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시간 역행Ⅱ
* * *
“본래 용사는 세 명이다.”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잘못 들었다기에는 그의 발음이 너무 명확했고, 바비룬의 귀도 기능이 멀쩡했다.
“뭐라고?”
“못 들었나? 용사는 세 명이다.”
“아니, 들었어. 들었는데 그게 무슨...”
무언가 단전까지 차올랐으나 깍지끼곤 허벅지에 올려놓은 손에 입김을 불어넣자 조금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정말 조금이었다.
멀쩡한 상태라기에는 대사의 여파가 너무나도 거대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거야. 그보다 너희 사천왕 중에서는 누가 용사가 아니라는 건데.”
“그건 나도 모른다. 너희 중 누가 용사가 아닌지도 모르지. 하지만 진리는 하나다. 용사는 세 명이라는 것.”
“개 같은 ONE(?)에 도착했을 때 역사서를 다 뒤져봤어. 역대 용사들에 대한 문서도 읽었고, 현재 3대 세력이라 불리는 구시대의 영웅들의 문서도 봤다고. 줄, 피아(타나토스), 홀라를 제하곤 다음 세대부터 용사는 4명이었어. 그들도 사실 세 명이었다는 얘기야?”
“그렇다. 지금도 줄의 사자로 너와 저 여자아이가 아닌, 두 명의 용사가 왔더라면 이런 얘기는 안 했겠지. 그저 4분의 1의 확률을 믿었을 뿐.”
“잠깐만, 그럼 구세대 이후부터 있었다는 용사 사칭범은 정체가 뭔데. 신이라도 돼? 아니... 그렇다기에는 같이 동고동락하며 성장해왔고, 마침내 마왕군을 같이 부순 동료였잖아. 어느 누구를 용사 사칭으로 가정하든 그들은 전송자였고, 동일하게 성장했어. 확실히 알고 하는 소리야?”
“아직 심증에 불과하지. 하지만 사람 감이라는 게 있잖은가? 되려 네놈은 드루이드이니 나보다 더 느끼는 바가 클 터.”
메이블은 불타버린 과자 부스러기를 신발로 밀쳤다.
“잘 생각해봐라. 한 번도. 단 한 번도 너희 세대 용사에게 이질감을 느낀 적이 없는가?”
“......”
“표정을 보니, 짚이는 게 있나보군.”
“없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혼란스러워.”
제대로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얘기였지만, 흘려듣지도 않았던 것이 메이블의 말대로 어딘가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정확히는 마왕을 토벌하고 3년만에 다시 일행을 마주했을 때 부터다.
바비룬 또한 악쿤처럼 특이 능력을 하나 지니고 있었다.
허나 이 특이 능력은 일행조차도 모른다. 그야 용사 생활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에 얻은 능력이니까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시 덩굴’이라는 이름의 능력.
요정족의 여왕 카넬루아에게 직접 하사받은 능력이다.
능력을 하사받기까지의 과정은 조금 우스웠다.
앞서 말하자면 바비룬은 호색이 굉장히 짙었다. 몇몇(최세린, 디안 등)을 제한 민간인 여성을 언제나 탐했고, 본인의 외모도 썩 나쁘진 않았으니 실제로 여성을 굉장히 많이 품었다.
그는 여성을 가리지도 않았다.
술만 들어가면 저렴해보이는 매춘부에게 손길을 뻗었고, 그들이 간을 보면 두둑한 금전을 쥐어주며 수많은 잠자리를 가졌다.
피임 마도구 알약이 없었더라면 동대륙에 바비룬의 씨앗은 굉장히 많았을 터,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일행도 그를 농부라고 놀렸으니 말은 다 했다.
이만 보더라도 전 용사들 중 가장 방탕한 삶을 살았던 게 바비룬이다.
그러니 마왕을 토벌하고 그러니 그가 비이린에 간다고 했을 때 모든 일행은 귀를 의심했었다.
다시 본론으로.
바비룬은 어째서 가시 덩굴 능력을 탐했던 걸까.
일행이 흩어졌던 기간. 그때 동대륙에서 술을 퍼마시던 바비룬이 홀라에게 대차게 얻어터진 기억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었다.
그 사건을 통해 홀라의 존재를 알게 됐고, 분함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 분함은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성질로 변했다.
‘...한 번만 다시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왜일까, 그는 홀라를 다시 만나기를 은근히 바랬다.
그 바램은 이뤄지기 굉장히 어려운 성질의 것이었기에 그리움이 되었고, 그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눈덩이에 살이 붙듯 점점 비대해졌다.
