 초월자가 되었지만 그를 상대로 이길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깝다.
아콜드와 블레드의 빈자리를 채울 다른 두 용사가 필요했다. 노젤루스에게 대적할 수 있는 자들을.
우연찮게도 그 자리를 메꿀 두 후보가 있었다.
홀라의 아들이자 화염의 신체강화를 사용하는 2급 기사단원 피아 파티킬리아.
아콜드의 수제자이자 전격 마법을 사용하는 7서클의 마법사 줄.
그들은 재능이 뛰어났다.
피아는 극도로 적은 마력을 지니고도 정교한 움직임으로 기사단에서 입지를 다졌고, 19살이라는 굉장히 젊은 나이에 2급 기사단원을 달성했다(홀라가 탈영한 이후 도망쳤지만).
여지껏 있었던 기사단원 중 피아보다 폭발적인 성장력을 보인 자는 홀라를 제외하곤 없다. 당연히 홀라의 아들이었기에 보고 배운 게 있었으니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그의 순수 재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줄도 마찬가지로 1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7서클을 달성했다.
허나 재능만의 얘기를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는 언젠가부터 아콜드도 젖혀 시그니처 매직에도 가까워지고 있었고, 마법을 가르치는 그노시스 학원에서 너무나 뛰어난 두각을 드러냈기에 학생 시절부터 차기 마법군 장관 후보에 이름이 오르던 인재였다. 이코와 ONE(?)이 평안히 흘러갔더라면 실제로도 가능했을 터(줄도 아콜드가 탈영한 후 도망쳤기에 만약의 얘기다). 그에게 부족한 건 오로지 시간이었다. 청출어람(出??). 그의 마법의 기술은 8서클의 대마법사 아콜드를 이미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여기까지가 통상적인 정보.
에이브(AYV)는 그들의 과거를 낱낱이 알고 있었다.
[둘 다 참 흥미로운 과거를 지닌 녀석들이더군.]
에이브(AYV)가 눈독들인 이유가 있었다.
우선 피아는 홀라의 친자식이 아니다.
레드 드래곤 로드 블레드의 자식이자 유일한 퍼플 드래곤 베인의 자식이었다.
파라소스가 침략당했을 때 베인이 피아의 알을 감싸고 다른 곳으로 차원이동시켰고, 그걸 홀라의 남편이 주웠던 것이다. 세간에서는 죽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더 강인하게 자랐다.
그렇지만 그는 본인이 최강이라 칭송받는 드래곤 로드의 핏줄임을 모른다.
어쩌면 홀라조차 능가할 혈통을 지니고 있음에도 그는 허물을 벗지 못한 채다.
마법의 주인이자 마력이 차고 넘치는 종족인 드래곤임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낮은 마력을 지니고 있다.
자신을 인간이라 믿고 있으니까. 기사단장인 홀라에게 기사단원으로서 길러졌으니까.
그를 깨달으면 초월자에 가까워질 수 있을 터. 피아는 용사가 되기에 자격이 충분했다.
그렇다면 줄은? 그는 ONE(?) 최초로 금기 마법 중 하나인 시간 역행을 이행한 인간이다.
그는 미래의 시간대에서 마법을 다루는 이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대마장이었다. 실상 미래라기보다는 평행세계라고 하는 게 이치에 맞겠지만 이야기가 복잡해지니 생략하고, 그가 시간을 역행하여 현재의 ONE(?)에서 살게 된 경위는 아주 간단하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그녀는 신들의 전쟁에 휘말려 죽었다.
그녀를 다시 보고자 시간을 역행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토록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에도 줄은 그 여자를 찾지 못했다. 이 세계엔 그녀라는 존재가 애초부터 없었다.
사랑 얘기는 관심 없었다. 중요한 건 그 세계에서의 줄은 이미 시그니처를 완성한 대마법사라는 것.
허나 시간 역행의 부작용 때문에 서클이 극도로 떨어졌다.때문에 줄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예전의 힘을 되찾아 다시 금기 마법을 발동해 다른 시간대로 넘어가 그녀를 찾는 것.
그때 매드킹이 나타났다. 그는 이 세계선에서 유일히 줄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스승이자 벗이었던 아콜드를 죽였다.
