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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은 돌고 돈다-75화 (75/152)

〈 75화 〉 최초의 수집가

* * *

4명의 신, 그리고 왜소했던 막내 에이브(AYV).

이들은 큐(Q)를 물리치고 그의 시신을 나눠 가졌다.

두 안구는 장남이자 오러와 기라는 자원을 정립했던 맞이이자 장남인 칸이.

심장은 마나와 마법을 연구했던 학구열 가득한 둘째이자 차남인 창판이.

가죽은 정령을 만들고, 주술을 만들어낸 태초의 드루이드이자 셋째, 장녀 하이라가.

남은 뼈는 세공술과 장신구를 좋아하던 음습한 성격의 넷째 차녀 테다리안이 가져갔다.

그럼 막내 에이브(AYV)는?

그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에 큰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포악하던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겼다. 다시 평화로운 옛날이 찾아오리라 굳게 믿었다. 그는 형제자매를 사랑했다.

하지만

칸이 말하길, [너는 미개한 놈이다.]

창판이 말하길, [감히 우리 형제와 어깨를 견주려는 게 잘못된 거지.]

하이라가 말하길, [불쌍한 막내야. 설마 아버지의 유품을 받지 못해서 불만인 건 아니겠지?]

테다리안이 말하길, [...벌이 필요하겠는걸.]

에이브(AYV)는 형제자매의 뜻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

그만의 능력을 통해 형제자매를 최선을 다해 보조했다.

허나 돌아오는 것은 가혹했다.

[너는 심연을 가꾸면 좋을 것 같아. 불만은 없지?]

심연, 어둑하고 아무것도 없는 끔찍한 무저갱.

그 속에 에이브(AYV)는 던져졌다.

그리곤 끝없는 영겁의 시간만이 흘렀다.

먹을 것도 없다. 빛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차가운 흑색 바닥과 흑색 하늘만이 쭉 이어져 있다.

그곳에서 하염없이 걷다가, 주저앉아 쉬다가, 언제는 잠도 잤다가. 괜히 웃어보며 괜찮은 척 해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지독히도 외로웠다. 심연에서 벗어나는 법은 알 턱이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빠져드는 늪 같은 외로움과 공포. 그것만이 에이브(AYV)를 다스렸다.

이렇게 죽는 걸까. 차라리 콱 죽어버릴까. 그럼 편해질 수 있을까.

그래, 죽자. 에이브(AYV)는 자살을 시도했다.

바닥에 강하게 머리를 박거나, 코와 입을 틀어막거나, 스스로 목을 조르거나, 날카로운 손톱으로 온몸을 푹푹 찌르거나. 여러 방법을 통해 시도해봤다.

하지만 그 또한 신의 육체였다.

신은 전능하다? 누가 그랬던가.

자살도 못 하는데 신은 무슨, 죽는 것도 할 줄 몰랐다. 에이브(AYV)는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워 어찌하여 자신이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가 수없이 생각했다.

무엇이 형제자매를 화나게 만들었을까.

여러 이유를 가정해봤지만 뭐 하나 들어맞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 설득할 방법은 없었을까?

다른 방법은 없었을지. 잠시 고민해봤지만 고개를 절렜다.

자식을 미개한 이로 치부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주장하던 자였으니 설득은 불가했을 터.

그럼 어떻게 했어야 심연에 갇히지 않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웃으며 생활할 수 있었을까.

내가 무얼 잘못했길래 이런 처지에 놓인 걸까. 뭘 어쨌었길래. 뭘 어쨌어야 했었길래.

‘......’

생각을 거듭할수록 올라오는 건 분노였다.

형제 자매가 원망스러웠다. 분노에 생각이 미치자 살점이 붙어 증오가 되었고, 그 증오는 영겁의 시간 속 어두운 곳에 몸을 밀어넣은 상태에선 더욱이 부풀려졌다.

하지만 분노만으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형제자매를 향한 끝없는 살의는 완성되었으나,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심연은 큐(Q)가 자식들을 가두기 위해 만들었던 감옥이다. 타의로는 심연에서 나올 수 있지만, 이곳에서 스스로 빠져나오는 건 큐(Q)도 불가능한 일이다. 타도 아버지 작전에서 첫 번째 계획은 그를 심연에 밀어넣는 것이었으니, 이곳이 얼마나 지독한 곳인지 짐작이 갈 터.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다.