결국 그는 홀라를 사모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를 아는 자는 ONE(?)에 단 한 명밖에 없다.
그녀가 카넬루아다. 바비룬이 그녀에게 홀라를 찾아달라 부탁했고, 그녀는 찾으려면 직접 찾으라는 뜻으로 가시 덩굴 능력을 건넸던 것이다.
그 능력의 순기능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
탐지와는 개념이 다르다. 이건 보기 싫어도 보게 되고, 보고 싶어도 더 자세히 볼 수는 없으니까 강제성이 부여된다.
가시 덩굴 능력을 지닌 순간부터 인물의 몸을 휘감은 색색의 덩굴이 시각화된다.
그 덩굴의 색깔로 그 자가 지닌 감정을 구분할 수 있다.
가령 붉은색이라면 분노. 푸른색이라면 안정, 노란색이라면 흥분 등등.
카넬루아는 홀라가 백색 덩굴을 감고 있으리라 말했다. 백지 상태, 공허한 기분을 뜻한다.
카넬루아는 바비룬을 응원했다. 그토록 방탕했던 바비룬이 누군가를 사모하게 될 줄은 몰랐다면서 쿡쿡 웃음지었다.
그때부터 카넬루아에게 반항할 수 없었다. 살며 처음 느껴보는 부끄러움이었기에 그 순간만큼은 소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사춘기 남자아이가 약점을 잡힌 기분이랄까.
하지만 놀림은 순간이고, 홀라를 향한 감정은 진심이었다.
준비는 끝났으니 바비룬은 동대륙을 다 들쑤시기 시작했다.
백색 덩굴을 찾는 즉시 팔목을 붙잡고 드라마틱한 재회를 연출하리라...
...는 허울 없는 이상에 불과했다.
바비룬의 눈에 비치는 덩굴은 너무나도 작았다.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면 제대로 확인조차 어려운 정도. 그조차도 어려울 때도 많았다.
한 몇 달을 쏘다녔을까. 그때쯤 악쿤에게서 호출이 왔다. 할 일은 마치고 봐야 더 떳떳하겠지. 또한 능력도 아직 미개하기에 더 시간이 필요하다 느낀 바비룬은 공용 차원문을 타고 남대륙으로 발길을 옮겼다.
정해진 수순대로 사천왕과 마왕을 토벌하였다. 그후 3년간 비이린에 갔던 것은 홀라를 찾기 위해 가시 덩굴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였다.
홀라는 초월자니 늙어 죽을 일은 없을 테고, 본인도 수명에 구애받지 않은 드루이드이기에 시간에 제약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마침내 가시 덩굴의 능력은 쓸만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쓰임이 예상치도 못하게 달랐다.
암두시아스의 옷을 사러 이프카리스토로 갔을 때 악쿤과 최세린, 디안을 우연히 마주했었다.
그때 진 키아라를 보자 바비룬은 온몸에 오한이 돌았다.
‘왜? 뭘 멍하니 봐?’
‘...아니다.’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그녀의 몸에는 숙소를 모두 뒤덮을 크기의 시커먼 덩굴이 감겨 있었기에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흑색 덩굴의 의의?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사악한, 더러운, 그런 속내를.
비이린에서는 이그니스가 있던 탓에 덩굴의 효력이 사라졌었던 것이었다.
빛의 정령왕 옆에서 시커먼 덩굴이 보일리 없었을 테니까.
과거에는 몰랐다만, 저 시커먼 덩굴이 최세린의 본심이리라.
그를 확인하자 그녀를 신뢰할 수 없었다. 디안의 간병을 맡던 최세린을 영상으로 비추라고 악쿤에게 지시했던 것도 같은 이치였다.
메이블의 ‘용사는 세 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곧장 반박하기 어려웠던 것도 바비룬도 어렴풋이 예상했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메이블이 부연설명을 덧붙였을 때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역시...’라는 생각을 내뱉었으니 메이블의 얘기를 한 단어도 빠짐없이 집중하여 듣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짚이는 게 있나보군.”
“없진 않지...만, 그래도 아직은 혼란스러워.”
메이블의 말에 대답한 것은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단순히 덩굴 하나만으로 진 키이라를 의심하기에는 바비룬에게 어울리진 않는 단어지만 ‘우정’이나 같이 쌓아온 ‘추억’이라는 낯간지러운 말들이 가슴에 걸렸다.