아콜드와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로 묶여있지만, 줄이 아콜드의 끝없는 추궁 끝에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건너왔다는 걸 밝혔고, 그때부터 둘은 서로에게 두터운 신뢰를 쌓았다.
그런 아콜드를 노젤루스가 처참하게 죽였다.
원한도 충분하고, 계기도 충분하다.
줄은 겉으로 보기에는 가벼워 보이는 면모가 있지만, 정의를 외면할 인품은 아니다.
예전처럼 9서클에 도달해 다른 시간대로 움직이면 노젤루스와 마주할 일은 없겠지만 스승이었고 벗이었던 사내를 죽인 복수는 값을 치뤄야 할 것이다.
줄은 이를 빠득 물고 있었다. 아직 미처 힘을 되찾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재밌겠어. 이 둘에게도 힘을 주도록.]
“아버님, 그랬다가는 초월자가 4명이 됩니다.”
[상관 없다. 그래봤자 신도 아니지 않는가.]
*
홀라와 피아, 줄은 누가 의도하기라도 한 듯 자연스레 단합하게 되었고, 이들 중 노젤루스가 가장 경계하는 자는 피아였다.
자신이 용의 핏줄임을 깨닫고 각성한 피아는 본인의 이름이 타나토스라는 걸 깨달았다.
블레드의 자식은 세간에서는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실상은 인간의 손에 길러졌다는 걸 알았고 그게 본인이라는 걸 듣자 형언할 수 없는 혼란과 분노가 그를 휘감았다.
그는 홀라를 원망하며 울부짖었다. 그게 용족으로서의 각성 계기가 되었다.
피아(타나토스)는 최악의 잡종이었다.
레드 드래곤과 퍼플 드래곤, 화염과 독을 모두 다룰 수 있는 극히 드문 혼혈이다.
화염은 노젤루스에게 있어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독이 문제였다.
피아(타나토스)의 독에 닿은 상처는 빛 마법으로도 치유되지 않았다.
그는 노젤루스의 유일한 천적이었다. 노젤루스는 긴장감을 애써 삼키며 세 용사를 바라봤다.
노젤루스와 새로운 용사.
이코국의 수도에 있던 궁전, 그곳에서 이들은 격돌했다.
쿠구구구
그 궁전이 모두 초토화되며 전투가 이어졌다.
층이 무너지며 땅을 쪼갰고, 줄의 전격 마법과 노젤루스의 빛 마법에 의해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고, 궁전 인근에는 깔끔하게 잘려나간 단면이 많았다.
콰아앙!!
이따금씩 폭발도 일어난다. 홀라가 오러를 터트리며 노젤루스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빛의 마나로 검을 만들어 그녀에게 대적했다.
그럴 때마다 충격파가 인다. 그리고 지쳐가는 쪽은 용사 일행이었다.
용사는 확실히 강력했으나 노젤루스처럼 스스로를 치유할 방법이 없었다.
지구전이 이어질수록 노젤루스에게 유리한 구도가 되었고, 설상가상 피아(타나토스)와 줄은 아직 초월자가 아니었기에 전체적인 기량이 노젤루스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이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노젤루스는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하하하! 상당히 즐거운데 그대들은 어째 즐기지 못하는가? 짐에게 닿지 못한다는 사실에 죽음을 직감해서인가? 절망이 느껴져서인가? 좌절스러워서 그런가?”
“그 더러운 입 닥쳐라 노젤루스!”
“아아, 피아. 한때 그대의 어미와 같이 짐의 훌륭한 검이었지.”
“...허억, 허억... 치근덕거리지 마십시오. 지금도 그 사실이 치욕스럽습니다.”
“섭하게 말하지 말게. 나는 그대와 아콜드를 자랑스럽게 여겼다네.”
“진짜 막 뱉는구나. 그렇게 자랑이었으면 왜 죽였어?”
“줄! 머잖아 짐의 지팡이가 될 수 있었지만, 품에서 도망쳤구나. 이제 와서 보니 그대들은 모두 짐의 품 안에 있었던 인재들이었지. 가장 놀라운 건 피아 그대이다. 그대가 이토록 강인한 전사일줄은 몰랐네.”