누군가가 꺼내줘야 한다. 에이브(AYV)는 느끼는 절망만큼이나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언젠가, 누군가의 실수이든 무엇이든 어떻게든 이곳에서 벗어난다면.

형제자매를 찢어 죽이리라. 아무런 죄 없는 본인을 가둔 증오스러운 칸, 창판, 하이라, 테다리안을 죽여 목을 참수해 창끝에 매달고 각 대륙에 전시하리라.

그들의 몸을 토막쳐 금수들 먹이로 던져주리라.

그를 위해서 필요한 건 힘이었다. 에이브(AYV)에게 있는 유일한 것은 시간이었다.

그는 끝없는 시간을 본인의 능력을 키우는 데 사용했다.

칸을 떠올리며 오러를 갈고닦았으며,

창판을 떠올리며 마법을 독학했다.

하이라를 떠올리며 정령술과 주술을 터득했고,

테다리안의 은밀한 움직임과 세공술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조는 본연의 것을 뛰어넘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본인만의 것을 가장 공들여 갈고 닦았다.

그 본연의 능력이 형제자매가 에이브(AYV)를 견제했던 이유였다.

공간을 다스릴 수 있다는, 다섯 형제자매들 중 가장 아버지에 근접했던 능력.

비록 전투에 그걸 적용할 방법은 ONE(?)에서 찾을 순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능력을 길러 어느 누구보다도 아버지에 가까워졌다.

거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형제자매와의 전쟁을 계획하고 있었다.

전쟁에 필요한 건 군대다. 그는 심연을 넓히며 군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여러 몬스터를 만들었으며, 그들에게 타도 형제자매를 정신교육했다.

하지만 몬스터는 멍청했다. 그는 보다 우수한 몬스터가 필요하다 여겨 지성이 짙은 몬스터를 만들었고, 그들은 72종류였다.

에이브(AYV)는 그들을 악마(??)라 불렀다.

얼마나 흘렀을까? 100년? 1,000년?

중요하지 않았다. 예전의 에이브(AYV)는 이제 없었다.

심연에서 자신만의 군대를 만들었고, 형제자매를 향한 핏빛 계획은 완성되었다.

기다린 시간이 긴 만큼 쩌억 아가리를 벌리는 심연의 출구는 참으로 반가웠다.

누가 문을 연 걸까? 머지않아 확인할 수 있을 터.

출구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곤 그리웠던 ONE(?)에 도착했다.

[에이브(AYV).]

그곳에 있던 건 피투성이가 된 채 단검을 들고 있던 테다리안이었다.

그에게 대적하는 자는 오러를 다루는 칸. 둘 다 머지않아 죽을 것처럼 보였고, 이들은 누군가를 쓰러트리기 위해 힘을 합친 게 아닌, 서로를 물어뜯고 있었다.

에이브(AYV)를 호출한 자는 테다리안이었다.

그녀는 도저히 이길 수 없던 칸을 물리치기 위해 동생을 불러냈고, 그의 도움이 있다면 칸을 힘겹게라도 잡을 수 있겠다 생각한 것이다.

그 이후에는 다시 에이브(AYV)를 심연에 가두면 될 터.

그는 제일 약했던 신이니까. 가장 왜소하고 소심하고 힘 없던 막내니까.

[날 도와 에이브(AYV).내가 널 심연에서 꺼내줬으니 날 도와서 같이 칸을 죽이자. 그리고 ONE(?)을 우리 둘이서 나눠먹는 거야. 구미가 당기지 않아?]

[......]

[에이브? 내가 말하잖아. 대답해.]

[...아직도. 착각에 빠져 사는. 미개한 테다리안.]

[뭐, 뭐라고?]

[멍청한 년. 네년이 나를 다시끔 ONE(?)에 불러낸 건 커다란 실수였다. 또한 네년의 사인이 되겠지.]

[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하는­]

푹­

단순한 손동작. 에이브(AYV)의 시커먼 기운에 물든 손이 테다리안의 목을 꿰뚫었고,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못한 채 피만 울컥거리더니 바닥에 엎어졌다.