그 모두가 거짓이었다고 받아들이면 무언가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가장 신뢰하는 악쿤에게도 말을 아꼈다. 그리고 가시 덩굴 능력이 없었더라면 다르칸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는 한 번 배신했었기에, 실렉티스의 길을 걸었었기에.
당연히 그를 의심해봤을 터.
하지만 그는 의도치않게 바비룬에게 신뢰를 샀다.
짙푸른 색, 혹은 따스한 주황색의 덩굴만 휘감기는 걸 보면 역시 천성이 착한 사람이다.
푸른색은 진정, 주황색은 애정을 뜻하니까.
“뭐, 네놈이 알아서 판별해야 할 문제지. 나도 마찬가지고.”
메이블은 바비룬이 심각한 표정을 거두고 고개를 들자 무언가를 휙 던졌다.
“가져가라. 네놈들이 그리 원하던 일지다. 그리고 저 여자 아이도 곧 깨어날 것이다. 단탈리온이 그녀에게 마나를 주입했으니 말이다.”
“으, 으음...”
단잠에서 깨어나듯 편안한 표정으로 디안이 몸을 일으킨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저 여자아이에겐 좌표만 설정하라고 일러둬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해줄테니.”
“...그래.”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탓에 미지근한 대답만을 남겼지만 메이블은 차분한 어투로 받아쳤다.
“마지막 조언이다. 사실 조언이라기보단 네놈이 질문했던 것에 대한 대답이지. 용사 사칭범의 정체가 뭐냐고 물었지?”
깨어난 디안이 두리번거릴 때 조용히 다가와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단탈리온도 듣지 못할 목소리로.
“그 정체는...”
*
오늘자 던전 탐사를 마친 진 키아라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닳고 닳아 글자도 판별하기 어려운 낡은 책을 읽고 있었다.
ONE(?)의 신화책이었다.
ONE(?)이 탄생하고, 큐(Q)가 4명의 자식에게 살해당하고, 4명의 자식은 각 대륙을 나눠가져 그 대륙을 가꾸고 마침내 수명이 다해 명을 다했다는, 대충 그런 4명의 신을 추양하는 이야기.
활자는 지워졌지만 이미 다 아는 내용이었다.
그것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내용을 모두 외고 있다. 못 읽을 턱이 없다.
‘지루한 얘기야.’
ONE(?)의 주민들은 에이브(AYV)의 존재에 대해 모른다.
그에 의해 이 세계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그 은혜를 모르고 이미 죽어버린 큐(Q)나 4명의 신에게 기도를 올린다. 그 꼴을 보기가 싫다며 그가 말했기에 수백년 전 신전을 모두 부숴버렸고 신자들을 죽였다.
그럼에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상상이라는 환상에 빠져 기도를 올리는 미련한 이들이 있었다. 또 그가 명령했기에 그 신자들을 방금 막 살해하고 오는 길이다.
악쿤이 알 방도는 없겠지만 사실 던전 탐사는 반나절 전에 끝냈다.
애초에 그 구조를 다 알고 있으니 굳이 들릴 필요도 없었지만, 이건 악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텁
그녀는 신화책을 덮었다. 그리곤 다시 가방 안쪽에 고이 넣었다.
너무나 지겹고 재미없는 얘기지만, 이 책을 볼 때마다 이 세계에 환멸을 더욱 느낄 수 있기에.
그래서 계륵처럼 버리지 않고 가지고 다녔다.
진 키아라는 이 세계와 주민들에게 정을 붙이기 싫었다.
이 신화책을 보면서 자신과 그들은 다르다는 사실을 몇 번이고 되새겼다.
그래야만 끝없이 ONE(?)에, 그리고 주민들에게 정을 붙이지 않을테니.
애초에 하늘에서 바라보면 인간이나 몬스터나 벌레나 한낱 미생물이나 작은 곰팡이마저도 크기가 똑같다.
어느 누구라도 다를 건 없다. 곰팡이를 죽인다고 죄책감이 들겠는가? 같은 이치였다.
그리 생각했고, 또 생각했다. 이번에도 다를 건 없다고 몇 번이고 되새겼다. 아니, 사실 그전부터 되새겼지만... 이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수천, 수만 번 읽은 책보다도 지겨운 이 선역, 악역 놀이는 언제쯤 끝날까요?”
진 키아라의 단검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신도들의 진득한 피가 묻어 있었다.
시커먼 옷 팔꿈치에 그 단검을 넣고 슥 당기자 피가 모두 닦였다.
“...대답해주세요.”
그녀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밤하늘의 은색 달빛이 묘하게 그녀를 찌르기 시작했다.
* * *