꾸득 꾸드득
노젤루스가 감탄한 건 괜한 반응이 아니었다. 피아의 온몸은 비늘이 드리우고 점점 용의 형태로 변환되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짙붉은 화염과 진득한 자줏빛 독액이 끈적인다.
“평생을 인간으로 살았더라면 짐에게 영락없이 죽었겠지만 이무기에서 멋지게 탈피하여 의젓한 용이 되었구나. 나 노젤루스가 그대를 인정한다.”
“네놈의 인정 따위...”
화륵......!!
화염이 독액을 머금고 폭발하듯 요동친다.
[바라지도 않았다!!]
완전한 용으로 변한 타나토스의 박력은 엄청났다.
그의 화염을 머금은 독액이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곳마다 구멍이 뚫리며 지글지글 끓는다.
이때 모두가 직감했다. 슬슬 이 싸움의 종착지가 다가온다는 것을. 노젤루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순간이 짐의 대의를 위한 최후의 시련이라 생각된다. 머잖아 결판이 나겠지. 내가 살아남을런지, 그대들이 살아남을런지...”
하늘을 바라봤다.
“신의 뜻에 달렸겠지.”
[신? 뜬구름 잡는 소리할 여유 따위 없애주마!!]
“여유? 내가 여유있어 보이는가? 짐은 지금 누구보다 절박하다. 이곳에서 그대들을 물리치고도 할 일이 아주 많다. 허나 시간은 촉박하지. 하루라도 바삐 모든 생명체를 죽여 마나의 정수로 만들곤 흡수할 것이다. 그때 짐은 비로소 ONE(?)의 신이 되어보이겠다. 그리곤...”
여전히 고개는 하늘에 고정하고 있었다.
“그대를 하늘에서 끌어내려주마.”
“미친 소리만 하니까 매드킹인 건가? 지금 누구한테 말하는 거지?”
“...아닐세.”
화아아악
노젤루스가 주먹을 콱 움켜쥐자 찬란한 빛무덤이 무너진 궁전을 휘감았다.
파직 파지지직...!!
줄의 온몸과 하늘의 먹구름이 서로 전류를 교환한다.
싸아아아...
홀라의 온몸에 찬란한 오러가 휘감겼고, 그것은 갑옷의 형태가 되었다.
이들은 격돌했다.
*
그로부터 십수 년이 흘렀다.
노젤루스는 죽었고, 홀라를 제한 두 용사도 노젤루스를 물리치고선 레벨이 올라 초월자가 되었다.
‘제법 재밌는 유흥이었어, 내게 도전하려던 노젤루스가 패배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을까.’
에이브(AYV)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사색에 잠겼다.
십수 년이라는 시간은 그가 다른 유흥거리를 찾던 시간이었다. 끝내 아무것도 찾지 못했기에 다시 예전 재밌던 유흥에 대해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케다시, 카티골.]
““부르셨습니까?””
[예전의 그 놀이가 그립구나.]
두 신 포식자는 귀를 의심했지만, 에이브(AYV)는 이들의 반응과는 관계없이 흑빛 차원문을 열었다.
마경으로 이어지는 차원문. 그 차원문에서 무언가가 꾸득꾸득 모습을 드러냈고, 그 불쾌한 마기에 케다시와 카티골은 흠칫 몸을 떨었다.
[부르셨습니까 위대하신 신이시어.]
차원문에서 기품 넘치는 동작으로 모습을 드러낸 악마는 상당히 기괴한 외형이었다.
72악마 중 10위 부에르. 사자 머리에 다부진 체격, 그의 날개뼈에는 말발굽이 달린 다리가 다섯 개 자라나 있었고, 그 다리 사이가 검은색 살점으로 이어져 마치 날개처럼 보였다.
[자네는 내 유흥에 어울려줘야겠다.]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악역을 자처해라. 그리곤 그대를 물리칠 선역과 피를 튀기며 싸워라. 나를 만족시킨다면 그대의 후손에게 영원한 번영을 약속하지.]
부에르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격식 있는 자세로 에이브(AYV)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부에르, 최초의 마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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