[...]

그를 묵묵히 바라보던 칸이 입을 움직였다.

[못 본 새 많이 험악해졌구나 에이브(AYV).]

[네놈도 날 가둔데 동조하지 않았나? 뻔뻔하기 그지없는 놈. 네놈도 이년과 다를 바 못 돼.]

철퍽­

바닥에 처량하게 쓰러진 시체를 발로 찼다.

그리곤 중지와 검지를 앞으로 내지르자 심연의 구멍에서 무언가 꾸득꾸득 기어나오더니 테다리안의 시신을 탐하기 시작했다.

으적­ 으적­

그녀의 사체는 몬스터의 한 끼 식사가 되었다. 바닥에 남은 핏자국까지 말끔하게.

여지껏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본 적 없는 몬스터들에겐 마다할 수 없는 달콤한 꿀과도 같았다.

[미천한 막내야, 아버지 흉내라도 낼 셈이냐?]

[안 될 것도 없지. 아버지가 네들 년놈들을 왜 그리도 괴롭혔는지 이제야 알겠어. 근본부터 잘못된 놈들이었으니 아예 존재 자체를 없애려 했던 거였겠지.]

쿵­

에이브(AYV)가 발을 구르자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시커멓게 물든다.

공기가 진동한다. 정령이 공포에 사로잡혀 에이브(AYV)에게 복종한다.

마나가 그를 향해 진동한다. 시커먼 기(?)가 풀풀 풍긴다.

[모조리 죽여주마.]

*

에이브(AYV) 군대의 신살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창판과 하이라까지 죽여내고 마침내 ONE(?)의 전대륙을 손에 얻어냈다.

그제서야 시간이 아버지를 죽인 후 수천 년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곤 계획을 완수했다.복수를 완수하자 남은 감정은 허망감이었다.

에이브(AYV)는 생각했다.

이제 무얼 할까.

몬스터는 각대륙에 해방했다.

네 명의 형제자매가 만들었던 인간들과 요정 등등이 몬스터에게 위협받았으나 미천한 인간이나 몬스터들 따위 별로 신경쓸 바는 아니었다.

다만 악마는 조금 달랐다.

그들은 저들이 우월한 종족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너무 활개치고 다녔기에 달랐다.

스스로를 왕으로 칭하거나 황제가 된다는 등 세력을 구축하고 몬스터와 인간을 거느리려 들었기에 에이브(AYV)는 그들이 귀찮아서 심연에 던져버렸고, 72악마는 그 심연을 지옥 혹은 마경이라 부르며 그곳에서 저들만의 사회를 이루었다.

‘별 재미는 없군.’

그 후부터는 몬스터와 인간이 어떻게든 다투고 서로의 영역을 나누어 공존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따분했다.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서로가 다툴 일은 없었고, 그럭저럭 잘 지내며 평화로운 것을 유지했다.

에이브(AYV)는 그게 불쾌했다.

형제자매가 없는 건 마음에 들었지만, 그뿐이다. 이 세계는 심연만큼이나 재미가 없었다.

그때 떠오른 게 형제자매가 큐(Q)의 사체를 나눠가진 후, 그것을 지니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딘가에 숨겨두었던 걸까? 지금이라도 그걸 찾는다면 지금과는 무언가 달라질 수 있을까?

굳이 갈구해본 적이 없었기에 생각을 안 했던 탓이다. 이제야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너희는 나를 위해 움직여야겠다.]

에이브(AYV)는 악마만큼이나 지성이 짙은 두 몬스터를 불렀다.

이들은 에이브(AYV)의 형제자매의 시신을 뜯어먹고 인간만큼이나 지성이 짙어진 유이한 몬스터들이었다, 성격이 보다 입체적이 되었다.

에이브(AYV)는 이들을 마치 자식처럼 여겼다. 이름마저 지어주었다.

장난끼가 많은 이에겐 케다시라는 이름을.

꽤나 진중한 성격의 이에겐 카티골이라는 이름을.

에이브(AYV)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 아버지의 시신을 가져와라. 나는 지금부터 너희를 실렉티스 ­ συλλκτε(수집가들)라 부르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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